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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petitive Strategy in Practice

국제화+벤치마킹=국가 고속성장

문휘창 | 107호 (2012년 6월 Issue 2)


필자의 지난 글(DBR 105, 포터 교수도 못 본 글로벌 트렌드: 다중 가치사슬)에서 국제화가 어떻게 기업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성공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을 넓혀주는지를 보여줬다. 이번 글에서는 일본과 중국, 인도의 경제발전 사례를 살펴보고 이 국가들이 어떻게 국제화를 통해 경제성장을 빨리 이뤘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한국 국제화의 현 상태를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일본: 페리 제독의 압력에 의한 문호개방

1853 78, 당시 에도(江戶)만이라고 불렸던 도쿄만의 우라가(浦賀)항에 짙은 검은색 연기를 내뿜는 4척의 배가 나타났다. 미국의 페리(Mathew Perry) 제독이 이끌고 있던 이런 종류의 배를 한번도 본적이 없는 일본 사람들은 이 배들이 연기를 내뿜는 용이라고 생각했고 많은 사람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나중에 배들이 항구 가까이에 정박을 하자 일본 사람들은 배 위에 있는 대포를 보고 그 숫자와 크기에 또 한번 놀랐다.

 

현대인의 시선으로 봐서는 그리 놀랄 일도 아니지만 당시 한국과 중국, 그리고 네덜란드만 알고 있던 일본인에게는 매우 큰 충격이었다. 증기선으로서 목재가 썩지 않게 콜타르로 검게 칠한 쿠로후네(?)라고 불리는 흑선과 페리 제독 및 선원들을 일본인들은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맞이했다. 여러 자료를 통해 당시 일본인의 이러한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아래 <그림 1>의 좌측 초상화가 페리 제독의 원래 모습이다. 그런데 일본인 중 일부는 가운데 그림처럼 착하다 못해 어리숙하게 보이는 이미지로, 또 다른 사람들은 우측의 그림처럼 도깨비에 가까운 모습으로 페리 제독을 형상화하면서 페리 제독과 미국 선원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여기기도 했다. 국제화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일본인들은 갈팡질팡하고 있었던 것이다.

 

페리 제독은 일본에 개항을 요구하는 당시 미국 대통령인 필모어(Millard Fillmore)의 친서를 전달하고 미국과 일본 간의 통상을 개시하고 정치적 관계를 수립하는 조약을 맺으려 했으나 미국을 두려워한 일본은 처음에 이를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러자 페리 제독은 이듬해 2월 연기를 내뿜는 더 큰 배를 이끌고 되돌아왔고 1854 331일 미국과 일본은 소위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이라고 불리는 미일화친조약(美日和親條約)을 맺어 일본은 할 수 없이 미국에 문호를 열었다.

 

불평등 조약이었던 미일화친조약은 일본 사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세력과 서양을 배척해야 한다는 세력이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서양군대가 일본의 내전에 참여하게 됐고 대포와 성능이 뛰어난 총과 같은 신무기로 무장한 서양군대에 일본의 구식 군대는 처참하게 무너졌다. 당시 세계를 주도했던 서양과 여러 면에서 상당한 격차를 느낀 일본에서는 이후 사회전반적으로 서양 문물과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리가 힘을 얻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메이지(明治) 유신이 일어났고 200년 이상의 쇄국정책에서 벗어나문명개화의 시대에 들어서게 됐다.

 

이후 19세기 말까지 일본 내에서는 철저한서구화 열풍이 일어나면서 정치적으로는 영국의 제도를 본뜬 입헌주의 체제를 성립했고 경제적으로는 서구의 자유경쟁 원칙을 따라 자본주의를 받아들였으며 사회·문화적으로는 영국과 독일의 교육제도를 본뜨는 등 서구화를 추진했다. 또한 정부 기관 내에번역국을 설치하고 서양근대기술문명의 성과를 모두 번역해 국내에 보급하려 했다. 이와 같이 일본에서는 심지어우리에게는 역사가 없다. 우리의 역사는 지금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정도로 철저하게 서양을 모방했다.

 

이러한 국제화 과정에서 일본은 자신들의 것을 그대로 발전시키기보다는 일본의모방문화를 잘 살려 구미 선진국의 여러 조직 및 정책을 벤치마킹하면서 동아시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빠른 기간 내에 세계적으로 힘을 겨루는 열강에 동참할 수 있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선진국이 될 수 있었다. 4척의 검은 배로 시작된 개항을 통해 일본은 산업전반적으로 큰 성공을 이뤘고 국제화를 기반으로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도저히 성공할 수 없는데…” 에서 만들 수 있는 이유(DBR 103)’에서 필자가 강조했던철저한 벤치마킹적극적인 국제화를 통해서 일본은 빠른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중국: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을 통한 자발적인 국제화

“생산력의 향상 없이는 중국을 부강하게 만들지도, 인민들의 삶의 질을 높이지도 못합니다. , 우리의 혁명은 단지 빈말일 뿐입니다. (…) 1960년대 초 중국은 선진국들에 비해 뒤처져 있었지만 그 차이는 별로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960년대에서 1970년대 사이, 10년 동안 그 차이는 더욱 커졌습니다. (…) 중국은 건국 이래 상당히 오랫동안 세계로부터 고립돼 있었습니다. (…) 1960년대 다른 나라와 협력할 기회가 많았음에도 중국은 스스로를 고립시켰지요. 결국 우리는 더 나은 국제 요소를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 4대 현대화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중국은 외국에 개방을 해야 하며 올바른 외국의 정책을 반드시 따라야만 합니다.1 중국은 기본적으로 중국인의 노력, 중국의 자원 및 기반을 활용해 4대 현대화를 이뤄야 하지만 외국과의 협력 없이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이는 1979 11월 덩샤오핑(鄧小平)이 미국의 브리태니커 백과사전(Encyclopedia Britannica)의 기브니(Frank Gibney)와 캐나다 맥길대(McGill University) 동아시아 연구원의 원장 린(Paul Lin)과 함께 나눈 대화의 일부이다. 여기서 덩샤오핑의 국가발전에 대한 혜안을 엿볼 수 있다. 중국 사인방(四人幇)2 자본주의 제도 아래서 부유하기보다는 사회주의 제도 아래서 가난한 것이 더 낫다는 국가발전의 목표가 잘못됐음을 그는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그는 국가 발전을 위한 목표와 방법론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최고의 복지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생산성이 최고인 국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경영전략에 있어서 목표를 정확히 꿰뚫어보는 그의 시각은 당시 경제발전에 의한 빈부의 차이보다는 발전을 뒤로한 부의 평등을 기본으로 여겼던 사회주의 지도자들과 매우 달랐다는 점을 눈여겨봐야 한다.

 

 

 

 

 

생산성을 높이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덩샤오핑이 선택한 방법론은 역시철저한 벤치마킹적극적인 국제화였다. 앞의 담화에서 덩샤오핑은 외국의 올바른 정책을참고해야 한다가 아니고반드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에 유의해야 한다. , 경제발전에 있어서 외국을 벤치마킹하는 것은 선택이 아닌 필수로 봤던 것이다. 또한 그는 외국과의 협력 없이 이러한 목표를 성취하는 것은불가능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중국이 가지고 있는 우위를 활용해도 혼자의 힘으로는 단기간 안에 목표를 성취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극적인 국제화의 힘을 빌려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한 것이었다.

 

중국의 경제성장을 언급할 때 흔히 많은 사람들은 중국의 값싼 노동력, 많은 인구, 넓은 영토, 풍부한 자원 등을 꼽는다. 그러나 이런 요소들은 중국의 오랜 역사 동안 지속적으로 중국이 누려왔던 강점이다. , 중국의 본격적인 발전 이전이나 이후나 이러한 요소들은 큰 변화가 없었다. 중국 발전의 근본적인 이유를 찾으려면 발전 전의 중국과 발전 후의 중국을 서로 비교해서 달라진 점을 찾아야 한다. 중국이 가장 발전했던 당나라 때 외국과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점, 부강했던 원나라 때 색목인(色目人)이라고 불린 외국인을 교류에 적극적으로 활용한 점, 그리고 1970년대 말 문호를 개방하고 적극적으로 외국인 투자 등을 활용하면서 크게 발전한 원동력은 모두 국제화이다.

 

중국의 개혁과 개방을 위해 주창한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의 핵심내용은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는 것이다. 이것은 고양이의 색깔에 상관없이 효율성이 높은 고양이는 모두 환영한다는 뜻이다. 더욱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정치제도에 상관없이 계획경제든 시장경제든 생산력 향상에 유용하면 모두 도입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비록 중국이 정치적으로는 사회주의체제를 유지했지만 시장의 효율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경쟁원칙을 적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중국은 개혁개방 이래 장기간 두 자리 숫자의 경제성장을 유지했고 지금은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올랐으며, 특히 2008년 세계경제위기 이후에는 세계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작년에 필자는 중국 광둥성에 1주일 정도 머물면서 이 지역의 경제를 자문했다. 광둥성의 지역총생산은 1978년 중국 개혁개방 전 30년 동안에는 불과 8배 늘어났지만 개방 후 30년 동안에는 245배나 증가하는 빠른 성장을 이룩했다. 광둥성은 싱가포르, 홍콩, 대만의 총생산 규모를 차례로 능가하면서 발전해왔다. 이러한 성공의 근본적인 원동력은 바로 30여 년 전에 시작한 개혁개방정책이다.

 

인도: 소비에트식 산업화에서 자본주의식 국제화 전략으로 전환

인도는 전국에 팽배해 있던 빈곤, 무지 및 각종 질병을 현대 과학과 기술로 빠른 기간 내에 퇴치하고자 했다. 따라서 빠른 시일 내에 현대화와 공업화를 이루는 것이 목표였다. 이때 인도 정부는영국의 산업혁명은 여러 세대에 걸쳐 일어났지만 소비에트식 산업화는 단 한 세대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따라서 독립 인도의 첫 총리인 네루(Jawaharlal Nehru)는 소비에트식 중앙계획경제를 선택했고 또한 영국의 식민지 시기를 상기하면서 다른 국가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발전을 꾀하는 방법을 택했다.

 

인도 경제개혁의 아버지라 불리는 라오(P. V. Narasimha Rao) 총리 시절 재무장관을 지낸 인도의 현재 총리인 싱(Manmohan Singh)은 위와 같이 인도 경제의 발전초기를 회고했다. 실제로 소비에트식 경제발전을 벤치마킹해 5개년 계획을 실시했던 인도의 사회주의적 경제는 처음에는 잘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다. 15년에서 20년 지난 뒤 인도 경제에 비록 여러 가지 문제가 나타났지만 남아메리카나 아프리카에 비해서 1980년대까지 인도 경제는 여전히 세계 기준으로는 상당히 괜찮았다. 물론 네루 총리가 계획했던 것처럼 빠른 성장은 이루지 못했다. 이후에도 여러 총리에 의해서 경제정책이 시도됐으나 그다지 크게 성공하지 못하고 급기야 1991년 인도는 경제위기를 겪게 됐다.

 

이와 더불어 인도가 모델로 삼았던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 1960년대까지 1인당 국민소득이 대략 비슷했던 한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의 급격한 발전 등은 인도에 충격으로 다가왔다. 결국 인도는 기존에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려던 차원에서 유지해왔던 허가정책(permit raj)3 버리고 시장경제체제로 본격적인 개혁을 했다. 과거와 달리 국내 경쟁은 물론 국제 경쟁이 인도에 점차 퍼지게 됐고 다른 국가들과의 경쟁을 위해 수많은 규제들을 철폐하기 시작했다. 80%에 이르던 관세를 단계적으로 낮춰서 25%까지 끌어내렸다. 라오 총리하에서 이행된 이러한 노력은 곧바로 결실을 맺었다. 무역 규모는 GDP 20%까지 증가했고 외국인 직접투자는 1980년대 거의 없었으나 1990년 중반에 50억 달러까지 증가했다.

 

경제발전의 단계에 비해서 제조업 중심의 2차 산업보다 서비스업 중심의 3차 산업이 더 발달된 인도 경제에 대해 많은 이들은페티클라크의 법칙(Petty Clark’s Law)’에 반하는 독특한 인도식 경제라고 언급하기도 한다.4 그러나 싱 총리는 과거에 인도의 제조업이 계획경제체제하에서 국가의 간섭을 받아 국내에서만 경쟁을 해 경쟁력을 잃었지만 서비스업(특히 IT 업종)의 경우 정부의 간섭을 거의 받지 않아 현재에도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지게 됐다고 밝혔다. 여기서 다시 한번 국제화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다.

 

싱 총리는 인도의 경제발전이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전환하면서 이뤄졌다고 보고 있으나 그의 회고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던 국제화의 중요성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도 경제발전에 있어서 지나친 정부간섭을 줄였던 것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그러나 더 결정적인 것은 대외무역, 외국인직접투자 유치, 기술도입 등과 관련된 개방과 국제화 전략이다. , 폐쇄적 경제구조를 버리고 개방정책을 채택해 세계경제 분업체재에 적극 참여했기 때문이다.단순히 정부간섭을 줄이고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해서는 1990년대 초 맞이했던 경제위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인도 경제발전 과정과 인도의 서비스업 발전 이유에서 볼 수 있듯이 인도 고속성장의 비밀은 바로국제화인 것이다.

 

국제화의 세 가지 성공전략

일본이 선진국으로 진입할 수 있었고, 중국이 세계 제2위의 경제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으며, 인도가 경제침체에서 벗어나고 신흥경제로 부상할 수 있었던 공통적인 원동력은국제화이다. 흔히 국제화는 경제 규모가 작은 나라에 특히 중요하고, 자급자족이 상대적으로 가능한 큰 나라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일본, 중국, 인도 사례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국제화는 큰 나라에도 중요하다. 이 세 국가는 모두 인구가 억대에 이르는 대국이다. 이 국가들이 만약 경제를 개방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했다면 어느 정도 자급자족은 할 수 있었겠지만 큰 발전은 없었을 것이다. 이 국가들의 고속성장의 비밀은 바로 국제화다. 일본처럼 타의에 의했던, 중국처럼 자의에 의했던, 그리고 인도처럼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던 결국은 국제화를 통해서만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이상의 사례에서 살펴본 국제화를 통한 성공전략을 아래와 같이 정리해보자.

 

첫째, 벤치마킹 상대로부터 철저히 배워야 한다. 일본은 철저히 서구화를 했기 때문에 한때 유럽국가들을 이기고, 미국에 이어 제2위의 경제대국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성공한 후에는 이러한 서구화의 열기가 줄어들고 다시 일본식으로 만족하려 했다. 일부 사람들은 일본은 영어를 못해도 잘살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일본이 영어를 잘했으면 지금보다 훨씬 더 잘살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최근에 일본의 경제성장이 느려진 것은 과거에 이룬 실적에 만족해 계속 배우려는 동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둘째, 필요한 파트너와 협력을 해야 한다. 국제화가 경쟁력의 원동력이 될 수 있지만 결국 혼자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 덩샤오핑이 말했던 것처럼 외국과의 협력, 특히 다국적기업과의 협력 없이는 절대로 경제발전의 목표를 제대로 이룰 수 없다. 그래서 중국은흑묘백묘론으로검은색 고양이흰색 고양이든 상관없이 적극적으로 외국인직접투자를 유치해 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투자유치국이 된 것이다.

 

셋째, 알맞은 벤치마킹 상대를 찾아야 한다. 인도는 초기에 다른 나라 경제발전을 눈여겨봤지만 벤치마킹 대상을 잘못 찾았다. 소비에트식 경제발전 모델이 처음에는 그럴듯해 보였지만 결국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기침체에서 허덕이게 됐으며 다른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경제발전이 늦어졌다. 그러나 국제화의 장점을 살리는 자본주의 방식을 채택하면서 빠른 속도로 경제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이러한 논의가 한국에 어떠한 시사점을 주는가? 일본, 중국, 인도에 비해 한국의 경제규모는 작은 편이기 때문에 국제화가 경제발전에 있어서 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한국의 국제화가 너무 지나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좀 더 깊숙이 살펴보면 한국의 국제화는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은 무역 주도국으로서 무역의 국제화는 잘돼 있지만 국제투자나 국제이민 등 국제화의 다른 부문에서는 아직도 미약하다. 무역뿐 아니라 다른 부문의 국제화 수준도 높인다면 선택의 폭을 넓혀 우리 경제가 더욱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문휘창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cmoon@snu.ac.kr

필자는 미국 워싱턴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워싱턴대, 퍼시픽대,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헬싱키 경제경영대, 일본 게이오대 등에서 강의했다. 주 연구 분야는 국제경쟁력, 경영전략, 해외직접투자, 문화경쟁력 등이다. 현재 국제학술지편집위원장도 맡고 있다. 다수의 국내외 기업, 외국정부(말레이시아, 두바이, 아제르바이잔, 중국 광둥성), 및 국제기구(APEC, UNCTAD, IBRD)의 자문을 담당했다.

  • 문휘창 문휘창 | - (현)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 (현) 국제학술지 편집위원장
    - (전)미국 워싱턴대, 퍼시픽대, 스토니브룩 뉴욕주립대, 헬싱키 경제경영대, 일본 게이오대 등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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