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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몽골말이 조랑말로... 조선 궁기병(弓騎兵)의 몰락

임용한 | 64호 (2010년 9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군사 분야에서 우리나라 군대의 전통적인 장기는 무엇일까? 요즘도 세계 최강의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궁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반면에 기병은 산이 많은 우리나라 지형에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재상과 장군들이 손꼽는 우리의 최고 장기는 기병과 활의 결합, 즉 궁기병(弓騎兵)이었다.
 
산이 많아 기병을 쓸 수 없다는 생각은 커다란 오류다. 유명한 고구려의 기병도 만주 평원에서 양생된 게 아니었다. 광개토대왕 시절에도 고구려의 중심지는 험악한 산악지방이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물구나무를 서고 온갖 기마술을 보여주는 마상재(馬上才·말 위에서 보여주는 재주)는 중국과 일본에까지 명성을 떨쳤을 정도로 유명한 조선의 국가적 자랑거리였다. 역사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토인비의 말처럼, 험한 지형 탓에 한국의 기마술은 묘기 수준으로 발전했고 한국군의 주력이 됐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더 힘든 훈련과 더 좋은 말이 필요했다.
 
중국, 일본에까지 명성을 떨쳤던 조선 궁기병
조선 궁기병의 실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하나 있다. 조선시대 최고의 골칫거리는 왜구였다. 임진왜란 때 조선은 육전에선 무참하게 패배했지만 해전에서는 승리했다. 이 때문에 일본은 육군이 강하고, 우리는 수군이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정작 임진왜란 전까지 조선은 왜구와 바다에서 싸우는 것을 꺼렸다. 왜구를 육지로 유인해서 싸워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다. 의외지만 백병전에 관한 한 왜구는 동아시아 최강이었다. 중국군이 소림사의 무승 등 강호의 고수까지 동원하고도 이기기 힘들었던 상대가 바로 왜구였다. 이런 백병전의 달인을 상대로 조선이 육상전을 자신했던 근거가 궁기병이었다.
 
고려 말에 왜구가 강릉을 침공한 적이 있었다. 이때 강릉의 말단 병사, 이옥이란 인물이 있었다. 그는 고려 말에 간신으로 악명이 높은 권력자였던 이춘부의 아들이다. 이춘부가 살해되자 이옥은 일반 병사로 강등돼 강릉으로 쫓겨났다. 왜구가 쳐들어오자 명예를 되찾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한 이옥은 단신으로 말을 타고 해안에 자리 잡은 왜구의 진지로 달려가 화살을 퍼부어댔다. 그를 잡기 위해 왜구가 구름 같이 몰려나왔다. 아무리 사격을 잘해도 화살통에 꽂을 수 있는 화살은 20발 남짓이었다. 혼자서 수백 명을 당할 수는 없었다. 화살이 떨어진 이옥은 말을 되돌려 해안의 방풍림 속으로 달아났다. 분노한 왜구는 놓치지 않겠다며 뒤쫓아 왔다.
 
그러나 전날 밤 이옥은 하인을 시켜 숲속 나무 곳곳에 화살 수백 개를 꽂아 놓았다. 이옥은 말을 타고 달리며 이 화살들을 뽑아 왜구를 쏘고 다시 달리는 ‘히트 앤드 런(hit and run)’ 작전을 구사했다. 그렇다고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왜구 중에서도 말 탄 장수는 있었을 것이다. 말을 달려 내빼며 멀리 떨어져 싸우면 안전하기는 하지만 말이 금방 지친다. 이옥은 아슬아슬하게 왜구를 근접시켜 놓고 활을 쏜 후 살짝 달아나곤 했던 모양이다. 왜구와 근접해 있으므로 한 번만 사격에 실수를 하거나 말에서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이었다. 활을 쏘아야 하므로 손으로 고삐를 잡을 수도 없다. 오직 다리와 허리만으로 무게 중심을 잡고, 말을 조정하면서 나무 사이를 지그재그로 달려야 한다. 말은 조금만 놀라거나 나무뿌리 같은 장애물을 만나 스텝이 엉키면 갑자기 멈추거나 날뛴다. 왜구도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한번만 걸려라”고 이를 갈며 그를 쫓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옥은 신기에 가까운 기마술과 활솜씨를 발휘해 끝내 실수를 하지도, 잡히지도 않았다. 저녁이 되어 왜구도 진정을 하고 보니 화살에 맞아 죽고 부상한 사람이 즐비했다. 이옥 단 한명에게 우롱당해 전력을 크게 상실한 왜구는 강릉 약탈을 포기하고 철수했다. 이 공으로 이옥은 복권됐고, 이성계 휘하에서 명장으로 명성을 날리며 고관으로 승진했다.
 
궁기병의 기본은 우수한 종마(種馬)
이런 식으로 싸우려면 훈련도 열심히 해야 하지만, 말도 보통 말로는 어림없다. 우수한 말을 얻으려면 먼저 우수한 종자를 얻어야 한다. 오늘날 강대국들이 신무기 개발에 막대한 비용과 노력을 쏟아 붓고 있지만, 옛날 제국들이 말에 들인 정성과 비용 역시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았다.
 
말에 관한 열정의 전설적인 사례는 기원전 2세기 중국 전한(前漢)시대의 무장 이광리의 대완국 정복이다. 한 무제(武帝)가 국력을 기울인 이 전쟁의 목적은 대완국에 있다는 천리마였다. 당시 한나라는 흉노와 결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흉노의 기병 때문에 고전하고 있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할 때까지만 해도 중국에서는 기병보다 전차를 선호했다. 그러나 전차는 흉노의 기병을 당할 수 없었다. 뒤늦게 기병을 양성했지만 문제는 말이었다. 마차를 끄는 투박한 말은 흉노의 기마와는 수준이 달랐다. 한나라는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오늘날 아랍종 계통의 말로 추정되는 서역의 명마가 절실했다. 정복에 성공한 이광리는 종마와 3000마리의 군마를 끌고 개선했다. 이후 한나라 군의 전력은 크게 상승했다. 말의 변화는 무덤에서 발굴되는 부장품에서도 드러난다. 유명한 진시황의 병마용에서 발굴된 말들은 전차용 말로서 머리가 크고, 통통하고, 튼튼하게 생겼다. 반면 한나라의 무덤에서 나온 기마 인형들은 체격이 더 크고, 머리가 작고 엉덩이가 커서 몸 전체가 유선형을 이루는 늘씬한 말들을 타고 있다.
 
부장용 토용과 그림에서 서역 말이 인기를 끈 이유는 오늘날의 경주마를 연상시키는 멋진 근육과 잘 빠진 몸매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자 지구 한 구석에 숨어 있던 진짜 명마가 등장했다. 징기스칸의 전설을 이룬 몽골말이다. 몽골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막상 몽골말을 보면 실망 그 자체다. 체격은 조랑말보다 약간 큰 정도고, 머리는 말과 당나귀의 혼혈처럼 느껴질 정도로 크고 둔탁하다. 그러나 이 말은 세계 최고의 지구력과 체력, 열대에서 한대까지 어디든지 가는 강인함과 인내심을 갖췄다. 물론 몽골말이 모든 점에서 일등은 아니다. 순간적인 힘과 스피드는 체격이 좋은 서역마가 우위였다고 한다. 그러나 군마로서의 보편적 자질은 몽골말이 우위였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말은 과일나무 밑으로도 지나간다고 해서 과하마(果下馬)라고 불린 조랑말이었다. 덩치는 작아도 체구에 비해 놀랄 만큼 힘이 세고 강건했다. 다리도 짧아 산길도 잘 다녔다. 다만 고집이 세고, 가끔 제멋대로인 게 문제였다고 한다. 그런데 고분벽화에 묘사된 고구려 기병을 보면 고구려 군이 탔던 말은 조랑말보다는 크다. 만주 지역에서도 몽골종의 영향을 받아서 좋은 말이 생산됐고, 후대에는 여진족의 주요 수출품이었다. 고구려 군이 탔던 말도 이 만주의 품종이 아닌가 싶다. 고려시대에는 순수 혈통의 몽골말이 수입됐다. 고려와 원나라가 사돈국이 되면서 몽골종을 제주도에 들여와 방목했고, 이 말들이 멸종의 위기를 아슬아슬하게 넘기고 조선시대까지 혈통이 이어졌다.
 
조선의 국영목장 제도
조선은 군마의 품종을 보존하고 양성하기 위해 국영목장 제도를 시행했다. 전국에 60∼100개 정도의 목장을 설치하고, 2만∼4만 마리의 말을 사육했다. 전문 사육사와 수의사, 목동도 양성했다. 서울에 설치한 목장이 지금의 성동구 행당동 살곶이 다리 일대인 살곶이 목장이었다. 이곳은 왕실의 전용 목장으로 오랫동안 보존됐다. 지방의 목장은 주로 섬이나 해변의 곶에 위치했다. 이런 곳에 둔 이유는 농민들이 경작하지 않는 땅인데다 무엇보다 맹수나 도적의 위험으로부터 안전했기 때문이다. 목장이 가장 많은 곳은 섬이 많은 전라도였다. 그러나 최대의 목장은 제주도였다. 조선시대 목장말의 절반이 제주도에서 사육됐다. 전성기에 조선에서 보유한 말은 2만∼4만 마리였다. 조선 후기로 가면 조금씩 줄어든다. 한말 고종 때도 5000여 마리 정도는 있었다.
 
하지만 목장 운영의 전성기에도 군마의 조달은 골칫거리였다. 목장 제도에도 불구하고 말 값이 너무 비쌌다. 군마에도 장수들이 타고 전투를 벌이는 전투용 말과 수송용 말의 구분이 있었다. 물론 그 경계가 꼭 명확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최고 무사들이 타는 전마는 군마 중에서도 최고의 말이어야 했다. 제일 좋은 말은 한 필 값이 쌀 30가마가 넘었다. 이것은 일반 자영농의 1.5∼2년 치 생산량, 또는 남자 종 6∼7명 값이었다. 그런데 기병은 전마 한 필에 수송용 말 한 두 필은 있어야 했고, 이 말을 돌보려면 최소한 종 한두 명은 거느려야 했다. 수송용 말을 전마의 반값으로 쳐도 이를 합하면 종이 최소 12명 이상은 있거나 3∼4년 치 수입 전액을 투자해야 출동준비를 할 수 있었다. 이것도 개인 장비(무기와 갑옷)와 말 갑옷 비용(이 비용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결코 만만치 않았다)은 뺀 수치다.
 
조선 시대에는 군사가 말과 무장, 식량까지도 자비로 준비해야 했다. 이런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전 국민의 10% 미만이었다. 군사가 말을 직접 키우면 이런 비용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말을 번식시키면 수익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명마라고 다 명마를 낳는 게 아니다. 일단 군마로 쓸 수 있는 좋은 말은 쉽게 얻기 힘들다. 군마는 기본 종자도 중요하지만 관리와 훈련도 철저히 해야 한다. 평소 쟁기를 끌다가 유사시에는 전쟁터로 끌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사료도 비싼 곡물로 먹여야 한다. 여물은 먹이면 안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요즘 경주마 키우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용과 노력이 엄청나게 들어간다.
 
전쟁이 발발하면 국가에서 목장 말을 무상으로 교부하거나 헐값에 교체해 주는 방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는 턱도 없었다. 군대의 주력이 기병인데, 말이 부족하고 비싸니 말이 없는 군사도 많았다. 말이 없으면 훈련도 못하고, 군사들의 자질도 떨어진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무과에 합격해도 군사로 발령을 받으려면 말을 데리고 와서 말이 있다는 검증까지 받아야 했다. 당연히 다른 사람의 말을 빌려서 등록하는 속임수가 발생했다. 그래서 점고라고 해서 매년 군대를 소집해서 말과 장비 점검을 했다. 그러면 점검이 없는 다른 고을에서 빌려왔다. 화가 난 정부는 전국 고을에서 동시에 점검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문제는 그렇게 하면 그날은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전국적인 공휴일처럼 돼버린다는 점이다. 하여간 이렇게 돌고 도는 싸움은 끝이 없었다.
 
경직된 산업 국유화로 인해 목축업 번성 기회 잃어
말 값이 비싼 이유는 공급 부족 때문이었다. 국영 목장은 조선의 국방력을 좌우하는 정부의 야심 찬 프로젝트였지만, 목장의 생산성은 형편없이 낮았다. 목동은 인도의 카스트처럼 신분제도에 의해 직업이 고정된 사람들이고, 말을 잘 키워봤자 보수도, 판매 수익도 기대할 수 없었다. 관에서는 1년에 번식시킨 새끼의 수를 매년 점검해서 목동을 평가하고 생산율이 낮으면 처벌했다. 그러나 이런 행정적인 수단으로 말의 질까지 평가할 수는 없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좋은 말은 관리와 훈련이 필수인데, 목동에게 그것까지 기대할 수는 없었다. 양이 아니라 말의 질까지도 평가하는 제도를 만들면 되지 않았을까? 그런 제도는 결코 시도되지 않았는데, 질이란 주관적 평가이고, 감정의 공정성을 보장할 방법도 없었다. 조선의 행정 체제는 아주 세밀하고 엄격했지만, 요즘 기준으로 보면 굉장히 경직돼 있어서, 이처럼 부정의 소지나 가시적 기준이 없는 제도는 결코 도입하지 않았다.
 
그러니 군마 양성이 제대로 될 리 없었고, 품종 개량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기껏 몽골이나 여진족의 말을 수입해 놓아도 ‘질보다 양’이므로 엄격한 교배를 통한 품종 유지에는 신경 쓰지 않아 금세 잡종으로 변해버렸다. 성종 대에 여진정벌을 앞두고 전마를 골랐더니, 전체 목장말의 4000분의 1인 40마리만 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정부는 이 문제를 알고 민간에 불하하는 방법도 써 보았다. 하지만 조선은 농본국가라 말 시장이 크지 않았고, 말을 키우는 비용에 비해 수익성은 형편없었다. 말을 불하받은 사람은 말을 이용해서 수익을 올리기는커녕, 말을 받은 대가로 국가와 관청에서 필요할 때마다 말을 제공해야 했다. 이것은 무상 대여였고, 말이 죽어도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했다.
 
그래도 16세기까지는 군마조달책이 그럭저럭 효과를 거두었다. 하지만 17세기 이후로는 목장 제도가 점점 더 쇠퇴했다. 조선 초기에는 중국에서도 탐을 내던 말이었지만 품종은 단종되다시피 했고, 조선 후기가 되면 웬만한 정예 기병들은 만주에서 수입한 말을 탔다. 이 때문에 목장을 재건하자는 주장과 아예 재원을 마련해서 대대적으로 말을 수입하자는 의견이 대립하기도 했다.
 
조선시대에 목축업은 의외로 번성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가졌다. 몽골종 말을 보존하고 개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중국 시장이라는 큰 수요가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 기회를 살리지 못했다. 조선의 군마들은 관리가 안 되다 보니 모두 조랑말로 변해버렸다. 조선군의 주력이 기병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다.
 
이 모든 결과가 농본정책에 따라 민간의 산업진흥을 허용하지 않고 모든 산업을 국유화하고 통제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오늘날 선진국은 군에도 아웃소싱과 민간 기업과의 협력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새로운 문제를 낳기도 한다. 하지만 효율성과 성장을 위해서는 경쟁과 보상체제의 개발이 필수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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