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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드레스덴

역사 + 자연 + 예술, 드레스덴의 삼색 매력

김민주 | 47호 (2009년 12월 Issue 2)
독일 수도 베를린에서 남쪽으로 189km를 달리면 체코 가까운 쪽에 엘베 강변의 고도(古都) 드레스덴(Dresden)이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 ‘엘베 강의 피렌체’ 혹은 ‘유럽의 발코니’로 불렸던 이 아름다운 도시에는 지금도 이 지역을 다스렸던 공국의 영광이 서려 있다.
 
드레스덴은 츠빙거 궁 등 르네상스부터 중세에 이르는 고풍스러운 건축물들,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작센 스위스, 도시민의 삶 속에 녹아든 예술이 삼박자가 되어 절묘하게 어우러진 도시다. 이 지역 출신의 작가 에리히 케스트너는 드레스덴을 두고 “역사, 예술, 자연이 마치 화음을 이루는 선율처럼 도시와 계곡 위를 감돌고 있다”고 말했다. 또 18세기 독일의 철학자 요한 고트프리드 헤르더는 드레스덴을 방문한 뒤 이곳을 ‘엘브플로렌스(Elb-florence)’, 즉 ‘엘베 강의 피렌체’라고 불렀다. 당시 예술의 중심지 피렌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도시의 아름다움에 반해 붙인 이름이다.
 
드레스덴이 단지 아름답기만 한 것은 아니다. 드레스덴은 공업 강국 독일의 도시답게 항공기 제조, 정밀기계 같은 각종 공업이 발달한 지역이었다. 근교의 마이센(Meissen)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마이센 도자기’는 과거 왕들의 식기로 사용될 정도로 유명한 유럽 최초의 백색 자기였다.
 
이뿐만이 아니다. 작센 주의 여러 도시(라이프치히, 바이마르, 비텐베르크 등) 중에서도 드레스덴이 돋보이는 이유는 이 도시가 간직한 드라마틱한 역사 때문일지도 모른다.
 
 
 
‘유럽의 발코니’ 드레스덴의 화려했던 영화
드레스덴은 옛 슬라브어로 ‘물가의 숲에 사는 사람’이라는 말에서 유래됐다고 알려져 있다. 이로 미뤄 처음 드레스덴에 정착했던 민족은 아마도 슬라브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이후 게르만족이 정착하면서 성이 만들어졌고, 1206년 도시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1270년 작센 주의 마이센 지역 변경백(邊境伯·일종의 지방 영주와 비슷한 행정관)인 하인리히가 큰 성을 세우면서 드레스덴은 번성하기 시작했다. 그가 죽은 후 보헤미아 브란덴부르크 지역에 편입됐다가 14세기 초 마이센 지역에 속하기도 했다. 15세기 후반 마이센 지역을 관할하던 베티나 가문이 17세기 작센 주 전체를 다스리는 선제후(選帝侯·독일의 황제 선거권을 가지고 있던 제후)가 되면서 드레스덴은 작센 지방의 수도가 됐다.
 
드레스덴의 영화는 이때부터 꽃을 피웠다. 작센 왕조의 전성기였던 17, 18세기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와 2세 재임 시기에 오늘날의 드레스덴의 모습이 완성됐다.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했던 ‘강성왕(August der Starke)’ 아우구스트 1세는 엘베 강 유역에 ‘북쪽의 베니스’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베를린보다 더 크고 베르사유 궁전처럼 화려한 도시를 꾸미기를 원했다. 도시 외곽에 화재가 발생하자 유명 건축가들을 불러 바로크 양식으로 도시를 재건했다. 이어 즉위한 아우구스트 2세는 드레스덴에 각종 미술품 등을 옮겨놓았고, 예술 도시의 기틀을 잡았다.
 
화려한 유럽의 고전 문화를 자랑하던 드레스덴은 제2차 세계대전의 참화로 철저히 무너져 내렸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5년 2월 13과 14일 이틀에 걸쳐 드레스덴은 연합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잿더미가 되었다. 사망자만 2만5000명에 이르는 대대적인 폭격이었다. 하지만 드레스덴은 폐허를 딛고 일어서 이제 거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예전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이다. 아픔을 딛고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 있는 조국 독일의 축소판이라고도 할 만하다.
 
‘복원’과 ‘보전’의 가치로 사람과 자본을 모으다
드레스덴이 도시 자산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고 알리기 위해 기울인 노력은 다른 도시에도 모범이 될 만하다. 드레스덴은 공습 이전의 도시를 되살리기 위해 ‘복원’과 ‘보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런 노력이 없었다면 인류는 찬란한 역사의 현장 한 곳을 영영 잃어버렸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폐허가 된 도시가 어떻게 다시 일어나고 있는지를 보기 위해 이곳으로 향한다.
 
당국은 역사성을 강조한 도시 브랜드 육성에도 공을 들였다. 2005년 드레스덴 공습 60주년을 맞이해 문화유산 완전 복원을 시작했고, 2006년에는 ‘드레스덴 800년의 역사(The Dresden Jubilee Year 2006)’라는 이름으로 도시 프로모션 행사도 열었다. 공습으로 파괴됐던 여러 문화유산이 이 해에 복원을 마치고 일반에 공개됐으며, 75개가 넘는 전시회와 400여 개의 크고 작은 이벤트가 열렸다. 8월에는 드레스덴의 유명한 ‘군주들의 행렬(Procession of Princes)’ 퍼레이드가 시민들의 참여로 열리기도 했다.
드레스덴의 최근 모습은 당시 모습을 그대로 남겨둔 채 전쟁의 참상을 전하는 일본의 히로시마 원폭 유적지나 독일의 아우슈비츠 유적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프라우엔 교회의 복원은 전화를 딛고 선진국에 다시 합류한 독일의 눈물겨운 재건과 오버랩되며 도시 마케팅의 상징 수단이 되고 있다.
 
아픈 과거의 역사 속에서도 미술과 음악 등 문화 도시로서의 상징을 버리지 않는 드레스덴의 예술 혼도 관광객들에게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한다. 드레스덴은 전후 동독 지역에 편입돼 공산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당연히 복원 과정도 더뎠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예술 도시의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베를린 장벽 붕괴를 재촉한 시위가 가장 먼저 일어난 동독의 도시가 바로 드레스덴이다.
 
예술의 영원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동시에 떠올리게 하는 드레스덴의 감성 마케팅은 관광객을 사로잡았다. 중세부터 현대사로 이어지는 굴곡진 유럽의 역사와 자연 풍광, 예술 혼이 어우러진 도시의 삼색 매력은 세계 각지의 관광객을 부른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당시 경기가 열리지 않았는데도, 독일 도시 중 9번째로 많은 48만여 명의 외국인 방문객이 머물렀다.
 
드레스덴은 폐허의 복원과 함께 아름다운 자연 보존에도 힘을 기울이고 있다. 특히 시가지의 60% 이상을 차지하는 녹지를 보존하기 위한 노력이 대표적이다. 드레스덴에서 건물을 세울 때에는 반드시 정해진 크기의 녹지를 조성해야만 한다. 드레스덴의 시민들은 전쟁의 상처를 극복하고 과거의 문화유산을 지킬 수 있었던 원동력을 도시 녹지 공간에서 찾는다.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녹색 공간이 폐허의 도시를 희망으로 덧칠한 셈이다. 이 모든 노력은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속에서 이뤄진다. 이 도시의 환경 담당 공무원이 6명밖에 없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녹지 보존을 위한 노력은 드레스덴의 폭스바겐 공장에서도 나타난다. 2001년에 완공된 폭스바겐 공장은 투명한 유리로 지어졌다. 밖에서 안이 다 들여다보이는 독특한 외관의 이 공장은 주거지역, 유적지 등 주위 경관과 조화를 이룬다. 침엽수와 호수가 펼쳐진 녹초 지대는 공원을 연상시키고, 주위에는 콘서트장과 같은 이벤트 공간도 설치됐다. 제조업과 도시 문화를 성공적으로 융합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드레스덴이 동독의 많은 도시를 제치고 기업과 연구소를 유치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독일 연방정부와 작센 주정부의 노력을 꼽을 수 있다. 연방정부는 통일 이후 동독과 서독 지역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동독 지역에 입주하는 기업에 상당한 보조금을 제공했다. 작센 주정부도 1991년 이후 23억 유로의 조세 혜택을 입주 기업에게 지원했다. 그 결과 폭스바겐, AMD, 인피니온 등의 글로벌 기업과 막스플랑크 연구소, 프라운호퍼 연구소, 라이프니츠 연구소 같은 각종 기관들도 이곳에 들어섰다.
 
하지만 보조금과 세제 혜택만으로는 기업과 연구소의 선택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이다. 기업들은 도시의 자연 및 문화 환경과 쾌적성, 창조적 분위기 등의 어메니티(amenity)를 매우 중시한다. 기업의 이전은 복원과 보존을 통해 아름답고 살기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드레스덴의 노력이 병행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최근 정운찬 국무총리의 언급 이후 국내에서도 드레스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드레스덴이 최근 논란의 중심이 된 세종시 개발의 벤치마킹 대상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떻게 세계의 관광객과 기업, 연구소를 끌어들여 기업 과학 도시로 발돋움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면밀하고 체계적인 벤치마킹이 뒤따랐으면 한다.
 
편집자주 한국 최고의 마케팅 사례 연구 전문가로 꼽히는 김민주 리드앤리더 컨설팅 대표가 전 세계 도시의 혁신 사례를 분석한 ‘City Innovation’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급격한 환경 변화와 거센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도시를 운영한 사례는 행정 전문가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자들에게도 전략과 조직 운영, 리더십 등과 관련해 좋은 교훈을 줍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필자는 마케팅 컨설팅 회사인 리드앤리더 대표이자 비즈니스 사례 사이트인 이마스(emars.co.kr)의 대표 운영자다. 서울대와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한국은행과 SK에너지에서 근무했고 건국대 겸임교수를 지냈다. <로하스 경제학> <글로벌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하인리히 법칙> 등의 저서와 <깨진 유리창 법칙> 등의 역서가 있다.
 
  • 김민주 김민주 | - (현) 리드앤리더 컨설팅 대표이사, 이마스 대표 운영자
    - 한국은행, SK그룹 근무
    - 건국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mjkim896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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