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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 사진작가 배병우

진정한 프로는 창조를 우연에 맡기지 않는다

신동엽 | 140호 (2013년 11월 Issue 1)

 

 

편집자주

모두가창조를 말하는 시대지만 정작 정확한 개념 정의도, 진정한 의미파악도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습니다. ‘창조성에 대해 10여 년 전부터 연구해 온 신동엽 연세대 교수가 여러 학자들과 함께 진행한 각종 인터뷰와 연구결과 등을 토대로 ‘21세기 시대정신, ‘창조성의 원천을 찾아서를 연재합니다.

 

창조에는 다양한 정답이 있다!

대표적인창조 집단인 세계적 예술가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창조성의 원천과 발현 과정을 사회과학적으로 설명하는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필자와 동료 연구자들이 깨달은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바로 창조성의 원천과 과정, 그 구현 방법은 예술가마다 천차만별이라는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이나 분야에 공통으로 적용될 수 있는 창조성의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각자 다른 원천에서 창조성의 영감을 얻으며 또 각기 다른 과정과 방법으로 창조성을 구현하는 것이 진정한 창조성의 원리라는 것이 지난 3년간 필자와 동료들이 창조적 예술가들에 대한 연구를 통해 얻어낸 결과다. 자연과학이나 공학과 달리 사회과학에는 유일한 정답이란 없다. 무수한 서로 다른 답들이 모두 정답일 수 있는 것이 사회현상이다. 그리고 특정 사회 조건에서 높은 성과를 창출한 대안도 다른 환경에 이식하면 전혀 긍정적 기여를 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기업 경영도 마찬가지다. 즉 경영의사결정의 본질은 수학문제를 푸는 것처럼 정답과 오답을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정답들 중 주어진 조건과 환경하에서 자신에게 상대적으로 더 적합한 대안을 선택하는 비교대안적 행위다.

 

따라서 최근 쏟아져 나오는 창조성의 베스트 프랙티스에 관한 도식화되고 단순화된 정리들은 오히려 독자들을 오도할 위험이 크다. 창조적으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방법을 찾고, 창조성의 원천에는 서로 다른 다양한 대안들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각 상황에서 독자 각자에게 상대적으로 가장 적합한 창조성 모델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창조성의 원천과 작동 과정에 대한 다양한 대안들을 최대한 많이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런 측면에서 필자와 동료 학자들이 현재 집필하고 있는 책에서는 창조성의 원리에 대한 필자들만의 독창적 모델을 정답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 예술가들과의 심층 면접과 연구를 통해 이들이 창조적 예술활동을 해온 각기 다른 다양한 모델들을 체계적으로 소개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 첫 번째로 소나무 시리즈로 유명한 세계적 사진작가 배병우의 예술창조성의 원천과 발현 과정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들이 지난 3년간 20여 명의 세계적 예술가들을 만나본 결과, 어떤 예술가는 바깥으로 눈을 돌려 끊임없이 새로운 분야나 영역들을 탐구하면서 창조적 예술을 만들어 왔고, 다른 예술가들은 한군데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자신의 기존 예술적 성취를 부정하고 파괴하는 데서 창조성의 실마리를 찾았다. 즉 각기 다른 방법으로 창조성에 접근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 배병우의 방법은 첨단 조류나 유행을 따라가기보다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면을 되돌아보며 주변의 시각과 상관없이 꿋꿋이 자신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즉 배병우 작가의 40년 가까운 창작활동을 뒤돌아보면 안으로 안으로 끝없이 파고들며 마치 선()과 갖은 삶을 살다 보니 어느 새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창작의 대상과 자신이 하나가 되면서 그 누구도 만나보지 못한 대상의 깊은 본질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 같은 이해를 바탕으로 창조적인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간으로서 배병우라는 개인은 그의 창작 대상인 소나무와 바위, 오름 등과 무척 닮아 있을 뿐 아니라 그의 작품에 표현된 대상들은 그 누구도 도달해본 적이 없는 깊은 내면의 핵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 배병우의 예술창조성의 세계를 알아보자.

 

 

배병우는 여수 출신으로 홍익대 미술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했으나 사진에 매혹돼 독학으로 사진을 공부했다. 바닷가에서 자란 그는 연출 사진이 대세인 현대 세계 사진계의 유행과는 정반대로 나무, 바다, , 바위, 오름, 계곡, 풀과 꽃, 고궁과 고찰, 바람 등 우리나라의 자연을 주 소재로 자기만의 독특한 미학을 꾸준히 추구해왔다. 30여 년간의 무명 시절 끝에 소나무를 대표로 하는 그의 자연 사진은 1990년대 중반경부터 세계적 극찬을 받기 시작해 현재는 세계 최고의 사진작가 중 한 명으로 세계 사진예술 평단에서 절대적 존경을 받고 있다. 세계 사진예술사 200년을 통틀어 가장 대표적 사진예술 이미지 200선 중 하나로 그의 소나무 시리즈가 뽑히기도 했고, 2010년에는 세계 최고의 예술축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올해의 이미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사진 1)

 

내면에 대한 깊은 성찰로부터 자신만의 독창성을 찾아라: 일생의 주제 소나무와의 운명적 만남

 

배병우가 사진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교 1학년 때다. 어릴 적엔 그림을 그렸고 홍익대 미대에서는 디자인을 전공했다. 아버지가 활어 수출선에 부탁해 구해준사쿠라’ ‘붐도로’ ‘홀바인상표의 크레용, 물감과 붓을 썼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수 일대에서 그림 잘 그리는 소위선수로 통했다.

 

“전남 여수에서 자란 나는 어릴 적부터 동네 형들과 남해 섬들 사이를 조그만 배로 노 저으며 돌아다녔다. 크레용과 수채화 물감을 갖게 됐던 초등학교 시절엔 화구와 함께 섬과 섬 사이를 누볐다. 어린 시절에는 카메라가 없어 바다를 붓으로 그린 셈이니 나의 바다 사진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홍익대 응용미술학과 1학년 시절, 어릴 적부터 배병우와 함께 어울리고 그림 그리던 동네 형님 김병섭이난 사진 그만둘 터이니 네가 사진 해라며 사진을 권했다. 배병우가 사진과 맞겠다는 판단이었다. 그 선배로부터 카메라, 확대기, 노출계를 비롯, 암실까지 물려받았다.

 

고향이 바다인 작가에게 바다를 비롯한 바위와 해송, 섬 등 자연이 초기 사진의 소재가 되는 것은 당연했고 어떻게 보면 운명적이었다. 즉 배병우의 일생을 관통해온 주제인 바다와 바위, , 소나무 등은 그의 내면 DNA에 녹아 있는 그의 일부였다. 그가 기억하는 사진작가로서 첫 여행은 1970년 봄의 부산과 통영이다. 뒤이어 그는 고향인 여수, 충무 앞바다, 완도, 진도 앞바다, 흑산도와 홍도, 울릉도, 마라도 등을 찍었다.

 

디자인 전공이던 배병우는 사진을 독학했다. 처음에는 에드워드 스타이켄의 책을 봤고, 뷰먼트 뉴홀의 <사진의 역사>, 피터 폴록의 <그림으로 본 사진사> 등을 봤다. 사진 역사를 공부하며 배병우가 가장 좋아한 작가는 에드워드 웨스턴이었다. 웨스턴이 주로 찍은 것이 바로 바다였다. 소재뿐만 아니라 예술관도 배병우의 생각과 통했다. 이와 함께 다양한 시각 미디어들을 폭넓게 아울렀던 헝가리 태생의 아티스트인 라슬로 모호이너지의 예술관에서도 큰 영향을 받았다. 배병우는 그에 대한 연구인모호이너지의 조형 이론이 현대 시각디자인에 미친 영향; 사진적 표현을 중심으로(1977)”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한참 바다를 찍으며 예술적 실험을 하던 배병우는 서서히 책 속의 스승들에게서 벗어나 독자적인 길을 가야 한다는 점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은사 이대원 선생의 지적도 한몫했다. 지금까지 찍어 온 바다는 세계 어느 곳에 가나 비슷하니 다른 이들과 차별화되는 배병우 자신만의 소재와 언어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34세 때 나는 주로 바다를 찍고 있었다. 마라도 바다 끝에서 작업을 하고 있었는데 저 망망대해를 앞에 놓고 갑자기 고민에 빠졌다. 그러면 우리의 풍경은 뭘까. 그때부터 약 2년간 가장 한국적인 표현이 뭔지를 찾아 다녔다. 1984년 낙산사 앞에서 사진을 찍다가 소나무를 보고는, 저것이다. 저게 한국이구나하고 순간적으로 느꼈다. 고정된 주제로서 무엇을 찍을까를 고민하던 찰나, 낙산사 앞에서 그렇게 만난 소나무는 내게 운명처럼 다가왔다. 1984년 무렵, 동해 양양 해변을 따라 내려오면서 마치 심마니가 산삼을 발견한 것처럼 소나무를 봤다. 그 후 한반도에서 여러 소나무 숲과 밭을 전전했고 설악 계곡에 흐르는 물을 마시며 그윽한 솔 향기를 음미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소나무가 한반도 등뼈인 태백산맥의 피와 살이라는 인식에 도달했다.”

 

그가 소나무를 소재로 삼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소나무는 바다만큼이나 배병우에게 친숙한 소재였다. 배병우는 자신이 바다와 섬, 소나무라는 환경 안에서 성장한 셈이라고 했다. 그는 어린 시절 여수 친구네 집 앞에 있는 커다란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소나무 그늘에서 놀다가 근처 언덕에 올라 바다를 바라봤다. 바다와 섬, 소나무는 그의 일생을 꿰뚫는 주제가 됐다. 소나무는 배병우의 내면에 이미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는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소나무라는 독창적 예술적 소재를 재발견한 것이다.

 

또 배병우에 따르면 소나무는 자신뿐 아니라 우리 민족의 전통적 미학 속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30대 무렵부터 배병우는 우리 전통 회화에 심취해 이를 집중적으로 연구해왔다. 그는 수시로 전통 회화 소장과 전시, 연구로 유명한 간송미술관을 찾았다. 간송미술관은 봄과 가을, 일년에 두 차례만 전시회를 개최하는데 배병우는 십여 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간송 전시를 관람할 만큼 한국의 전통 회화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대가들의 소나무 그림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에 따르면 우리 전통 풍경화에 소나무가 없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단원 김홍도나 겸재 정선의 위대함을 느끼며 옛 그림들에 흠뻑 취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국미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지다 소나무에서 그 답을 찾았다.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들을 보면 1백 점 중 99점에는 소나무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그만큼 우리나라에 소나무가 많다는 이야기다. 글자 그대로 나무()’자에 변치 않을()’자가 소나무(, )이니, 우리 민족과도 닮았다. 실제로 우리 조상들은 소나무로 지은 집에서 태어나 소나무로 불을 지펴 밥을 해 먹고, 소나무로 만들어진 관 속에 들어가 묻혔으며, 무덤 옆에 소나무를 심지 않았던가. 실로 한국인의 삶, 요람에서 무덤까지 깊게 뿌리내린 나무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소나무를 단지 생물학적으로 찍을 게 아니라 예술적 의미를 부여해 소나무에 힘을 주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스쳤다.”

 

배병우는 20대 초에 자신의 미적 영감을 표현할 매체로서 운명적으로 사진을 만났으나 그가 사진을 시작하고 수련하던 당시, 한국에서 사진은 예술의 영역으로 확실히 인정받지 못하던 형편이었다. 또한 수입된 테크놀로지로서의 사진을 다루는 입장으로서 배병우는 서양의 작가들과는 다른 동양의, 우리나라만의, 그리고 자기 자신만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작품 활동을 해야 한다는 자의식을 갖게 됐다. 본격적 순수 예술 매체로서 사진이 인정받도록 하는 것, 그리고 예술가로서 자기 고유의 소재와 언어를 개발하는 것이 배병우라는 사진작가가 자신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뛰어넘어야 할 허들이었다.

 

80년대 중반부터 소나무 사진을 찍어 온 배병우는 1993년 예술의 전당에서 드디어소나무개인전을 갖는다. 자신만의 독창적 소재와 언어를 찾도록 채찍질했던 은사 이대원 선생은배병우 개인전 최고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각고의 노력과 헌신, 오랜 무명시절 끝에 드디어 작품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며 세간의 관심을 받게 된 데에 대해서 배병우는 놀라우리만큼 초연했다.

 

 

그는 단지 세상의 관심사와 자신의 작품 세계가 일치하는 순간이 온 것뿐이라고 말한다. 21세기의 가장 중요한 화두 중 하나가 자연과 환경이기 때문에 자연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가 바뀌었고 그 바람에 한국적인 소나무 풍경을 담은 자신의 작품이 주목을 받게 됐다는 것이다. 자신은 그저 지난 20, 30년 동안 찍고 싶은 사진을 꾸준히 찍어왔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묵묵히 자신만의 작품활동을 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시대를 따라간 것이 아니라 자신은 그 자리에 항상 있었고 시대가 자신을 찾아온 것이 배병우의 생각이다. (사진 2, 3)

 

30여 년간 자기만의 예술을 묵묵히 해오던 배병우는 소나무 시리즈와 함께 단숨에 세계 사진예술계에서 정상급의 위치에 올랐다. 세계적 컬렉터들이 앞 다투어 그의 작품을 구입했고 유럽에서 출간된 작품집들이 모두 매진됐다. 해외 주요 갤러리에서 가장 초청하고 싶어 하는 우리나라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더구나 그의 소나무 시리즈는 2010년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미술관이 발표한 200년 가까운 세계 사진예술사를 통틀어 역대 가장 대표적인 200대 사진 이미지 중 하나로 선정됐다. 배병우의 세계적 위상이 또 한 번 증명된 것은 2010년에 세계 최고의 클래식음악축제인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대표 이미지로 선정된 일이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대표 이미지는 항상 당대 세계 최고 화가들의 작품으로 장식됐다. 가장 한국적인 미를 찾기 위해 30년간 작업해온 그의 한국 소나무 숲 사진이 세계 최고 예술축제의 홈페이지 전면을 가득 채웠으며 축제 기간 동안 찰츠부르크 시내 곳곳을 장식했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만의 예술을 추구해온 배병우의 우직한 예술관이 그를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개막공연을 축제 조직위원장 바로 옆 자리에서 관람하는 세계적 위상의 예술가로 인정받게 만든 것이다.

 

 

대상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있어야 그 본질을 볼 수 있다: 창작 대상과 하나가 돼버린 작가, 미스터 소나무 배병우

소나무라는 일생일대의 창작 대상을 만난 배병우는 소나무의 모든 면을 이해하기 위해 맹렬히 몰두했다. 전국의 소나무 숲을 다 돌아다녔다. 1984∼1985년경 소나무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기 시작한 후, 처음 일 년 동안에만 10만㎞ 정도를 답사했다. 작가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을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는 소나무가 어디에 있는지 찾기 위해서였다. 전문 서적, 신문, 잡지 등의 모든 소나무 관련 기사를 스크랩했고 조선시대에 소나무를 그린 회화 작품을 모두 찾아봤다. 끝없는 발로 뛰는 답사, 글로 보는 공부, 그리고 엄청난 작업량은 그에게 한국적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깨달음과빛으로 그린 수묵화라는 배병우만의 고유의 사진 언어를 허락했다.

 

“어느 순간 소나무의 선들에서 절대적인 정신성과 영혼의 모습을 보았다. 그들의 얽히고설킨 형상에서 그것들이 한국의 감성을 상징하는 선임을 깨달았다. 그러한 정신과 영혼의 선이 확장해 제주 바다의 수평선으로, 제주 오름의 곡선으로, 그리고 여수 앞바다 향일암의 수직선으로 나타났다. 크지도, 작지도, 요란하지도, 밋밋하지도 않은 중용적 선이랄까, 우리 산하의 선들을 통해서 한국적인 독특한 미감을 표현하고 싶었다.”

 

자신만의 고유한 예술을 구현할 대상으로 소나무를 선정한 이래 배병우는 소나무를 비롯한 나무와 숲에 관한 자료는 분야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섭렵했으며 우리나라 방방곡곡은 물론 전세계 어디를 여행하거나 일단 나무와 숲부터 찾아 깊이 있게 관찰하고 렌즈에 담았다. 아프리카를 여행했을 때는 다른 일행들은 사파리에만 관심을 가질 때 배병우가 새벽같이 일어나 아프리카 숲과 나무를 보러 가자고 가이드를 깨워 다들 놀라기도 했다. 또 어느 나라에서 어떤 사진을 찍든 그의 작품에는 어김없이 나무가 등장한다. 스페인 정부의 위촉을 받아 작업한 알함브라궁전 시리즈를 보면 아무런 건물도 없이 달과 소나무 끝만을 밤하늘을 배경으로 찍은 작품이 있는데 궁전 건물이 전혀 없어도 누구나 알함브라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다. (사진 4) 그러다 보니 어느 새 그는 여느 식물학자 못지 않은 나무 전문가가 됐을 뿐 아니라 진심으로 나무를 사랑하게 됐다. 그는 전 세계 웬만한 나무는 그 수종과 생물학적인 배경, 그리고 지역별 변형 등에 대해 해박하다. 무엇보다 그는 나무를 진정으로 좋아하고 아낀다.

 

배병우는 어떤 대상의 본질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창조적으로 의미를 부여하려면 그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심과 애정, 몰입이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그는 소나무를 진심으로 사랑한다. 낙산사에 화재가 발생했을 때 고찰이 타는 것 못지 않게 울창한 소나무 숲이 모두 불타버린 것에 가슴 아파 실제로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그는 나무와 자연을 해치는 난개발에 대해 극도로 비판적이다. 서울시가 광화문 광장을 개발할 때 가로수와 중앙분리대 역할을 하던 아름드리 은행나무를 모두 없앤 데 대해 문제를 제기했으며 해송 숲으로 뒤덮인 서해안의 아름다운 섬 굴업도를 개발하는 데 반대해 굴업도 시리즈 사진을 찍어 환경단체에 기부해서 환경보호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가 특히 싫어하는 것은 연말연시에 흔히 볼 수 있는 가로수들에 작은 전구를 촘촘히 박은 전선으로 나무들을 장식하는 관행인데 이는 나무에 전기고문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흥분한다.

 

나무에 대한 진정성 있는 관심과 애정은 배병우에게 다른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는 나무 내면의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능하게 했다. 그는 어떤 나무를 처음 보더라도 나이와 건강 상태 등을 거의 정확하게 알 수 있다고 한다. 그가 독일의 한 도시를 방문했을 때 현지인이 숲에서 좀 떨어져 홀로 서 있는 오랜 고송이 건강이 안 좋은 것 같다고 원인이 뭐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배병우는나무가 외로워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예전에는 그 나무가 있던 곳까지가 숲이어서 친구 나무들이 옆에 있어 외롭지 않았으나 도시개발로 숲이 뒤로 밀려 다 사라지고 그 나무만 홀로 남아 친구가 없어 외로워서 아프다는 것이다. 독일 현지인들이 예술가의 독특한 통찰력에 큰 감동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배병우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나무장사 배 선생입니다라고 말하곤 한다. 자신은 나무를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면에서 다른 나무장사들과 같으나 그들과 달리 나무를 베지 않으니 나무를 더 사랑하는 나무장사라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는다.

 

 

특히 소나무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배병우에 따르면 소나무는 전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 분포하는 흔한 나무이지만 그 외형적 기품이나 향기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품격이 있다고 한다. 그는 한자로 소나무 송()자가 나무()의 공작(), 즉 귀족이라는 뜻이라고 독특하게 해석한다. 바로 이런 흔하지만 기품 있는 자태 때문에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우리 조상들의 왕릉에는 예외 없이 소나무가 무덤 뒤를 지키고 있으며 왕들의 영혼이 소나무를 징검다리 삼아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같은 소나무라도 지역마다 기후 조건이나 토양, 지형 등에 따라 그 모양이 천차만별이라 마치 인종의 다양성을 보는 것 같고, 따라서 우리나라 소나무에는 우리나라 사람과 자연을 닮은 우리만의 독특한 미학이 배태돼 있다고 믿는다.

 

소나무에 대한 이런 진정한 관심과 애정, 몰입에 기반한 깊은 본질적 이해는 세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만이 가지는 독창성의 뿌리가 됐다. 배병우의 소나무 사진은 그를 흉내낸 무수한 소나무 사진들과 확연히 구분된다. 배병우표 소나무 사진은 마치 소나무들이 깊은 고뇌와 사색에 잠긴 듯하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대화하는 것 같기도 하며, 꿈틀거리며 춤추는 것 같기도 하다. 그의 소나무 사진은 대상에 대한 이런 진정한 애정에 기반한 심층적이고 본질적 이해로부터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창작의 대상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본질을 이해하고 공감하기 위해 오랜 세월 각고의 노력을 하다 보니 배병우는 어느 새 자신의 창작 대상들을 닮게 됐고, 이제는 작가와 대상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게 됐다. 배병우의 예술을 세계 무대에 소개한 일본 최고의 큐레이터지바 시게오는 배병우에게내가 너를 일생 동안 연구하고 싶다며 그에게미스터 소나무(Mr. 마쓰)’라는 별명을 붙여줬다. 실제로 배병우를 직접 만나 보면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은 뿌리깊은 강인함과 오랜 세월의 시험을 이겨낸 깊이와 넉넉함, 그리고 고고한 아름다움이 묘하게 결합된 우리 소나무를 그대로 빼다 닮았다. 또 그는 제주 오름의 완만하면서도 절제된 넉넉함과 영겁의 세월을 끊임없이 왔다가는 파도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리를 지켜온 바닷가 바위의 확고함이 그의 인품의 핵심이라는 것이 그를 아는 사람들의 평가다. 즉 그는 오름을 닮았고 바위를 닮았다. 배병우는 바위와 오름과 하나가 된 것이다. 그의 바위 사진들을 보면 어느 새 작품 뒤로 배병우의 바위 같은 모습이 떠오름을 느낄 수 있다. (사진 5, 6) 그의 바위 사진들은 배병우와 마찬가지로 바닷가에서 태어나 자란 청마 유치환의 절창 <바위>에서 묘사한 바위의 무념무상의 경지가 그대로 묻어난다.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년(憶年) 비정의 함묵(緘默)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 유치환바위

 

작가와 창작 대상이 완전히 하나가 될 때에만 표현될 수 있는 초절의 예술창조성에 대해 배병우 작품집 <빛으로 그린 그림>의 서문에서 박영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그의 풍경 이미지를 보는 주체는 작가와 심정적인 공감대를 갖게 돼 마치 작가는 동양적 산수화가 시도했던 합일의 경지를 꾀하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관람자로 하여금 작가와의 심정적 공감대를 이루며 이미지 안에서 동일시가 가능해지는 그의 풍경 사진은 관객을 동양적 합일의 경지로 이끈다. 이제 그의 사진은 역사와 문화가 다른 사람들에게 이미지를 통하여 문명에 가려진 자연의 초월적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배병우 특유의 소통 방식이며, 자연 속에 내재된 엄숙하고 근원적인 생명감을 통해 물질과 속도를 좇는 현대인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예술적 치유의 방식인 것이다.”

 

묵묵히 자신만의 길을 가면 언젠가 시대가 자신을 찾아온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자기 확신

배병우의 작품 활동이 처음부터 평단이나 컬렉터들의 인정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가 사진을 시작했을 당시 국내 사진계는 서양의 흉내를 낸 연출 사진 일색이었다. 자연 풍경만 찍는 배병우에게 사람들은 대체 왜 그런 작업을 하느냐고 했다. 해외의 반응도 냉담했다. 지금 이런 시대에 무슨 소나무를 찍냐는 것이었다.

 

1988년에 독일에서 전시를 했는데 그곳 사진작가협회장도 나를 무시했다. 너무도 힘이 빠지고 고민이 돼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한국에 다시 돌아와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 ‘소나무에 내 일생을 걸겠으니 지켜봐 달라. 내가 소나무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작업해 나가는지.”

 

세상의 싸늘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배병우가 자신의 사진 언어를 꾸준히 벼릴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확신, 그리고 비록 소수지만 확고했던 주위 지인들의 지지 덕분이었다. 바다와 섬, 바위, 소나무 등은 가장 배병우다운 소재였다. 그가 나고 자란 환경 그 자체였고 평생을 바라본 대상들이었다. 또 사진은 대상의 본질을 포착해 새로운 차원의 인식을 이끌어내는 매체라는 확고한 예술관, 한국의 미에 대한 천착, 인문학적 바탕 등이 아마 배병우를 흔들리지 않게 한 힘이었을 것이다. 그는 중국 명나라 말기 화가이자 문인인 동기창의 말을 인용하기 좋아한다. “동기창은 예술가는 타고난다고 했는데, 또 한편으로 누구나 만 권의 책을 읽고 만리 길을 여행하면 예술가가 될 수도 있다고 했다.” 또 그의 사진이 전혀 주목받지 못하던 시절, 그의 친구들이정말 중요한 일이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해보라고 격려했다. 은사 이대원 선생의 격려 역시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해외에서의 경험은자신만의 것에 대해 한 우물을 파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히는 계기가 된다. 30대 시절의 수많은 여행경험, 90년대 말 유럽에서의 전시나 해외활동을 통해 그는 한국적인 이미지를 담아내는 것이 사진작가로서 자신의 소명이자 정체성임을 확신하게 된다. “내가 내 땅에서 내 것으로 하지 않는 한 세계 무대에서는 언제까지나 3류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느꼈다. 그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30대 중반, 새로운 시간과 환경을 만들고 싶은 마음에 독일로 건너갔다. 빌레펠트대 사진과의 예거 교수를 만났다. 그를 통해 독일의 사진작가와 화가를 소개받고 미술관을 순례했다. 국제 수준에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치열하게 새롭게 시작해야 함을 배웠다.”

 

“서른 살부터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 그러면서 내린 결론은 이랬다. ‘자기의 길을 가야지 남 따라가면 자멸이다.’ 기술적인 것은 빌려와도 상관없다. 그러나 그 본질은 자신이 딛고 있는 땅에 기본을 두는 정체성이 중요하다. 나는 다행히 이 길밖에 다른 길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느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 미술계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가 자신만의 틀이 없다는 점이라고 말한다. 기술적으로 사진을 잘 찍는 것보다 훨씬 중요한 문제는무엇을 찍을 것인가, 무엇을 담을 것인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만의 색깔과 생각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즉 본질이 있어야 표현도 따라온다는 것이 배병우의 신념이다. 그는 어느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한국 작가한테 제일 부족한 점 중 하나는 줏대 없이 자꾸 유행을 따라간다는 것이다. 중국 작품을 보면나는 중국인이다라는 것이 단박에 드러나는데 우리는나는 한국인이다라고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나라 작가가 만든 작품은 어느 나라 것인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나라 미술의 최대 걸림돌이다. 결국 자기 틀이 만들어져 있지 않다는 뜻이다. 사진을 포함한 현대미술 각 분야에도 많은 부침이 있는데 연예계와 똑같은 원리가 적용된다고 생각한다. 못생겨도 연기 잘하면 오래가듯이 당장 눈에 안 띄어도 자기만의 세계가 있으면 오래 가는 것이다.”

 

자신만의 주제를 고유의 사진 언어로 풀어내는 데 집중해 온 배병우는 그 시대에 유행하는 조류를 자꾸 모방하려는 예술하는 후배들에게도 이렇게 말한다.

 

“사람은 같은 일을 계속하다 보면 한 번쯤은 자신의 시대가 온다. 유행을 따르면 자신의 시대가 오기는커녕 계속 그 뒤를 좇아가게 된다.”

 

즉 예술가가 시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만의 독창적 작업을 계속하다 보면 반대로 시대가 예술가를 찾아와서 문을 두드린다는 얘기다.

 

이런 면에서 배병우는 자신의 소나무와 자연 사진들이 세계적 명성을 얻은 데는 1990년대에 본격화된 환경과 자연을 중시하는 범세계적 생태주의적 시대정신의 확산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앞으로 또다시 시대정신이 변하면 그의 사진에 대한 관심이 지금 보다 낮아질 수도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인정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술에는 흐름이 있다. 소나무 사진이 얼마나 더 사랑받을지 나도 모른다. 환경과 생태를 중시하는 시대상황 때문에 잠깐 주목을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저 꾸준히 자기 예술을 하고 있으면 어느 단계에 와서, 그 시대가 왔을 때 빛을 보게 된다. 그리고 시대가 지나면 사라지는 것이다. 흐름이 끝나면 사라져 줘야 한다. 하지만 연연하지는 않는다. 평생 작업을 다 마치면, 죽은 후 내 작업은 언젠가 알려질 것이다.”

 

지금은 전 세계 예술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 거장이지만 뒤돌아보면 그가 걸어온 길은 그야말로 길고 험난했다. 20대에 사진을 접하고 본격적인 사진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배병우는 50대가 다 돼서야 비로소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 해외 경매에서 세계적 가수 엘튼 존이 그의 작품을 구입하고 비틀즈의 전 멤버 폴 매카트니가 그의 팬이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세간의 화제가 된다. 찢어지게 가난한 30년의 노력 끝에 50대에 들어 비로소 작품을 팔아 경제적 안정을 꾀할 수 있는 형편이 된다.

 

“사진 찍고, 그림 그리고,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다 가난했으니까. 가난에 대해서는 그러려니 하고 여길 수 있었어요. 겁날 것도 없었고. 그러니까 하고 싶은 사진을 계속 찍었던 거죠.”

 

‘가난을 그러려니여겼다는 그이지만 배병우는 자신이 동료 예술가들에 비해 일찍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제도적 혜택도 많이 누린 축에 속한다고 고백한다. 젊은 시절 배병우는 후배 사진작가 김중만과 함께 4년 정도 충무로에서 사진 스튜디오를 했다. 이때 상업 사진 활동을 하면서 기술적인 부분을 많이 배웠다. 그 당시는 한국 상업 사진의 초창기 시절이라 번듯한 스튜디오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다. 일본 등지에서 조명이나 스트로브 등을 수입해다가 직접 연구하면서 사진을 익혔다. 배병우는 누군가의 조수로 사진 일을 시작했더라면 독자적인 길을 걸어오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고 회상한다. 사진계에 체계화된 기반이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 연구해 깨쳐야 했다. 더디 배웠지만 그 당시의 경험이 큰 자산이 됐다.

 

탁월한 창조적 역량을 가진 인재들이 모두 훌륭한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오랜 시간 꾸준한 노력을 기울여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을 충분한 자양분이 보장돼야 탁월한 재능이 비로소 빛을 발할 수 있다. 배병우는 재능 있는 예술가들이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예술 분야로의 투자가 활발히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소망한다. 특히 해외 기업들처럼 한국의 기업들도 예술품 구매나 투자에 좀 더 적극적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신도 지난 30여 년간 무명 후배 작가들의 작품을 꾸준히 구매함으로써 그들을 격려한다. 그가 후배들 작품을 구매함으로써 그들을 지지해주는 것은미술계의 신사였던 은사 이대원 선생에게 배운 것이다. 배병우 본인의 생활이 안정된 것은 불과 10여 년 안팎의 일이지만 지난 30년간 꾸준히 예술계의 동료와 후배들을 챙겨왔다. 그리고 후배들에게도 꾸준히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기 위해서 명민하게 노력할 것을 주문한다.

 

 

소나무를 넘어 바람을 찍다: 진정한 예술가는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예술창조성의 정점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한다

국내는 물론 특히 유럽과 일본에서의 폭발적 인기를 고려할 때 다양한 소나무 사진들만 계속 찍어도 배병우의 명성과 부는 앞으로도 보장되겠지만 그는 소나무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창작의 대상을 찾아 끊임없이 탐색한다. 물론 소나무 사진으로 가장 잘 알려졌지만 그동안에도 그는 다양한 대상의 본질을 프레임 안에 포착하는 작업을 계속 해왔다. 바다와 섬은 물론이고 종묘나 창덕궁 등의 한국 전통 건축, 이국의 풍경들, 알함브라궁전, 제주 오름의 여성적인 선 등을 찍었다.

 

그는 진정한 창조적 예술에는 정점이나 전성기란 없으며 예술가의 전체 일생을 관통해서 끊임없이 창조가 시도돼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면에서 한국 사진예술을 세계에 알린 배병우의 지금까지의 성취도 대단하지만 앞으로의 행보가 더욱 기대된다. 배병우는 사진은, 그리고 예술은 인생과 인격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기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고 믿는다. 그는 그렇기에 예술가는 50세부터 더 깊어진다고 말한다. 연습량이 축적되고 인생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제가 이제 60세인데 50세 이전의 예술가들은 어리다고 봅니다. 인간이, 삶이 뭔지 잘 모르는 거죠. 삶의 매트릭스를 젊어서는 알 수가 없어요. 50세가 넘어야 알게 됩니다.”

 

또한 거장과 신예들 간의 교류를 통해 우리나라의 예술창조성을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기획에서 배병우는 젊은 미디어아트그룹인과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지난번 카셀도쿠멘타에 프랑스 조각가 루이즈 부르주아가 나왔잖아. 그분이 지금 아흔 살이 넘었어(루이즈 부르주아는 이 대담이 진행된 시점에서는 생존해 있었다-편집자 주). 미국 화가 조지아 오키프는 아흔아홉 살에 사망했는데 일흔 살이 지나면서 작품이 좋아졌지. 보기 좋은 사례들이야. 우리는 예순이라고 하면 자꾸 마무리를 강요해.”

 

그래서인지 그의 작업 계획은 빽빽하다. 해외 활동도 많다. 한 번 주제를 파고들기 시작하면 20∼30년씩 몰두하곤 하는 그가 큰 기대를 걸고 최근 시작한 작업 중 하나가 극동 아시아 미의 표준을 찾는 프로젝트다. 10년 정도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앞으로 작업할 중국 프로젝트 커미션 하시는 분이 굉장히 대단한 분입니다. 우리 극동 아시아의 디자이너나 아티스트들이 왜 표준을 서양에 맞추느냐고 하시더라고요. 저도 서양 표준인데 그게 아니라는 거죠. 그분이 저더러 미의 표준이 뭐냐고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국 동양의 수묵화와 미국 서부의 풍경 사진이라고 말했었죠. 그분의 생각은 극동아시아는 중국이 표준이 돼야 하는데 왜 서양에 맞추냐는 겁니다. 그러려면 우선 중국의 표준을 시각적으로 보여줘야 극동아시아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가질 수 있다는 거예요. 그 생각에 공감을 했어요.”

 

배병우가 최근 시작한 또 다른 프로젝트는 다른 동료 사진예술가들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 전통 건축물들을 고품격의 예술적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이다. 그는 종묘, 창덕궁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전통 건축물에 녹아 있는 한국의 미를 찾아내는 작업을 오래 전부터 꾸준히 해왔다. 특히 서양의 대표적 궁전 건축인 스페인의 알함브라궁전과 우리나라의 대표적 궁전인 창덕궁을 대비시킨 그의 2009년 개인전은 생존 작가로는 국립현대미술관이 개인전을 개최한 최초의 경우로서 기록적 관람객이 내방하는 등 큰 화제를 낳았다. (사진 7, 8) 알함브라와 창덕궁 사진을 동시에 전시한 스페인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시도는 한국 전통 문화의 뿌리에서 출발한 그의 예술이 문화권의 한계를 넘어 범세계적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잘 보여줬다.

 

배병우의 다양한 새로운 시도들 중 가장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은바람시리즈다. 소나무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바람 시리즈는 우리 자신을 깊이 있게 되돌아보고 이를 근본적으로 재해석한 데서 출발했다. 바람 시리즈의 명칭인풍경(Windscape)’은 그 의미 자체가 한국적 미학의 본질을 현대적으로 풀어내려는 시도다. 한국어로 풍경(風景)은 바람과 경치으로 이뤄져 있다. 즉 바람의 경치라는 뜻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우리말로 풍경으로 번역된 영어의 원문은 ‘Landscape’로서 그 단어의 의미는의 경치라는 것으로 원래 우리말의 풍경과는 내포하는 의미가 전혀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도 풍경화나 풍경사진이라 하면 서양의 표준에 맞게 지형이나 구조물 등 눈에 들어오는 요소들을 담는 것이 당연시됐다. 즉 이제까지 풍경이라고 부르면서 실제로는지경(地景)’을 그리거나 찍어온 것이다. 배병우의풍경(Windscape)’은 우리 조상들이 지경이 아닌 풍경이라고 부른 정신으로 되돌아가 이를 뒤집어보려는 그야말로 창조적인 시도다. 바람을 찍겠다는 것이다. 2013년 초 독일과 프랑스 등 유럽의 평론가들과 사진전에서 극찬을 받은 배병우의 풍경 시리즈에서는 수면 위로 바람이 불어 물이 부서지는 순간, 들판 위 풀들이 바람에 스러지는 순간을 담는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지만 배병우의 사진 속에서는 바람이 보인다. 특히 그의 풍경 작품집에 실린 풀잎이 바람에 누웠다 일어나는 사진은 그의 처이모부였던 고 김수영 시인의 절창풀’의 본질을 그대로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사진 9)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더 빨리 일어난다

- 김수영

 

진정한 프로는 창조를 우연이나 영감에 맡기지 않는다: 구도자적 치열함이 창조를 낳는다.

사진을 대하는 배병우의 태도는 너무나 진지하고 우직하며 치열해서 차라리 구도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작품도 고가에 거래되지만 지독하게 어려웠던 무명시절과 크게 변한 것은 없다. 단지 좋아하는 와인을 마음껏 마실 수 있고, 좋은 전시장에 작품을 걸 수 있게 됐을 뿐. 그는 여전히 20㎏에 달하는 사진장비를 지고 매일 새벽 사진을 찍으러 간다. 친구들을 좋아하고 애주가인 그는 예전부터 새벽녘까지 술을 마시다가도 어김없이 새벽 4시경 해뜨기 전 사진을 찍으러 나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을 찍는 것은 곧 빛을 다루는 일이고 자신의 예술 세계를 열기 위해 사진작가가 이해해야만 하는 광원이 바로 태양빛이라고 믿는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빛, 그리고 자신의 사진 언어가 가장 잘 구현될 수 있게 하는 해가 완전히 뜨지는 않았으나 어둠은 걷히고 땅에서 물안개가 희미하게 올라오는 순간에 소나무 숲을 가득 채우는 신비로운 빛을 보기 위해 동트기 전 길을 나선다. 이런 시간은 불과 하루에 20분 정도밖에 되지 않으며 매일 그 짧은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셔터를 눌러도 작품이 될 만한 사진은 한 달에 한두 점도 채 나오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그는 좋은 예술가가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요건은 지독한 성실성이라고 믿는다. 그의 작품집 <빛으로 그린 그림>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는 기교보다 우직한 성실함이 먼저다. 이른 아침부터 논밭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게 기본이다. 그런 바탕이 마련돼야 영농 기술도 적용해보고, 시장의 흐름도 읽을 수 있다. 어부였던 아버지도 날마다 새벽 3시면 일어나셨다. 단 하루도 어김없이. 경매 시간을 놓치면 그날 하루는 허탕을 치고 마니까. 생선을 팔기 위해 일찌감치 새벽 어시장으로 나섰다. 어촌촌놈인 나도 그런 기분으로 매일 아침 일어난다. 삼십여 년을 하루도 어김없이.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 사진의 3분의 1은 없었을 것이다. 태양이 뜨는 동시에 아침이 시작되고 하루가 시작된다. 동이 튼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본 사람들이라면 모두 공감할 것이다. 난 스무 살 때부터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항상 새벽녘에 촬영을 했다. 이른 아침에 숲을 향하는 것은, 해뜨기 전 안개와 섞인 광선의 미묘한 느낌을 표현할 수 있어서다. 해뜨기 전이나 해 질 즈음 광선의 섬세하고 미묘한 맛이 좋다. 그래서 늘 동트기 전에 일어나 하루를 준비한다.”

 

최근 유행처럼 양산되고 있는 창조성에 관한 자기계발서나 경영경제 서적들에서는 흔히 열심히 노력하는 근면성이 핵심 관건이던 20세기적 산업사회와 달리 21세기 창조사회의 핵심은 기발한 상상력이므로 근면한 노력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심지어 예상 못한 우연한 발견을 통해 창조적 가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근면보다는 여유 있는 생활이 중요하고 심지어 어느 정도 게으르기까지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가 인터뷰한 세계적 예술가 그 누구도 극도로 치열한 삶을 살지 않는 사람은 없었다. 가장 창조적 기업가라는 스티브 잡스가 거의 잠을 자지 않고 일에 몰두하는 워커홀릭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배병우는 가장 극단적 예다.

 

이런 면에서 사람들은 배병우를 두고발로 찍는 사진가라고 말한다. 하나의 주제에 20∼30년을 몰두하며 온 천지를 누비면서 엄청난 작업량을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양이 질을 만든다고 믿는다. 그는 후배 미디어아트그룹인과의 대담에서머리하고 손은 같이 가야 해. 항상 카메라를 들고 무엇이라도 작업을 하고 있어야 다음 단계로 진전될 수 있어. 발전은 연속적인 작업과 반복으로 되는 것이지 머리로만 되는 게 아니야. 계속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것을 자신도 느낄 수 있어라고 조언하기도 했다.

 

배병우는 작품에 관한 한 편집광에 가까울 정도의 완벽주의자다. 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완벽하다고 믿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계속 같은 대상을 찍는다. 그가 창덕궁의 사계절 사진을 찍을 때 1년 사계절 사진을 모두 완성한 후 책으로 편집하던 중 고궁 기와지붕에 눈이 덮인 사진에서 눈이 온 두께가 그의 마음에 미흡했다. 그는 즉시 책 출간을 1년 늦추고 그 다음 겨울에 눈이 올 때까지 기다려 기어이 마음에 드는 고궁 설경을 얻어냈다. (사진 10)

 

대상의 본질을 담아내고자 하는 그는 기본적으로보이는 대로 찍는다.’ 기술의 발전으로 거의 마술 수준의 사후 수정과 보정이 가능함에도 불구하는 배병우는 우직하게 렌즈도 하나만 가지고 다니고, 줌렌즈도 쓰지 않으며, 후처리도 없다. 그의 작품들은 오랜 시간 대상과 빛과 씨름하며 연습과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언제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서 있어야 하는지를 터득한 결과이며 자연과 빛이 주는 찰나의 완벽한 순간을 아무런 기교 없이 혼신의 노력만으로 잡아낸 산물이다. 예술가로서의 정점을 향해 쉼없이 정진하는 그는 여전히 새벽녘이면 사진을 찍으러 나선다. 배병우야말로 소설가 필립 로스가 말하는 진정한 프로 예술가이며 창작의 대상과 예술가 자신이 완전히 합일된 가장 깊은 경지의 예술창조성의 구현자다.

 

“영감을 찾는 것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 필립 로스, <에브리맨>

 

필자 주

이 글은 기초 자료 조사와 작가와의 인터뷰 녹취록 정리 등을 담당한 김맑음 미국 예일대 경영대 박사과정생(조직이론)의 도움으로 집필됐습니다. 이 글에는 인터넷 사이트나 신문 등 다양한 기존 매체들의 자료가 몇 군데 인용돼 있는데 일부는 출처가 명확하지 않아 정확한 원천을 밝히지 못했습니다. 귀한 시간을 아낌없이 인터뷰에 내어주신 배병우 작가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신동엽 연세대 경영대 교수 dshin@yonsei.ac.kr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예일대에서 조직이론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직이론 분야의 세계 최고 학술지 등 저명 저널에 다수의 논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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