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컨버전스의 성공 조건

이재술 | 56호 (2010년 5월 Issue 1)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은 생전에 자신의 예술 세계를 비빔밥에 빗대 설명하곤 했다. 각각의 재료가 어우러져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비빔밥에서 영감을 얻어 자신도 다양한 아이디어를 혼합해 독창적인 예술을 창조했다는 설명이다. 우리 전통 음식인 비빔밥은 이렇듯 세계적인 거장의 손을 거쳐 20세기 예술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비빔밥에 내재한 융복합의 정신이 비즈니스계에서도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소비자의 요구와 기술 기반의 변화는 다양한 가치, 기술, 산업, 서비스의 창조적 결합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융합의 시대를 앞당겼다. 사업 간 융복합화를 근간으로 하는 비즈니스 컨버전스는 이미 경영 전략의 핵심 키워드로 자리매김했다.
 
컨버전스 시대의 도래는 기업과 국가 모두에 새로운 도약을 위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후발 개발도상국의 추격, 기술 및 자본으로 무장한 선진국의 견제에 치여 자칫 샌드위치 신세로 전락할 위험에 처한 한국 경제로서는 결코 꺼뜨려서는 안 될 희망의 불씨이기도 하다. 다행히 최근 지식경제부가 산업 융합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정책 지원 및 제도적 기반 조성에 착수한 일은 고무적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밝지 않다. 다양한 음식을 혼합한 퓨전 요리 정도가 인기를 끌고 있을 뿐 대다수 융복합 산업의 발전은 지지부진하다. 말로는 융합을 강조하지만 엄격한 업종 구분을 강조한 칸막이식 법과 제도가 신사업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다. IPTV, 소방 로봇, 트럭 지게차, 헬스케어 냉장고 등 제도의 장벽에 막혀 활로를 찾지 못하는 융복합 신제품이 한둘이 아니다.
 
자본시장통합법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하고 있는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새로운 복합 금융 상품을 허용함으로써 다양한 금융 상품을 소비자에게 제공하겠다는 초기 취지는 논의 과정에서 용두사미가 돼버렸다. 상품 개발 범위가 줄어들면서 창의적 상품이 들어설 입지가 좁아졌고, 금융 사업자 간 융합 시너지 효과 역시 줄었다. 일부 금지 조항을 제외한 모든 상품 개발을 허용한다는 초기의 네거티브 시스템(Negative System)은 ‘따로따로’ 사고에 익숙한 기존 사업자와 관련 기관의 집단 이기주의에 밀려 퇴색됐다.
 
현재 정부에서는 업종별 단절의 한계를 극복하고 융합 신시장을 선도하기 위해 가칭 산업융합촉진법 제정을 추진하고 있다. 좋은 의도에 부합하는 결실을 얻으려면 무엇보다 자본시장통합법의 전철을 밟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미래에 출현할 기술, 제품, 서비스를 모두 예측할 수 없는 만큼 환경 변화에 유연히 대처할 수 있는 규정을 만드는 게 관건이다. 이를 위해서는 행정 편의를 이유로 규제에만 집착해서는 안 된다. 최소한의 금지 사항을 제외한 나머지 모두를 열어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컨버전스라는 메가 트렌드에 대응하려면 법 제도의 정비만으로도 부족하다. 가장 중요한 사안은 의식 변화를 포함한 사회 시스템 전반의 재조정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우리 사회 전반에 만연한 경직성과 획일성을 탈피하고 다양성을 수용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이 필수적이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벗어나 융합형 사고로 무장한 창조적 인재를 배출할 수 있도록 교육 과정을 재편할 필요가 있다. 학생 개개인의 다양한 능력을 발굴하는 데 초점을 맞춘 융합형 교육이 대안이 될 수 있다. 기업에서도 다양성이 존중받는 유연한 문화가 확산돼야 한다. 한때 쇠락의 길을 걷던 애플이 오늘날 세계가 주목하는 기업으로 부상한 건 애플의 독특한 기업 문화에 힘입은 바가 크다.
 
비빔밥은 먹다 남은 반찬 몇 가지로도 새로운 맛을 창조하는 융합과 시너지의 음식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한국인처럼 다양한 음식을 섞어 먹는 일을 즐기는 민족을 찾아보기 어렵다. 음식 문화에 담긴 컨버전스의 정신을 되살린다면 한국이 21세기 창조적 융복합 시대를 선도하는 선진 국가로 부상하는 일 역시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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