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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박한 토양과 ‘천사의 몫’

이철형 | 166호 (2014년 12월 Issue 1)

11월은 와인 업계가 가장 분주해지는 시기다. 9∼10월을 기점으로 북반구의 주요 지역 포도 재배와 양조가 일단락되면서 올해 수확된 포도의 품질이나 특징에 대한 평가, 생산량 예측 등을 지표로 다음을 준비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와인은 흔히 최상의 포도를 재배할 수 있는기후와 토양이라는신이 주는 선물인간의 겸손과 정성이 함께 빚어내는 작품이라고 일컫는다. 가장 최적의 기후 조건을 갖췄던 해였다고 좋은 와인이 탄생할 것이라는 기대는 섣부르다. 또 제아무리 최고의 정성을 기울였다고 해도 기후가 뒷받침되지 않거나 양조과정에서 예측할 수 없는 변수가 생기면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와인은 기업의 경영과 참 많이 닮아 있다.

 

최고의 와인 생산지가 갖춰야 하는 자연환경은 기후, 습도, 햇볕의 양 등이 기본적인데 역설적이게도 척박한 땅일수록 좋은 포도를 만들어 낸다. 포도는 영양분이 많은 부식토나 진흙 땅보다 석회석, 자갈, 모래, 암반 등이 섞인 볼품없는 토양을 좋아한다. 소위 일반 농작물이 잘 자라는 땅에서는 포도나무가 뿌리를 깊이 내릴 필요가 없고 자신의 줄기와 잎이 자라는 데 영양분을 대부분 소모해 종족번식을 위한 열매를 맺는 데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 와인의 원재료가 되는 최상의 포도가 탄생하지 않는다. 반면 척박한 땅에서는 수분과 영양분을 찾아 깊게는 40m까지도 뿌리를 내리고, 영양분을 흡수하며, 최대한 좋은 열매 맺기에 주력한다.

 

어찌 보면 기업을 경영하는 CEO 입장에서 한국은 척박한 토양과 같다. 창의적인 신규 사업을 구상하면 늘 수많은 규제가 가로막고 있어 아예 창업 자체를 포기하는 사례가 많다. 또 규제에 제대로 대비하지 못해 창업했다가 뒤늦게 문을 닫아야 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전 세계적으로 농업과 서비스산업이미래 산업으로 각광받고 있음에도 과거 제조업을 적극 지원했던 것 같은 지원제도는 미비한 상태다. 그러나 마치 포도가 그런 것처럼 기업도 환경이 어렵고 척박할수록 시장의토양인 소비자들에게 깊게 뿌리내리고 정성을 다하면단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와인 시장은 1987년 국내 와인 수입 허용 이후 1995년 소득 수준 1만 달러 시대를 맞이하며 급성장할 것으로 기대를 모았지만 아시아 외환위기라는 직격탄을 맞고 크게 위축되고 말았다. 2000년에 필자가 현재 몸담고 있는 회사의 모회사인 아영FBC는 수입과 도매업 중심(B2B)에서 B2C(소매업) 방식으로 와인을 직접 소비자에게 판매하겠다는 중요한 결단을 내리면서 와인나라라는 국내 최초의 와인 전문 소매기업을 만들었다. 다른 수입사들의 상품도 차별 없이 판매하는, 소위 구색을 제대로 갖춘 와인 전문점을 기획했다. IMF 관리체제하에서 와인 소비 욕구는 억제됐지만 척박한 토양에서 와인나라는 소비자에게 더 깊게 뿌리내리면서 현재의 위상을 확보할 수 있었다.

 

포도 경작 다음으로 와인의 품질과 맛을 결정하는 중요한 과정 중 하나는앤젤스 셰어(Angel’s Share, 천사의 몫)’라고 부르는 숙성 과정이다. 와인을 오크통에서 숙성시키는 동안 수분, 알코올이 증발하는데 이 빈 공간이 아주 천천히 공기로 채워지면서 와인이 산화된다. 와인을 만드는 사람들은 공기 중으로 사라진 (와인의 경우 연간 약 2% 정도가 증발) 수분과 알코올을 천사들이 가져갔다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증발된 양을 잘 측정하고 관리하는 것이 좋은 와인을 만드는 비법 중 하나다.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는 기업에 이런앤젤스 셰어는 필수적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손실이라고 판단할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기업이 안정적인 기틀을 마련할 수 있는 기업 활동이 여기에 해당한다. 모든 기업은 끊임없이 장기적 발전 방안을 구상하고 관리해야 한다. 좋은 와인을 빚기 위해 2∼3%의 천사의 몫이 있어야 하듯이 사회에 대한 기여를 통해 기업은 존재가치를 더 높일 수 있다. 천사의 몫을 주고, 그 천사가 되돌려주는 더 깊고 풍부한 맛과 향을 기다려보는 것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다.

 

이철형 ㈜와인나라 대표

이철형 대표는 서울대 경영대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건국대 와인학 석사과정 겸임 교수를 지냈으며 한국국제소믈리에협회 자문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는 를 위한 와인커닝 페이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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