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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5

울지도 분노하지도 말자, 역사는 울보에게 맡겨지지 않는다

김상근 | 98호 (2012년 2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대중이란 누구인가?

마키아벨리가악의 교사라는 오명을 뒤집어쓰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그의 대표작인 <군주론>은 강자를 위한 권력의 지침서처럼 보이고 어떻게 하면 약자를 겁주고 억압할 수 있는지를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마키아벨리는 힘과 권력을 가진 강자의 하수인처럼 행동하면서 약자를 억누르는 정교한 방식을 고안해낸 인물로 이해됐다. 누구든지 자신을 약자로 규정하는 순간 마키아벨리는 타도해야 할 공공의 적()으로 간주된다. 미국 경제의 심장부 월스트리트를 점령했던 시위대의 슬로건 중에우리는 99%(We are 99%)’란 것이 있다. 세계 경제를 지배하면서 자본주의 체제가 산출하는 이익을 독점하고 있는 상위 1%에 대한 대중의 반감을 표출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상위 1%를 위해 일하는 참모처럼 보였기 때문에 나머지 99%로부터악의 교사란 오해를 받았다.

 

마키아벨리는 본인이 99%의 범주에 속하는 대중(大衆)의 일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대중의 보편적인 속성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대중의 모습은얼빠진 짐승이었고우리에 갇혀 있는 노예에 불과했다. 그는 대중을 노예근성에 물들어 있는 한심한 존재로 생각했다.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말했다.

 

“대중의 습성은 얼이 빠진 짐승처럼 사나운 본성을 지니고 숲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우리 속에 갇혀 노예처럼 사육되고 있다가 뜻밖에 자유로워져서 들판에 방목되면 먹잇감이 어디 있는지, 보금자리인 동굴이 어디 있는지, 그저 어리둥절하여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누군가가 다시 잡으려고 오면 즉시 그 먹잇감이 돼버리는 것과 같다. 타인의 명령하에 사는 데 익숙해진 대중이 바로 그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이다.”1

 

마키아벨리의 눈에 비친 대중이란 늘 강자의 논리에 휘둘리고 힘을 가진 포식자(捕食者)에게 잡아먹히는 나약한 존재였다.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스스로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한다. 마키아벨리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15세기 말 피렌체의 대중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들은 메디치 가문이 르네상스를 일으키고 피렌체 경제를 유럽 최고 수준으로 격상시켰을 때 앞다퉈 메디치 가문을 찬양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다가 경제가 어려워지고 프랑스의 침략이 눈앞에서 펼쳐지자 헌신짝처럼 메디치 가문을 버렸다. 그들은 메디치 저택을 습격해 재산을 약탈하기까지 했다. 이 정치적 혼란기를 틈타 수도사 사보나롤라가하느님의 심판을 운운하며 등장하자 이번에는 신정정치(神政政治)의 주술에 빠져들게 된다. 르네상스와 인문주의가 태동했던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가 갑자기 중세 시대의 암흑으로 뒷걸음쳤다. 그러나 종교적 열광주의도 잠시뿐 피렌체 대중들은 4년 만에 사보나롤라를 불태워 죽여 버렸다. 젊은 마키아벨리는 이런 피렌체 대중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왜 대중은 사보나롤라를 불태워 죽였을까? 과연 대중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들인가? 이들에게 역사의 미래를 맡길 수 있을까? 마키아벨리의 고민은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폴 자민(Paul Jamin)이 1893년에 그린 <브레누스와 그의 전리품>. 로마를 점령한 브레누스가 로마 여인을 포함한 전리품을 챙기는 장면이다. 로마시민들은 베이로 도주했다.

‘대중’의 한계에 대한 인문학적 성찰

마키아벨리는 대중의 실체를 더욱 명확하게 고찰하기 위해 고대 로마의 역사로 돌아갔다. 로마사에 나타난 대중의 실체를 분석한 것이다. 기원전 387, 갈리아인(지금의 프랑스 지역에 살던 야만족)들이 로마를 침공하자 공포에 질린 로마시민들은 도심에서 북쪽으로 16㎞ 정도 떨어진 베이(Veii)라는 작은 도시로 도피했다. 베이는 산 중턱에 있는 도시였기 때문에 야만족의 공격을 방어하기에 적격이었다. 베이로 집단 이주한 일반 시민들은 로마의 귀족계급으로 구성된 원로원과 갈등을 겪게 된다. 야만족의 군대가 침공했을 때 원로원은 시민들에게 함께 힘을 모아 로마를 사수하자고 호소했다. 그러나 겁에 질린 일반 시민들은 원로원의 명령을 무시하고 로마를 버리고 말았다. 텅 비어 있던 로마로 입성한 갈리아의 지도자 브레누스(Brennus)는 일곱 달 동안 마음껏 약탈을 일삼다가 약 1000파운드에 달하는 막대한 금을 보상금으로 챙기고 로마를 떠났다. 로마 공화정의 위대한 역사에 치욕스러운 오점을 남긴 순간이었다.

 

한편 베이로 집단 이주했던 일반 시민들은 야만족이 철수한 로마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로 했다. 적에게 노출돼 있는 로마보다 산악 도시인 베이가 더 안전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시 원로원과의 갈등이 불거졌다. 하루 속히 로마를 재건하려던 원로원은 베이에 거주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법률을 공표했다. 정해진 기간 안에 모두 로마로 귀환하라는 것이었다. 베이의 시민들은 원로원의 결정을 비난하며 새로 제정된 법률을 따르지 않았다. 그러나 막상 정해진 기간이 다가오고 로마로 귀환하지 않은 시민에 대한 강력한 처벌 계획이 발표되자 그들은 하나둘 로마로 돌아갔다. 처벌이 두렵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다른 시민들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는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돌아가 버리면 자기만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이 앞섰다. 마키아벨리는여럿이 함께 있을 때는 포악한 자라도 혼자 남게 되면 무서운 나머지 법률을 따르게 된다는 리비우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일반 대중이란 존재는 이렇게 늘 줏대가 없고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조변석개(朝變夕改)하며 겁을 주면 따를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라고 혹평을 퍼부었다.2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중은 종종 지배자의 결점을 비난하는 데 대담하고 노골적인 언사를 사용하지만 이윽고 형벌이 정면으로 모습을 드러내면 순식간에 동료들끼리 서로 신용할 수 없게 돼 서둘러 그 지시에 따르게 된다.”3

 

기원전 4세기의 로마시민들이나 15세기 말 피렌체의 대중 사이에 별다른 차이가 없다는 것을 마키아벨리는 알아차렸다. 모름지기 대중은 권력을 가진 강자의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것이 일반적인 현상이며 이런 나약한 대중은 강경한 규제로 통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 것이다.

 

채찍과 당근으로 대중을 통제하라

마키아벨리는 대중의 나약한 본성을 까발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대중을 통제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해서 더 지독한 악명을 얻게 된다. 이것 때문에 <군주론>이 약자를 억압하는 강자의 지침서란 고약한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논리를 펴기 위해 다시 고대의 역사로 돌아갔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했다.

 

“아가토클레스를 비롯해 그 밖의 사람들이 배신과 잔혹한 일을 일삼아 왔음에도 각기 제 나라에서 오랫동안 평안하게 지낼 수 있고, 외적을 막아 내고, 시민들의 반란도 전혀 없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 4

 

아가토클레스 기념 동전. 집권하기 전까지 악당이었던 그는 대중을 잘 통제해 탁월한 지도자로 변신에 성공했다.

마키아벨리는 대중을 통제하는 방법을 제시하기 위해 기원전 3세기의 인물인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독재자 아가토클레스(Agathocles, 기원전 361∼289)를 사례로 든다. 아가토클레스는 옹기장이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무자비한 폭력을 동원해 시라쿠사에서 권력을 잡았던 인물이다. 그는 약 1만 명의 시민을 죽이고 왕권을 찬탈한 악당이었지만 그 이후부터는 이상적인 군주의 모델로 시칠리아의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시칠리아가 그리스의 간접지배에서 벗어나고 아프리카 북단의 카르타고로부터 독립할 수 있었던 것은 아가토클레스의 지도력 때문이었다. 15년 동안 시칠리아의 왕으로 군림(기원전 304∼289)하며 국가의 기반을 튼튼하게 다진 후 공화정 제도를 부활시키고 임종을 맞이함으로써나라의 아버지로 불리게 됐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런 질문을 제기한다.

 

“원래 악당이며 독재자였던 아가토클레스가 어떻게 그리스와 카르타고의 지배에서 벗어나 시칠리아의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는가? 아카토클레스가 탁월한 군주로 변신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인가?”

 

마키아벨리는 아가토클레스가 시칠리아의대중을 잘 다뤘기 때문에 성공적인 군주로 변신했다고 분석했다. 아가토클레스의 통치 방식은 의외로 간단했다. 잔혹과 은혜를 적절히 베푼다는 것이다. 이른바채찍과 당근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아가토클레스는 먼저 대중들에게 잔혹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군주의 통제력을 확립한 후 지속적인 은혜를 베풀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정책을 펼쳤다. 마키아벨리는 아가토클레스의 성공비결을 이렇게 설명한다.

 

“잔혹함이 훌륭히 사용됐다는 것은 자기 입장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상 한번은 잔혹함을 행사하지만 그 뒤 더 이상은 거기에 집착하지 않고 가능한 부하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으로 전환한 경우를 말한다.” 5

 



시칠리아 세게스타(Segesta)의 그리스 유적지. 기원전 425∼406년에 건축되었으나 시라큐사의 왕 아가토클레스의 정벌로 폐허가 됐다. 그리스의 지배가 끝난 것이다.

즉 현명한 지도자는 권력을 잡은 초기에 단 한번만 대중에게 잔혹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잔혹하게 행동하면 그는 자기 욕심에 사로잡혀 대중을 탄압하는 독재자로 인식되기 때문에 이런 행동은 절대로 삼가야 한다. 대중은 자신이 누리고 있는 자유를 빼앗기는 것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기 마련이다6  따라서 군주는 단 한번만 잔혹함을 보여주고 그 뒤에는 지속적으로 은혜를 베풀어 민심을 잡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자기에게 해를 끼칠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로부터 오히려 은혜를 입게 되면 보통 때 은혜를 받은 것보다 몇 배나 더 큰 고마움을 느끼게 되는 법이기 때문이다7  마키아벨리는 대중을 이끄는 방식에 대해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잔혹한 가해 행위를 여러 차례 행할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치르도록 하고 다시는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약속으로 민심을 수습한 다음 은혜를 베풀어 민심을 잡아야 한다. <중략> 요컨대 가해 행위는 한번에 끝내야만 한다. 짧은 시일 내에 끝내면 끝낼수록 그만큼 대중의 분노도 쉽게 사라지게 된다. 반대로은혜는 민중이 오랫동안 음미하도록 조금씩 베풀어 줘야 한다.” 8

 

사보나롤라가 화형당한 이유: 무지 혹은 분노

마키아벨리가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애썼던 대중(大衆)이란 계급은 고대 로마에서는 플레비스(Plebis), 피렌체에서는 포퓰레스(Popules)로 불렸던 피지배 계급을 말한다. 고대 로마 시대의 귀족계급이었던 옵티마테스(Optimates) 15∼16세기 피렌체의 상류층인 그란디(Grandi)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29살 이전의 마키아벨리도일반 대중(포퓰레스)’의 일원이었다. 마키아벨리가 대중의 실체에 대해 의문을 가졌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의 정체성에 질문을 던졌다는 말이 된다. 왜 일반 대중은 권력을 가진 강자에 의해 자기 운명이 결정돼야 하는가? 왜 약자는 늘 강자가 휘두르는 힘의 논리에 굴복당해야만 하는가? 왜 우리는 강자의 횡포 앞에서는 주눅이 들고 그들이 베푸는 약간의 선심 앞에서 필요 이상의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마키아벨리는 본인이일반 대중의 계급에 속해 있던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대중의 우매한 속성을 공격하는 입장을 취했다. 이것은 자기 얼굴에 스스로 침을 뱉는 행동이다. 일반 대중은 주체성을 상실하고 늘얼이 빠진 짐승처럼 행동한다는 자기 고백적 성찰을 통해서 마키아벨리는 이 세상의 약자들에게 자조(自嘲)적인 방식으로 조언하고 있다. 사건의 본질이나 현상의 실제 모습을 판단하지 못하고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대중의 모습에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보았다. 거짓 선지자 사보나롤라가 대중의 선풍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피렌체 정국을 장악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그런 사보나롤라가 대중의 지탄과 야유를 받으며 화형을 당하는 모습을 또한 지켜보면서, 마키아벨리는얼이 빠진 짐승처럼 행동할 수 있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사보나롤라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피아뇨니(Piagnoni) 혹은 프라테스치(Frateschi)로 불렸다. 사보나롤라의 설교를 들으면서 감격의 눈물을 쏟아내던 일반 대중에게울보라는 뜻의피아뇨니라는 별명이 붙여졌고 이런 사람들은수도사의 사람이란 뜻의프라테스치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현상을 전부 사실이라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이었다. 한편 사보나롤라의 집권과 득세에 반대했던 피렌체의 귀족층과 중산층은 각각 캄파나치(Campagnacci)와 아라비아티(Arrabbiati)로 불렸다. ‘캄파나치는 최상류층 가문으로 구성됐으며 그란디(Grandi·귀족 명문가)가 주요 멤버였다. 피렌체의 유수한 귀족 가문이 구성원이었기 때문에거만한 집단이란 뜻도 포함돼 있다. 한편아라비아티는 피렌체의 신흥 중산층으로 구성돼 있다. 아라비아티는분노한 자혹은미친 개란 뜻이다. 캄파나치와 아라비아티는 두 집단 모두 사보나롤라에게 반감을 보였지만 대응방식은 각기 달랐다. 귀족 명문가로 구성된 캄파나치는 사보나롤라를 의도적으로 무시했다면 신흥 중산층에 해당하는 아라비아티는 사보나롤라를 이용하려 들었다. 사보나롤라의 득세를 경계했지만 자신의 기득권에 도움이 된다면 일단 관망하며 중립을 지키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캄파나치는 처음부터 냉소적이었다. 이들은 사보나롤라 집권 내내 그를 무시하는 태도를 보였고불의 심판이 예정되자 이를 무지한 행동이라고 비꼬았다. 중세시대에서나 볼 수 있었던 우스꽝스럽고 야만적인 행동이란 것이다. 캄파나치의 지도자격이었던 지롤라모 루첼라이(Girolamo Rucellai)는 사보나롤라의 광기를 잠재우기 위해서불의 심판이 아니라물의 심판을 받는 것이 어떠냐고 비꼬았다. 냉수 마시고 정신 차리란 말이다. 또 다른 상류층 인사였던 조반니 카나치(Giovanni Canacci)우리나라를 건국한 조상들이 이제 피렌체가 전 세계의 오락거리와 불명예로 전락했다고 통탄할 것이라며불의 심판을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인격자로 명성이 높았던 네로 델 네로(Nero del Nero)제발 수도사들은 제자리로 돌아가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로 돌아가라고 하소연했다. 시뇨리아의 자문 역을 했던 귀족 아뇰료 니콜리니(Agnolo Niccolini)는 피렌체 정부가 종교적인 문제에 깊숙이 개입하여 불의 심판을 주도한다는 것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냈다.9  정치와 종교의 엄격한 분리를 주장한 것이다.

 

왜 피렌체의 최상류층 인사들은 사보나롤라에 대해 무관심과 냉소로 일관했을까? 이들은 피렌체의 귀족 가문으로 1494년에 몰락한 메디치 가문과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었다. 대부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으며 사업을 해서 부를 키웠거나 통혼(通婚)으로 메디치 가문과 사돈 관계를 맺고 있었다. 1494년에 메디치 가문이 몰락하고 피에로 데 메디치가 망명을 떠났을 때 이들 귀족계급은 조용히 자기 재산을 피렌체 밖으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다. 막대한 양의 피렌체 금화(florin)가 국외로 빠져나가자 피렌체 경제는 큰 타격을 받았다. 절대적인 통화량이 줄어들면서 피렌체 경제는 타격을 받았다. 피사(Pisa)와의 전쟁경비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었고 여러 해 반복된 흉작으로 기본적인 생활비가 폭등하면서 피렌체 경제는 사실상 마비상태에 이르렀다. 당연히 세수(稅收)가 줄어들었고 피렌체 정부는 극심한 재정난에 봉착했다. 정부가 손을 벌릴 수 있는 곳은 메디치 가문과 연결되지 않았던 신흥 중산층, 즉 아라비아티들이었다. 피렌체 행정부는 신흥 중산층에 해당하는 그들로부터 막대한 국가운영 자금을 빌렸다10  물론 고리(高利)의 이자를 부담하는 조건이었다. 재정난으로 발등에 불이 떨어진 피렌체 정부가 사채업자의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피렌체 정국의 실세로 급부상한 사보나롤라는 이런 고리대금 관행을 극렬하게 비난하면서 이자지급과 원금 환불을 거부하는 태도를 취했다. 돈을 빌려준 피렌체의 신흥 중산층이분노한 자즉 아라비아티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보나롤라 때문에 자기 돈을 떼이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미치자 피렌체의 중산층은 그야말로미친 개가 되어 갔다. 그들 중 일부는 사보나롤라가 설교하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에 몰래 들어가 설교단에 못을 거꾸로 박아놓기도 했다. 설교단을 손바닥으로 치면서 설교하던 사보나롤라가 못에 찔리게 하기 위해서였다.

 

마키아벨리의 관찰에 의하면 사보나롤라는 결국 피아뇨니의 무지와 아리비아티의 분노 때문에 죽임을 당한 것이다. 사보나롤라 사태의 본질은 그의 설교를 들으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피아뇨니(울보)들의 부적절한 현실 판단과미친 개로 변해갔던 아라비아티(분노한 자)들이 분노로 이성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피렌체 우피치미술관 회랑에 서 있는 마키아벨리의 동상 앞에서 사람들이 잡담을 나누고 있다. 마키아벨리는 그들에게 무엇인가 말을 건네려는 표정을 짓고 있다.

난세를 살아가는 방법

혼란에 휩싸였던 15세기 말 피렌체 사회는 지금의 사회와 놀랄 만큼 닮아 있다. 일반 대중은피아뇨니(울보)’처럼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면서 일부 선동가들의 꼬임에 넘어가고 있다. 그들은 순진하게도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모든 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우리 가운데 아라비아티(분노한 자)가 폭발적으로 증대하고 있다는 것도 또 다른 심각한 문제이다. 글로벌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로 전 세계의 많은 중산층들은 빠른 속도로분노한 자로 변하고 있다. 2011년 말에 발표된 통계청의 자료가 그것을 정확하게 보여준다. 자신이 속한 사회 계층을 묻는 질문에나는 하층민이라고 답한 사람은 45.3%이고나는 중산층이라고 답한 사람은 52.8%였다11  중산층과 하층의 차이는 7.5%포인트에 불과하다. 이 조사가 처음 시작됐던 1988년에는 이 차이가 무려 24%포인트였다. 붕괴하고 있는 한국 중산층의 모습을 여기서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급속한 경제적 몰락이 눈앞의 현실로 나타나자 많은 중산층들은아라비아티로 돌변하면서 급속하게 스스로를 하층민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무지와 분노로 폭발직전에 있는 현대 사회를 본다면 무슨 말을 할까?

 

20대 후반, 사보나롤라가 초래한 광란의 시대를 살았던 마키아벨리는 냉정한 관찰자였다. 선동가의 외침에 쉽게 넋을 잃지도 않았고 분노한 사람들 틈에 끼여 무작정 돌을 던지지도 않았다. 그는 냉정한 관찰자로 머물며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세상의 흐름을 관찰했다. 그는 출신이 비천해 세금 체납자의 아들이라는 오명을 쓰고 청춘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돈이 없어서 책을 사 보지도 못할 만큼 가난에 치여 살았다. 이런 불명예스러운 자식의 아들이 대학교육도 받지 못했고 남들처럼 변호사 자격증도 없었는데 당당히 피렌체의 외교를 담당하는 제2 서기장으로 등장한 것이다. 난세(亂世)의 정중앙을 지나가고 있던 피렌체 정국에서 마키아벨리가 국가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권력의 핵심으로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 스스로가얼이 빠진 짐승처럼, 즉 대중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자기 이익을 좇아 쉽게 분노를 폭발시키던 아라비아티처럼 행동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마키아벨리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다짐했을 것이다.

 

“울지도 말고, 분노하지도 말자. 역사는 울보에게도, 분노한 자에게도 맡겨지지 않는다.”

 

대중은 왜 늘 소수의 지배자에게 당하고 사는 것일까? 그것은 그들이 울보이기 때문이며 쉽게 분노하면서 이성을 잃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국가>에서 마키아벨리와 똑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왜 한쪽은 언제나 지배하고 다른 한쪽은 언제나 지배를 받아야 하는가?” 12

 

아리스토텔레스가 스스로 내린 대답은 마키아벨리의 대답과 같았다.

 

“지배를 하는 사람은 이성을 가진(logon echon) 반면 지배를 받는 사람은 비이성적(alogon)으로 행동하기 때문이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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