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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淸 부담스러워 병났다며 사신 피한 숙종 원칙대로 대접하고 실리 챙긴 영조

노혜경 | 159호 (2014년 8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HR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 공식 외교 관계를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청나라를 무시하고 명나라를 기리는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숙종은 책봉국이라면 응당 취해야 할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껄끄러운 상황이 일어날 때면 와병을 핑계로 대며 사신 영접을 피했고, 환자처럼 누워 있다 침상에서 칙서를 받곤 했다. 영조는 달랐다. 청나라 사신이 도착하면 최대한 예를 갖춰 환대했다. 영조의 달라진 태도는 청에게조선이 법과 원칙을 준수한다는 신뢰를 심어주기 충분했다. 이로 인해 그는 뇌물로 점철된 외교가 아니라 정도에 따른 외교를 펼쳐나갈 수 있었고, 그 결과 종계변무(宗系辨誣) 문제를 해결하는 실질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편집자주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조선 외교정책의 핵심은 사대교린책으로 요약된다. , 중국에 대해서는 사대책을, 일본과 여진 등 주변 국과는 교린책을 썼다. 사대관계에서 조선은 중국에 조공을 보냈고, 중국은 조선에 책봉을 하고 조공에 대한 사례를 보내왔다. 반면 교린관계에서는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나라, 혹은 그렇지 않은 나라를 대상으로 국가 간의 국서 교환, 약간의 통상을 하는 정도였다.

 

임진왜란은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를 무너뜨렸다. 또한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세력교체는 동아시아 국제질서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의 책봉을 받았지만 속으로는 명나라의 정통을 이었다는 조선 중화주의’ ‘소중화 의식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 명나라의 은혜를 갚는 차원에서 효종 때에는 명나라를 무너뜨린 청을 치자는 북벌을 계획하기도 했고, 숙종 때부터는 임진왜란 때 우리에게 군대를 파견해준 명나라 신종을 기리기 위한 대보단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마음으로는 조선이 명나라의 부활을 바랐다고 해도 현실에서 강국은 청나라였다. 강국도 보통 강국이 아니었다. 군사능력에서 청과 명은 수준이 달랐다. 이미 17세기에 청나라는 영국, 유럽도 두려워한 초강대국이었고 군대는 혈기가 넘쳤다. 대외전쟁을 자제하던 명나라와 달리 청은 여차하면 군대를 파견하겠다고 윽박지르는 사나운 국가였다.

 

 

 

 

 

겉과 속이 달랐던 조선의 대청(對淸) 외교

조선은 겉으로는 청나라와 공식적으로 외교·복종관계를 맺었다. 정기적 혹은 비정기적인 사신단을 끊임없이 보냈고 청에서도 보내오면서 외교와 무역관계를 지속했다. 대개 청나라의 사신이 책봉국에 가면 그 나라의 영접사가 국경까지 가서 맞이하는 건 물론 왕이 도성 밖 교외에 나아가 영접하는 게 관례였다. 그러나 정작 조선은 병자호란의 패전으로 반청 감정이 높았다. 더욱이 살아 있는 청나라보다는 이미 죽어 없어진 명나라에 경의를 표시하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낸 방법이 왕(숙종)이 아프다는 핑계로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러 나가지 않은 것이었다.

 

1685(숙종 11)에 조선인이 불법적으로 국경을 넘어 청나라 영토로 들어가 산삼을 캐다가 중국 관리를 해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를 조사하기 위해 청에서는 사신을 파견했다. 이 사신단을 맞이하러 나가야 하는데 숙종은 병을 핑계로 성 밖까지 나가지 않았다. 다만 양해를 구해 겨우 편전에서 황제의 편지를 받도록 허락을 얻었다. 숙종은 처음엔 관대를 갖추고 앉아 있으려고 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갑자기 걱정이 됐다. “꾀병을 부려 영접하러 나가지 않았는데 너무 건강해 보이면 안 된다” “병이 심한 것처럼 보여야 하니 방 안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청나라 사신을 만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기왕이면 조명도 다 끄고 어두침침하게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렇게 정말 환자처럼 누워 있다가 황제의 칙서를 받았다. 막상 그렇게 하다 보니 이건 더 위험한 방법이었다. 상대국의 칙서를 누워서 받다니.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를 떠나 우호적인 동등한 국가 간이라고 해도 이런 행동을 하다가는 요즘에도 인터넷에서 한바탕 소동이 날 것이다.

 

청나라 사신도 이 광경을 보니 분노가 치밀었던 모양이다. 그러던 참에 오해가 생겼다. 숙종은 끙끙 앓다가 일어나는 척하며 칙서를 받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해질 무렵이 되면서 방이 무척 어두웠으나 숙종은 계속 어두운 곳에 있어서 눈이 익숙해져서 글씨가 보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밖에서 들어온 청나라 사신은 방이 어두워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심기가 상했던 그는 숙종이 글이 보이지도 않을 것 같은 방에서 칙서를 읽는 모습을 보고 노발대발했다. “이렇게 어두운 데서 뭣을 보겠다는 것이냐” “칙서를 읽기 싫어서 보는 척만 하는 것 아니냐며 노발대발했다. 숙종은 부랴부랴 촛불을 가져오게 했고 다시 칙서를 받드는 예를 거친 다음 황제의 편지를 읽는 해프닝이 벌어졌다.

 

청나라가 사신을 파견한 이유는 나름 합리적이고 조선을 배려한 것이었다. 조선인이 밀입국을 해서 청국 관리를 살해했지만 아무튼 외국인이니 양국이 합동으로 공정하게 조사하고 재판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숙종은 사건의 범인과 함께 월경했던 20여 명을 조사하는 자리에도 나가지 않았다. 청국 사신은 사건이 일어난 지역의 지방관들까지도 모두 불러들이게 했다. 청나라는 지방관들이 고의적으로 상인들의 월경을 방치하거나 커넥션을 맺고 있다고 의심했는데 약간은 사실이었다. 이들을 조사하고 지휘 책임을 물어 처벌까지 강행했다. 판결을 내리는 자리에는 어쩔 수 없이 숙종이 참여해야 했다. 자국민의 형사처벌을 외국 사신에게 맡기고 정작 국왕이 이를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청나라 사신은 국경을 침범한 자, 인삼을 판매한 자, 청 관리를 해친 자, 동조자 등 그 죄목을 각각 나누고 형을 정했다. 판결이 과한 것인지, 정상 참작을 많이 한 것인지에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숙종이 청나라 사신이 내린 판결에 이의를 제기했다. 수령과 밀입국자를 관리하지 못한 책임은 먼저 자신에게 있다고 사과하고 범인들과 변경지역 수령들 모두를 청나라 사신이 내린 판결보다 더 중한 벌로 다스리라고 청했다. 숙종의 반응에 당황한 청 사신은황제의 명은 감형하라는 것이었다라고 하며 맞서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됐다. 결국 청에서는 형을 감하는 수준에서 정하고 숙종에게도 벌금 2만 냥을 부과했다.

 

그런데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이미 회령지역 시장(회령개시)에서 소 전염병 때문에 중국과의 소 교역을 중지했다가 청으로부터 오히려 벌금 1만 냥을 물게 된 선례가 있었다. 소 전염병은 와전된 것으로 판명됐지만 섣불리 교역을 금지시켰다가 청으로부터 외교적인 오해를 받은 것이었다. 국경 지역의 개시는 쌀과 농기구, 소 등을 싼값으로 만주 지역인들에게 넘기는 공무역 성격이었기 때문에 조선상인에게는 매우 불리한 입장이었다. 손해를 보면서까지 소를 파는 것을 꺼리는 분위기로 인해 이런 외교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서로 관계가 껄끄러운 상황에서 또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이불 속에서 청 사신을 맞이하는 상황이 연출됐고 이는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숙종은 입장이 난처할 때마다 자신의 병세가 심각함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맞이하러 나왔다는 인상을 주도록 여러 번 꾸몄다. 1713(숙종 39) 사신이 왔을 때는 비를 무릅쓰고 모화관에 나가면서 내시들이 숙종 곁을 꼭 부축하게 해 왕이 얼마나 몸이 불편한가를 보이도록 했다. 당시 청 사신은 백두산 정계 문제로 백두산 지역의 지도를 요구했는데 숙종은 말로만 물길과 산세의 대강을 설명한 뒤 황폐하고 외딴지역이라 지도를 만들지 않았다고 둘러댔다.숙종은 사신이 올 때마다 연기를 하느라 정말 고생을 했다. 국가와 백성을 위해서 그랬다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얻어낼 것도 없이 오히려 피해를 감수하면서 오직 명분과 자존심 때문에 벌이는 고생이었다.

 

자존심보다 실리를 택한 영조

영조는 달랐다. 청 사신이 도착하자 영조는 모화관에 나가 정성과 예의를 다했다. 사신들은 매우 감격했다. 한 번은 청국 사신단 가운데 환자가 발생했다. 영조는 급히 의원을 보내 극진히 치료케 했고 사신들은 더욱 감격해 했다. 껄끄러운 문제에 대처하는 방법에서도 정공법을 택했다. 숙종 때 아극돈(阿克敦)이 사신으로 왔을 때 공청(空靑)이라는 특수한 광물을 가져온 대가로 관행보다 많은 은을 준 일이 있었는데 이게 선례가 돼 영조 대에 이르자 조선이 부담해야 할 은이 너무 많이 늘었다. 이런 사안으로 논쟁이 벌어지자 신하들 사이에서는 영조에게부담스러운 장면을 회피하려면 병을 핑계대고 교외까지 배웅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그러나 영조는병을 핑계 삼는 것은 성실함이 부족한 것이라며 일축했다.

 

왕세자(효장세자)의 접견에 있어서도 세자가 너무 어려서 접견 절차를 줄여도 좋다는 청국 사신으로부터의 허락이 있었음에도 영조는우리나라는 예를 지키는 나라로 중국에 알려져 있고 내가 절을 하는데 세자가 절을 하지 않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영조가 오히려 정식대로 하라고 했을 정도였다. 이후 역관이 전해준 말에 의하면 청나라 사신이 세자를 보고 떠들썩하게 칭찬하면서세자가 중국에 있더라도 비교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이니 만약 돌아가서 황제께 이 사실을 전하면 반드시 하사품이 있을 것이라 했다.

 

이런 영조의 외교관례를 준수하는 태도는 청에법과 원칙을 준수한다는 신뢰를 심어주게 됐다. 조선은 뇌물 없는 외교가 없다고 할 정도로 외교적인 모든 과정에 뇌물을 쓰고 있었다. 그러나 영조는청나라에서 처리하는 것이 아무리 중대한 일이라도 뇌물로 힘을 얻은 규례가 없었다며 규정된 절차대로, 규정된 만큼의 사례품과 은을 주도록 만들었다. 또 그만큼의 이익도 얻어냈다. 청으로 보내는 공물의 수효도 줄였고 청에서 새로 편찬하는 <명나라실록>광해군과 인조 때의 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신을 파견해 종계변무(宗系辨誣, 명나라 <태조실록> 등에 잘못 기록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종계를 개록해달라고 주청했던 사건)의 문제를 해결하기도 했다. ‘반드시 이름을 바로 잡고 명분을 분명히 해야 한다(必也正名)’는 영조의 신념이 청나라의 외교관계에서 통한 것이었다.

 

현대에도 각국의 외교상황을 외교전 혹은 총성 없는 전쟁이라고 한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되는 게 바로 외교다. 이는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기업 경영 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경쟁과 협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중요한 사실은 어떤 경우에도 최대한 실리를 챙기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를 둘러싼 주변 국들과의 관계는 한말 일제강점기 직전의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고들 한다.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은 중국과 일본, 러시아, 미국의 구도 속에서 나아갈 방향을 고민하고 있었다. 지금은 한국과 중국 사이가 북한을 약간 소외시킨 채 유례없이 가까워지고 있고, 오히려 북한과 일본이 가까워지고 있다. 이 와중에 미국은 자국과 중국을 두고 우리의 외교선택을 시험하고 있다. 이렇게 민감한 상황에서 숙종처럼 감정이 앞서서 섣불리 행동하다간 오히려 관계를 악화시켜 실리는 내어주고 빈껍데기 자존심만 지킬 공산이 크다. 괜한 명분 탓에 별 쓸모도 없는 자기 만족을 추구하기보다는 영조처럼 규정된 기본 규칙은 지키되 줄 것은 주고 내게 필요한 것은 확실히 받아내는 실리적 외교가 훨씬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노혜경 덕성여대 연구교수 hkroh68@hotmail.com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에서 학사 및 석사 학위를 받고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박사(한국사학) 학위를 받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을 지냈고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로 활동했다. 저서로 <영조어제해제6>가 있다.

  • 노혜경 | - (현) 호서대 인문융합대학 교수
    - 강남대, 광운대, 충북대 강사
    -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원
    - 덕성여대 연구교수
    - <영조어제해제6> 저자
    hkroh68@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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