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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 위기를 잊고 사는 한국, 한국기업

“당신의 기업, 안녕하십니까?”

문권모,정임수 | 6호 (2008년 4월 Issue 1)
문권모·정임수기자 dbr@donga.com
 
매년 1000개씩 팔리던 장수식품 새우깡에서 이물질이 발견되자 수십 년간 힘겹게 쌓아왔던 브랜드 가치는 순식간에 증발하고 ‘생쥐깡’이란 오명만 남게 됐습니다. 대공황과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도 꿋꿋하게 버텨왔던 미국 투자은행 베어스턴스는 위기설이 제기된 불과 나흘 만에 본사건물값의 5분의 1안되는 헐값에 팔리고 말았습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그리고 한국전쟁을 거치며 무려 610년을 버텨왔던 국보 1숭례문은 순간 화마에 휩쓸려 사라졌습니다. 어떤 기업에도 치명적 위기는 찾아올 있습니다. 하지만 관리하고 대비하면 위기가 닥쳐도 피해를 최소화할 있습니다. 전사적 위기관리(ERM)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최고의 전문가들과 함께 진행한 사례분석을 통해 리스크 관리를 위한 실용적 솔루션을 제시합니다.
 
위기를 위기로 직감하면 헤어날 방법은 반드시 있다. 그러나 위기를 위기로 인식하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멸문(滅門)의 길로 가게 된다.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풀릴 그때가 위험한 고비일 수 있다.”
최인호의 소설 ‘상도(商道)’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위기 불감증이 어제 오늘 이야기가 아니지만 아직도 한국 기업의 위기관리 수준은 낙제점이다. 특히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다가 한 순간 위기가 닥치면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기업도 무너지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 국내외 기업과 공공기관에 대한 광범위한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위기관리 능력 향상을 위한 실용적 교훈을 제시한다.
 
위기 식별과 사전 대비가 열쇠
리스크 관리의 첫 출발점은 사전에 위기를 ‘식별(identify)’하는 것이다. 발생 빈도가 높으면서도 회사에 치명적일 수 있는 위험이 무엇인지부터 미리 파악해야 대책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지하철 운영 관리를 담당하는 기관의 책임자라면 어떤 위험 요인을 생각할 수 있을까. 화재나 운행사고, 침수, 정전, 테러, 지진, 누전, 전동차 충돌, 총기사고 등 수없이 많다. 이 가운데 한국적 상황에서 지진이나 총기 사고 등은 상대적으로 발생 가능성이 낮다. 또 운행 사고나 전동차 충돌은 시스템 개선으로 발생 가능성을 낮춰가고 있으며 누전도 그 자체보다는 이로 인한 화재가 더 큰 위협이다. 특히 지하철은 불특정 다수가 이용하며 폐쇄된 공간에 많은 사람들이 밀집해있다. 따라서 테러의 표적이 될 수 있으며 화재 발생 시 대형 인명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
 
조금만 고민하면 누구라도 쉽게 이 정도 판단은 할 수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3년 2월 192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구 지하철 화재가 발생하기 전 대구지하철과 소방당국은 이런 가능성에 대해 거의 고려하지 않았다.
화재를 지하철의 중대한 위험으로 생각했다면 적어도 몇 차례의 화재 진압 훈련은 실시해야 했다. 하지만 대구에서는 단 한차례도 이런 훈련이 없었다. 밀폐된 공간에서 불이 나면 무엇보다 유독가스가 치명적이다. 따라서 유독가스를 일으키지 않는 건축 자재나 내장재를 사용해야 했다. 그렇지만 대구 지하철은 고온에 취약한 재료를 썼다.
또 객차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경우 승객들의 신속한 대피가 최우선 과제다. 안타깝게도 대구 지하철에서 비상시 차량 문을 여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지하 공간이란 특징 때문에 비상구도 더 확충하고 정전 시 비상구 위치를 잘 확인할 수 있도록 대비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전혀 이런 대책은 없었다. 결국 수많은 사람이 불길과 화염에 고통 받다 세상을 떠났다.

만약 식품업체 관리자라면 전혀 다른 종류의 위험을 생각해봐야 한다. 본사 건물에 테러 공격이 가해지거나, 침수로 인해 공장이 잠기거나 하는 위험은 상당수 한국 기업들 입장에서 발생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낮다. 발생 가능성이 높으면서도 회사 존립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 ‘식품 안전’ 문제다. 제조 공정에서 인체에 유해한 성분이나 이물질이 포함돼 있을 수도 있다. 또 제품은 잘 만들었다 하더라도 유통 과정에서 제품이 변질돼 소비자가 피해를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아무리 제품을 잘 만들고 유통 과정에 만전을 기했어도 정신 이상자나 테러리스트가 자사 제품에 독극물을 넣을 수도 있다. 이런 사고 가운데 하나만 언론에 공개되더라도 해당 기업은 치명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잠깐만 생각해도 이런 위협 요인을 쉽게 도출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의 대표적 식품회사인 농심은 사전에 체계적인 대비를 하지 못했다. 대표 상품 가운데 하나인 새우깡에서 생쥐 머리로 추정되는 이물질이 발견됐지만 농심은 무려 한 달간 이를 감추기에만 급급했다. 문제를 제기한 소비자에게 라면 3박스를 위로품으로 주며 사건 무마와 은폐에만 열을 올렸던 것이다. 당연히 신문 헤드라인에 ‘농심 한 달 간 쉬쉬’란 제목이 뽑힐 수밖에 없다.
 
금융회사라면 어떤 위험이 가장 심각하고 위협적일까. 금융상품의 특성상 내부 직원들의 과도한 레버리지나 변동성이 큰 상품에 대한 지나친 투자다. 이런 투자를 통해 신뢰가 무너지면 투자자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기 때문에 초대형 금융기관도 한 순간에 몰락한다. 역사와 전통을 가진 영국 베어링스은행과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SG), 미국 베어스턴스 등이 이런 일을 경험했다. 특히 최근 단 한 번도 적자를 내지 않았던 베어스턴스는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로 유동성이 악화됐다는 소문이 퍼진 후 불과 4일 만에 헐값에 팔리고 말았다. 이로 인해 국내 금융회사들의 피해액도 4000억 원 이상으로 추정됐다. 따라서 금융회사라면 위험자산 투자에 따른 위험을 가장 심각한 것으로 파악하고 반드시 사전에 철저한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
 
김두철 한국리스크관리학회장(상명대 산업대학장)은 “닥칠 수 있는 수많은 위험 중에 얼마나 자주 발생하느냐는 보다는 리스크가 현실화했을 때 얼마나 큰 타격을 줄 수 있는지 강도를 따져 관리의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 리스크를 확인하고 평가하는 기본 과정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리스크 매뉴얼은 필수
2006년 3월 서울 잠실 롯데월드에서 놀이기구를 타던 이 회사 직원이 10여m 아래 바닥에 떨어져 숨졌다. 이 직원은 술을 마시고 놀이기구에 탔지만 제지를 받지 않았다. 또 안전요원들은 숨진 직원이 안전벨트를 제대로 착용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여기에 더 심각한 문제가 사고 후에 드러났다. 사고가 발생했음에도 해당 놀이기구가 2차례나 더 운행됐던 것. 사고가 났다면 당장 놀이기구 운행을 중단하고 원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은 안전 관리 경험이 없는 사람이라도 누구나 알 수 있는 상식이다. 이 기구는 최고 속도가 시속 72㎞로 최대 지상 21m까지 상승하는 롤러코스터였다. 만약 기계에 작은 결함이라도 있었더라면 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다.
기업에 치명적인 리스크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평가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리스크 매뉴얼을 만드는 것이다. 롯데월드가 인명 사고 시 행동 준칙과 보고 체계 등을 규정한 리스크 매뉴얼을 갖고 있었더라면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리스크 매뉴얼은 제대로 만들어야 한다. 숭례문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때 소방방재청과 문화재청이 우왕좌왕하는 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은 잿더미로 변했다. 문화재청은 사고 발생 후 ‘문화재 재난 위기대응 실무 매뉴얼’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매뉴얼은 화재 시 행동요령으로 ‘신속하게 신고하고 안전조치를 취한 후 침착한 소화 활동을 통해 주요문화재를 보호해야 한다’는 상식적인 문구만을 담고 있었다. 실제 화재진압 실패의 원인인 건축물 구조나 전문적인 화재진압 방법은 매뉴얼에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응급 환자에게 초기 응급 치료가 목숨을 좌우하듯 위기 발생시에도 초기에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만약 제대로 된 매뉴얼을 직원들이 습득하고 있다면 초기 대처가 훨씬 정교하게 이뤄질 수 있고 문제가 악화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리스크 관리 매뉴얼에는 △위기상황의 정의 △위기의 성격 및 종류 △위기 대응팀의 구성 △담당자별 행동 요령 △사내 비상연락망 등이 포함돼야 한다. 위기 상황의 종류에는 아주 작은 사안부터 최악의 상황까지가 모두 포함돼 있어야 한다.
 
매뉴얼 제작에는 CEO를 비롯해 기업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해야 한다. 특히 해당 위기상황과 관련한 담당자는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숭례문 사건의 경우 소방전문가가 아닌 문화재청 공무원이 매뉴얼을 만들었다는 게 문제였다. 매뉴얼을 관리하는 문화재안전국 직원 9명 중 소방전문가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번 만든 리스크 관리 매뉴얼은 주기적으로 수정, 보완해야 한다. 수시로 워크숍이나 교육을 통해 조직원들에게 내용을 전달하고 숙지시키는 것도 중요하다.
 
적극적이고 진솔한 커뮤니케이션을 하라
큰 사고가 터지면 회사 임직원들은 당황하기 십상이다. 사건에 대한 진상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황에서 여론의 시선이 한꺼번에 집중되는데다 기자들까지 몰려들기 때문에 식은땀이 흐르고 정신까지 혼미해진다. 이런 혼란 속에 통상 많은 기업들은 △입장 표명 유보(혹은 침묵) △책임 회피 △거짓말 등 세 가지 유형으로 대응하곤 한다. 하지만 이 모두 심각한 문제를 유발할 수 있다.
 
지난해 12월 7일 삼성중공업 소속 예인선이 끌고 가던 크레인이 정박 중인 유조선을 들이받아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후 삼성중공업은 책임을 즉각 인정하지 않고 “법원에서 가려질 것”이란 입장을 고수했다. 입장 유보 방침을 고수하다가 사고 발생 47일 만인 1월 22일에야 삼성중공업 사장과 임직원은 ‘국민 여러분께 큰 충격과 걱정을 끼쳐 드려 죄송하다’고 밝혔다. 배상에 대한 언급은 2월 29일에야 ‘1000억원 지역발전기금’ 형태로 나왔다.
 
삼성중공업이 이처럼 입장 표명을 유보하고 침묵했던 데에는 나름 이유가 있을 수 있다. 사건의 진상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책임을 인정하는 게 오히려 여론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 내부에서 설득력을 얻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입장 표명이 유보되는 동안 발생하는 정보 공백은 수사 기관이나 경쟁사, 네티즌들로 채워진다. 이 과정에서 자칫 음모론까지 확산될 수 있다. 실제 태안 기름유출 사고 후 음모론이 유포되기도 했다. 결국 삼성중공업에 대한 비난여론은 극도로 고조됐다. 농심도 새우깡 이물질 사건에 대한 한 달 간의 오랜 ‘침묵’ 때문에 나중에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았다.
책임 회피도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다. 미국 이유식 업체인 거버(Gerber)사는 제품에서 유리가 발견됐다는 고객들의 항의가 빗발치자 “미디어의 집단 폭행으로 우리가 희생자가 됐다”며 책임을 회피했다. 언론의 앞서 나가는 보도에 억울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태도는 대중들에게 책임 회피로 비쳐졌다. 결국 거버사는 속절없이 시장 점유율 하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은 더욱 치명적인 유혹이다. 일본 햄·소시지 시장의 80%를 차지하며 매출액 1000억 엔을 올리던 유키지루시 식품은 호주산 쇠고기를 일본산으로 속여 팔다 적발됐다. 이 회사는 개인 차원의 비리일 뿐 회사나 조직이 관여한 사실이 없다고 거짓 해명을 하다가 소비자의 외면을 받았다. 신뢰를 잃은 유키지루시 식품은 2002년 4월 문을 닫았다. 경비업체 에스원도 경비를 담당하던 직원이 고객 집을 절도하다 적발되자 “범인은 퇴직한 직원”이라고 거짓말을 했다가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 농심은 한 달간 새우깡에 이물질이 발견된 사실을 숨긴 이유에 대해 “쥐 머리로 인정할 만한 근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해명하다가 식약청에서 사진과 현미경 관찰 결과 쥐머리로 추정할 수밖에 없다는 입장을 발표하자 어쩔 수 없이 사과를 했다. 이런 증거 인멸과 거짓말 등은 다른 농심 제품의 신뢰도에도 치명적 영향을 끼쳤다.
 
이처럼 문제를 회피하기 위한 수동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보다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이며 진솔한 자세가 훨씬 효과적이다. 진상이 확인되지 않았다면 적어도 △진상 파악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고 △소비자 피해에 대해서는 어떤 경우라도 책임을 회피하지 않겠으며 △피해 확산을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정도의 입장은 밝혀야 한다. 또 회사 내부의 잘못이 드러났다면 △신속하게 △고위 임원이 직접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를 해야 한다. ‘공자님 말씀’이 아니라 진심이 담긴 진솔한 사과는 오히려 동정과 용서를 구할 수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르윈스키와의 스캔들을 사죄한 후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기도 했다.
 
반대로 사과의 진실성이 떨어지면 오히려 일이 더 꼬인다. 농심은 새우깡 사건이 발생한 뒤 한 달이 지나서야 사과를 하긴 했다. 하지만 이물질이 검출된 제품 중 일부만 수거하면서도 사과문에 해당제품 전량을 폐기하겠다고 언급해 축소 의혹을 받았다. 이로 인해 사과의 효과가 반감됐고, 농심 불매운동까지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위기 상황에서 제대로 커뮤니케이션하기 위해서는 ‘3·3·3 원칙’에 따라 대응을 해야 한다. 3시간 이내에 위기 대응팀을 구성하고, 3일 동안은 긴급 활동을 하며, 3주간은 이후 상황을 관찰하고 추가 대응 활동을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커뮤니케이션 창구를 철저하게 단일화해야 한다. 직원들이 ‘중구난방(衆口難防)’식으로 입장을 표명하거나 언론 취재에 응하다보면 개인적 의견이 회사 의견으로 비쳐질 수도 있다. 일례로 식품 사고가 난 회사 직원이 “식품 안전관리를 위해 어떤 시스템을 갖추고 있느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더라도 다음날 신문에 “안전관리 시스템 엉터리… 직원들 내용조차 몰라”로 보도될 수도 있다. 일관된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반드시 경험 많은 전담자를 책임자로 지정해야 하며 다른 직원들의 개별 대응은 철저히 막아야 한다.

철저한 내부 통제 시스템 구축
직원의 비리나 역량 미흡, 감사 부재 등 조직의 내부적인 원인에서 파생되는 잠재적인 리스크도 기업에 치명적일 수 있다.
1762년 설립돼 한때 영국의 왕실자금까지 관리하던 베어링스 은행이 대표적 사례다. 1992년 이 은행 싱가포르지점에서 근무하던 28세의 젊은 직원 닉 리슨은 자신의 사소한 거래 실수를 감추기 위해 가명 계좌를 만들기 시작했다. 리슨은 초기의 작은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차익 거래뿐만 아니라 투기 거래에 나섰다. 여기서 이익이 나면 정식 계좌에 등록해 보고했지만 손실이 발생하면 다시 가명 계좌에 감췄다.
이 과정에서 숨겨진 손실이 점점 커지자 리슨은 손실을 일시에 만회하기 위해 큰 도박에 나섰다. 고베 지진 복구를 위해 일본이 재정 지출을 늘리자 일본 경제가 회복될 것이라 판단하고 일본의 주가지수선물을 대량 매입하면서 일본 국채 선물을 매도했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일본 주가지수는 하락을 거듭했고 총 13억 달러의 손실이 발생했다. 10억 달러에 이르던 자기자본은 완전히 잠식됐고, 채권자들은 채권액의 20분의 1만을 겨우 건질 수 있었다.
 
베어링스 은행에는 직원의 업무나 거래를 상시적으로 감시하고 관리하는 내부통제 시스템이 없었다. 리슨은 헤지를 하지 않고 리스크가 높은 거래를 잇달아 했지만 회사는 사전에 이를 파악해 경고를 내리지 않았다. 또 금융기관은 직접 거래를 담당하는 업무와 이를 지원하고 통제하는 업무가 분리돼 있어야 하는데 리슨은 금융거래부터 장부 정리까지 모든 권한을 갖고 있었다. 권한이 집중된 부서나 직원에 대해서는 업무 현황을 수시로 파악하고 잘못된 의사결정 등에 대해 통제하고 감시하는 절차가 반드시 필요하다.
 
위기관리 리더십 갖춰야
잘못된 리더십도 기업에 위기를 가져오는 주요 요인 중 하나다. 미국 사우스이스턴 대학의 로트피 게리쉬 교수에 따르면 위기, 특히 부정한 행위는 리더십의 부재 또는 리더들의 잘못된 조직 관리 탓에 발생한다. 고위 경영진의 행동과 이를 따르는 중간 관리자들의 동조는 조직에 불문율 같은 ‘분위기’를 만들고, 이런 분위기는 명문화된 규정을 뛰어넘어 상당한 영향력을 갖는다.
 
올해 1월 프랑스 소시에테제네랄(SG) 은행에서 일어난 사상 최악의 금융사고는 잘못된 조직 문화가 어떻게 위기를 만드는지 잘 보여준다. 30대 초반의 주식선물 트레이더 제롬 케르비엘이 일으킨 이 사고는 49억 유로라는 천문학적 손실을 가져왔다.
은행 측은 서둘러 “해당 직원이 회사 규정을 어기고 불법으로 자금을 운용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많은 금융 전문가들은 회사 내의 묵인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입사 2년차인 ‘햇병아리’가 500억 유로를 굴리는 것을 어떻게 최고의 내부통제 시스템을 갖춘 회사가 모를 수 있었냐는 것이다. 게다가 사건을 저지른 케르비엘도 “은행 상사가 선물투자 규모를 몰랐을 리가 없다. 하위직에서(상사의 묵인 없이) 그런 이익을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이 사건은 ‘돈만 벌면 된다’는 조직적인 불문율 혹은 분위기가 가져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은행 고위층이나 중간관리자의 행동이 비윤리적 행위에 대한 ‘면죄부’가 되지 않게 주의했다면 사고가 생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경영진이 현장을 외면하는 것도 위기를 불러오는 원인이다. 이정조 리스크컨설팅코리아 대표는 “CEO가 현장을 살펴보면 위기와 관련한 징후와 ‘정보(intelligence)’를 얻을 수 있다”며 “아울러 조직 전체에 적절한 긴장을 불어넣어 위기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최근 유동성 위기로 장부가의 1.2%에 회사가 넘어간 미국 베어스턴스은행은 현장 경영을 외면한 대표적 사례다. 지난해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임한 이 은행의 제임스 케인 전 회장은 “사무실에만 앉아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했다”는 비난을 들었다.
재벌 2세들이 컨설팅회사 및 사내 전략팀과 함께 ‘장밋빛 시나리오’를 짰다가 실패의 구렁에 빠지는 것도 현장을 챙기지 못해서다. 전략적 조기경보 분야의 권위자인 벤 길라드 박사는 “효과적인 정보는 고객과 부품, 종업원에게서 나온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 조직의 리더가 리스크 관리 조직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지적도 많다. 김상일 연세대 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우리나라에서는 리스크 관리를 진단이나 감사 등 ‘힘없는 조직’에서 맡는 경우가 많다”며 “최고경영자가 관심을 갖고 힘을 실어줘야 이들이 어두운 부분을 속속들이 밝히며 제대로 일할 수 있다”고 말했다.

[DBR TIP] 홍콩 지하철과 일본 문화재 관리

2004
년 1월 홍콩에서도 대구 지하철 방화를 연상시키는 사건이 발생했다. 출근길 1200여명의 승객이 타고 있던 지하철에 50대 남자가 신문지에 불을 붙인 뒤 석유통과 일회용 버너 가스통 5개를 지하철 안에 던져 넣은 것. 대구 지하철에 비해 훨씬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사건 발생 10여분 만에 화재가 진화됐다. 승객 14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는 데 그쳤다. 홍콩 지하철은 화재 발생에 대비해 사전에 전동차 내부에 스테인리스, 알루미늄 등 불연성 소재만을 사용했다. 또 홍콩 정부는 매년 화재에 대비한 훈련을 공개적으로 실시했으며, 직원들을 대상으로 안전 훈련을 엄격하게 시행했다.
 
문화재 방재 시스템 분야에서는 일본이 가장 앞선 나라로 꼽힌다. 일본 정부가 지난해 문화재 방재시설 설치에 책정한 예산만 무려 12억여 엔. ‘문화재 방화(防火)의 날’로 제정된 1월 26일에는 전국 중요 문화재를 중심으로 관할 소방서와 공무원, 일반 시민까지 참여하는 대규모 소방 훈련이 매년 실시된다. 일본의 주요 문화재에는 물대포와 스프링클러는 물론 자동 화재경보기, 열감지기 등이 설치돼 있다. 소방서를 비롯한 관계 당국과 직통 비상 전화나 비상벨이 연결된 곳도 많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철저한 문화재 방재 시스템을 갖추게 된 이유는 과거 뼈아픈 사건을 겪었기 때문이다. 1949년 세계 최고(最古) 목조건물인 사찰 금당(金堂)에서 화재가 발생해 고구려 승려 담징이 그린 금당벽화가 소실되는 등 심각한 피해를 겪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일본 국민들은 문화재 위험 관리에 대한 인식을 갖게 된 것이다. 또 1995년 발생한 고베 대지진을 계기로 이런 인식을 더욱 확고하게 굳히게 됐다. 즉, 직접 리스크를 경험하면서 리스크 관리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 것이다.
 
[DBR TIP] 월마트의 허리케인 ‘카트리나’ 대응

월마트는 2005년 8월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뉴올리언스를 강타했을 때 신속하고 정확한 대응으로 찬사를 받았다. 심지어 정부의 재난방재 당국보다 발 빠르게 움직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월마트는 카트리나에 대한 대응을 허리케인이 뉴올리언스에 상륙하기 6일 전인 8월 23일 이미 시작했다. 연방기상청이 경보를 발령하기 12시간 전 이미 ‘비상물류배치계획’을 완료하고 피해 지역 주민들이 필요로 할 물건을 인근 물류센터로 실어 보냈다.
 
월마트는 허리케인 상륙에 대비해 세세한 부분까지 계획을 세웠으며, 모든 것을 사전에 작성한 매뉴얼대로 진행했다. 특히 허리케인 피해지역 소비자의 구매 패턴까지 연구해 위기 상황에 대비했다. 월마트가 수집한 자료에 따르면 피해 지역 소비자들은 초기에 생수, 손전등, 발전기, 방수외투 등을 많이 구매한다. 보관이 쉽고 온 가족이 먹을 수 있는 딸기 파이도 ‘초기 대응 물품’ 중 하나. 허리케인이 지나가고 복구 작업이 시작되면 전기톱과 걸레 등이 많이 팔린다.
 
카트리나에 대한 대응은 아칸소주 벤톤빌에 있는 비상운영센터(Emergency Operations Center)가 실시간으로 지휘했다. 허리케인 추적 소프트웨어까지 갖춘 센터의 지휘에 따라 피해 현장 직원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덕분에 허리케인 상륙 보름 만인 9월 16일부터 재해지역에 있는 126개 점포 중 113개가 정상 가동을 시작했다. 월마트는 이후 한동안 뉴올리언스 주민들의 유일한 ‘생명선’ 역할을 했다.
 
[DBR TIP] MS의 리스크 관리 시스템

마이크로소프트(MS)는 리스크 관리의 ‘교범’으로 꼽히는 기업이다. MS는 1997년 전사적 리스크 관리를 담당하는 리스크 관리 그룹(RMG·Risk Management Group)을 출범시켰다. RMG의 관리 영역은 재무부문(FRM·Financial Risk Management)과 비즈니스부문(BRM·Business Risk Management)으로 이뤄져 있다. FRM은 다른 기업의 재무 리스크 관리부서와 비슷한 역할을 하며, 전사 통합 재무정보 시스템을 자체 개발해 다양한 재무 리스크에 대한 대응 활동을 수행한다.
다른 기업과 차별화됐으며, 탁월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은 비즈니스부문이다. BRM은 인터넷에 기반을 둔 리스크 정보 시스템을 운영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MS의 중간관리자들은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리스크 관리 인트라넷 사이트에서 필요한 정보(유사한 프로젝트의 리스크 체크리스트, 메모, 베스트 프랙티스)를 모두 제공받을 수 있다.
 
인트라넷 이외에도 RMG의 리스크 전문가들은 재무, 마케팅, 법무 등 각 사업 부문의 경영자 및 관리자들과 직접 접촉하며 긴밀히 협력한다. 이들은 경영자 및 관리자들이 빠트리고 지나가는 리스크에 대해 조언해 주며, 다른 사업부문의 지식을 전해주기도 한다. 새로운 제품이나 프로젝트 그룹이 사업을 진행하기 전에 리스크 요인을 찾아내고 우선 대응 순위를 매기는 것을 도와주는 것도 주요 업무 중 하나.
마이크로소프트는 리스크 지도를 활용해 리스크를 중요도에 따라 관리하는 가장 대표적 기업이다. 리스크 지도는 여러 가지 리스크를 영향력과 발생빈도(또는 발생 가능성)에 따라 2차원 평면에 배치하고, 중요도를 가려내는 기법이다. MS는 20:80의 법칙을 적용해 20%의 주요 리스크에 대해 80%의 관리 노력과 자원을 집중한다.
 
RMG는 현장에서 리스크를 찾아내는 것과 동시에 지진 발생과 같은 예기치 못한 리스크의 영향 및 파급효과를 마련하고 대응책을 찾아내기도 한다. 이때 사용하는 기법이 바로 시나리오 분석이다. 시나리오 분석은 ‘보험 가입’과 같은 단순한 해결책이 아니라, 여러 가지 가능성을 고려한 총체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게 해 준다. 다시 말해 하나의 사건으로 파생될 수 있는 여러 가지 파급 효과를 찾아내고 그에 대한 대응방안을 강구하는 것이다.
MS는 연구개발(R&D) 건물이 모여 있는 미국 시애틀 지역의 지진에 대비해 다수의 시나리오를 마련했다. 그 결과 △MS 주식거래 중단으로 인한 증시 혼란 △직원에 대한 임금 미지급 △사업 중단으로 인한 시장점유율 하락 △R&D 중단에 따른 신규사업 차질 등의 리스크 요인이 도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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