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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vs. Business Strategy

영국의 엔진 도입한 美전투기의 힘 도요타 기법 빌린 GM의 지혜

김경원 | 162호 (2014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전략

교훈

핵심 역량이 부족하다면 적(경쟁기업)에게서라도 빌려 오는초선차전(草船借箭)’의 자세가 필요

전쟁사례

1941년 북미항공이 제작해 영국 정부에 인도한 머스탱 전투기는 높은 고도에서 엔진 성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음. 그러나 영국 업체 롤스로이스의 엔진 기술을 라이선스 받아와 생산한 엔진으로 교체한 후 놀라운 성능을 발휘하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움. 자동차 최강국으로 엔진 기술에 자부심을 갖고 있던 미국이 자존심을 내세워 영국으로부터 엔진을 받아오기 꺼려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결과임

경영사례

1970년대 두 차례 오일파동을 계기로 자동차 시장에서 연료 효율성이 중요한 이슈로 떠올랐지만 GM은 연료절감을 목적으로 한 기술 개발을 등한시함으로써 소비자들의 변화된 니즈에 대처하지 못했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GM은 경쟁사인 도요타와 합작사인 NUMMI를 설립했고 NUMMI에서 적용한 생산 매뉴얼을 뷰익 사업부의 로봇 조종 매뉴얼에 적용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확연한 품질 개선 성과를 일궈냈음 

 

편집자주

전략은 원래 전쟁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전략의 이론은 중국의 <손자병법>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독일의 클라우제비츠에 이어 20세기 영국의 리델 하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에 걸쳐 정립되고, 또 실전에서 적용돼 왔습니다. 그만큼 경영전략은 실제 전쟁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점이 많습니다. 현장형 경영전략 전문가인 김경원 박사가 전쟁 사례로부터 얻은 전략적 교훈이 어떻게 실제 경영사례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전쟁 사례를 통해 의미 있는 경영 전략의 지혜를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삼국지연의>에 보면 적벽대전 직전에 아군의 화살이 모자라자 제갈량이 계책을 내 적에게서 10만 발의 화살을 확보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른바초선차전(草船借箭)’이다.1 전략을 실행하다 보면 생산기법이나 기술 등 자사의 핵심 역량 부족이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전략 수립단계에서 이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다가 실행단계에서 이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전략을 추진할 수 없게 된다. 이 경우 많은 회사들은 뒤늦게 핵심역량을 자체적으로 갖추려고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한다. 그러나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고 사업기회는 사라져 버린다. 이때는 핵심역량을 적(경쟁자)에게서라도 배워야 한다. 문제는 선두업체의 경우 자존심 때문에 이를 거부하다 낭패를 보는 사례가 있다는 점이다. 과감하게 반대 조치를 취했다면 회사의 결정적인 성장동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사례도 있다. 실제 전쟁사례와 경영사례를 통해 이를 살펴보자.

 

전쟁사례

영국에서 심장을 빌려온 P-51 머스탱 전투기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국과 추축국(樞軸國) 양 진영을 통틀어 최고 성능의 전투기는 미국의 ‘P-51 머스탱(Mustang)’이라 할 것이다. 이 비행기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영국공군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세계대전이 발발할 즈음 심각한 전투기 부족 상황을 겪던 영국 정부가 미국에서 전투기 구매를 추진하던 중 NAA(North American Aviation)가 단 4개월 만에 성능 좋은 신형기를 개발해주겠다는 약속을 제시하자 이를 받아들여 탄생한 기체다. NAA는 약속을 지켰고 1941 10월 첫 양산제품을 영국 정부에 인도했다.

 

영국에 도착한 비행기는 야생마를 뜻하는 머스탱이라는 제식명칭을 받고 전장에 투입됐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영국의 주력 전투기스피트파이어(Spitfire)’나 독일의 주력 전투기인 ‘Bf-109’에 비해 공중전 실력이 한참 떨어지는 것으로 판명됐다. 특히 높은 고도에서 엔진 성능이 현저히 떨어져 제대로 공중전을 치를 수 없었다. 이에 영국군은 머스탱을 대지 공격용으로만 사용했다.

 

그런데 엔진 메이커 롤스로이스(Rolls Royce)의 테스트 파일럿인 로널드 하커(Ronald Harker)가 이 비행기의 가능성을 알아봤다. 하커는 머스탱이 낮은 고도에서 뛰어난 성능을 보이다가 고도를 높이면 성능이 갑자기 떨어지는 이유를 비행기 자체의 설계 문제가 아니라 엔진에 이상이 있는 것으로 봤다.2  1942 10월 하커의 제안에 따라 롤스로이스는 영국 공군에서 머스탱 5대를 빌려 와 스피트파이어에 달려 있는 자사의 엔진을 장착해 날렸다. 결과는 놀라웠다. 고공성능 등 공중전 성능이 비약적으로 좋아져 독일의 어떤 전투기도 이길 수 있었다. 최고 속도는 무려 시속 700㎞를 넘어서 그 당시까지 개발된 어떤 비행기보다도 빨라졌다.게다가 본래의 우수한 설계 덕에 연료 탑재량이 많았던 머스탱은 우수한 엔진을 장착하자 항속거리가 스피트파이어보다 훨씬 길어졌다. 날개 밑에 보조 연료탱크를 달면 항속거리가 3347㎞였는데 이는 영국에서 거의 유럽 전역에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

 

미국도 당장 롤스로이스의 스피트파이어 엔진을 자국 회사인 패커드(Packard)로 하여금 라이선스 생산케 하고 북미항공에 이 엔진을 단 머스탱을 대량 주문했다. 이는 당시 뒤늦게 연합국 진영에 합류했지만 전쟁 수행의 주도적 역할을 맡게 되면서 탱크, 비행기 등 신무기 개발에서 영국과 은근한 자존심 경쟁을 벌이던 미국으로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이었다. 그 당시까지 비행기 엔진은 자동차 엔진과 근본적으로 같은 피스톤 엔진이었기 때문에 영국에서 엔진 기술을 빌려온다는 건 자동차 최강국인 미국이 영국에 손을 벌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이 결정은 미국이 전쟁에서 승리할 결정적 기회를 잡은 것이기도 했다.

 

당시 미국은전략폭격이라는 개념을 개발했다. 장거리 대형 폭격기로 적 후방 깊숙이 자리 잡은 무기공장 등 전쟁 수행에 필요한 자원을 파괴해 아예 적의 전쟁 수행능력을 없앤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폭격기들이 적 전투기의 공격에는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을 호위해 줄 아군 전투기들의 동행이 필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들 전투기는 크기의 한계로 인해 폭격기만큼 길게 날 수 없었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호위전투기의 유무에 따라 폭격기의 손실률이 크게 달라졌기 때문이다.

 

8공군은 1942 8월부터 영국에 주둔하기 시작해 유럽 본토 폭격에 나섰는데 호위 전투기가 따라붙을 수 있는 프랑스까지 출격할 경우 폭격기의 손실률은 1∼2%로서 감내할 만한 수준이었다. 그런데 제8공군이 1943 8월부터 호위 전투기들의 항속거리를 훨씬 넘어 독일 깊숙이 폭격에 나서면서 큰 문제가 생겼다. 대형 폭격기인 B-17 376기나 동원해 독일 중심부의 공업도시 슈바인푸르트(Schweinfurt)와 레겐스부르크(Regensburg)를 공습했는데 아군 전투기들의 호위를 받지 못한 폭격기 편대가 독일 전투기들을 만나 60기가 격추됐다. 출격했던 폭격기의 약 16% 정도가 불귀의 객이 된 셈이다. 두 달이 지난 10월에는 다시 이 두 도시 폭격에 나선 291기의 4분의 1을 넘어서는 77기가 격추됐다. 그제서야 미군의 수뇌부는 호위전투기가 없는 폭격임무의 포기를 고민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차에 영국제 심장을 달고 다시 태어나 독일 깊숙이 장거리 비행이 가능한 머스탱이 구세주처럼 나타났던 것이다.

 

1943 11월 제8공군은 신형 머스탱을 보급받았다. 그리고 그 다음달부터 머스탱의 호위하에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켰다. 이때부터 미군 폭격기의 손실률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이듬해인 1944 1월과 2월에는 손실률이 4.9%로 낮아졌고 갈수록 더 많은 머스탱이 호위에 나서자 1944년 말에는 3.1%로 떨어졌다. 손실률이 떨어지면서 폭격기들이 마음 놓고 목표물을 조준할 수 있게 되면서 폭격의 정확성도 크게 높아졌다.

 

이후 머스탱은 종전(終戰)까지 유럽에서만 4950기의 적기를 공중에서 격추했고 지상에 있던 4131기의 적기를 파괴하는 데 기여했다. 공중에서 떨어뜨린 적기 수만 해도 모든 연합국 전투기들이 떨어뜨린 적기 총수의 절반에 해당한다. 이는 적의 전력을 문자 그대로 궤멸시킴으로써 연합군이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이다. 만약 미국이 무기 강국의 자존심을 내세워 영국으로부터 엔진을 받아오는 것을 꺼려 했다면 이런 결과는 없을 것이다.

 

경영사례

도요타로부터 품질관리 기법을 도입한 GM

1970년대 발생한 두 차례의 석유파동은 자동차 산업에 큰 충격을 줬다. 소비자들의 선택 기준이 연료 효율성으로 옮겨가며 차의 크기는 작아졌고 전륜구동이나 전자식 연료분사 장치 등 연료절감 목적의 장치를 장착한 자동차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큰 차체에 엔진을 여유 있게 설치할 수 있는 후륜구동에 전통적인 기화식 연료분사 장치(carburetor) 등 기계적으로 간단한 자동차를 생산해 오는 데 익숙한 미국 자동차업체들에 이는 재앙과 같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시장에서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으려면 예전보다 훨씬 작아진 차체의 엔진 룸에 엔진에다 바퀴구동 장치를 모두 쑤셔 넣어야 하며 전자식 연료분사 장치 등 복잡한 장치까지 붙여야 됐기 때문이다.

 

이는 당연히 높은 제품 불량률로 이어졌다. 미국 자동차업체들은 소형차 생산 관련 경험이 부족했던데다 연료절감 목적의 기술개발을 등한시해왔기 때문에 생산과정상의 문제는 물론이고 설계결함, 기술미비 등의 문제가 복합적으로 발생했다. 좋은 예가 GM 1979년부터 생산하기 시작한사이테이션(Citation)’이다. 이 차는 이 회사가 고유가 추세에 대응하기 위한 야심작으로 출시한 전륜구동 모델 자동차였다. 출발은 순조로웠다. 출시 첫해에올해의 차(Car of the Year)’로 선정되는 등 언론에서 큰 호평을 받았다. 소비자들의 반응도 좋아 출시 첫해에 약 80만 대가 팔렸다. 하지만 이후 이 차에 여러 가지 문제가 터져 나오면서 소비자들의 반응도 빠르게 식어갔다. 엔진오일이 자꾸 새는 문제부터 브레이크 등의 문제 등으로 GM은 이 차를 여러 번 리콜해야만 했다. 이 차의 문제는 GM 모든 차종에 대한 소비자들의 신뢰를 떨어뜨렸고 이 회사의 시장점유율은 갈수록 떨어졌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GM은 당시 위협적인 경쟁자로 떠오른 도요타로 눈을 돌렸다. 도요타는 당시에도 소형차 분야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신뢰성, 연비, 가격 대비 성능 등을 자랑하고 있었다. GM은 도요타에 미국 내 합작공장을 만들자는 제안을 했다. GM은 이 협업을 통해 도요타의 소형차 제작 기법을 배워 자사의 품질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통해 시장점유율을 다시 올리려고 했다. 의외로 도요타는 GM의 제안을 바로 받아들였다. 마침 당시 미국 의회에서 거론되던 수입차 총량 규제 움직임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미국 내 생산 기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1984년 말 GM과 도요타는 합작회사인 NUMMI(New United Motor Manufacturing Inc.)를 설립했다. NUMMI는 캘리포니아 프레몬트에 위치한 GM공장에 합작으로 공동 생산 설비를 짓고 여기서 생산된 차들의 모습을 조금씩 달리해 각각쉐보레 노바(Chevrolet Nova)’도요타 코롤라(Corolla)’라는 이름으로 팔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GM은 당시 뷰익(Buick) 사업부를 주축으로 기존 공장을 개조하기 위한 야심 찬 계획을 추진했다. 당시 차세대 중대형차 개발을 준비 중이던 GM 뷰익 사업부는 품질 개선을 위해 생산 로봇을 도입하는 등 자체적으로 여러 노력을 기울여 왔지만 시험 생산 기간 중 여러 문제가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예를 들어, 유리 장착 로봇은 유리를 깨먹기 일쑤였고 도색 로봇은 너무 많거나 적은 페인트를 분무하는 등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에 생산 책임자들은 고심 끝에 NUMMMI에서 생산 매뉴얼을 가져와 로봇 조종 매뉴얼 등을 그대로 적용했다.3 이는 확연한 품질 개선으로 이어졌다. 1986년부터 출시된 이 차 모델은 1989년 자동차 품질평가 회사인 J.D.파워에서 실시한 초기 품질 평가에서 미국 회사 중 유일하게 10위권 안에 모든 것을 물론이고 당당히 1위를 차지했다.

 

이후에도 2010년대 초까지 뷰익 사업부는 르세이버(LeSabre)를 비롯한 여러 차종을 J.D. 파워의 품질 평가 리스트 수위권에 올려놓았다. GM은 이런 경험을 전 사업부로 확산시켜 자사 제품 품질이 어떤 수입차와 견주어도 뒤떨어지지 않을 만한 결과를 얻었다. 이는 당시 세계 최대 자동차 메이커였던 GM이 한 수 아래였던 경쟁자 도요타로부터 생산기술 전수를 마다하지 않았던 노력에서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경원 디큐브시티 대표 alexkkim7@gmail.com

필자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매디슨)에서 경영학 석사,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금융연구실 실장, 글로벌연구실 실장, IMF T/F 팀장을, 삼성증권에서 리서치센터장을 각각 역임했다. 2009 CJ그룹 전략기획 총괄 부사장으로 부임해 전사 전략 및 M&A 전략 수립을 주도했다.

  • 김경원 김경원 | -(현) 디큐브시티 대표이사 겸 대성산업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실장, 리서치센터 센터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CJ그룹 전략기획총괄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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