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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성향의 변화

귀족의 시대에서 대중의 시대로··· 유행과 디자인이 탄생했다

조승연 |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1차 세계대전은 20세기를 뒤흔든 전체주의의 두 가지 형태, 파시즘공산주의를 낳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전쟁이다. ‘소비사회라는 관점에서도 엄청난 변화를 만들어냈다. 귀족들이 즐기던 까다롭고 난해한의례적 소비값비싼 소량 제품위주의 의복과 액세서리 등 소비재 산업을 만들어냈지만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대중을 위해 다량 생산된 제품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물건을 더 많은 이들에게 팔기 위해유행산업디자인이 만들어졌으며 전쟁 전후에애국적 소비가 최초로 등장하기도 했다. 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역사상 가장 화려한 생활을 하던 귀족들은 자신들의 몰락을 예견하지 못했다. ‘가장 성공적이고 화려한 순간에 미래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은 100년 전의 세계 전쟁이 여전히 우리에게 주는 큰 교훈이다.

 

1차 세계대전과 귀족의 몰락

1) 전전(戰前) 귀족의 소비행태

“평민들에게는 전투 중에 전사하는 것이 큰 비극이겠지만 우리 귀족들에게는 매우 적절한 퇴장이야.”

 

1차 세계대전은 유럽의 귀족인 기사계급들이 그들의 전통에 따라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죽는 영광을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는 의미다. 이 말은 1937년 프랑스를 휩쓸던 흑백영화의 대작, 장 르노와르 감독의위대한 환상(La Grande Illusion)’에서 주연인 유럽 장교가 남긴 명대사다. 영화위대한 환상은 포로수용소로 개조된 한 독일 귀족의 성에 갇힌 프랑스 공군대원과 성의 주인이자 포로 감시 책임자인 독일 귀족 간에 벌어진 이야기이다. 프랑스 장교 보엘뒤와 독일 포로수용소 책임자인 폰 라폰스타인은 기사도 전통이 유지되던 가문에서 자란 유럽 귀족 계급의 후예들이었다. 독일 귀족인 폰 라폰스타인은 보엘뒤가 비록 적국 포로이지만 자기의 성에 머물고 있는 손님이니 만큼 대접을 제대로 하려 했다. 그가 갇혀 있는 감옥으로 흰 장갑과 정장을 보내 귀족다운 차림으로 식사할 수 있도록 하고 정찬 코스 요리로 저녁 식사를 함께 나눴다. 두 사람은 비록 적이지만 식사 중에 프랑스나 독일 등 국가 정체성보다 훨씬 오래된 유럽의 귀족이라는 공통된 문화 배경을 공유해 자국의 평민들보다 오히려 서로간에 훨씬 대화가 잘 통했다. 이들은 심지어 두 집안이 오래 전에 정략 결혼으로 맺어진 먼 사돈 지간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두 사람은 각기 베를린과 파리에서 근무할 때, 귀족들이 자주 모이던 한 음식점에서 종종 밥을 먹었고, 심지어 같은 웨이트리스를 유혹한 경험까지 있었다. 둘 다 깊은 문학적 소견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었고, 프랑스어, 독일어, 영어를 돌아가면서 구사해 언어 장벽조차 느낄 필요가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비즈니스가 활성화되면서 사업으로 돈 번 신흥 계급인부르주아들이 득세하게 된 유럽에서 곧 귀족계급이 몰락할 거라는 현실적인 이야기로 이어졌다. 폰 라폰스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이 전쟁을 독일이 이기건, 프랑스가 이기건, 확실한 것은 전쟁이 끝나고 난 이후의 세상에는 폰 라폰스타인과 보르뒤 같은 가문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이죠.”

 

몇 달 후 포로인 보르뒤는 부하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다. 독일군 장교인 폰 라폰스타인은 탈출하다 들킨 보르뒤에게 신사답게 경고를 한 후 권총을 발사했다. 보르뒤는 그의 총알에 맞아 죽어 가면서내가 당신이라도 나라를 지켜야 하는 기사도의 원칙에 따라 나를 쐈을 것이라며 자기를 죽인 사람에게 끝까지 기사도의 예를 다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한 말이 바로이 전쟁에서 죽는 것이 평민들에게는 비극이겠지만 귀족들에게는 적절할 때 퇴장하는 것이지요였다.

 

서기 750년경 망해버린 서로마를 대신해 유럽을 통일하고 첫 신성로마제국의 왕관을 쓴 샤를마뉴 대왕 수하의 기마 대원 자손들은 유럽에서귀족(L’aristocratie)’이라는 특이한 무사계급을 형성했다. 이들은 르네상스 시대 이후에도 도시의 상인 계급인 부르주아와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하며 사회 중심축을 차지해 왔다. 이들은 생산적인 계급인 부르주아들과 달리 전쟁과 정치만이 주 임무여서 노동을 천시했다. 그래서 평화 시에는 의복이나 식사 의례, 오페라나 클래식 음악 같은 것에 대해서 논하며 복잡하고 난해한 문화를 만들어 소비했다. 의상과 말투, 호칭까지 자기들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복잡한 형식을 붙여 철저히 타 계급과 격리돼 살았다. 신흥 중산층들인 부르주아들은 그런 귀족들이 부러워 그들의 소비 방식을 자기 방식으로 들여와 소화했다. 따라서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의 주 소비 패턴은 귀족들이 즐기던의례적 소비였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유럽의 소비 생활을 선도해온 귀족적 소비의 대표적인 예는 프랑스 파리를 중심으로 형성된 의류업이었다. 프랑스의생오노레 가(Rue Saint-Honoré)’를 중심으로 활성화된 프랑스 의류업은 귀족 여성들의 성장기에 맞춰 치르는 여러 의례에 맞춘 상품을 내놓아 큰 성공을 거뒀다. 당시 유럽 귀족들은 영토 분쟁과 전쟁을 줄이는 차원에서 자녀들의 정략 결혼을 당연시했다. 정략 결혼은 국경을 넘나들었다. 귀족들은 결혼 시장의 국제 네트워크를 타고 일년을 봄/여름(printemps été, 즉 불어의 봄과 여름의 첫 글자) 시즌과 가을/겨울(automne hiver, 즉 불어의 가을과 겨울의 첫 글자) 시즌으로 나눠서 각기 다른 도시로 이주해 거기서 보냈다. 이들은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그 도시 내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귀부인의 소개를 받아 사교계에 진입하고 약 6개월간 그 도시의 문화생활을 통해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자녀들의 혼인 상대를 찾았다. 그리고 새로운 도시에서 가장 탁월하다고 소문난 의상 전문가를 찾아가 그 도시의 최신 유행에 대한 정보를 얻고 그의 권유에 따라 결혼을 앞둔 자녀를 위해 가장 비싸고 고급스러운 의상을 구입했다. 파리는 유럽 귀족들이 가장 즐겨 방문하는 인기 사교 지역이었다. 그 덕분에 파리 의상실들이 유럽 내에서 가장 성업했다. 그 영향으로 오늘날까지 파리의 의류업체들은 매년 P/E 시즌 한 번, A/H 시즌 한 번, 총 두 차례씩 신상품 라인을 선보이고 있다. 파리 생오노레에 입점한 의류업자들은 여자가 16세가 되면 공식적으로 사교계에 내보내 신랑감을 찾도록 하는 행사에 쓸데뷔용 드레스나 귀족들 특유의 화려한 장례식, 성탄 미사 드레스 등 특정 의례용 의류들을 발명해 비즈니스를 활성화하는 데 성공했다.

 

이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매일 거의 의례로 시작해 의례로 끝나는 생활을 했다.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아침식사, 11시경 친구들의 방문을 받는 소위리셉션을 마치고 이후 점심식사, 오후 티 타임, 그 후는 운동 경기 관람, 승마, 사냥 등의 스케줄을 짰다. 스케줄마다 각기 다른 의례를 만들어 거기에 맞는 소비를 했다. 특히 의례마다 옷을 다르게 입는 소비에 집중했다. 미국의 역사가 브랜트 셰넌은 자신의 저서에 “19세기 영국 귀족 부인들은 다른 귀족들이 볼 때적합한생활을 하기 위해 하루에 의복을 12차례 정도 갈아입어야 했다고 썼다. 이런 소비 방식의 특성 때문에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유럽 비즈니스는 다양한 용도의 상품보다 승마용, 사냥용, 티타임용 등 각 의례에 사용될 상품들을 철저히 분리해서 판매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나이 많은 유럽인들의 소비 패턴에 그런 습관이 남아 있다. 유럽 귀족의 하루 일과 중 가장 중요한 의례는 저녁식사였는데 대부분 5∼6시간 동안 이뤄지는 길고 따분한 행사였다. 19세기 말경에는 귀족들의 저녁식사에 필요한 은수저 세트, 뷔페 세트, 크리스털 와인 디캔터, 촛대, 도자기 등에 대한 소비가 피크를 이뤘다. 이때 유럽의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많은 신흥 부르주아 가문들이 등장했는데 그들이 귀족들을 흉내내면서 의례적 소비가 경제발전의 폭발적인 원동력이 됐다. 1830년대에 문을 연 고급 식기 세트 회사 크리스토플과 1890년대에 문을 연 유리/식기 공예품 회사 라릭은 이런 소비 트렌드에 힘입어 큰 기업으로 성장했다. 또 손님 접대와 사교 파티가 소비생활의 중심이었던 만큼 최고급 주얼리의 경제적 역할도 중요해 부셰롱(1858), 카르티에(1847) 등의 회사가 럭셔리 상품 소비 붐의 수혜자가 됐다.

 

중국 명나라와 청나라에서 만든 백자블랑 드 신(Blanc de Chine)’의 과다 수입으로 영국 국고가 은 부족에 시달릴 정도로 테이블 의례 (Art de la Table) 시장이 경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다.

 

 

2) 귀족의 몰락

유럽의 귀족은 무사들이어서 전쟁이 발발하면 가장 먼저 전방으로 달려가 적군과 싸워야 할 의무를 졌다. 이들은 평민 병사들과 달리 자비로 말과 병장기를 구입해 기마대로서 참전했다. 그만큼 말과 귀족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아직 총이 없었던 중세 시대까지만 해도 말 탄 기마병들은 평민 병사 수백 명의 병력과 맞먹는 무시무시한 전투력을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은 갑옷과 방패에 자기 가문의 문장을 새기고 자신을 상징하는 동물을 수놓은 깃발을 들고 전투에 임했다. 이런 기사도 전통을 이어받은 유럽의 기마병들은 전쟁터로 나갈 때 가장 멋진 의복을 갖춰 입고 선두에 섰다. 오늘날까지도 그런 전통이 남아 귀족 시대의 기마병 옷인 프랑스의우시에 기마대(Les Hussards)’나 영국의경 기마대(Light Brigade)’의 복장이밀리터리 룩이라는 이름으로 첨단 패션계에 종종 재등장해 인기를 모으기도 한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유럽의 기마대는 모든 남성 소비의 역할 모델이었다.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한 영국의 카디건 백작은 당시 유럽 남자들의 패션 트렌드를 선도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영국의 기마대 대장인 카디건 백작은 오랫동안 영국과 러시아가 벌인 크리미아 전쟁에 참전했다. ‘백의의 천사나이팅게일의 활약으로도 유명한 이 전쟁은 길고 지루하고 끔찍했다. 카디건 백작은 600명의 경 기마대를 거느리고 참전했는데 상관의 명령을 잘못 해석해 기마대를 이끌고 러시아 포병대에게 정면 돌진하다가 부하들이 거의 전멸을 당했다. 백작 자신과 몇몇 장교만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하지만 원래 정면 돌진은 중세 기사들의 전투방식이어서 목숨 걸고 러시아 포병대를 향해 정면 돌격한 카디건의 기마병들은 영국의 영웅으로 포장됐다. 오늘날까지 영국의 중고등학생들이 배우는경 기마대의 돌격이라는 테니슨의 시로 남아 영국 귀족의 모범적 헌신을 대표한다. 어쨌건 카디건 백작은 귀족다운 귀족으로 여겨져카디건 백작 룩이 오랫동안 영국을 휩쓸었다. 카디건 백작이 추운 러시아 원정 시 군복 안에 즐겨 입었다는 팔 달린 조끼 스타일의 스웨터가 오늘날까지카디건이라는 일상용어로 쓰일 정도로 당시까지만 해도 전쟁은 낭만적으로 인식되는 면이 강했고 무사 계급인 귀족들에 대한 환상과 영웅담 역시 유럽인들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았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은 유럽 역사상 처음으로 기사가 아닌 일반 국민들까지 징집해 전쟁터로 내보내야 하는 대규모 전면전이었다. 이 전쟁은 지저분한 참호 안에서 쥐와 진흙과 하나가 돼 사는 경험을 만들어냈다. 그 경험을 한 사람들의 수는 정말로 많았다. 그동안 유럽인들이 가졌던 전쟁에 대한 낭만은 완전히 사라졌다. 독일 소설가 레마르크의서부전선 이상 없다 1차 세계대전의 전쟁터에서 벌어지는 참혹한 실상을 적나라하게 묘사했다. 거기에는 참호 안에서 흙덩이가 된 병사가 귀족 장교들의 일터인 본부에 긴급 사항을 보고하러 갔다가 노고를 격려받기는커녕 군인답지 않게 의복이 불량하다는 형식적인 훈계만 듣고 나오는 장면이 등장한다. 또 기관총 같은 신무기로 무장한 평민 출신 병사들이 평생 멋진 말 등 위에 올라 깃발을 휘날리며 전쟁터를 누비는 자부심으로 살아온 기마대를 단숨에 전멸시키는 일이 많아 말을 탄기사계급에 대한 환상과 함께 귀족에 대한 존경심 역시 급격히 소멸됐다. 더불어 유럽에서는의례적 소비시대가 막을 내리고 개인 취향과 실용성에 의한 소비로 옮겨갔다.

  

 

3) 귀족적·의례적 소비의 종말

1차 세계대전 이전에 설립된 회사와 이후에 설립된 회사의 성격을 비교해 보면 재미있는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예컨대 19세기에 설립된 가방 회사 루이뷔통은 애초에 거대한 트렁크 생산으로 성공했다. 귀족들이 마차에 거의 반년 동안 쓸 수 있는 많은 짐을 싣고 시즌 따라 도시를 옮기는 데 유용한 짐 가방을 만든 것이다. 그에 비해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부상하기 시작한 샤넬은 스포츠 의상과 정장을 겸비할 수 있는 실용적이고도 활동적인 의상으로 큰 성공을 거뒀다. 담배 사업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볼 수 있다. 전쟁 직전인 1907년 알프레드 던힐은 런던에 쿠바산 시가 전문점을 열어 크게 성공했다. 던힐은 오늘날까지도 신사들끼리 만나 시가를 피우는 의례에 필요한 모든 소품들을 판매한다. 고급 나무로 만든 시가 통부터 커팅할 때 필요한 칼, 담배 냄새를 흡수하기 위한 흡연용 특별 의상(스모킹 재킷)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나갔다. 그에 비해 1차 세계대전 직전인 1910년에 설립돼 전쟁과 함께 성장한 프랑스의 담배 브랜드골로아즈는 언제 어디서나 쉽게 피우고 버릴 수 있는, 현대의 우리들에게도 익숙한 궐련형 담배를 만들었다. 이 담배는 전쟁 참호에서 적의 기습을 기다려야 하는 지루함과 불안감을 달래야 하는 보병들 사이에서 먼저 유행했는데프랑스 여성이라는 뜻을 가진 브랜드명과자유여 영원하라라는 슬로건이 전쟁 중인 국민들의 애국심을 유발해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전쟁 후에는 유명 화가 피카소나 소설가 사르트르 같은 사람들이 공공연히 피우면서 지금은 오히려 프랑스 지식층을 상징하는 담배가 됐다. 귀족층을 모방하며 새로운 트렌드가 사회 계급의 피라미드를 따라 흘러 내려오던 소비 시대가 끝나고 군대 같은 만인이 공감할 수 있는 감성코드에서 나온 새로운 트렌드가 계급 피라미드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 1차 세계대전 전후 소비 행태라고 말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성공한 상품들은 대부분 귀족들의 의례에서 벗어나 실용적이고 활동적인 소비를 강조하는 면이 강하다. 전쟁을 계기로 귀족을 상징하던 기마병들의 위용은 떨어졌지만 그 자리를 비행기 조종사 등 빠른 기계를 조종할 수 있는 사람들이 새로운 전사적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이에 따라 스포츠카 운전사, 요트 레이서 등 기마대의 기사를 대체할 새로운스피드 아이콘들이 대중의 영웅으로 부상해 새로운 소비 트렌드를 주도했다. 스포츠 영웅 마케팅 시대가 막을 연 것이다.

 

새로운 영웅의 등장과 새로운 소비자의 태동

1) 새로운 소비의 트렌드: 스피드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탈리아의 전투기 조종사 바라카는 자비로 구입한 전투용 비행기 기체를 노랗게 칠하고 중앙에 커다란 검은 말을 그려 어디서든지 눈에 띄는 비행기를 타고 전쟁터를 누빈 것으로 유명하다. 바라카가 전투 중에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자 바라카의 어머니가 아들과 함께 부서진 비행기 잔해를 찾아내 거기에 그려진 말 그림을 도려냈다고 한다. 나중에 바라카의 고향 마을에서 열린 자동차 경주 대회에서 바라카의 어머니가 이 말을 상품으로 내걸었고 그 경기에서 우승한 엔초 페라리가 그 말을 상으로 받은 후 자신이 설립한 페라리 자동차 회사의 로고로 삼았다는 후일담이 있다.

 

이것은 말과 한몸처럼 움직이던 기사들의 위상이 전투기 조종사 등을 통해 스피드 스포츠 스타로 옮겨 갔음을 말해준다.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럭셔리 소비는 새로 등장하는 스피드 기계에 대한 로망에 초점이 맞춰졌다. 전투기 조종사들이 즐겨 차는 시계, 가죽 재킷, 스포츠카 운전사들의 몸에 찰싹 붙은 복장, 리듬이 빠른 재즈 음악과 거기에 어울리는 칵테일 드레스, 위스키 등 여러 독주들, 인스턴트 담배, 아무 옷이나 막 입고 들어가 스낵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며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영화관, 놀이공원 등 전쟁 후의 유럽 소비자들은 귀족적 의례를 흉내내기보다는 기술 발전이 가져온 간편함과 스피드 소비에 관심을 집중했다. 1916 5, 이탈리아의 시인 마리네티가 신문에 기고한 에세이에는 이런 사회 분위기가 아주 잘 나타나 있다. “세상의 숭고함은 새로운 아름다움, 속도의 아름다움에 의해서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중략) 지금까지의 도덕은 사람의 몸을 관능에서 지나치게 안락하게 보호하도록 했다. 미래주의적 도덕은 오히려 사람이 느림 속에서, 추억 속에서, 분석 속에서, 휴식과 습관 속으로 썩어 들어가는 것을 막도록 해주는 것이 목적이다. 인간의 에너지는 속도와 하나가 돼 수백 배로 불어나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정복할 것이다.”

 

이런스피드 소비에 가장 즉각적으로 반응한 것은 당연히 시계 시장이다. 1차 세계대전 이전의 신사들은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포켓 워치를 선호했다. 포켓 워치에 체인을 감는 방법부터, 어느 쪽 주머니에 거는 것이 가장 미적으로 우월한지에 대한 책이 나올 정도로 그 시대의 시계는 복잡한 의례를 상징하는 물품이었다. 그런 소비 취향 때문에 1차 세계대전 전까지는 손목시계가 대중화되지 못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주로 스피드와 관련이 깊은 파일럿, 다이버, 스포츠카 운전사들이 즐겨 사용하던 손목시계가 대중화된다. 1935년 스위스 시계회사 IWC비행사를 위한 특수시계라는 슬로건으로 Mark XI이라는 시계를 출시해 큰 히트를 쳤다. 1927년 영국 여성 메르체데스 글라이츠가 롤렉스 시계를 팔에 차고 프랑스와 영국 사이의 해협을 수영해 최초로 건너면서 롤렉스 손목시계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게 됐다.

 

2) ‘유행산업디자인의 탄생

이렇게 불붙기 시작한 스피드 소비는 오늘날의 소비자들에게까지 영향력을 갖고 있는 두 개의 커다란 소비 트렌드를 만들었다. 그중 하나는유행이라는 개념이며, 두 번째는 예술가들의 새로운 아이디어를 수제품이 아닌 대량생산 상품에 접목하는산업디자인이다. 귀족들은 오랜 역사성에 뿌리를 둔 계급이기 때문에 소비 문화에서도 영구적인 미학을 추구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소비는 새로 만들어진 스피드 문화에 어울리는 유행을 추구했다. 귀족 계층은 자기 가문의 역사와 개인의 우월성을 중요시했기 때문에 자기만을 위해서 만든 수제 아이템을 선호했지만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전역 군인들은 유니폼을 입고 소속 부대에 대한 자부심으로 청춘을 보냈기 때문에 특정 브랜드가 마치 군대 유니폼처럼 더 큰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주기를 원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만의 미적 철학보다는 대중적인 유행을 좇는 것이 더 편했을 것이다.

 

프랑스어로분위기 Mode라고 하는데 오늘날까지분위기에 맞다를 뜻하는 A la mode는 프랑스어로유행 중이다를 뜻한다. Mode에 맞다고 해서 Modern, 모던하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과거를 지향하며 전통 유지를 원하는 귀족들보다 시대 분위기에 맞는모던한 소비자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음을 알려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소비행태는 1920년대가 되자 시대를 앞서가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새로운 중산층을 위한 상품 개발을 원하는 사업가들 사이에 많은 콜라보레이션이 일어나도록 만들었다. 바로 예술가의 아이디어를 대량생산 상품에 접목하는 산업 미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시대에 걸맞은모던한 상품들을 만들려면 시대를 앞서가는 미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음악가 스트라빈스키와 샤넬, 화가 몬드리안과 이브 생 로랑의 콜라보레이션처럼 앞선 세계를 꿰뚫어 보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안목을 빌려 가장모던한 상품을 내놓으려는 소비 흐름은 바로 이때 탄생한 셈이다. 즉 산업 미술이 주도하는 소비의 흐름은 1차 대전 이후에 생겨나 지금도 적용되는 주요 소비 트렌드가 됐다는 뜻이다. 하나의 상품 유행이 광범위한 소비자층을 형성하고 큰 권력을 형성하는 시대를 맞게 되면서 한 사람의 디자이너가 만든 상품이 수십만 개씩 팔려나갔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워크숍, 프랑스의 아르데코, 아르뉴보, 영국의 리버티 디자인 운동 등 대량생산 상품에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를 딴 디자인을 입혀 유행을 만드는 움직임이 유럽 곳곳에서 나타나 디자인 경쟁 시대가 막을 열었다.

 

3) 미국 소비모델의 세계화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세계의 소비자들은 영국, 프랑스 귀족들의 소비 방식을 기준으로 해서 자신들의 소비 형태를 만들어 나갔다. 예컨대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와 중국 상하이에 모여 살던 영국 귀족들의 생활 패턴인 티타임이나 양복 착용 등이 아시아의 대중에게까지 퍼져 나가는 식이었다. 하지만 전쟁에 뒤늦게 참전한 미국의 무시무시한 기술력으로 태어난 상품 소비를 경험하게 된 유럽인들은 전쟁을 통해 미국식으로 소비 패턴을 급속히 바꿨다.

 

이탈리아의 유명 감독 루치노 비스콘티의 명화아카토네를 보면 시칠리아의 가난한 어부 가족들의 애환을 볼 수 있다. 배가 파산해 더 이상 고기를 잡을 수 없어 집안이쫄딱망하자 장남은 어선에 취업을 하고 차남은 남의 배를 고치는 중노동을 해야 했다. 그가 노동에 찌들어 있을 때 말쑥한 양복을 입은 신사가 다가와 미제 담배럭키스트라이크한 갑을 건네며나와 함께 떠나면 매일 미제 담배를 피우게 해주겠다라고 말한다. 차남은 주저 없이 짐을 싸서 그 남자를 따라 시칠리아를 떠난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인들은 미군들을 통해 미제 깡통 통조림과 담배, 초콜릿 바, 축음기 등을 처음 접한 경우가 많았다. 미군들의 휴양지가 된 동네들을 중심으로 캐주얼 한 미국식 바(Bar)가 생기고 거기에서 남녀가 자유롭게 교제하는 문화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가기도 했다. 미국의 흑인 음악인 재즈와 레그타임, 미국식 춤도 함께 퍼져 나갔다. 1차 세계대전을 그린 전쟁 소설, 프랑스 작가 루이-페르디낭드 셀린의 <밤 끝으로의 여행>에는 주인공이 미국 자원봉사자 간호사와 사랑에 빠진 후, 신대륙의 건강미에 매력을 느껴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스토리가 소개된다. 그만큼 1차 세계대전 후 유럽 내의아메리칸 드림열풍은 대단했다. 전쟁 이후로 유럽의 많은 회사들이 생산 공정과 유통 구조를 미국식으로 바꿨고 소비자들도 귀족들의 까다롭고 아름다운 물건에 대한 소비보다 미국의 풍요롭고 편안한 소비를 선호하게 되는 등 큰 전환점을 맞았다.

 

4) 애국주의와 이념

수천 년 동안 유럽의 사회 질서 유지 중심축을 이뤄 온 귀족주의가 몰락하면서 유럽인들은 새로운 정체성을 찾아야만 했다. 거의 전 유럽의 남자들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나라를 위해 싸워본 경험을 갖게 되자 유럽인들은 신분 계급보다 국가를 통한 정체성을 찾게 됐다. 자국 기업 상품을 선호하고 자국 상품 소비를 통해 국가적 소속감을 느끼려는애국적 소비움직임이 나타나면서 ‘Made in’이 소비자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기 시작한 것도 1차 세계대전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끝없는 전쟁을 통해 한 나라를 상징하는 유니폼, 국기 등을 자주 접하게 돼국가 이미지또는국가 브랜드라는 개념이 일반인들의 인식 속에 침투하기도 했다. 1차 대전 전에는어떤 계층이 쓰는 물건이냐가 상품을 선택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었으며 상품의 국적과 상관 없이 귀족층이 사용하는 물건들은 거의 비슷했다. 그에 비해 귀족 계급이 몰락하고 나라 간의 라이벌 의식과 정체성이 분명해진 1차 세계대전 이후의 소비자들은어느 나라 물건이냐가 그 물건의 품질과 특성에 대한 가장 중요한 척도로 여겨져 국가 브랜드 경쟁 시대가 막을 열었다.

  

 

결론 및 시사점

우리나라에서 여러 시즌에 걸쳐 방영된 미국 드라마다운턴 에비’.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몰락하는 영국의 한 귀족 가문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다. 아직도 귀족의 전통과 영광을 지켜낼 수 있을 것으로 믿는 전쟁 이전 세대와 오히려 귀족의 답답한 삶을 짐으로 여기며 평민들과 어울려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하는 전쟁 이후 세대의 갈등이 잘 나타나 있다.

 

지금 1차 세계대전 이후에 대한 분석을 하며, 어떤 국가와 장군은 뭘 잘못했고, 그 전쟁의 틈바구니에서 어떤 기업은 기회를 잡았다고 이런저런 설명을 붙이는 건 사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미국 속담에머리 뒤에 달린 눈은 항상 시력이 2.0/2.0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만큼 지나간 일에 대해 말하기는 쉽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전쟁, 그리고 이어진 또 다른 큰 전쟁(2차 세계대전)에서 살아남은 사람들과 조직들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는 있다.

 

1차 세계대전에 대해 그 이전 시대 사람들은 주로 정치학, 특히국가 간의 패권다툼이라는 패러다임을 통해 세상을 보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그로 인해 1차 세계대전이 각 나라의 권력 지형을 어떻게 바꿀지에 관한 많은 논의가 있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이 남긴 가장 중요한 세상의 변화인사람들이 세상 보는 눈을 어떻게 바꾸게 될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생각해보지 못한 이들이 많았다. 이런 눈치를 채지 못한 왕실, 귀족 가문, 기업들은 대부분 전쟁으로 몰락했다.

 

러시아의 사례를 생각해보자. 중세까지 유럽인들이 가졌던 전쟁에 대한 낭만을 송두리째 파괴하자 기사도에 대한 신봉과 경의가 동시에 무너졌다. 특히 러시아 평민들이 세계대전 참전으로 총의 위력을 경험하자 힘이 빠진 기사 계급을 향해 총칼을 겨누고 황실조차 쉽사리 붕괴됐다. 그 여파로 전 세계를 냉전의 회오리로 몰아넣은 공산 혁명이 일어났다.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이처럼 전 세계가 관여된 대형 사건들은 전 지구적으로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근본부터 바꾸는 힘을 갖는다. 1차 세계대전 직전, 제국주의에 기반한 경제·사회 시스템으로 역사상 가장 엄청난 부와 이에 기반한 귀족들의환상적인 라이프 스타일이 탄생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다운턴 에비의 캐릭터들처럼 자기들의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서 프랑스 철학자 알랑 바뒤는 “20세기는 1918년에 시작한다라고 이야기했다.

 

올해는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다. 100년 전과 마찬가지로 20세기는 공산주의에 대한 이념적 대안으로 탄생한 국제 자유시장이 지금까지의 역사상 유래가 없는 부와 성취를 기록하고 있다. 영원 불멸할 것 같은 글로벌 기업이 탄생했고 수많은 국가들은 빈곤에서 탈출했다. 잘나가는 기업일수록, 돈이 많은 최고 부유층일수록 현재가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어떤 전 세계적 사건과 충격이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서 어느 누구도 그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아마도 1차 세계대전이 여전히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다가오는 변화의 특성과 그 계기가 되는 엄청난 사건은 예측하기 어렵고 결과 또한 상상하기 어렵다는 점일 것이다. ‘성공에 대한 도취’ ‘지금의 성공이 영원할 것이라는 믿음’. 만약 이런 관념에 사로잡힌 기업이 있다면 바로 지금 당장 스스로를 돌아봐야 할 때다.

 

조승연 문화전략가 scho@gurupartners.kr

필자는 고교 시절 미국전국라틴어경시대회에서 우수상(Magna Cum Laude)을 받았으며 미국 고등학생 문예지에 시와 단편소설이 실리기도 했다. 뉴욕대 스턴 경영대학원(NYU Stern School)을 졸업한 뒤 프랑스 최고 미술사 학교인 에콜 드 루브르에서 2년간 수학했다. 영국계 컨설팅회사 UnfroZenMind에서 외부 상임이사를 지냈으며 한국무역협회 등 국제 마케팅 리서치에 참여했다. 현재 오리진보카 대표로 <피리부는 마케터> <이야기 인문학> 등 다수의 저서를 출간했다.

 

  • 조승연 | -(현)오리진보카 대표
    -(현)문화전략가
    -UnfroZenMind 외부 상임이사
    -국제 마케팅 리서치 참여
    -<피리부는 마케터>, <이야기 인문학>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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