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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톤 전투 - 결점 對 결점

임용한 | 45호 (2009년 11월 Issue 2)
그리스가 페르시아 제국과 맞붙은 페르시아 전쟁은 전설적인 전투를 여럿 탄생시켰다.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이 마라톤 전투다.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지금의 소아시아(터키) 연안에 있는 그리스 식민지의 반란을 제압하고, 그리스 본토를 공략하기로 결심한다. 그리스로 향하는 페르시아 함대의 선봉은 유명한 아테네의 참주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였다. 부친이 실각한 후 그는 페르시아로 망명했다가 페르시아 군을 끌고 돌아왔다.
 
히피아스가 안내한 페르시아 함대의 상륙 지점은 아테네 북동쪽 40km쯤 되는 지점에 있는 마라톤 평야였다. 마라톤 평야는 길고 평평한 해안선을 지니고 있었다. 평야 북쪽에는 현지 주민들이 ‘개꼬리’라고 부르는 가늘고 기다란 석호가 있어서 더 이상 나무랄 데 없는 방파제를 만들어주었다.
 
 

 
공포에 휩싸인 아테네
페르시아 군이 접근하자 아테네는 공포에 휩싸였다. 이 전쟁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우리들은 아테네의 공포를 이해하기 힘들다. 페르시아와 그리스의 차이는 흔히 말하는 거인과 어린아이보다도 더욱 극심했다. 우리들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에 대한 경외심 덕분에 그리스의 이성과 시민정신 역시 과도하게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좁은 산곡을 따라 수백 개의 도시국가(폴리스)로 쪼개져 있던 나라인 만큼 그리스 인의 사고와 세계관은 지극히 편협하고, 한심했다. 그리스 인들이 처음 페르시아 제국과 접촉했을 때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크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페르시아에 대한 그리스 인의 당당함은 에게 해 밖의 세계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리스 군의 무장과 전술은 그리스의 산악지대에서 폴리스 간의 힘겨루기에만 적합했다. 그들은 1000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하기도 힘들었다. 청동갑옷과 방패로 무장하고 방진을 이룬 보병대는 고대 세계에서 최강의 수비력과 전투력을 자랑했지만, 기병도, 제대로 된 궁수도 없었다. 그들의 요새도 담장 수준에 불과했다. 청동보병은 적이 앞에 있을 때만 제대로 싸울 수 있다. 측면과 후면은 무방비 상태였고, 기동력은 최악이었다. 평원에서 페르시아 기병이 측면과 후면으로 공격해 들어오면 손을 쓸 수가 없고, 궁병대가 화살 공격을 하면 비 맞듯이 서서 맞아야 했다.
 
후대 사람들은 그리스가 페르시아를 이긴 힘은 개개인의 자발적 의지와 참여, 희생을 끌어낸 그리스의 시민정신과 민주주의라고 포장했다. 하지만 이는 과장된 이야기다. 페르시아 전쟁 내내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시민정신이 보여준 이기주의와 야비함이란 ‘민주주의’에 회의를 불어넣기에 충분했다.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의 아들이 페르시아 군을 끌고 쳐들어온 것도 그렇지만, 마라톤 전투의 영웅 밀티아데스와 살라미스 해전을 이끈 테미스토클레스도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민들에게 배신당해 몰락하거나 페르시아로 망명해야 했다.
 
핵분열 상태의 그리스
그리스 인은 모래알 같았다. 그리스의 폴리스는 항복하자는 도시와 싸우자는 도시로 분열됐다. 엄밀히 말하면 핵분열 상태였다. 싸우자는 도시들도 연합전선이나 동맹 체제를 전혀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테네를 도와 이 싸움에 참전한 도시는 ‘플라타이아이’라는 작은 소도시뿐이었다. 그들이 톡톡 털어서 보낸 병력은 겨우 800명이었다. 마라톤 전투 후 현장에서 전사자들의 무덤을 만들었는데, 아테네 인들은 플라타이아이 전사자 11명을 위한 별도의 작은 무덤을 따로 만들었다. 이것이 플라타이아이 인에 대한 감사의 표시인지 뿌리 깊은 지역주의의 소산인지는 모를 일이다. 이 정도 지역주의는 그나마 낫다. 아테네는 10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국가여서 군대 지휘도 10명의 지휘관이 하루씩 돌아가면서 맡았다.
 
아테네 군이 마라톤으로 출발한 날, 필리피데스라는 아테네의 유명한 달리기 선수가 그리스 반도 반대편의 도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틀 만에 225km를 주파한 그는 스파르타에 도착해서 원군을 요청했다(이 필리피데스의 이야기가 변형되어서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다). 하지만 필리피데스는 눈을 의심해야 했다. 스파르타 사람들은 신나게 놀고 있었다. 그때가 축제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원군 파병에 동의했지만 출발은 1주일 후로 미루어졌다. 하필 축제기간 동안 전쟁을 금지하는, 평화의 축제가 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테네 군이 페르시아 군과 대치한 곳은 마라톤 평야 남쪽, 산과 평야와 바다가 만나는 협로였다. 마라톤에서 아테네로 가는 길은 두 곳이 있었다. 하나는 해안을 따라 남하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 길을 따라오다가 서쪽으로 우회전해서 계곡을 넘어가는 길이었다. 이 두 길이 나뉘는 계곡 입구 또는 이 교차로를 내려다보는 비탈 위에 아테네 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어느 길로 진행하든 페르시아 군은 좁은 산곡의 유리한 위치에 자리한 그리스 군을 먼저 격파해야 했다.
 
그리스 군은 산비탈에 참호를 파고, 좌우에 장애물을 설치해서 기병의 접근을 막았다. 페르시아 군은 아테네 군의 정면을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페르시아는 용맹과 야성을 자랑하는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된 보병을 보유했지만, 그들은 하나같이 경무장이었다.
 

 
페르시아의 장군들은 히피아스의 길 안내가 잘못됐다고 불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는 산으로 가득 찬 나라라 어디로 상륙하든 이런 곤경을 피할 수 없었다. 진짜 잘못은 페르시아 군이 그리스의 지형과 그리스 군의 전술에 대응할 방법을 제대로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교차로를 두고 양군이 대치했다. 그리스 군은 평원으로 내려갈 수 없었고, 페르시아 군도 산으로 오를 수 없었다. 특히 페르시아 군은 병력을 너무 적게 데려오는 실수를 했다. 병력이 조금 풍부했더라면 그들은 일부 병력으로 산비탈의 그리스 군을 견제하면서 주력을 무방비 상태의 아테네로 내려 보낼 수 있었다. 아테네가 불타면 폴리스의 대부분이 저항을 포기하고 그리스 전쟁은 쉽게 끝날 수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페르시아 보병의 수는 아테네 군을 조금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그에 맞먹는 수의 기병이 있었지만 그리스의 산악지형에서 기병의 단독 운영은 위험했다.
 
시간을 끌수록 페르시아가 불리해졌다. 보급품은 바닥나고 계절이 바뀌면 태풍이 불어닥친다. 최악의 상황은 스파르타에서 오고 있는 지원부대였다. 페르시아군은 모험을 감행했다. 마라톤의 그리스 군을 보병대가 묶어두고, 밤에 기병을 배에 실어 아테네에 직접 상륙시킨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그리스 군이 페르시아 군에 심어놓은 스파이에 의해 노출됐다. 다민족으로 구성된 페르시아군은 보안이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 밤 페르시아 군에서 탈출한 스파이들이 그리스 군 진영으로 뛰어들어 와서 소리쳤다. “기병대가 떠났다!”
 
밀티아데스의 창의적 실험
그리스 군은 공격을 결정하고 페르시아 군과 전투 경험이 풍부한 밀티아데스에게 지휘를 맡겼다. 전투에 앞서 밀티아데스는 몇 가지 창의적인 변화를 주었다. 그리스 군은 1만 명, 페르시아 군은 1만5000명으로 페르시아 보병대의 전열이 좀 더 길었다. 전열이 짧으면 적군이 좌우에서 감아 들어올 수가 있다. 밀티아데스는 중앙의 방진을 얇게 해서 열을 늘렸다. 대신 좌우 측면은 그대로 두었다. 혹시 모를 적의 기병과 경보병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해서 병사들의 좌우 폭도 평소보다 넓혔다. 이 작전은 매우 위험했다. 방진이 얇아지면 충격을 막아내기 어렵다. 병사들의 간격이 넓어지는 바람에 스크럼을 짜기 힘들었고 적병과 거의 1:1로 부딪혀야 했다. 자칫하면 적과 충돌하자마자 그리스 군의 중앙부가 썩은 각목처럼 부러질 수도 있었다. 중앙부가 부러지면 적은 중앙을 가르고 나와 그리스 군의 좌우를 휘감아 전멸시킬 수도 있었다.
 
약화된 전선을 보완하기 위해, 그리고 궁병에 의한 피해를 줄이기 위해 밀티아데스는 절대 금기에 도전했다. 40kg에 가까운 중무장을 한 보병을 뛰어서 돌격하게 했다. 이때 보병이 달린 거리와 속도를 두고 수백 년간 논쟁이 벌어졌는데, 그 거리가 얼마이든 최후의 순간에 그리스 군은 사자처럼 적진에 달려들었다. 그리고 그 효과는 엄청났다. 말 그대로 금속과 나무의 충돌에 페르시아 군은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스 군은 192명이 전사한 반면, 페르시아 군은 6400명이 전사했다.
 
그리스 군은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창의력으로 절대적인 승리를 거뒀다. 지휘부는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지만, 총지휘관 칼리마코스는 밀티아데스에게 지휘권을 양도하는 결단을 내렸다. 최고 책임자의 공정한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여주는 사례다. 밀티아데스가 아니었으면 그리스 군은 절대로 이런 창의력을 보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미래의 지도자였던 테미스토클레스와 아리스티데스는 제일 위험한 중앙부에 자원했다. 칼리마코스는 선두에서 싸우다 전사했다. 음모에 달통한 정치가들이었지만, 적어도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은 회피하지 않았다. 아테네의 민주주의가 지닌 최대의 장점은 최전선에서 싸운 지도자와 그렇지 않은 지도자를 예민하게 구분할 줄 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날 패배의 최고 책임은 페르시아에 있다. 페르시아는 그리스가 상상할 수도 없는 다양한 민족, 다양한 군대로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 다양성은 제국이 만들어준 자연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이 다양성을 제국 밖의 세계에 대한 창조적 적응력으로 승화시키지 못했다. 창조적 아이디어는 다양성에서 나온다. 하지만 자연적 조건에 의해 만들어진 다양성만으로는 성과를 낼 수 없다. 조직원들 모두가 함께 추구하는 공동의 가치와 비전이 제시되어야 하며, 자율성을 극대화하는 조직 문화가 필요하다. 또 이를 뒷받침하는 리더십도 있어야 한다. 이런 조건들이 갖춰지지 않은 채 다양성만 확보하면 정보 누설 등으로 조직이 치명적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제국의 다양한 에너지를 급변하는 환경에 맞게 창조적 전략으로 승화시키지 못한 게 페르시아 군의 결정적 패인이다.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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