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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의 기술전략:루이비통

파리를 꿈꾸며 걷던 소년 루이 비통.. 보물상자의 틀 깨고 세계의 백을 만들다

허두영 | 168호 (2015년 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혁신

 

보물상자는 대체로 무겁고 뚜껑이 볼록하다. 도난 방지와 빗물로 인한 보물 훼손을 막기 위해서다. 하지만 이 때문에 먼 거리를 이동할 때 어려움을 겪게 되며 상자를 여러 개 쌓기도 쉽지 않았다. 루이 비통(Louis Vuitton)은 교통수단이 발달하는 현상을 목격하고 가벼운 재료를 사용했으며 둥근 뚜껑 대신 납작한 뚜껑을 달아 방수 처리를 해 여러 겹으로 상자들을 쌓을 수 있도록 했다. 가볍고 튼튼해서 운반하기 편한데다 비에 젖을 우려도 적고 좁은 공간에 많이 실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루이 비통의 제품은 왕족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이후 교통수단 혁명 등 외부 환경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하면서 루이비통은 탄탄하게 성장했다. 

 

보물상자는 대개 영어 ‘D’자를 왼쪽으로 눕힌 뚜껑이 볼록한 나무 궤짝이다. 묵직한 직육면체 상자를 반원통 모양의 뚜껑이 덮고 있는 모습이다. 오아시스의 부족이 아라비아의 대상(隊商)과 주고받은 보물을 담은 궤짝도, 클레오파트라 여왕이 즉위할 때 주변 부족에게 받은 예물을 넣은 상자도,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가 아즈텍 왕국에서 약탈한 보물을 실은 상자도 모두 이런 모습으로 그려진다.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를 경배하면서 바친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담은 상자도, ‘알리바바와 40인의 도적에서 알리바바가 도적의 동굴에서 발견한 보물상자도, ‘캐리비안의 해적에서 잭 스패로 선장이 훔친 보물상자도 마찬가지다.

 

보물상자는 왜 이런 모습일까? 먼저 보물상자의 주인인 왕족이나 귀족의 고민을 헤아려 보자. 그들의 가장 큰 고민은 보물이 도난당하는 것을 막는 것이다. 보물을 담을 궤짝은 웬만해서는 파손되지 않도록 튼튼하게 짜야 했고 훔쳐 가기 어렵도록 묵직하게 만들어야 했다. 그래서 단단한 재목을 큰 못으로 박고, 가로세로로 부목을 덧붙이고, 모서리에 쇠로 된 조각을 달아 좀처럼 깨지지 않도록 제작했다. 빗물이 스며 소중한 보물에 녹이나 곰팡이가 스는 것도 큰 문제다. 그래서 물방울이 흘러내리도록 뚜껑을 둥글게 만들고, 안쪽은 양이나 돼지의 가죽을 덧댔다. 요즘으로 치면 귀중품을 보관하는 금고의 역할도 한 셈이다.

 

 

강남구 압구정로의 루이비통 매장 전경

 

보물상자를 뜯어 고쳐 여행용 트렁크를 만들다

프랑스 나폴레옹 3세의 부인인 외제니 황후의 짐을 꾸리던 루이 비통(Louis Vuitton)1 은 이런 보물상자가 도통 맘에 들지 않았다. 무거워 옮기기도 불편한데다 뚜껑이 둥글다 보니 높이 쌓아 올릴 수도 없다. 패션과 연회에 관심이 많은 황후의 나들이가 점점 잦아지면서 황후의 의상과 패물을 담은 궤짝은 갈수록 늘어만 갔다. 당시 파리의 패션을 주도하던 황후는 임신한 몸매를 숨기기 위해 주문했던 크리놀린(crinoline·버팀살을 넣어 풍성하게 만든 치마) 스타일을 즐겨 입었다. 또 타조 깃털로 화려하게 장식한 외제니 스타일 모자를 즐겨 썼다. 황후는 나들이를 갈 때마다 가장 호화로운 행차를 주문했고 루이 비통은 새로운 보물상자를 계속 개발해 많은 짐을 꾸리는 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루이 비통은 1821년 프랑스 동부의 산악 지대인 쥐라(Jura) 지방 안쉐(Anchay) 마을에서 태어났다. 집안은 5대째 농사를 지으면서 목공소와 방앗간을 운영했다. 10살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재혼하자 고집센 루이 비통은 엄격한 계모와 지루한 시골 생활에 염증을 느꼈다. 13살에 가출해 파리로 무작정 상경했다. 빈털터리가 걸어서 470㎞ 떨어진 파리에 도착하는 데는 2년이 넘게 걸렸다. 지나가는 마을의 목공소나 식당, 마구간에서 일을 하고 끼니를 때우면서 여비를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 루이 비통은 목재를 비롯해 가죽, 가구, 염색, 자물쇠, 양철 같은 다양한 재료나 제품을 다루는 기술을 조금씩 익혔을 것으로 보인다. 파리에 도착한 루이 비통은 당시 최고의 짐짝 장인(trunk maker)으로 꼽히는 무슈 마레샬(Monsieur Marechal)을 찾아가 본격적으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루이 비통은 이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그가 짠 궤짝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고, 그가 싼 짐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다.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자 마레샬은 루이 비통에게 외제니 황후의 일을 맡겼다.

 

전담 짐꾼인 루이 비통의 재능을 일찌감치 알아본 황후는 1854년 번화가와 가까운 까푸신느 4번가에 포장 전문 가게를 열도록 후원하고 부유한 귀족 손님까지 알선해줬다. 루이 비통은가장 아름다운 옷을 정교하게 잘 싼다(packing the most beautiful clothes in an exquisite way)’는 황후의 칭찬을 들으면서 자신의 강점을 정확하게 파악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건 가게를 열면서어떤 깨지기 쉬운 물건도 안전하게 포장해 드립니다. 드레스 포장 전문(Securely packs the most fragile objects. Specializing in packing fashions)’이라는 간판을 걸었다. 시골에서 상경할 때만 해도 닥치는 대로 일해야 했지만 파리에서는 자신의 핵심 역량에만 집중하면 됐다.

 

목공에 자신 있는 루이 비통은 보물상자를 만드는 목재로 포플러를 택했다. 8∼10년생 포플러는 가볍고 질긴데다 물에 잘 젖지 않아 궤짝을 짜는 데 제격이다. 조직이 치밀한 너도밤나무는 부목을 대는 데 썼다. 궤짝을 짜는데는 못 대신 리벳과 아교를 주로 사용했다. 못은 녹이 쉽게 스는데다 목재를 갈라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둥근 뚜껑 대신 납작한 뚜껑을 달아 여러 겹으로 쌓을 수 있도록 했다. 문제는 방수(防水)였다. 양가죽이나 돼지가죽은 오래되면 퀴퀴한 냄새가 나고 곰팡이가 슨다. 루이 비통은 당시 인상파 화가들이 튜브에서 짜낸 유화물감을 칠하던 캔버스를 떠올렸다. 아마(亞麻)를 굵은 씨줄과 날줄로 오밀조밀하게 엮은 마포(麻布)에 풀을 몇 차례 먹여 방수성을 높인 뒤 궤짝에 붙였다. 이것이 1858년 등장한 루이 비통의 첫 작품그레이 트리아농 캔버스(Gray Trianon Canvas)’. 외제니 황후가 즐겨 찾던 베르사유 궁전의 별궁(別宮), 트리아농에서 그 이름을 땄다.

 

그가 짠 궤짝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고, 그가 싼 짐은 좀처럼 흐트러지지 않았다. 맡은 역할을 충실하게 해내자 마레샬은 루이 비통에게 외제니 황후의 일을 맡겼다.

 

가볍고 튼튼해서 운반하기 편한데다 비에 젖을 우려도 적고 좁은 공간에 많이 실을 수 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트리아농 캔버스는 파리의 왕족과 귀족에게서 큰 인기를 끌었다. 루이 비통은 황후가 의상마다 챙기는 패물이 각기 다른 것에 착안해 궤짝 안에 작은 칸을 만들거나 서랍을 달아 부피가 작거나 파손되기 쉬운 패물을 함께 담았다. 마지막 남은 과제는 잠금장치. 당시 도난에 대비해 보물상자마다 자물쇠와 열쇠를 다르게 만들었기 때문에 열쇠를 헷갈리거나 자칫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낭패였다. 루이 비통은 여행용 트렁크가 강도들의 표적이 되자 자신만의 열쇠 하나로 여러 자물쇠를 열 수 있는 텀블러 잠금장치(Tumbler Lock)를 개발했다. 지금 루이비통 가방의 잠금장치는 액세서리로 남았지만 여전히 고객의 물건을 끝까지 안전하게 보호한다는 믿음을 준다.

 

 

 

 

새로운 교통수단을 보고 여행의 시대를 예측하다

시골뜨기가 기차를 처음 보고 얼마나 충격을 받았을까? 루이 비통은 견습공으로 일하던 1837년 작업소와 가까운 생제르맹(Saint Germain)역에서 파리의 첫 기차노선이 개통되는 것을 보고 앞으로 교통수단의 발달로 여행이 부쩍 늘어날 것이라 내다봤다. 바야흐로 여행의 시대가 열리는 것을 일찌감치 파악한 것이다. 특히 1869년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가 열리면서 세상은 한 달음박질로 닿을 수 있을 것처럼 가깝게 다가왔다. 1873년 쥘 베른이 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어보면 당시 유럽에 불어닥친 여행에 대한 관심을 엿볼 수 있다.

 

증기가 동력을 공급하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새로운 동력을 기준으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마차에 싣던 묵직한 보물상자 같은 궤짝은 기차의 좁은 공간에 싣기조차 어려웠다. 작게 줄인 옷장을 세운 듯 옷을 걸어 보관할 수 있는 워드로브(Wardrobe)는 기차 여행을 위한 트렁크다. 루이비통은 1883년부터 파리-이스탄불을 달리기 시작한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1등 침대칸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브랜드였다.

 

증기선도 빠른 속도로 범선을 밀어냈다. 미국의 로버트 풀턴이 1807년 허드슨 강에 처음 증기선을 띄우고 1838년 그레이트웨스틴 호가 대서양 항로를 개척하면서 귀족들의 증기유람선 여행이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루이비통은 객실 침대칸 밑에 넣을 수 있는 캐빈트렁크(Cabin Trunk)와 납작하게 접을 수 있는 스티머백(Steamer Bag)을 선보였다. 1912년 처녀 출항한 호화로운 타이타닉 호에 승선했던 많은 상류층 인사들이 선호했던 제품들이다.

 

자동차는 빠른 속도로 기차를 따라잡았다. 1886년 독일의 칼 벤츠가 내연기관 자동차를 발명하면서 철길이 없는 곳으로도 달릴 수 있는 자동차 여행이 신흥 부자들의 자랑거리가 됐다. 루이비통은 1897년 독일 베를린에서 처음 열린 모터쇼에서 자동차용 트렁크를 소개한 데 이어 1905년 예비 타이어를 두는 자리에 딱 맞는 드라이버백(Driver Bag)을 발표했다. 또 아프리카 횡단과 종단, 아시아 횡단 같은 장거리 경주를 후원하면서 극한 환경에서 자동차용 트렁크의 품질을 과시했다. 항공 여행에서도 빠질 수 없다. 루이비통은 열기구 여행에 대비해 가볍고 물에 뜨는 에어로트렁크(Aero Trunk)와 항공 여행에 적합한 각종 소프트백(Soft Bag)을 내놓았다. 1927년 뉴욕에서 파리까지 대서양 횡단 비행에 성공한 미국의 찰스 린드버그는 뉴욕으로 돌아갈 때 루이비통에 여행 가방을 2개 주문하기도 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운반도구는 남성 위주의 트렁크 형태에서 여성 위주의 핸드백 형태로 옮아갔다. ‘옮기는 가방이 아니라드는 가방시대가 열린 것이다. 루이비통은 증기선용으로 만든 캐빈트렁크의 세컨드백(Second Bag)으로 1901년 스티머백을 내놓았다. 스티머백은 증기선을 오래 타면 늘어나는 빨랫감을 담기 위한 가방이었다. 이어 항공여행용으로 가볍고 질긴 소프트백이 인기를 끌면서 본격적인 핸드백의 시대가 열렸다. 그는 교통수단의 발달로 새로운 가방에 대한 수요가 생길 때마다 발빠르게 대응했다.

 

‘모든 걸 담는다는 뜻을 가진 키폴백(Keepall Bag. 1924), 바쁜 여성을 위한 스피디백(Speedy Bag. 1930), 샴페인을 담는 노에백(Noe Bag. 1932), 코코 샤넬이 주문한 알마백(Alma Bag. 1934), 자물쇠를 옆에 단 락킷백(Lockit Bag. 1958), 젊은 여성의 가방에서 영감을 얻은 파피용백(Pappillon bag. 1966), 말 안장용 가방을 연상시키는 소뮈르백(Saumur Bag. 1986), 업무가 많은(multi-tasking) 여성을 위한 네버풀백(Neverfull Bag. 2007), 고전적인 여성스러움을 강조한 티볼리백(Tivoli Bag. 2008)…. 루이비통의 핸드백 라인은 시대를 따라 진화하고 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고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운반도구는 남성 위주의 트렁크 형태에서 여성 위주의 핸드백 형태로 옮아갔다. 스티머백은 증기선을 오래 타면 늘어나는 빨랫감을 담기 위한 가방이었다. 이어 항공여행용으로 가볍고 질긴 소프트백이 인기를 끌면서 본격적인 핸드백의 시대가 열렸다.

 

창업자의 가출에서 여행의 가치를 찾다

유명 연예인의 패션이 금방 대중에게 유행하는 것처럼 당시 왕족이나 귀족의 패션도 곧바로 신흥 부자들이 모방하기 시작했다. 트리아농 캔버스의 복제를 막기 위해 개발한 스트라이프(줄무늬) 캔버스나 다미에(Damier. 바둑판 무늬) 캔버스까지 내놓는 족족 모조품이 판을 치자 가업을 물려받은 루이 비통의 아들 조르주(George) 1896년 혁신적인 디자인을 선보였다. 아버지의 이름과 기하학적 무늬를 소재로 모노그램 캔버스를 등장시킨 것이다. 모노그램(Monogram)이란 루이 비통의 ‘L’ ‘V’를 겹쳐 놓은 것처럼 여러 문자를 겹쳐 한 덩어리로 보이게 만든 도안이다. 이 모노그램은 루이 비통 가문의 문장(紋章) 같은 상징성을 만들어냈다. 조르주는 오트쿠튀르(haute couture·고급 의상실)의 아버지로 불리는 찰스 워스(Charles Worth)가 자신이 지은 옷에 사인을 하는 것을 보고 화가가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듯 캔버스에 ‘L. Vuitton’을 새겨 제품에 예술적인 가치를 부여했다.

 

1987년 루이비통을 인수해 LVMH를 설립한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 회장은 모노그램 탄생 100주년을 맞아 루이비통의 패션사업 진출을 결심하면서 젊고 도발적인 34살의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를 아트디렉터로 앉혔다. 제이콥스는 루이비통의 전통적인 사치품에 팝아트(Pop Art)를 입히면서 팝럭셔리(Pop Luxury) 시대를 열었다. 그는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와 함께 멀티컬러 모노그램을, 스티븐 스프라우스(Stephen Sprouse)와 함께 낙서처럼 휘갈긴 형광 그래피티(Graffiti) 모노그램을, 쿠사마 야요이(草間彌生)와 함께 물방울 모노그램을 만들어 팝럭셔리를 대중에게 선물했다. 루이비통의 혁신은 캔버스로 시작해서 캔버스로 이어간다. 루이 비통은 트리아농 캔버스를 방수용 포장으로 개발했고, 조르주 비통은 캔버스에 모노그램을 넣어 쉽게 모방하지 못하도록 했으며, 제이콥스는 캔버스에 팝아트를 그려 넣었다. 그렇다. 캔버스는 원래 예술을 담는 화폭(畵幅)이었다.

 

루이비통은 창업자 루이 비통의 여행에서 시작한다. 공룡이 번성했던 중생대 쥐라기의 흔적을 품고 있는 웅장한 쥐라 산맥에서 13살의 소년 루이 비통은 혼자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파리까지 470. 하루도 쉬지 않고 걷는다면 보름 남짓, 마차를 타면 닷새 정도. 지금은 자동차로 5시간 걸리는 거리를 소년은 2년 동안 방랑했다. 들에 일렁이는 꽃과 밤하늘에 핀 별을 확인하며 걷고 또 걸었을 것이다. 꽃과 별을 소재로 하는 아르누보(Art Nouveau) 스타일의 모노그램은 소년의 꿈을 연상시키는 모티브다. Paris, Paris, Paris, Paris, Paris…. 낙서로 뒤덮인 그래피티 모노그램은 소년의 열망을 드러낸다. 얼마나 파리에 가고 싶었으면…. 시골뜨기에게 파리는 방랑의 목적지이자 인생의 목표였다. 루이비통은 창업자의 여행 경험을 최고의 명품으로 승화시킨 브랜드다. 비싼 루이비통 가방을 들고 여기저기 바쁘게 쏘다니는 사람들에게 소년이 가만히 묻는다. ‘인생은 당신을 어디로 데려갈까요?’(Where will life take you?2

 

허두영 테크업 대표이사 huhh20@techup.co.kr

필자는서울대에서 재료공학을 배우고 방송통신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했다. 전자신문과 서울경제신문 기자를 거쳐 과학동아 편집장을 지냈다. CNET Korea를 창간하고 소프트뱅크미디어 대표이사를 지내기도 했다. 이후 과학수필가로 등단해 <사랑하면 보이는 나무> <신화에서 첨단까지> 등의 저서를 집필했다. 재료를 고르고 다듬는 역량에서 명품이 탄생한다는 걸 깨닫고 이번 칼럼을 기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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