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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21C에도 ‘헝그리 정신’이 필요한 이유

임용한 | 76호 (2011년 3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을 수도로 그리스와 소아시아 일대에 걸쳐 있었던 비잔틴 제국은 서기 610년에서 1453년까지 1000년 가까이 생존했다. 이 긴 수명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비잔틴 제국이 자리를 잡은 지역은 동서문명의 교차점으로 수많은 강대국들이 명멸하고 수많은 민족이 이동해갔다. 사라센, 오스만 등 굵직한 제국과 훈족의 침입, 게르만족의 대이동 등 격변의 현장에서 비잔틴은 1000년을 버틴 것이다. 어쩌면 좀 더 오래 지속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1453 5 28일 그날의 불행했던 사건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테오도시우스의 3중 성벽과그리스의 불

군사적인 측면에서 비잔틴 제국을 지탱해 준 특별한 요인은 수도 콘스탄티노플(현 이스탄불)의 유명한 성벽이었다. 성벽을 완성한 황제의 이름을 따테오도시우스의 성벽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벽은 여러 번 개보수를 거쳤지만 기본적인 구조는 비슷하다. 성벽의 길이는 22.5km에 달하고 성벽의 앞에는 항상 물이 차 있는 커다란 해자가 있는데 폭이 18m 정도다. 해자의 안쪽 벽에는 총안을 뚫은 방벽을 세웠다. 이것이 첫 번째 벽이다. 그 벽 뒤에 계단 형태로 2개의 단이 있다. 계단은 통로 공간과 성벽이 세워진 성벽 공간으로 나뉜다. 통로의 넓이는 12∼15m이고 성벽의 높이는 7.5m, 두께는 2m였다. 성벽은 뒷계단의 벽과 닿아 있다. 이 성벽이 외벽인데, 45∼91m 간격으로 사각형의 탑(우리식 용어로는 돈대)이 돌출해 있다. 탑의 수는 96개였다. 그 뒤의 계단도 같은 형태인데 통로의 폭은 앞의 통로와 비슷하지만 성벽, 즉 내벽은 높이가 12m, 두께가 5m였다. 그리고 내벽의 탑과 탑 사이에 외벽의 탑과 같은 수의 탑을 세웠다. 이 탑의 높이는 18m에 달했다.

세계에는 많은 성이 있다. 독특하고 아기자기한 장치를 갖춘 성도 많다. 테오도시우스의 성벽도 그런 구조물이 없는 건 아니지만 20km가 넘는 길이에 거의 일직선으로 서 있는 이 성벽은 그런 복잡한 장치보다는 성벽 자체의 견고함으로 당당하게 승부한다. 압도적인 힘이 있으면 잔기술이 필요없다는 역사적인 증거와 같다. 1000년의 세월 동안 이 성벽은 무수한 공격을 받았지만 그 어떤 사나운 군대도 이 성벽을 돌파하지 못했다.

이렇게 요새화된 성을 공격할 때는 직접 공격대신 장기전으로 가는 방법도 있다. 성을 포위하고 굶주릴 때까지 기다린다. 수비하는 측에서는 식량 결핍 이전에 물 부족이 치명적이다. 물이 부족해지면 전염병이 돌기 십상이다. 콘스탄티노플에는 평균적으로 40만 명 정도의 시민이 살았고 전성기에는 70만에 달했다. 하지만 이 위대한 도시는 식량은 물론이고 엄청난 인구가 3년을 버틸 수 있는 물 저장능력이 있었다. 특히 도시 자체를 거의 2층 구조로 만들어 지하공간에 구축한 수조는 경이에 가깝다.

사실은 포위할 수도 없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삼각형의 반도였기 때문에 성벽을 포위해도 바다를 통해 얼마든지 보급을 유지할 수 있었다. 비잔틴 제국도 이 사실을 알고 바다를 지키기 위한 방법을 찾아냈다. 그것이 유명한그리스의 불이다. 그리스의 불은 가연성 액체로 액을 발사하고 불을 붙이면 화염방사기가 됐다. 이 불은 물을 부어도 꺼지지 않고 바다 위에서도 탔다. 비잔틴 함대는 물 속으로 관을 연결하고 액체를 방사한 뒤 불바다를 만들어버리는 전술도 곧잘 사용했다. 제국은 이 제조법을 철저히 함구해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비밀을 보존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날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나프타와 피치, 나무의 진, 식물성 기름, 수지 등을 섞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리스 불의 효과에 대해서는 이설이 있다. 이 비밀무기야말로 비잔틴의 바다를 사수한 일등공신이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고, 소문이 부풀려진 것으로 적을 놀라게 할 뿐 큰 중상을 입히지는 못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살상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라고 해도 무기의 효용을 꼭 살상력으로만 판별할 수는 없다. 비잔틴 함대는 함선 수에서 밀리거나 바이킹이나 노르만족, 아랍의 해적들에 비해 근접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이때 화염은 근접전투를 어렵게 하는 데 제격이었다. 바다를 채운 불바다는 함대의 밀집과 집중공격을 방해했다. 그것은 적의 포위망을 분쇄하고 항구 공략을 어렵게 하는 데 아주 유효했다. 비잔틴 해군의 전술적 용도와 목적에는 아주 적합한 무기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거대한 돌벽과 불로 보호되는 콘스탄티노플을 고립시키려면 최소한 10만 명 이상의 거대한 지상군에다 화염지옥을 두려워하지 않고 삼각형의 양쪽 항구를 제압할 수 있는 압도적인 함대가 필요했다. 과학과 군사기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옛날에는 군대와 전술도 자연환경과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런데 땅과 바다는 상극이어서 10만 명 이상의 정예 지상군과 해협 두 개를 동시에 제압할 수 있는 강력한 해군 함대를 동시에 보유한 국가는 거의 없었다. 혹 있다고 해도 그 엄청난 병력을 3년 동안이나 한 곳에 묶어둘 재력과 군사력을 지니지는 못했다.

오스만투르크의 콘스탄티노플 침공

1453 4월 콘스탄티노플은 최대의 위기에 봉착했다. 오스만투르크의 걸출한 군주인 메메드 2세는 제국의 성장에 눈엣가시와 같던 비잔틴 제국을 어떻게든 끝장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예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이곳을 자신의 수도, 제국의 중심으로 만들려는 구상까지 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면 투르크 제국은 과거 비잔틴 제국보다도 더 크고 동서양에 걸친 초유의 대제국이 될 것이었다.

당시 비잔틴 제국은 영토를 거의 다 상실한 채 콘스탄티노플과 그리스, 마케도니아의 일부 지역만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 개 광역시의 연합국가 정도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성벽은 여전히 난공불락이었고황금뿔(Golden Horn)’이라고 불리는 콘스탄티노플의 동쪽 지협은 강력한 쇠사슬로 방비돼 선박의 돌입이 불가능했다. 그리스의 불도 여전히 위협적이었고 그것을 막을 소화 대책도 없었다.

하지만 메메드 2세는 한 가지 비장의 병기를 소지했다. 대포였다. 대포는 14세기부터 사용됐다. 그러나 작고 위력이 약했다. 그때 헝가리인 우르반이라는 인물이 크고 강력한 공성용 대포를 개발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르반이 처음 고용된 곳은 콘스탄티노플이었다. 하지만 가난해진 왕국은 그에게 상응한 보수를 줄 수가 없었다. 투르크가 이 정보를 포착하고 그를 매수했다. 우르반이 거의 굶어죽게 된 것을 투르크 사신이 빼내갔다는 전설도 있는데 그 정도는 아닌 듯하다. 여하튼 우르반은 길이 8.2m 600kg의 포탄을 날리는 대포를 제조했다. 황소 60마리가 이 대포를 끌었고 포탄은 1.6km를 날아갔다.

한때는 이 괴물 대포가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주역이라고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괴물 대포는 성벽을 부쉈지만 하루에 일곱 번 밖에 발사할 수 없었다. 대포도 한 대 밖에 없어서 성벽 사이로 투르크 군이 침공할 진입로를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대포로 성벽을 허물어뜨려도 다음 날 아침이면 수비대는 파괴된 성벽을 기를 쓰고 메웠다.

화가 난 메메드 2세는 전쟁사에 길이 남는 기발한 작전을 쓴다. 황금뿔의 차단선을 돌파하기 위해 전함을 들어서 언덕을 넘긴 후에 차단선 안쪽 바다에 내려놓았다. 전함을 바퀴 달린 통나무 발판 위로 들어 올린 후 이 발판에 밧줄을 걸고 수천 마리의 소로 잡아당겼다. 일종의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이동하듯이 전함들은 발판을 타고 미끄러지면서 차단선 안쪽 바다로 풍덩풍덩 떨어졌다.

하지만 이 전함들도 비잔틴의 숨통을 끊은 주역은 아니었다. 비잔틴 함대의 결사적인 저항으로 황금뿔에 들어가긴 했지만 항구로 상륙하지는 못했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주역은 이런 기발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5 28일 고전적인 방법으로 시행한 오스만투르크 최후의 대공세, 그리고 무엇보다 콘스탄티노플 수비대의 어처구니 없는 실수 때문이었다.

실수로 잠그지 않았던 성벽의 비상문

메메드 2세는 정예 3개 군단을 동원해 희생을 불사하는 파상공세를 폈다. 수비대는 1, 2파의 공세는 막아냈다. 그러나 무려 4시간 동안 1분도 쉬지 못하고 싸워야 했다. 수비대는 겨우 7000명밖에 없어서 교대해 줄 예비 병력이 없었다. 심지어 내벽에 배치할 병력도 없어서 전 수비대는 외벽에 자리 잡고 내벽으로 통하는 문을 잠가버리는 배수진을 쳤다.

마지막 3파 공격을 담당한 부대는 정예 중의 정예인 예니체리 군단이었다. 수비대는 녹초가 됐지만 이 공세도 막아냈다. 투르크 최후의 공세도 실패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하지만 바로 이때 어처구니 없는 일이 발생했다. 성 밖으로 통하는 작은 비상문 하나를 누가 실수로 잠그지 않은 것이다. 투르크 병사가 이 사실을 발견하고 이 문을 통해 성 안으로 침투한 뒤 깃발을 세웠다. 하지만 수비병이 이 사실을 발견하고 곧 문을 잠갔다. 침입한 투르크군은 수비대에 쫓겨 성벽을 따라 도주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투르크군이 발사한 작은 포탄이 제노바군(비잔틴 제국 수비를 위해 참전한 용병군)의 지휘관인 주스티아노에게 상처를 입혔다. 지금까지 잘 싸워오던 주스티아노는 부상을 입자 마음이 바뀌었는지 전선을 이탈해 제노바 함선으로 후퇴했다. 그가 후퇴하자 제노바 병사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성벽 위에 투르크 군의 깃발이 흔들리는 게 보였고, 도망치던 투르크 병사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동요하던 제노바군은 성벽이 함락된 줄 알고 주스티아노가 열고 나간 문으로 미친 듯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황은 걷잡을 수 없게 됐다. 전투를 지휘하던 콘스탄티누스 11세는 함께 있던 두 명의 기사와 함께 쏟아져 들어오는 투르크군을 향해 돌격했지만 결국 전사했다. 그것이 콘스탄티노플의 최후였다. 그날 하루 동안 콘스탄티노플은 초토화됐고 수만명이 죽고 강간당하고 노예로 끌려갔다.

헝그리 정신이 필요한 이유

그렇다면 잠그지 않은 문과 주스티아노의 부상, 이 연속된 불운이 콘스탄티노플 함락의 주원인이었을까? 아니다. 진정한 원인은 다른 곳에 있다. 비잔틴 제국은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왕국이었다. 특히 콘스탄티노플에는 부가 넘쳤다. 부유하고 편안했던 그들은, 힘든 전쟁은 용병을 고용해 맡겼다. 비잔틴의 나태해진 정신은 제국의 영토가 다 잘려나가고 거의 콘스탄티노플 한 도시만 남게 된 상황에서도 변할 줄을 몰랐다.

우리는 흔히 인간이 절망적 상황, 위기 상황에 처하면 대오 각성해 초인적인 힘과 의지가 나온다고 믿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초인적 힘과 변화도 준비되고 훈련된 사람에게서만 나온다. 콘스탄티노플에는 10만 명의 시민이 있었다. 따라서 병사가 최소 2만 명은 나와야 했다. 그러나 포위전에 가담한 병사는 3000명뿐이었다. 그나마 각국에서 용병과 자원병 4000명을 받아 총 7000명으로 수비대를 꾸렸다. 7000명의 용사가 한 달 반을 버텼다. 우연히 수비대가 붕괴된 것 같지만 진짜 원인은 체력고갈이었다. 만약 싸울 힘이 남아 있었고 교대할 병력이 있었다면, 그래서 외벽보다 더 강한 내벽에 수비대만 배치할 수 있었어도 그날 콘스탄티노플은 사수할 수 있었다.

부와 쾌락에 물들면 인간의 정신과 판단력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한다. 중국의 송나라는 망하는 순간까지도 돈으로 평화를 사려고 했다. 후대 사람들은 이를 격렬하게 비난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태도를 보인다. (제일 많이 비난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중국인들이다.) 그러나 당대의 송나라인들은 마치 마약에 취한 듯 현재의 부와 안일함에 취해 군대의 증원도 징발도 참전도 거부했다. 그 결과 그들은 모든 부귀영화를 잃은 것은 물론 나라까지 잃어버렸다.

모든 조직과 기업, 개인도 마찬가지다. 편안함과 풍족함을 일부 포기하고 고통을 벗해 즐길 줄 아는 훈련과 분위기가 결여되면 결국 돌이킬 수 없는 미로로 빠져든다. 그것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고 부유하고 화려했던 도시의 최후가 남긴 교훈이다. 21세기에도 여전히 헝그리 정신이 필요한 이유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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