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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의 거울

사두마차 타고 개선한 로마의 ‘戰神’ 교만 깨달은 뒤 마키아벨리의 거울되다

김상근 | 162호 (2014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카밀루스 장군은로마의 두 번째 창건자로 칭송을 받았다.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 로마를 처음으로 창건한 인물이었다면 카밀루스는 외적의 침입으로 무너질 뻔했던 로마를 구한 탁월한 장군이었기 때문이다. 카밀루스 장군은 단 한번도 집정관(Consul)의 자리에 오른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다섯 번이나 독재관(Dictator)을 지냈다. ‘독재관은 외적의 침입 등으로 비상시국에 처했을 때 국가의 모든 권력과 결정권을 거머쥐는 자리다. 보통 집정관 출신이 독재관으로 임명돼 전쟁을 지휘했다. 하지만 카밀루스 장군만은 예외였다. 이런 카밀루스 장군도 젊은 시절 실수를 저질렀다. 첫 번째 전투에서 승리한 뒤 우쭐해서 사두마차를 타고 로마에 개선장군으로 귀환했다. 로마 시민들은 이런 카밀루스 장군의 모습을 보고 경계했다. 이후 카밀루스 장군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고 다시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았다.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는 카밀루스의 생애를 통해 참된 군주의 모습을 발견했다. 카밀루스 장군은 적절한 처신으로 시기심을 일으키지 않는 귄위를 가진 현자였다. 

 

편집자주

고전의 지혜와 통찰은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여전히 큰 교훈을 줍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군주의 거울을 연재합니다. 인문학 고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두마차를 타고 가는 남자

()가 경작과 단백질 섭취를 위해 인류에게 필요했던 동물이었다면 말()은 전쟁을 위한 도구였습니다. 말을 타고 전쟁에 임하면 훨씬 유리했습니다. 적진을 향해 빨리 달려갈 수도 있고, 머나먼 원정길도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위대한 장군들의 모습은 일반적으로 기마상(騎馬像)으로 표현됩니다. 중세 기사들도 대부분 말을 타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포세이돈(Poseidon)바다의 신으로 알려져 있지만()의 신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포세이돈의 조각을 보면 종종 말을 타고 있거나 사두마차(四頭馬車)를 몰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돼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위대한 장군이라 할지라도 말 한 마리의 등에 오르는 것에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사두마차는 포세이돈 신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최초로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사두마차를 타고 당당히 로마로 입성했던 장군이 있었습니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Marcus Furius Camillus, 기원전 446∼365)라는 인물입니다. 카밀루스 장군은로마의 두 번째 창건자로 칭송을 받았습니다. 로물루스가 기원전 753년에 로마를 처음으로 창건한 인물이었다면 카밀루스는 외적의 침입으로 무너질 뻔했던 로마를 구원했던 탁월한 장군이었습니다. 카밀루스는 평생 단 한 번도 집정관(Consul) 자리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시민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카밀루스를 독재관(Dictator)으로 임명했습니다. 그것도 다섯 번씩이나 독재관을 지냈는데 그것은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었습니다. ‘독재관은 나라가 외적의 침입 등으로 비상시국에 처했을 때 한 사람에게 모든 권력과 결정권을 일임하는 제도였습니다. 임기는 반드시 6개월을 넘지 못하도록 했고 보통 두 명의 집정관 중에 한 명이 독재관으로 임명돼 전쟁을 지휘하곤 했습니다. 카밀루스는 단 한 번도 집정관 자리에 오른 적이 없는데 무려 다섯 번이나 독재관을 지냈고 모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 로마가 처했던 누란(累卵)의 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했습니다. 그야말로전쟁의 신이었고 포세이돈이 타던 사두마차를 끌고 개선식을 받을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의 위대한 장군 카밀루스를 그리스의 테미스토클레스 장군과 대비시켰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영웅전>의 백미인 비교 부분이테미스토클레스 vs. 카밀루스편에는 빠져 있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가 왜 하필 테미스토클레스와 카밀루스를 대비시켰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게 됐습니다. 두 명 다 유능한 장군이었고 외적의 침입을 물리친, 탁월했던 지휘관이라는 공통점이 있긴 합니다만 성격과 품성이 서로 달랐고, 생의 마지막에 맞이했던 임종의 모습도 완전히 달랐습니다. 조국 아테네를 배신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황소의 피를 마시면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카밀루스는 마지막까지 로마 시민들의 존경을 받다가 노환으로 평온하게 임종을 맞이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카밀루스를 비교할 근거가 없어졌으니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테미스토클레스와 카밀루스를 다른 자료와 비교해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난 회에서 테미스토클레스를 플라톤의 <국가>와 비교해 봤습니다. 카밀루스의 생애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과 비교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왜 카밀루스를 마키아벨리의 책 <군주론>을 통해 분석하려는 것인지 대해서는 나중에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카밀루스가 어떤 인물이었고, 어떤 역동적인 삶을 살았는지 알아야겠지요?

 

프란체스코 데 로시카밀루스의 생애’, 1545년 작품. 피렌체 베키오 궁전. 사두마차를 타고 있는 카밀루스의 당당한 모습이 잘 표현돼 있다.

 

카밀루스의 파란만장했던 생애

카밀루스는 기원전 5세기기원전 4세기의 인물입니다. 카밀루스 시대의 로마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제국의 로마와는 그 모습이 상당히 달랐습니다. 로마는 이제 겨우 2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진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원래 로마인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원주민이 아니라 외부에서 유입돼 온 정착민이었습니다. 남의 땅을 비집고 들어온 외부인이었기에 로마인들에 대한 이탈리아 원주민들의 반감과 경계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습니다. 영토를 확장하기 위한 전쟁은 불가피했고 자기 땅을 지키겠다는 원주민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 혼란의 와중에 카밀루스라는 불세출의 지도자가 등장한 것입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외부의 혼란이 극심하면 내부의 혼란도 덩달아 증대합니다. 로마도 그랬습니다. 아직 나라의 틀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으니 권력구조에 대한 합의도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전통 귀족들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켜나갔고 일반 평민들은 호민관(Tribune) 제도를 만들어 귀족들의 권력 독점을 견제하고 저항했습니다. 원로원 중에서 두 명의 지도자를 뽑아 집정관(Consul)으로 임명하는 제도도 사실 권력 독점을 막으려는 고육책이었습니다. 한 사람이 권력을 혼자서 독점하지 못하도록 두 사람에게 권력을 나누어 놓은 것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평민들은 호민관을 무려 6명이나 임명해 그들의 권리를 지키도록 했습니다. 소수의 지배를 받는 것보다 2명의 집정관(원로원 대표) 6명의 호민관(평민 대표)의 통치를 받는 것이, 그래도 약간의 위안이 됐던 모양입니다. 권력구조와 통치방식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은 나라에서 관직에 오르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카밀루스도 그것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에 오를 기회가 있었지만 모두 사양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카밀루스의 처신 때문에그의 권위는 시기심을 유발하지 않았다고 평가합니다. (1)

 

도메니코 코르비팔리스키의 선생과 카밀루스’, 1764∼66년 작품, 로마 캄피돌리오박물관 소장

 

카밀루스 장군이 유명해진 것은 물론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아이퀴(Aequi)족과 볼스키(Volsci)족과의 전투에서 적이 쏜 화살이 허벅지에 박혔지만 카밀루스는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싸워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습니다(기원전 403). 당시 그는 부관의 신분이었지만 이런 용감무쌍한 행동으로 지휘관보다 더 높은 명성을 얻었습니다. 카밀루스가 처음으로 지휘관 자리에 오른 것은 7년간 지속됐던 베이이(Veii)족과의 전쟁(기원전 406∼396) 때였습니다. 베이이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16㎞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에트루리아 지역의 요새였습니다.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중부의 원주민들이었는데 매우 호전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부족끼리의 전쟁이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에트루리아인들은 아예 언덕이나 산꼭대기 부족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군사적 방어를 위해서 고지대에 도시를 건설한 것입니다. 지금도 이탈리아 중부지역에 산악도시가 많은 것은 바로 이들이 에트루리아인들의 후손들이기 때문입니다. 시에나, 우르비노, 몬테풀치아노, 오르비에토 등의 중부 도시가 다 에트루리아인들이 거주했던 지역입니다. 카밀루스 당시 베이이는 에트루리아인들이 자랑하던 최후의 보루였습니다. 로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지만 높은 성벽과 풍부한 전쟁 자금 때문에 적국 로마에 대한 군사적, 문화적 자신감이 넘치던 도시였습니다. 로마인들은 세력을 북쪽으로 확장하기 위해서 베이이를 공격했지만 난공불락의 요새를 공략할 수 없었습니다. 무려 7년이라는 오랜 시간이 흘렀고 로마의 지휘관들은 일반 군사들의 불평불만을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인기가 높았던 카밀루스가 마침내 작전 지휘권을 넘겨받게 됩니다(기원전 401). 카밀루스의 군사작전은 신출귀몰, 그 자체였습니다. 시간을 끌면서 지하 땅굴을 파 들어간 것입니다. 원래 이탈리아 중부 지역은 사암(砂巖)이 많기 때문에 지하 토목공사가 비교적 용이합니다. 베이이의 다른 쪽을 공격하는 척 하면서 적의 관심을 딴 곳으로 잡아놓은 다음 땅굴 공사를 계속해서 베이이 신전의 바닥을 뚫는 데 성공했습니다. 지하 땅굴을 통해서 질풍노도와 같이 밀려들어간 로마 군인들은 베이이를 철저하게 파괴했습니다. 당시의 풍습대로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군사들은 패자의 재산을 노략질했습니다. 승자가 전리품을 챙기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로마 군사들도 베이이 주민들을 죽이고 재산을 무차별적으로 강탈했습니다. 그러자 카밀루스는 두 손을 하늘로 뻗고 눈물을 흘리면서 유피테르 신에게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인간의 선행과 악행을 심판하시는 모든 신들이시여! 승리의 행운을 거둔 저희에게 어떤 보복을 하시려거든 로마나 로마 군대에 하지 마시고 제발 제게만 하시옵소서!(5)”

 

베이이와의 전쟁은 무려 10년을 끌었습니다. 베이이를 공략함으로써 이제 로마는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로 나아갈 수 있는 전략적 교두보를 확보했습니다. 이런 혁혁한 전공을 쌓은 카밀루스는 백마(白馬)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로마로 당당히 귀환했습니다. 플루타르코스의 표현대로 그것은신들의 왕에게만 어울리는 신성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카밀루스의 명백한 실수였습니다. 사두마차를 타고 개선하는 카밀루스 장군을 보면서 로마 시민들은 겉으로는 찬사를 늘어 놓았지만 속으로는 질투와 경계심을 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로마 시민들은 젊은 장군의 오만한 개선식에 불편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카밀루스에게 전리품 중의 십분의 일을 델포이신전에 바치기로 했던 전쟁 전의 맹세를 지키라고 쏘아붙였습니다. 카밀루스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약속했던 전리품도 델포이 신전에 바쳤습니다.

 

이번에는 팔리스키(Falisci)족과의 전쟁(기원전 395)이 벌어졌고 카밀루스는 다시 독재관에 임명돼 이 전쟁을 지휘합니다. 카밀루스 장군은 장기전을 계획했습니다. 이것은 적의 전력이 막강해서라기보다 로마 시민들의 관심을 외부로 돌려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외국과 전쟁을 하면 내부의 문제로 서로 싸우던 국민들도 일치단결하게 됩니다. 국내 정치 현안 때문에 골치가 아픈 현대 정치가들은 카밀루스 장군의 작전을 한번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국민의 시선을 외부로 돌리게 만들고, 일치단결해 함께 싸우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냉소적인 시선으로 이런 로마인들의 정치방식을 평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 사람들이 곧잘 쓰던 처방으로 마치 용한 의사의 처방처럼 매우 적절하고 효험이 있었다. 외부의 적에게 시선을 돌리게 함으로써 나라 안의 골치 아픈 병을 없앴던 것이다(9).”

 

한편 팔리스키족들은 성벽이 튼튼했기 때문에 로마군대에게 포위됐음에도 불구하고 평소처럼 자유롭게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어린 학생들을 가르치던 팔리스키의 한 교사가 나라를 배신합니다. 가르치던 아이들을 데리고 로마에 투항한 것입니다. 그 선생은 카밀루스에게 어린 학생들을 인질로 삼고 싸우면 팔리스키족이 즉각 항복할 것이라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그 선생을 체포해서 아이들과 함께 팔리스키족의 성 안으로 돌려보내 버렸습니다. “위대한 장군은 자신의 용맹에 의지해서 전쟁을 벌이지 남의 비열함에 의지하지 않는다며 그 선생을 회초리로 매질하고 성 안으로 돌려보낸 것입니다. 팔리스키족은 크게 감명을 받고 카밀루스에게 투항을 결정했습니다. 카밀루스는 로마 군사들에게 투항한 팔리스키족들의 재산을 전리품으로 취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기원전 4세기의 로마 모형. 로마 역사 박물관. 신전이 보이는 앞쪽의 언덕이 카피톨리움이다. 지금의 캄피돌리오 언덕으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광장과 박물관이 있다.

 

팔리스키족과의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들은 격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전쟁에 나선 것은 순전히 전리품을 챙기기 위함이었는데 카밀루스 장군이 이를 금지했기 때문입니다. 빈손으로 돌아온 로마 군인들은 카밀루스 장군에게 누명을 씌워 법정에 고발했습니다. 장군의 집에서 전리품으로 보이는 값비싼 황동문짝이 발견됐다고 주장했습니다. 황당한 모함을 받은 카밀루스는 결국 로마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로마 시민들의 시기와 질투, 권력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에 지쳐버린 카밀루스는 결국 유랑자가 돼 조국을 떠납니다.

 

카밀루스가 떠나버린 로마에 또다시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습니다. 갈리아 지방의 야만족들이 일시에 라인 강과 알프스 산을 넘어 이탈리아로 몰려든 것입니다. 갈리아 지방은 지금의 프랑스 지역인데 게르만족이 살던 야만의 땅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 갈리아 지방의 야만족들이 이탈리아의 포도주 맛을 보고 집단 이주가 시작됐다고 기록했습니다(15). 지금은 프랑스 포도주가 이탈리아 포도주보다 상급으로 치는데 그때는 아직 갈리아 지방에 포도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갈리아족의 침공은 기원전 390년에 일어난 고대 로마 역사의 대사건입니다. 당시 갈리아족의 왕 브렌누스(Brennus)는 로마를 침공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에트루리아의 도시 클루시움(Clusium)이 그들의 공격 목표였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야만족의 이탈리아 반도 진입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브렌누스의 의도를 떠보기 위해 사절단을 클루시움으로 보냈습니다. 브렌누스는 로마가 개입하지 말 것을 요구하면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27). 로마의 사절단은 브렌누스의 공격이 클루시움에서 멈추지 않고 로마까지 공격할 것이라고 예측했습니다. 그래서 사절단은 로마로 귀환하지 않고 클루시움의 군대에 합류해 갈리아족과 싸우게 됩니다. 브렌누스는 평화를 모색하러왔던 사절단이 전투에 개입하는 것을 보고 분노를 터트리며 로마에 대한 선전포고를 합니다. 기원전 387, 브렌누스의 갈리아 군대는 로마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로마의 중장보병 4만 명이 방어를 위해 선제공격을 시도했지만 참패를 당했습니다. 카밀루스가 없는 로마 군대는 오합지졸이었을 뿐입니다. 퇴각하던 로마 패잔병들은 베이이에 숨어들었고 로마에 남아 있던 시민들과 군사들은 모두 카피톨리움 언덕 위에서 최후의 방어진을 구축했습니다. 피신할 수 있는 로마 시민들은 모두 이 언덕 위에 올라 결사항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던 노인들은 의자에 앉아 브렌누스 군대의 무자비한 살육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이제 로마는 카피톨리움 언덕을 제외한 전 지역을 갈리아족에게 뺏기고 말았습니다. 로마가 창건된 지 390년 만에 나라의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에 처한 것입니다.

 

로마가 경국(傾國)의 위기에 처했다는 소문이 은둔하고 있던 카밀루스의 귀에 들려왔습니다. 그는 즉각 젊은이들을 설득해 민병대를 조직하고 갈리아 군대의 배후 기지를 공격했습니다. 물론 승리를 거뒀습니다. 그리고 폰티우스라는 청년을 로마로 보내 승전 소식을 급히 알리도록 했습니다. 로마의 지리를 잘 알고 있던 폰티우스는 카피톨리움을 에워싸고 있던 갈리아 군대의 감시망을 피해 언덕 절벽을 기어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카밀루스 장군이 갈리아 군대의 배후 기지를 점령했다는 승전보를 알렸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카피톨리움의 로마 시민들은 카밀루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고 다시 한번 나라의 운명의 그에게 맡겼습니다.

 

폰티우스가 몰래 기어올랐던 카피톨리움의 비밀통로는 갈리아 군사들에 의해 곧 발견됐고 그 통로를 통해 이번에는 갈리아 군사들이 절벽을 기어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신의 도움이 로마인들에게 임했습니다. 카피톨리움 언덕 위에 유노(Juno) 신전이 있었는데 그 주위에 거위들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야음을 틈타 갈리아 군사들이 비밀통로를 기어오르고 있을 때 이 거위들이 큰소리로 울어대기 시작했습니다. 시끄러운 거위 울음소리에 잠이 깬 로마의 경비병들은 적을 발견하고 손도끼로 내리치며 방어에 나섰습니다. 겨우 야간 기습은 모면했지만 7개월이나 지속된 공성작전 때문에 로마 시민들은 휴전 협상에 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브렌누스는 철군(撤軍)의 조건으로 황금 1000리브라를 요구했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겨우 1000리브라의 황금을 구해 전쟁 배상금으로 지불했지만 브렌누스는 황금의 무게를 재던 저울을 조작하면서 더 많은 황금을 요구했습니다. 이에 로마인들이 항의하자 패한 자들만이 억울한 법이다(Vae victis)!”라는 유명한 말을 내뱉었습니다(25). 이런 일로 로마인들과 갈리아인들이 옥신각신하고 있을 때 독재관으로 임명된 카밀루스 장군이 로마 시내로 입성했습니다. 로마인들과 갈리아인들 모두 숨을 죽이며 전설적인 장군의 모습을 지켜봤습니다. 카밀루스 장군은 조용히 황금을 회수하더니 브렌누스에게 당장 저울을 들고 꺼지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리고로마인들은 황금이 아니라 무쇠로 도시를 구원한다는 명언을 남겼습니다. 다시 전쟁이 벌어졌지만 브렌누스는 역전의 노장 카밀루스를 당할 수 없었습니다. 카밀루스가 승리를 거두고 그동안 협소한 카피톨리움 언덕에 갇혀 7개월 동안 지옥과 같은 삶을 살았던 로마 시민들은 마침내 자유를 얻게 됐습니다.

 

황당한 모함을 받은 카밀루스는 결국 로마를 떠나기로 결심했습니다. 로마 시민들의 시기와 질투, 권력에 대한 지나친 경계심에 지쳐버린 카밀루스는 결국 유랑자가 돼 조국을 떠납니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은 다시 카밀루스를 비난하기 시작했습니다. 카피톨리움을 제외하면 로마 시내는 이미 폐허로 변했으니 베이이로 수도를 이전하자는 의견이 대두됐습니다. 그러나 카밀루스는 수도 이전을 반대하며 로마를 재건하자고 주장했습니다. 수도를 옮기자는 안과 로마를 재건하자는 안이 팽팽히 맞서고 있을 때, 다시 에트루리아인들이 전쟁을 걸어왔습니다. 갈리아인들과의 전쟁에서 국력이 소진된 틈을 타서 이탈리아 중부의 원주민들이 로마를 공격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독재관에 임명된 카밀루스는 이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둡니다. 적의 성벽이 나무로 돼 있는 것을 보고 화공(火攻)작전을 펼쳐 적을 단숨에 물리쳤습니다.

 

다시 로마로 개선한 카밀루스는 도시의 내분을 잠재우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쿠데타를 획책하던 만리우스(Manlius Capitolinus)를 체포해 적절한 재판과정을 거쳐 그를 처형한 것도 카밀루스의 공이었습니다. 만리우스는 갈리아 군사들이 카피톨리움의 비밀통로로 야간 기습을 할 때 최전선에서 싸웠던 용사였습니다. 그는 언덕 위에 버티고 서서 비밀통로를 통해 올라오던 갈리아 군사들을 도끼로 내리쳤고 적군은 모두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나중에 반역 혐의를 받은 만리우스는 카피톨리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는 벌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가장 큰 영광을 안겨 준 곳과 가장 큰 불행을 가져온 곳이 같았습니다.

 

카밀루스는 이제 노인이 됐지만 로마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다시 독재관으로 임명돼 나라를 구하게 됩니다. 이번에는 내분이 문제였습니다. 지금까지 2명의 집정관은 모두 원로원에서 선출됐습니다. 그런데 로마 평민들은 그중 한 명은 평민 출신이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습니다. 원로원이 이를 수용하지 않자 거의 내란 지경의 혼란이 발생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시 독재관으로 임명된 카밀루스는 시간 끌기로 사태가 악화되는 것을 막았습니다. 이런 로마의 고질적인 내분과 계급 간의 갈등은 카밀루스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로마 대중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카밀루스는 독재관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납니다(40).

 

도메니코 길란다이오백합의 방 벽화’ 1482∼1484년 작품, 피렌체 베키오궁전. 왼쪽 집무실 상단 제일 오른쪽에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사람이 카밀루스다. 그 방은 마키아벨리의 집무실이었다.

 

어느덧 여든의 나이에 접어든 카밀루스는 다섯 번째로 독재관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패퇴했던 갈리아인들이 다시 로마 침략을 감행했기 때문입니다. 노장 카밀루스는 새로운 전법(戰法)을 개발했습니다. 갈리아 군사들은 도끼와 칼을 마구 휘두르는 검법을 사용했는데 이를 방어할 수 있는미끄러운 무쇠 투구를 개발한 것입니다. 또한 위아래로 긴 방패를 제작하고 가장자리를 청동으로 둘렀습니다. ()도 새로 개발했습니다. 적의 방패를 향해 창을 던지면 앞부분의 쇠가 나무와 분리되도록 만든 것입니다. 갈리아 군사들은 로마 군사들이 던진 창의 쇠 무게 때문에 방패를 오래 들고 있을 수 없었고 이 순간을 공격 시점으로 이용한 것입니다. 이런 혁신적인 무기 개량을 통해 카밀루스는 또 한번 로마를 위기에서 구해 냈습니다.

 

카밀루스의 마지막 업적은 원로원과 평민 간의 화해를 주선한 것이었습니다. 집정관 중 한 명을 평민 중에서 선출하는 법안을 최종적으로 승인하고 원로원의 동의를 얻어 낸 것입니다. 두 계급 간의 화해를 이룩한 카밀루스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콘코르디아(Concordia) 신전을 지어 봉헌합니다. 지금도 로마의 캄피돌리오 언덕에서 보면 원로원 건물과 평민들의 민회 사이에 건축됐던 콘코르디아 신전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카밀루스의 최후는 로마에 닥친 전염병의 창궐과 우연히 겹쳤습니다. 카밀루스가 노환으로 임종했을 당시 많은 로마 시민들이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로마의 두 번째 재건자였던 카밀루스의 생애를 이렇게 정리했습니다. 카밀루스의 죽음은 당시 전염병으로 생을 마친 모든 사람들의 죽음을 합친 것보다 로마 사람들에게 더 많은 슬픔을 안겨주었다(43).”

 

카밀루스를 14년 동안 지켜본 사람

이 위대한 로마의 장군을 14년 동안 쭉 지켜본 사람이 있었습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1469∼1517)였습니다. 아니, 카밀루스는 기원전 4세기의 인물이고 마키아벨리는 기원후 16세기의 인물인데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요? 물론 시간적으로 두 사람은 약 2000년의 간격을 두고 있지만 카밀루스와 마키아벨리는 늘 함께하던 사이였습니다. <군주론>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마키아벨리는 1498년부터 1512년까지, 그러니까 14년 동안 피렌체의 제2서기장으로 일했습니다. 지금도 마키아벨리가 고위 공직자로 재직하고 있을 때 사용했던 그의 집무실이 팔라초 베키오(Palazzo Vecchio)에 보존돼 있습니다. 놀랍게도 마키아벨리가 14년 동안 수도 없이 들락거렸던 그 집무실 입구 상단에 카밀루스 장군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미켈란젤로의 스승이기도 했던 도메니코 길란다이오(Domenico Ghirlandaio, 1449∼1494)가 그린 벽화 제일 오른쪽에 승리의 깃발을 들고 서 있는 카밀루스 장군의 모습이 보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이 위대했던 장군의 모습을 무려 14년 동안 거의 매일 봤을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카밀루스의 생애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탐독했던 리비우스의 <로마사>에서 카밀루스는 대단한 영웅으로 묘사돼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도 자주 읽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렌체 친구들에게 <영웅전> 전집을 구해 달라는 편지가 남아 있기 때문이지요. 실제로 <군주론>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영웅전>의 내용이 자주 반영돼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쓸 당시, 로마의 위대했던 장군 카밀루스에 대해서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몇 년 전 제가 DBR에 연재했던 마키아벨리에 대한 글은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던 마키아벨리에 대한 이해를 뒤집기 위해 연구, 집필된 것이었습니다. 흔히들 마키아벨리 하면악의 교사라든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가 부려야 하는 권모술수를 가르친 천하의 나쁜 놈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오해는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집필할 때 숨겨 놓았던 원래 의도를 잘못 해석했기 때문에 빗어진 것입니다. <군주론>은 군주의 처세를 가르친 책이 아니라 공직 복귀를 간절하게 소망하던 한 실업자(마키아벨리)가 쓴 애절한 이력서였습니다. 실제로 마키아벨리는 14년간 고위 공직에 있다가 메디치 가문의 복귀로 갑자기 일자리를 잃었습니다. 극심한 가난에 시달렸고, 일벌레였던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메디치 가문의 눈에 들어 공직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평소 생각과는 다른군주의 거울을 메디치 가문에게 바친 것입니다. 바로 그 책이 <군주론>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 15장에서군주는 필요하다면 악덕으로 악명을 떨치는 것을 개의치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미덕을 가진 군주가 오히려 권력을 빼앗기게 되고 악덕을 행하는 군주는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번영을 누릴 것이라고 주장한 것입니다. <군주론> 16장에서는 군주는 인색하다는 평판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고 심지어 17장에서는 사랑을 느끼게 하는 것보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것이 훨씬 더 안전하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이것은 마키아벨리의 속임수였습니다. 그는 지금 메디치 가문을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스스로 여우가 돼 자신의 입장과는 정반대 의견을 제시한 것입니다. 마키아벨리는 14년 동안 카밀루스 장군의 모습을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리비우스의 <로마사>와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읽으면서, 카밀루스가 어떤 인물이었고, 그가 어떻게 위기에 처한 로마를 구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마키아벨리는 카밀루스의 생애를 통해 참된 군주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악덕을 버리고 미덕을 소중하게 여기던 탁월한 지도자였습니다. 로마 시민들의 끊임없는 질투와 경계를 받으면서도 그는 늘 관대했습니다. 카밀루스는 적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지만 백성들에게는 사랑받는 존재였습니다. 그는 적 앞에서 당당했지만 백성들 앞에서는 겸손했습니다. 첫 번째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우쭐해서 사두마차를 타고 개선했던 젊은 날의 실수를 다시는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참된 군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초기의 실수를 바로잡고 그것을 거울삼아 절대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

 

여우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에서 주장했던 것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마키아벨리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카밀루스가 진짜 군주라는 것을! 젊은 날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적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 돼야 하지만 백성들에게는 사랑받는 존재가 돼야 한다는 것을!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플라톤아카데미 연구책임 교수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20여 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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