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Revisiting Machiavelli-6

용병? 그래도 스스로 무장해야 산다

김상근 | 101호 (2012년 3월 Issue 2)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마키아벨리, 권력의 중심에 서다
1498년 5월28일, 우리들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외교를 담당하는 제2 서기장에 선출됐다. 그가 제2 서기장에 선출된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피렌체의 공직자윤리법은 세금체납자 아들의 정계 진출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마키아벨리의 아버지가 세금체납자(스페키오)였다. 정계 진출에 관한 금치산자(禁治産者)가 관례를 깬 것이다. 피렌체의 공직자는 주로 정규 대학 교육을 마치고 법률을 전공한 사람 중에서 선출됐다. 세금체납자의 아들이자 변변한 학력도 없었던 29살의 청년 마키아벨리가 혜성과 같이 등장해 피렌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그와 경쟁했던 입후보자 중에는 피렌체 대학의 수사학 교수(프란체스코 가티)도 있었고 전문 변호사(안드레아 디 로몰로)도 있었지만 마키아벨리가 대평의회(Consiglio Maggiore) 투표에서 당선됐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서 마치 자신의 처지를 회상하는 듯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박복한 처지에서 높은 신분이 되는 데 있어서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지위를 갖고 있지 않는 한 실력 내지 책략을 쓰지 않고 출세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1
 
정말로 ‘박복한 처지’에서 출발했던 마키아벨리가 어떻게 피렌체의 고위 공직자로 급부상할 수 있었을까? 자신의 말대로 ‘실력 내지는 책략’을 써서 출세한 것일까? 그는 훗날 그 공직에서 쫓겨난 후 절친한 친구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자신은 “타고난 운명 탓에 비단이나 모직을 짜는 법을 몰랐고, 은행업이나 무역으로 큰돈을 버는 것에 관심이 없었으며, 이익이 될 만한 일에 냄새를 맡는 감각도 없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2 별 볼일 없는 집안의 후손이었다는 푸념이다. 그렇다면 마키아벨리는 어떻게 피렌체의 제2 서기장이 될 수 있었을까? 그는 <로마사 논고>에서 “모략만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털어놓는다.
 
“나는 비천하게 태어난 자가 정정당당하게 실력으로 출세한 예를 지금까지 한번도 들어보지 못했다. 오히려 내가 목격한 것은 조반니 갈레아초가 그의 큰아버지인 베르나르도 각하의 손에서 롬바르디아의 지배권을 빼앗은 것과 같은 사건들이다. 즉 모략만이 성공의 비결이라는 것을 나는 확고하게 믿고 있다.”3
 
마키아벨리는 공직에 오르기 위해서 강력한 후원자를 얻었다. 예나 지금이나 ‘내가 무엇을 아는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내가 누구를 아는가’이고 또 ‘누가 나를 아는가’이다. 실력은 나에게 맡겨진 업무를 처리할 능력이지만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기회는 내가 가진 인적 자원으로부터 출발한다. 마키아벨리가 발휘했던 술수의 증거는 남아 있지 않지만 자신이 가지고 있던 인적 자원을 최대한 활용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 행정부의 최고위직인 제1 서기장 마르첼로 아드리아니의 후원을 받았다. 그는 마키아벨리를 개인적으로 가르친 스승이었고 3달 먼저 피렌체 제1 서기장으로 선출(1498년 2월13일)되면서 마키아벨리의 앞길을 터줄 수 있었다. 경쟁자였던 프란체스코 가티 교수가 메디치 가문과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도 흑색선전의 도구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당시 피렌체 행정부는 1494년에 축출된 메디치 가문의 복권 움직임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메디치 가문이 귀환해 참주정으로 돌아간다면 피렌체의 공화정 정부는 무너지게 된다. 아마 마키아벨리는 선거전에서 프란체스코 가티가 메디치 가문의 사람이라는 것을 떠들고 다녔을 것이다. 요즘 선거전에도 흔히 등장하는 네거티브 전략을 구사했을 가능성이 높다.
 
 
마키아벨리가 담당했던 업무
피렌체의 행정부는 제1 서기국과 제2 서기국으로 편성된다. 제1 서기국은 대외 관계 및 외교 문서를 담당했고 마키아벨리가 서기장이었던 제2 서기국은 국내 관계 및 전쟁 업무를 관장했다. 그러나 복잡하고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던 피렌체 정치의 현실은 그렇게 두 서기국의 업무를 칼처럼 가르지 못했다. 국내 문제 담당이었던 마키아벨리는 외교 업무에도 자주 동원됐고 뛰어난 문장력 때문에 공식 외교 문서 작성에도 자주 투입됐다. 예나 지금이나 능력 있는 사람에게 일복이 터지는 법이다. 천성이 낙천적이면서도 업무 능력이 뛰어났던 마키아벨리는 문제가 있는 곳에 제일 먼저 투입되는 피렌체 최고의 공무원이 됐다. 제2 서기장으로 임명되자마자 마키아벨리에게 군사 문제를 전담하는 ‘10인 위원회’가 맡겨진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5월28일에 제2 서기장으로 임명된 마키아벨리는 7월14일부터 ‘10인 위원회’의 서기장도 겸직하게 됐다. 그렇다고 연봉이 두 배로 늘어난 것도 아니다. 당시 제1 서기장의 연봉은 330소금화(小金貨, fiorno piccolo)였고 제2 서기장에게는 192소금화가 지급됐다. ‘10인 위원회’ 서기장의 임금은 따로 지급되지 않았다. 한 사람 연봉에 일은 두 배! 그래도 마키아벨리는 열심히 일하던 국가의 충복이었고 맡은 일은 끝장을 보는 유능한 공무원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집에서 시뇨리아 정청까지 출근하려면 베키오 다리를 건너야 한다. 그가 첫 출근하던 날 신이 나서 달려갔을 베키오 다리의 모습은 1498년과 거의 변한 것이 없다.
 
 
 
 
 
 
첫 번째 임무: 용병대장과의 협상
한국 여행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이탈리아 관광 상품은 피렌체를 스쳐지나가는 도시로 분류하고 있다. 북유럽의 허브 도시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베네치아나 밀라노에 도착한 한국 관광객은 피사(Pisa)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일반적인 코스를 택한다. 갈릴레이 갈릴레오가 중력 실험을 했다는 그 유명한 ‘피사의 사탑’에서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점심 식사를 피사에서 하고 로마로 내려가기 전에 잠시 방문하는 도시가 피렌체다. 시뇨리아 광장과 두오모(대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고 가죽 가방을 사거나 이른바 ‘고현정 크림’이라고 불리는 산타마리아 노벨라 수도사들이 만들었다는 화장품을 구입하고는 바로 피렌체를 빠져나간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피렌체를 그저 평범한 이탈리아의 도시라고 생각하고 오히려 피사를 더 중요한 도시로 생각한다.
 
피사와 피렌체가 있는 지역을 토스카나(Toscana)라고 하는데 이곳은 이탈리아의 중북부 지역이다. 피사는 피렌체의 지배를 받고 있던 작은 도시였다. 유럽 전역으로 퍼져 있던 은행 지점망과의 신속한 정보 교환과 피렌체의 주력 산업이었던 모직업의 수출입을 위해서 피사 항구는 피렌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항구도시였다. 그런데 피사인들은 선천적으로 피렌체인들을 싫어하는 지역감정을 가지고 태어났다. 이것은 12∼13세기에 전 유럽을 분열시켰던 기벨린당(황제파)과 구엘프당(교황파)의 갈등이 남긴 역사의 흔적이었다. 토스카나 지방의 맹주였던 피렌체에 구엘프당이 주도하고 있었다면 토스카나의 작은 도시였던 피사, 루카, 시에나 등에는 모두 기벨린당이 득세하고 있었다. 피렌체 지배에 대한 반감이 극심했던 피사인들은 프랑스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공을 틈타 피렌체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프랑스는 피사의 독립을 지지하는 입장을 취해서 피렌체를 곤욕스럽게 만들었다. 16세기 전반, 그러니까 마키아벨리가 피렌체의 제2 서기장으로 일하는 동안 피렌체의 최대 현안은 피사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었다.
 
피사 문제는 천하의 마키아벨리도 쉽게 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군사적으로 약체였던 피렌체는 프랑스의 무력지원이 필요했다. 그런데 이 프랑스가 피사를 두둔하고 있으니 피렌체 정부로서는 좌불안석(坐不安席)이 당연했다. 국가의 기반이었던 무역업과 은행업을 위해서는 피사 항구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는데 그 피사가 반란을 일으켰고 그 뒤에는 프랑스가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첫 번째 임무는 바로 이 피사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제2 서기장 마키아벨리는 사절(mandatario)로 임명돼 외교업무를 담당했다. 국가를 대표하며 현장에서 외교문제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대사(oratore)가 아니었다는 말이다. 따라서 마키아벨리의 주된 업무는 상대편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안을 시뇨리아(행정부)에 보고하고 훈령을 받아 협상에 임하는 정도였다. 주변 환경과 인물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그 특징과 대세의 흐름을 분석하는 데 타고난 능력을 보였던 마키아벨리는 이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했다. 이런 탁월한 외교 공무원에게 맡겨진 첫 업무는 용병대장 자코모 다피아노와 적절한 용병 사용료 지급에 대해 협상하는 것이었다. 신참 공무원 마키아벨리는 임무 수행을 위해 부지런히 말을 몰아 폴테데라에 도착했다. 폴테데라는 피렌체에서 서쪽으로 약 7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도시로 피사로 가는 길목에 있다.
 
용병대장 자코모 다피아노
당시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들은 전쟁을 대신 해주고 돈을 벌어들이는 용병사업에 관여하는 일이 많았다. 소국의 영주가 자국의 방어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다른 도시국가 간의 전쟁을 이용해 돈벌이를 한 것이다. 중세 말기의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용병 부대가 국가 간의 전쟁을 도맡아 처리했다. 군대의 힘이 강하면 자국 내에서 쿠테타가 일어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의도적으로 자국의 군대를 양성하지 않았다. 14∼15세기의 이탈리아는 경제성장의 시기였다. 베네치아와 제노아, 아말피(나폴리) 등은 국제 무역을 통해 큰돈을 벌어들이고 있었고 피렌체는 국제적 규모의 은행업과 모직산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따라서 엄청난 비용을 들여 군대를 유지하는 것이 낭비라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노동과 산업에 종사할 시민들이 군대에 징집돼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정치·경제적 이유 때문에 이탈리아의 주요 도시국가들은 작은 도시국가 영주들을 용병으로 고용하면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용병 계약은 보통 1년 단위로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탈리아에서 도시국가 간의 대규모 전쟁이 발발하면 작은 도시국가 영주들은 대목을 맞게 된다. 이른바 전쟁 특수가 일어나게 되고 용병이 부족하면 알프스산맥 너머에서 추가 병력을 고용하기도 했다. 강인하기로는 스페인 사람들로 구성된 용병부대가 최고였고 잔인하기로는 독일 용병을, 충성심이 깊기로는 스위스 용병을 최고로 쳤다. 병력이 부족하면 멀리 영국에서부터 용병 부대가 내려오기도 했다.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국가들과 스페인, 독일, 스위스, 영국의 용병부대가 언급됐지만 한 나라가 빠져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바로 프랑스다. 당시 프랑스 출신의 용병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유럽에서 제일 먼저 중앙집권 국가로 발돋움하면서 자국의 군대를 조직해 개인의 무력사용을 통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프랑스의 군대가 이탈리아의 최대 위협이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대포를 이끌고 알프스 산맥으로 넘어 남하하기 시작했을 때 이탈리아의 비극은 시작됐다. 이탈리아의 용병들은 프랑스 정예부대의 군사력 앞에서는 그야말로 추풍낙엽 신세를 면치 못했다. 낭만적인 기사도 정신을 바탕으로 둔 중세적인 용병제도는 군사작전과 대량 살상무기를 앞세운 프랑스 군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이런 현실을 제일 먼저 깨달은 사람이 바로 마키아벨리였다. 그는 지금 그 모순적인 제도의 핵심인 용병대장을 만나 용병 사용료 협상을 해야 하는 첫 임무를 맡게 된 것이다.
 
자코모 다피아노는 소국(小國) 피옴비노의 영주이면서 피렌체의 용병대장으로 계약을 맺고 있었다. 자코모 다피아노는 용병료를 인상하고 지휘권을 확대해 달라고 요구했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첫 번째 임무의 수행 결과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신참 공무원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 행정부의 기록을 보면 용병료는 종전의 액수대로 유지됐고 지휘권 확대는 긍정적으로 검토하겠다는 언질 정도에서 마무리됐다. 대신 마키아벨리는 첫 협상 대상자에 대한 평가를 간략하게 남겼다. “말은 잘하는데 결단력이 약하고 실행하는 것은 최악이다.”
 
마키아벨리의 이런 냉소적인 평가는 자코모 다피아노 개인에 대한 혹평일 수도 있지만 용병 제도 전반에 대한 문제점 지적일 수 있다. 대체적으로 용병들은 정치꾼들이었다. 그들은 전쟁이 없으면 수입이 줄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분쟁거리를 만들기도 했고 도시국가 간의 충돌을 유도했다. 전쟁이 터지면 용병대장들은 그럴듯한 군사작전을 보여주면서 자신들의 몸값을 올리는 데만 열중했다. 마키아벨리의 표현대로 ‘말은 잘하는데’ 막상 전투 현장에서는 몸을 사리면서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 용병대장들의 비즈니스 플랜이자 수익모델이었다. 군대로 돈벌이를 하는 입장에서 군인이 전투에서 사망하거나 대포 같은 고가의 무기가 파손되면 큰일이다. 따라서 그들은 늘 ‘실행하는 것은 최악’이었던 것이다. 용병대장들은 해가 지고 날이 어두워지면 쌍방의 합의하에 전투를 중단해 버렸다. 야간 전투를 하다가 피아(彼我) 간에 피해가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런 용병대장을 상대로 협상을 벌여야 했던 마키아벨리는 자코모 다피아노와의 만남에서 용병제도의 모순을 바로 지적했다. 그 후부터 마키아벨리는 용병과 원군이 얼마나 무가치하며 자국의 군대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에 대해서 여러 차례에 강조하게 된다.4
 
두 번째 업무: 이탈리아의 잔다르크와의 협상
첫 임무를 마치고 피렌체로 돌아온 마키아벨리에게 곧 다음 업무가 맡겨졌다. 이몰라(Imola)와 포를리(Forli)를 통치하고 있는 여걸 카테리나 스포르차(Caterina Sforza)를 만나 또다시 용병 고용 문제를 협의하란 것이었다. 이몰라와 포를리의 용병 500명을 1년간 고용하는 조건으로 피렌체가 부담할 수 있는 금액은 1만 피오리노였다. 그런데 카테리나 스포르차 백작부인은 1만5000피오리노를 요구했다. 1498년 7월13일 마키아벨리는 아펜니노산맥을 넘어 이몰라와 포를리로 말을 몰았다. 이몰라와 포를리는 피렌체와 베네치아 공화국 사이에 끼여 있는 작은 도시국가다.
 
카테리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의 잔 다르크로 불릴 만한 여걸이었다. 카테리나는 밀라노의 용병대장으로 활동하다가 비스콘티(Visconti) 가문의 사위가 돼 왕권을 넘겨받았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의 친손녀였다. 타고난 피부터 달랐던 것이다. 그녀는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이런 저런 관계로 얽혀 있는 인물이다. 첫 번째 메디치 가문과의 관계는 악연으로 출발했다. 1478년 메디치 가문의 지도자 로렌초를 암살하기 위해 꾸며졌던 ‘파치가의 음모’ 사건의 배후 조종자였던 지롤라모 리아리오(Girolamo Riario)가 카테리나의 첫 남편이었다. 사실 지롤라모 리아리오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메디치 가문과 악연을 맺었던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조카였기 때문이다. 리아리오는 암살 시도가 실패로 돌아간 후 로렌초 데 메디치에 의해 암살됐다. 잔인한 복수극이 펼쳐진 것이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의 손에 남편을 잃은 카테리나는 아들 오타비아노 리아리오의 섭정으로 행세하면서 이몰라와 포를리를 통치했다.
 
 
 
여성에게 권력이 넘어가자 즉각 반란이 일어났다. 카테리나는 급히 성채 안으로 몸을 피하고 권력을 지키기 위한 결사항전에 들어갔다. 반란의 주모자들은 성채 밖에 남아 있던 자녀들을 인질삼아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권력에 대한 욕심보다 모성애가 더 강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란의 주모자들은 카테리나의 대응에 완전히 기가 죽고 말았다. 카테리나는 성채 위 망루에 올라서서 치마를 걷어 올리고 자신의 하체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야, 이놈들아! 아이는 이것으로 얼마든지 더 낳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마키아벨리의 임무는 이 대단한 여걸 카테리나를 상대로 피렌체와의 용병 계약을 1년 더 연장하면서 용병료를 동결시키는 것이었다.
 
피렌체를 적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는 임무를 맡았던 용병대장은 카테리나의 아들인 옥타비아노 리아리오였다. 카테리나와 마키아벨리 간의 탐색전과 신경전이 몇 번 펼쳐진 후 두 사람은 타협점을 모색하게 된다. 양쪽이 조금씩 양보해서 1만2000피오리노를 지불하는 것으로 협상이 종결됐다. 카테리나는 마키아벨리에게 “피렌체인들은 언제나 말은 그럴듯하게 하지만 실행하는 데는 영 신통치 않다”고 핀잔을 주기도 했다. 막상 합의된 금액으로 용병계약서에 서명하려는 순간 카테리나가 또 다른 요구사항을 들고 나왔다. 이몰라와 포를리가 외국으로부터 공격을 당하면 피렌체가 자국의 군대를 의무적으로 파견해야 한다는 조건을 요구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그것은 서기장인 자신의 권한 밖의 일이라고 성질을 부리고 피렌체로 돌아와 버렸다. 물론 ‘성질을 부리는 것’도 외교 전략의 일환이었다.
 
마키아벨리와 협상을 벌였던 카테리나는 계속해서 피렌체와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이것이 카테리나와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인연이다. 첫 남편이 암살 사건에 연루됐던 첫 번째 인연이 악연이었다면 두 번째는 좋은 인연이다. 피렌체에서 메디치 가문이 축출된 후 망명자였던 조반니 데 메디치와 사랑에 빠졌던 카테리나가 둘 사이에서 아들을 낳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을 따 다시 조반니 데 메디치라 불렀는데 이 아기가 나중에 ‘검은 깃발의 조반니’라는 용병 대장으로 성장하게 되고 마키아벨리는 훗날 그를 높이 평가하게 된다. 이 ‘검은 깃발의 조반니’의 아들이 바로 피렌체의 첫 번째 대공(Grand Duke)이자 메디치 가문을 복권시켰던 코시모 1세다.
 
마키아벨리는 카테리나와의 협상을 종결 짓고 1499년 8월1일 피렌체로 돌아왔다. 마키아벨리가 피렌체로 돌아왔을 때 피사 사태는 파국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치타 디 카스텔로 출신의 또 다른 용병대장 파올로 비텔리가 피사 공격을 본격적으로 감행한 것이다. 초기의 형편은 그런대로 좋았다. 비텔리가 지휘하는 피렌체의 군대가 피사에 포탄을 퍼부어 성벽의 일부를 파괴시켰다. 이제 피사 성채 안으로 군대를 투입해 점령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용병대장 비텔리는 승리를 목전에 두고 갑자기 군대를 철수시켜 버렸다. 소강상태에 빠진 피사와의 전쟁은 9월14일에 종결되고 말았다. 승리를 눈앞에서 놓친 피렌체인들은 용병대장 비텔리를 전격 체포했고 10월1일 처형시켜버렸다. 당시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군사 업무를 담당하던 ‘제10인 위윈회’의 비서관이었다. 비텔리의 행동에 격분했을 것이 틀림없고 비텔리의 처형에 일정 부분 관여했으리란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는 용병 제도의 한계란 것을 마키아벨리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힘으로 무장하지 않는 국가는 용병이라는 외부의 힘에 의존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신을 늘 궁지에 몰아넣게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한 것이다.
 
 
스스로 무장하라
21세기 최고의 창조경영자로 알려져 있는 스티브 잡스의 일화다. 자기 집 주차장에서 애플사를 창업했던 약관의 청년 스티브 잡스는 사업 파트너였던 스티브 워즈니악과 담판을 지어야만 했다. 기술적으로는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던 컴퓨터 전문가였던 워즈니악은 당시 보수도 좋고 평판도 좋았던 휴렛팩커드사의 직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워즈니악은 애플사와 HP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고 있으면서 직장은 HP를 다니고 실험적인 컴퓨터는 애플을 통해서 만들고 싶어 했다. 스티브 잡스는 워즈니악을 설득해 애플에 전념하도록 만들어야 했다. 아래 구절은 월터 아이작슨이 최근 발행한 <스티브 잡스>의 해당 부분이다.
 
“워즈는 HP에 엔지니어로 남아 있는 것을 원했다. ‘HP는 안정적인 직장으로 유지하면서 애플 일을 병행하면 왜 안 된다는 거지’라며 강력한 반대의사를 굽히지 않았다. 절대로 HP를 그만두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마쿨라(잡스의 초기 파트너)는 워즈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간단히 알았다고만 답했다. 그러나 잡스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워즈에게 전화를 수시로 걸어 설득과 협박을 계속했다. 잡스는 워즈에게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불같이 화내기도 했다. 결국 잡스는 워즈의 아버지까지 찾아가 아들의 마음을 돌려달라고 간청했다. 이때 잡스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고 한다. 워즈의 아버지가 잡스의 정성에 감동했고 고집불통의 아들을 설득해 HP를 그만두고 애플에만 전적으로 매달리도록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래도 워즈는 마음을 굽히지 않았다. 이제 잡스는 고등학교 때 워즈의 친구였던 앨런 바움을 찾아가 그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워즈는 결국 잡스에게 전화해 HP를 그만두고 애플에 몰두하겠다고 말했다.”5
 
스스로 무장하지 않으면 필멸(必滅)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 강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의 힘에 의존하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사람의 힘과 논리에 끌려 다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맡기는 꼴이다.국가적으로는 외국 군대의 힘을 빌려 자국의 안보를 지키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다. 마키아벨리가 가슴 졸이며 지켜보았던 피렌체 외교의 한계는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약소국가의 딱한 현실에서 비롯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용병을 위험하고 불안정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용병은 최선을 다해서 싸우지 않기 때문이다. 충성을 바쳐야 할 대상이 두 개라면 어느 한쪽도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본성이다. 충성심은 오직 한 사람이나 조직에 바쳐질 때 힘을 발휘하게 된다. 양다리를 걸친 사람은 어느 한쪽에도 충성하지 않는다. 인간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
 
용병과 관련한 여러 협상을 진행하고 비텔리의 처형을 지켜본 마키아벨리는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남에게 맡기지 않으려면 스스로 무장해야 한다.” 스스로의 무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워즈니악을 얻기 위해 소리를 지르며 협박하고, 또 울면서 호소했던 스티브 잡스의 행보에서 마키아벨리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인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등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