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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

대운하 ‘초연결의 아이콘’으로

조영헌 | 344호 (2022년 05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중국의 ‘운하 열기’가 일대일로 프로젝트 등과 연결되며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과거 수많은 중국 상인이 대운하의 연결성에서 파생되는 열매를 맛보았다. 21세기 운하열 역시 초연결의 아이콘으로 정착한다면 그 열매의 혜택은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 거래를 하는 기업인이라면 관 주도의 과잉 규제와 권력의 예측 불가능성이 남아 있는 한 이런 상상은 장밋빛 전망에 그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중국 대운하와 ‘운하열(運河熱)’

한국의 남한산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던 2014년 6월22일, 중국에서는 대운하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축제 분위기가 연출됐다.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제38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위원회의 논의 결과였다. 대운하는 중국의 46번째 세계문화유산이자 대표적인 선형(線形) 문화유산(Lineal or Serial Cultural Heritages)이었다. 대운하의 등재가 결정된 날 운하 도시 항저우(杭州)에서 시작된 ‘대운하문화절(大運河文化節)’ 행사는 10월까지 4개월간 이어지며 이를 자축했다.

항저우에 가면 지금도 왕래하고 있는 수많은 화물선을 볼 수 있다. 이를 내려다보기 좋은 뷰포인트(View Point)는 길이 92m, 폭 5.9m의 아치형 석교(石橋)인 공신교(拱宸橋)이다. 다리 한가운데에서 올라 2∼3분마다 대운하를 왕래하는 여러 척이 연결된 화물선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수백 년 전 대운하 시대(1415∼1784)로 시간 여행을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공신교는 지금부터 약 400년 전인 1631년에 건립된 것인데 아직도 왕래하는 선박의 통항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대운하를 횡단하는 시민들의 나들목이자 휴식처 역할을 하고 있다. 공신교 인근에는 대운하 유람선을 탈 수 있는 선착장이 마련돼 있어 관광객들의 발걸음을 유혹한다. 공신교에서 대운하 유람을 했다면 인접한 운하쇼핑광장에 마련된 중국경항대운하박물관(中國京杭大運河博物館)을 방문하는 것이 좋다. 대운하의 역사와 유물을 간직하고 있는 전람 면적 1만㎡에 달하는 중국경항대운하박물관은 2006년의 국경절인 10월1일에 정식 개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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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국경절에 중국의 대표적인 첫 번째 대운하박물관이 항저우에 개관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2006년 3월 전국양회(全國兩會) 기간에 58명의 정협(政協) 위원이 대운하에 대한 보호 및 세계문화유산 등재 신청을 제안했고, 이후 5월에는 정협의 시찰단이 대운하에 대한 답사를 진행했다. 같은 해 6월 국무원은 제6차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 우리나라의 문화재 개념)를 발표하면서 경항대운하를 국가급 문물 보호 단위로 승격했고, 12월 국가문물국(國家文物局)은 ‘중국세계문화유산 예비 목록’을 개정하면서 기존에 없던 대운하를 첫 번째 항목에 깜짝 포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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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2006년은 대운하를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키기 위한 국가 차원의 공식적인 발동이 걸린 해였다. 항저우는 이에 발맞춰 웅장한 대운하박물관을 개관하면서 국가의 등재 사업을 지원하는 한편 대표적인 대운하 도시로서의 위상을 외부적으로 확정하고자 시기를 치밀하게 맞춘 것이다. 하지만 2003년 주석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상당 기간 정치적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장쩌민(江澤民)의 고향이자 또 다른 대운하의 대표 도시인 양저우(揚州)와의 경쟁에서 항저우는 점차 밀리는 추세다. 2007년 중국 정부가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사무국을 양저우에 설립한 이후 양저우가 등재 사업의 견인 도시 역할을 감당했고, 세계운하역사도시 조직위원회(WCCO)가 양저우에 설립됐으며, 2019년부터는 항저우 소재 박물관의 1.5배에 규모에 달하는 중국대운하박물관(전람 면적 1만6000㎡)이 양저우에 착공돼 아직 건설 중이다.

사실 중국에 대운하에 관한 박물관은 이외에도 더 있다. 2009년 산둥성 랴오청(聊城)에 건립된 중국운하문화박물관(전람 면적 7000㎡), 2008년 명칭을 수당(隋唐)대운하박물관으로 바꾼 장쑤성 화이안(淮安)의 화베이시(淮北市)박물관, 2014년 장쑤성 우시(無錫)에 건립된 디지털대운하박물관(大運河數字博物館) 등이다. 산둥성 지닝(濟寧)에는 대운하총독서박물관(大運河總督署博物館)이 건립될 예정이다. 2021년 현재 대운하가 관통하는 도시에 총 32곳의 박물관이 있는데, 이들을 연결해 ‘대운하 박물관 연합’을 조성하겠다는 계획도 제출됐다.1

이처럼 우후죽순 대운하 관련 박물관이 건립되는 현상에는 다 이유가 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기대되는 경제적, 문화적 유익을 놓고 대운하가 경유하는 각 성(省)과 시(市)에서 ‘운하열(運河熱)’이라고 부를 만한 경쟁이 과열된 탓이다. 이 과정에서 무분별한 경쟁과 혼란이 야기되기도 하고 박물관 사례처럼 ‘중복’ 투자가 빈발했다. 실제 박물관에 방문해보면 중복된 전시 내용이 많고 운하 관련 유물로 남은 것이 많지 않은 탓에 전시물에 복제품(replica)이 많아 실망할 때가 많다.

일대일로와 연결돼 더욱 뜨거워진 ‘운하열’

2014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점화된 ‘운하열’이 시간이 갈수록 더 뜨거워지고 있다. 2013년 시진핑(習近平)의 집권과 동시에 일대일로(一帶一路) 프로젝트가 주창되면서 대운하가 덩달아 주목받은 탓이다. 아니, 대운하가 2013년 공포된 일대일로와 연결된다고? 의아하게 생각할 독자분이 많을 것 같다.

대운하와 일대일로와의 연결고리는 200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은 한일월드컵으로 한창 ‘축구열’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을 때, 중국은 2008년 베이징의 올림픽 유치가 결정(2001년 7월)된 후 2002년부터 베이징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장거리 물 운송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른바 ‘남수북조(南水北調)’, 즉 ‘남방의 물을 북방으로 조달한다’라는 이름의 거대 프로젝트다.

베이징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베이징이 세계적인 도시 치고 물이 부족한 도시라는 점을 실감했을 것이다. 이는 몽골이 베이징에 수도 건설을 시작했던 13세기부터 고민했던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13세기 베이징의 설계자인 유병충(劉秉忠, 1216∼1274)은 주변 하천의 물을 끌어오는 한편 대운하의 물길을 성곽 안쪽까지 연결하고 적수담(積水潭)이라는 거대한 호수를 대도(大都, 원나라 시기 베이징의 공식 이름) 중앙에 조성했다. 오늘날에도 유람선을 탈 수 있는 베이징의 유서 깊은 관광지, 스차하이(什刹海)에 위치한 지수이탄(積水潭)이라는 지하철의 이름은 13세기 몽골의 지배와 베이징의 탄생을 기억하게 하는 장소와 명칭이다.2 이후로도 베이징의 고질적인 물 부족이 쉽게 해결되지 않자 1950년대 중국 공산당 정부는 베이징 동북부의 백하(白河)와 조하(潮河)에 댐을 건설하고 거대한 미윈(密雲) 수고(水庫, 저수지)를 조성해 베이징의 식수원으로 활용했다. 하지만 베이징이 확대되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미윈 수고의 물 공급도 한계에 도달했다.

이에 올림픽 준비의 일환이자 북방 지역의 물 부족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양쯔강의 물을 베이징으로 조달하는 남수북조 사업이 2002년 시작됐다. 동부 라인, 중부 라인, 서부 라인의 3개 라인으로 기획됐는데 2002년 가장 먼저 기공(起工)돼 2013년 1차로 마무리된 동부 라인이 사실상 대운하의 양쯔강 이북 구간과 겹쳤다. 남수북조로 조달되는 물은 대부분 ‘유(U)’자로 된 콘크리트 인공 수로 위를 흘러가지만 이를 기존의 대운하와 병행하도록 건설했다.3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남수북조 프로젝트는 기본적으로 개발 사업이기에 대운하를 따라 유지되던 기존의 자연생태계를 교란시킬 가능성이 농후했다. 실제 수로를 뚫고 주변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대운하의 여러 문화유산이 수몰되거나 파괴됐다. 이에 2004년 당시 국가문물국 국장이었던 단지샹(單霽翔)은 남수북조의 물길이 건설되는 과정에서 대운하의 물길이 훼손되거나 인근 문화재가 수몰되는 문제의 심각성을 파악하고, 문화유산의 차원에서 대운하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법적 보호책 마련을 주장했다. 단지샹 국장의 문제 제기는 고위급 정치인들과 학계의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2006년부터 본격화되는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대운하에 대한 이미지 개선 작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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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아가 단지샹 국장은 2013년 대운하의 등재를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전략적으로 연결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그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는 중국의 대운하는 베이징과 항저우를 잇는 경항(京杭)대운하로 제한해서는 안 되며, 수당(隋唐)대운하와 절동(浙東)운하까지 포함해야 할 것을 선구적으로 주창했다. 그의 주장은 “고도(古都)인 낙양은 수당대운하의 서쪽 기점이자 동시에 실크로드의 동쪽 기점이기도 하므로 수당대운하의 (대운하) 가입은 실크로드와 대운하를 함께 연결한 것이다. 또한 절동운하 역시 경항대운하와 해상 실크로드를 하나로 연결시킨다”4 로 요약된다. 그의 제안이 공감을 받으며 ‘경항대운하+수당대운하+절동운하’를 모두 포괄한 ‘대운하’가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그리고 2014년 후반부터 ‘대운하 문화대(cultural belt)’라는 개념이 등장했다. 이는 일대(一帶, One Belt, 육상 실크로드)와 일로(一路, One Road, 해상 실크로드)를 남북으로 연결하는 정치적 성격이 농후한 개념이지만 중국 공산당의 입맛에 딱 맞는 콘셉트가 됐다.

그리고 2017년 6월 시진핑은 통저우(通州)의 대운하를 탐방하는 자리에서 “대운하는 선조가 우리에게 물려준 존귀한 유산이고 유동(流動)하는 문화이기에 보호(保護)와 전승(傳承)과 이용(利用)을 잘하기 위한 전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언급했다.5 시진핑의 언설은 마치 ‘모택동 어록’처럼 힘을 발휘했고, 2019년 2월에는 중공중앙판공청(中共中央辦公廳)과 국무원판공청(國務院辦公廳)이 연합해 ‘대운하문화보호•전승•이용규획강요(大運河文化保護•傳承•利用規劃綱要)’를 발표했다.

그즈음부터 대운하의 ‘보호’ ‘계승’ ‘이용’을 주제로 한 연구 논문들이 쏟아져 나왔다. 2021년에는 ‘운하학(運河學)’을 선도적으로 주창했던 랴오청대학(聊城大學) 운하학연구원(運河學硏究院)에서 정부의 연구비를 받아 『산둥 운하문화유산의 보호, 계승과 이용 연구』라는 제목의 학술서를 출간했다.6 장쑤성에서도 2019년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70주년을 기념해 시진핑이 담화로 발표한 ‘보호’ ‘전승’ ‘이용’의 세 측면으로 지난 70년 장쑤성의 대운하 문화를 분석하는 자리를 마련했다.7 일대일로와 연결되면서 그야말로 ‘운하열’에 불이 붙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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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과 ‘소통’의 상징으로 부각된 대운하

여기서 주목해야 할 포인트가 있다. 2014년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전후해 본격화된 이 거대한 열기의 배후에는 대운하에 대한 새로운 역사 기억을 창출하려는 중국 정부의 의도가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학계의 호응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방향성 제시와 막대한 연구비 지원의 주도권은 정부가 쥐고 있다. 중국 정부는 21세기에 들어와 ‘온화(溫和)’하고, ‘연결(聯通)’되며, ‘포용(包容)’적인 국가 이미지를 만들고 선전하기 위해 남북을 연결하며 통합시키는 대운하를 새로운 문화 기호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문화 유전자로 대운하를 평가하려는 연구에서도 중국 대운하의 문화적 특징을 ‘소통(沟通)’ ‘포용’ ‘교류’ ‘융합’의 아이콘으로 규정한 바 있다.8 화베이 지역을 중심으로 운하 도시의 대학을 연계하는 ‘운하문화 개방대학(開放大學)’ 연맹을 핵심 아이디어로 하는 ‘대운하 문화교육대(文化敎育帶)’라는 신개념도 만들어졌다.

대운하의 기본 기능과 개념이 인공 수로를 통한 ‘연결’에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수양제가 비옥한 강남 지역과 낙양 및 장안의 경기(京畿) 지역을 연결하기 위해 대운하를 개착했고 쿠빌라이나 영락제 역시 강남과 수도 북경을 연결하기 위해 대운하를 재건했다. 수도와 연결된 대운하를 통해 곡물을 비롯한 물자가 수도로 집결하고 과거 응시를 위한 수험생들이 모여들었다. 각지의 문화가 대운하를 왕래하는 사람들을 통해 전파된 것은 물론이고 수도 북경에서 발행한 저보(邸報)라는 신문과 명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의 자살 소식은 대운하를 통해 지방으로 퍼졌다. 황제가 남쪽으로 순행할 때는 어김 없이 강남과 연결된 대운하를 이용했다. 바다 건너편에서 온 유구(琉球), 일본, 유럽의 사절단과 승려, 선교사들 역시 대운하로 연결된 루트를 통해 베이징을 오고 갔다. 동남 지역을 통해 중국에 정착한 무슬림 역시 대운하를 이용해 거점을 확대했기에 대운하 연변 도시에는 무슬림 사원인 청진사(淸眞寺)가 빠짐없이 건립돼 있다. 조선인 최부(崔溥, 1454∼1504)가 저장성 닝보(寧波)로 표류했을 때도 대운하 루트를 이용해 북경을 거쳐 송환됐다. 이처럼 대운하는 강남과 베이징을, 해양 세계와 수도 베이징을 연결하는 교량(bridge) 역할을 했다. ‘연결’은 확실히 대운하를 상징하는 개념이었고, 이에 관련해 ‘소통’ ‘교류’ ‘융합’이 발생했다.

반면 기존 중국의 대표적인 문화적 상징물인 장성(長城)은 ‘단절’과 ‘구별’의 상징 부호였다. 흉노의 침략을 막기 위해 건립된 진과 한나라 시대의 장성부터 시작해 명나라 시대에 대거 재건된 장성 라인은 모두 북방 유목민족과의 교류를 차단하기 위한 ‘단절’의 상징물이다. 오늘날 베이징에 방문하면 볼 수 있는 빠다링(八達嶺) 장성은 서북쪽 오아시스에 있는 가욕관(嘉峪關)에서 동쪽 해안선과 만나는 산해관(山海關)까지 연결된 ‘만리장성’의 일부인데 모두 16세기에 유목 세계와 정주 세계를 ‘구별’하는 대규모 바리케이드였다. 비록 보기에는 장관이지만 실제 효과는 실망스러웠다. 명은 장성을 쌓은 지 100년도 되지 않아 만주족에게 산해관을 열어주고 무너졌다. 장성의 의미 역시 내집단과 외집단의 ‘단절’과 ‘구별’이기에 포용과 연결을 지향하는 21세기의 세계관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이에 중국 정부는 G2의 국면이 뚜렷해진 21세기에 접어들어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를 대체하기 위한 신질서를 모색하며 중국의 대표적인 문화적 상징물로 장성을 대신해 대운하를 선택한 것이다. 즉, ‘단절’과 ‘구별’의 중국을 탈피해 ‘연결’과 ‘소통’의 중국 이미지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대운하 개념에 경항대운하, 수당대운하, 절동운하가 결합하자 육상 실크로드의 종점인 시안(장안)과 해상 실크로드의 시점인 닝포가 대운하로 자연스럽게 ‘연결’됐다. 이른바 ‘일대’와 ‘일로’가 매끄럽게 연결되면서 유라시아 대륙의 동서남북이 타원형으로 이어지는 ‘초연결’이 이론상 가능해진 것이다.

1400년의 시간을 ‘연결’하는
대운하의 다양한 활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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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는 공간적인 ‘연결’뿐 아니라 시간적인 ‘연결’도 가능케 했다. 7세기에 탄생한 대운하가 역사적 유물로만 기억되지 않고 끊임없이 활용되면서 현재까지 생명력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장성이 한때만 기능했던 유물로 기억될 뿐 현재는 관광자원으로만 활용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다.

중국의 역대 집권자들은 대운하에 대한 애착을 놓지 않았다. 그들이 지난 1400년 동안 대운하를 아끼고 활용했던 방법은 크게 8가지로 정리가 가능하다.9

첫째는 7세기 수양제(隋煬帝)의 활용법이다. 당시 양제는 위진남북조의 긴 분열기를 통일한 후 남조(南朝)의 중심지인 강남으로부터 물자를 차출해 수도로 조달하기 위해 통제거(通濟渠)를 뚫었고, 다시 고구려 침공을 위한 물자 조달을 위해 영제거(永濟渠)도 개착했다. 즉, 강남의 물자를 차출하고 한반도를 침공하기 위한 용도로 대운하를 뚫었던 것이다. 이것이 대운하의 첫 번째 용도였다.

수나라 멸망 이후 당나라 지도자들은 대운하를 폐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왕 만들어진 대운하를 남북 방향의 경제 교류를 활성화하는 데 활용했다. “수나라 백성들에게는 그 해로움이 말할 수 없었지만 당나라 백성들에게는 그 이로움이 말할 수 없다”고 노래했던 피일휴(皮日休, 834∼883)의 시는 이러한 반전의 드라마를 잘 보여준다. 실제 당의 대운하는 남북 물자 교류의 대동맥으로 경제적 통합의 효과를 나타내기 시작했다. 남북의 경제적 통합, 이것이 대운하의 두 번째 활용법이었다.

원나라(몽골제국)의 쿠빌라이 칸이 수도를 대도(베이징)로 천도한 이후 대운하 루트는 이전과 달리 항저우에서 수도 베이징을 직접 연결하는 경항대운하 노선으로 조정됐다. 하지만 원을 무너뜨린 명나라의 개창자 주원장이 수도를 난징(南京)으로 옮기면서 대운하의 기능 역시 쇠퇴하기 시작했다. 난징이 수도로 정착됐다면 대운하 역시 곧 막혀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영락제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대운하가 주목받기 시작했다. 경제 중심지인 남경에서 1000㎞ 이상 북쪽으로 멀어진 황량한 베이징으로 수도를 옮기는 것에 동조했던 신료들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영락제는 대운하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대운하가 있는 한 북경으로의 천도와 경제적인 문제는 없을 것이라 장담했다. 결국 대운하는 베이징 천도라는 정치적 결단을 돕는 도구로 활용됐다. 이것이 대운하의 세 번째 활용법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대운하는 남쪽의 물자를 북쪽(베이징)으로 운송하는 ‘남량북운(南糧北運)’의 생명선으로 기능했다. 하지만 이는 처음 대운하가 등장했던 7세기 이후 변함없는 대운하의 기능일 뿐이었다. 이에 더해 15세기부터 18세기의 대운하는 해외 무역의 욕구를 억제하는 대체제(代替製) 역할을 수행했다. 저장성-장쑤성-산둥성-허베이성을 관통했던 대운하는 경제 중심지와 정치 중심지를 연결했기에 당시 증대하던 초지역적(inter-regional) 교역의 욕구, 즉 서로 먼 지역을 왕래하며 시세 차익을 누리려는 욕구를 상당 부분 충족시켰다. 정화의 인도양 원정대가 보여줬던 15세기 중국의 해양력 수준이 18세기 후반까지 유지는커녕 오히려 쇠퇴했던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이처럼 후대의 평가는 다소 달라졌지만 이것이 역사적으로 대운하의 네 번째 활용법이었다.

청나라의 몰락과 함께 대운하의 생명력도 끝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1949년 이후 등장한 공산당의 신중국은 대운하를 폐기하지 않고 복구하며 ‘알뜰하게’ 활용하기 시작했다. 기차와 자동차가 확산하는 국면에서의 ‘의외의’ 전략이었다. 즉, 북쪽에서 생산된 석탄을 남쪽으로 운송하는 데 대운하를 활용한 것이 대운하의 다섯 번째 활용법이다. 이를 “북매남운(北煤南運)”이라 부른다. 1958년부터 장쑤성 북부 지역에서 시작된 운하에 대한 보수 및 확장 공사는 단순히 대운하의 ‘복원’이 아니라 대약진운동(1958∼1960)이 절실하게 필요로 했던 신성장 동력으로 기획된 결과였다. 이 배경에 당시의 산업과 교통 구조에 대한 고려가 담겨 있었다. 당시 석탄 산지가 주로 화북(華北)에 위치한 반면 석탄을 소비했던 발전소, 공장, 생활 주거지는 양쯔강 하류 지역에 집중된 탓이었다. 대운하는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한 철도 운송을 보완하는 용도로 활용됐다.

여섯째로 양쯔강의 풍부한 수자원을 북쪽의 갈수 지역으로 조달하는 데 대운하를 활용했다. 앞서 언급했던 남수북조 프로젝트가 그것이다. 그 결과 대운하의 수질은 개선됐고, 대운하는 경유 지역으로 농업용 관개용수 및 공업, 생활용수까지 공급했다. 홍수를 방지하는 기능까지 덧붙여진 것은 망외(望外)의 수확이었다.

일곱째는 서두에 잠시 언급했던 바, 대운하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시켜 관광 자원으로 활용한 것이다. 이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참여했던 지역적 범주는 세 개 대운하 라인(경항대운하, 수당대운하, 절동운하)이 경유하는 6개 성(허베이, 산둥, 장쑤, 저장, 허난, 안후이)과 2개 직예시(베이징, 톈진), 그리고 35개 도시로 확대됐다. 2014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될 때까지 양저우와 항저우로 대표적인 운하 도시는 도시 재건 및 유람선을 통한 관광객 유치에 성공했고, 강남 지역의 운하망으로 연결된 여러 시진(市鎭)에는 수향(水鄕) 도시를 경험하려는 관광객이 급증했다.

마지막 여덟째는 대운하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대운하의 개념을 확대해 일대일로(一帶一路)의 국가 전략과 연계하는 데도 활용한 것으로, 앞서 언급했다. 그야말로 지난 1400년 동안 왕조의 변화와 여러 위기 국면 속에서도 대운하는 끈질기게 생명력을 유지해왔다. 이러한 시간적 연결을 다양한 공간적 연결과 결합하면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키워드인 ‘초연결(hyper-connectedness)’이라 불러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21세기 중국에서 대운하가
‘초연결’의 아이콘이 될 수 있을까?

남은 문제는 과거 1400년 동안 유지된 대운하의 초연결성이 실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진입하는 21세기에도 실효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의 여부다. 2014년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과 연동되면서 운하열이 새롭게 불붙었으나 이러한 열기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까?

이를 분별하는 실마리 역시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적인 안목으로 보면 21세기의 운하열은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과거에도 크게 두 차례의 운하열이 있었다.

첫 번째 운하열은 7세기 수나라의 양제가 처음 대운하를 개착할 때 등장했다. 당시 황제는 대운하의 탄생을 과시하고자 크고 화려한 용선(龍船)을 타고 대운하를 유람했다. 양저우와 같은 도시에는 대운하 개통을 축하하고 황제의 운하 행차를 맞이하기 위한 크고 작은 행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 열기는 황제와 집권자들이 주도한 관 주도의 열기일 뿐이었다. 수많은 백성이 운하를 파는 부역에 동원돼 사망했고, 그 과정에서 민초들의 고충은 무시됐다. 아직 경제적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상태에서 진행된 무리한 토목공사였기에 상인들도 장거리 유통망의 혜택을 제대로 누리지 못했다. 게다가 대운하의 북부 구간은 고구려를 침공하는 군수 물자 유통로로 활용됐으니 재정 지출의 주범일 뿐이었다. 결국 수나라는 대운하를 개통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몰락했고, 대운하가 ‘황제의 오락용’으로 건설된 것이 아니냐는 후대의 비판을 받으며 운하열도 금방 식어버렸다.

두 번째 운하열은 1415년 명나라의 영락제가 대운하를 재건하면서 바다를 통한 베이징으로의 물자 조달을 중단하면서 발생했다. 수백만 석의 곡물을 비롯해 베이징으로 조달되는 각종 물품의 유통로가 대운하로 일원화되면서 약 1800㎞에 달하는 대운하 구간의 장거리 유통망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황제나 관료들이 대운하를 굳이 강조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치 중심지와 경제 중심지가 분리되고 그 연결고리가 대운하로 일원화되면서 생겨난 자연스러운 변화였다. 이후 250년이 넘도록 정덕제를 제외한 어떤 황제도 대운하를 이용한 여행을 다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민간에서 주도적으로 대운하를 활용한 교역, 도시 발전, 문화 교류, 정보 유통 등 사회경제적 열기가 이어졌다. 청나라의 강희제나 건륭제와 같은 걸출한 황제들이 대운하를 이용해서 강남 여행을 다니자 그 열기는 17세기 후반부터 더욱 고조돼 1784년 건륭제의 마지막 남순(南巡, 남방 순행)까지 이어졌다. 370년간 이어진 ‘운하열’이기에 이 시기를 대운하 시대라고 부른다.10

대운하 시대에 중국 경제를 휘어잡았던 대상인들은 대부분 대운하 유통망 속에서 성장하고 사업을 확장시켰다. 물품의 이동 거리가 길어질수록 그 시세 차익이 높아지는 것은 자연스런 이치였다. 이전부터 초지역적 교역의 욕구는 충만했다. 특히 13세기 몽골제국의 등장으로 장거리에 걸친 대량 교역이 경제적으로 안정된 사업으로 널리 인식됐다.11 다만 13세기 초지역적 교역은 동서 방향의 교류가 주류였다. 미진했던 남북 방향의 교류 욕구가 15세기 대운하라는 초연결의 인프라가 구축되면서 제대로 불이 붙은 것이다. 그 이전까지 몇 개의 큰 지역구 안에서만 주름 잡던 상인들이 대운하 시대의 개막과 함께 초지역적인 유통망 속에서 시세 차익을 챙기면서 거대 상인으로 성장했다.

21세기에 접어들어 새로 불붙은 ‘운하열’의 지속성은 관 주도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민간 주도로 정착할 것인가에 따라 판가름이 날 것이다. 과거 두 차례의 ‘운하열’은 이러한 두 가능성을 보여주는 훌륭한 전례가 된다. 두 번째 ‘운하열’ 시기에 수많은 상인이 대운하의 ‘연결성’에서 파생되는 열매를 맛보았듯 21세기의 ‘운하열’이 ‘초연결’의 아이콘으로 정착한다면 그 열매의 혜택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지 모른다. 다만 관 주도의 과잉 규제와 권력의 비투명성(예측 불가능)이 남아 있는 한 이러한 상상은 장밋빛 전망일 수 있다. 중국 전문가뿐 아니라 중국과 거래하려는 경영인들 역시 중국 정부의 규제력과 거버넌스의 투명성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더욱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chokra@korea.ac.kr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 학자와 하버드-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근세 시대에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 및 북경 수도론이 주된 연구 주제이고, 동아시아의 해양사와 대륙사를 겸비하는 한반도의 역사 관점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 저서로 『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엘로우 퍼시픽: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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