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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두면 쓸모 있는 돈의 사회학

가상 화폐는 사다리인가, ‘사다리게임’인가

김수경 | 357호 (2022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비트코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지만 가상 화폐의 큰 변동성과 자신의 운에 기대를 걸고 너도나도 코인 판에 뛰어든다. 특히 한국 청년에게 가상 화폐 투자는 유일한 계층 상승 도구로 여겨진다. 집값은 치솟는데 노동이라는 적법한 수단으로는 계층의 사다리를 타기가 불가능해지자 가상 화폐가 마지막 희망이 된 것이다. 이는 물질적 성공을 바라지만 이를 달성할 합법적 수단이 없어 아노미 현상이 발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학 교수라는 직업상 늘 청년들을 만난다. 청년 문제가 워낙 화두이다 보니 수업 시간에 기회가 될 때마다 묻는다. “요즘 청년들이 생각하는 가장 큰 고민이 뭐예요?” 청춘이니까 아무래도 이성 교제 아닐까? 아니지, 요즘은 일자리가 부족하니 취업이 가장 큰 고민일 거야….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집’이었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집을 살 수 없게 돼 버린 게 제일 큰 고민이라는 것이다. 다시 물었다. “여러분은 아직 집 살 걱정을 할 나이는 아니지 않나요?” 학생들의 대답은 이랬다. “우리가 돈을 벌 때 즈음이면 구입할 수 있는 집이 다 없어질 것 같아요.”

‘라떼는’ 그랬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돈이 조금 모이면 결혼을 하고 전셋집을 얻어 살다가, 아이가 커가고 적당한 시기가 되면 은행에 빚을 내서 작은 집 한 칸을 마련했다. 그런데 지난 몇 년간 집값이 폭등하면서 내 집 장만의 꿈은 영원히 멀어졌다. 최근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04년 99㎡(약 30평) 기준 3억4000만 원이었던 서울의 아파트 가격은 올해 5월 12억8000만 원으로 4배 가까이 상승했다. 이는 노동자 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36년간 숨만 쉬고 월급을 모아야 살 수 있는 가격이다. 정부는 집값 상승을 억제하기 위해 대출을 막았고, 결과적으로 ‘현찰 부자’가 아니면 아무도 집을 살 수 없게 됐다.

청년들의 분노 포인트는 집값 그 자체보다 걷어차인 사다리에 있었다. 청년들의 눈에 비친 지금의 50∼60대 정책 결정자들은 경제 호황기에 대학을 졸업해 지원서를 내기만 하면 기업들이 여기저기서 모셔가던 시절을 살았다. 은행에 저축을 하기만 해도 연이율이 20% 가까이 됐으니 월급 모아 집 사는 게 전혀 무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 세대는 어떠한가. 취업이 어려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티끌 모아봐야 티끌’밖에 되지 않는 제로금리의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다. 유일하게 믿었던 대출조차 막히면서 이들에겐 계층을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가 영영 사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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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때, 하늘에서 동아줄 하나가 내려온다. 단단한 동아줄인지, 썩은 동아줄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너도나도 붙잡겠다고 달려든다. 바로 비트코인이다. 비트코인은 계층 사다리가 사라진 한국 사회 청년들의 유일한 희망으로 급부상한다. 가상 화폐 전문 매체 코인데스크코리아와 대학생 커뮤니티 사이트 에브리타임이 지난해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대학생 10명 중 7명은 가상 화폐 투자 경험이 있다고 응답했다(응답자 2502명 중 1714명). 가상 화폐 시장이 청년 중심인 것은 공식적인 통계로도 드러난다. 올해 3월 금융위원회 금융정보분석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가상 화폐 거래소에 계좌를 가진 사람 중 30대가 31%, 40대가 27%, 20대 이하가 24%를 차지했다. 50대는 14%, 60대 이상은 4%에 불과했다. (그림 1) 현재 가상 화폐 시장은 분명 청년들의 놀이터이자 전쟁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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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 사이에서 가상 화폐 투자가 유행하자 정부는 규제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한다. 2018년 1월11일 박상기 법무부 장관은 “가상 화폐 거래는 사실상 도박에 가깝다”며 가상 화폐 거래를 금지하는 법안을 준비하고 거래소 폐쇄 방안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박 장관의 발언 직후 비트코인 시세는 2100만 원에서 1400만 원으로 30% 이상 폭락했다. 가상 화폐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곡소리’가 났고 이 사태는 ‘박상기의 난’으로까지 불렸다.

비슷한 일은 3년 뒤 똑같이 재현됐다. 2021년 4월22일 은성수 금융위원장은 국회에 출석해 “가상 화폐는 내재 가치가 없으며 거래소는 전부 폐쇄될 수도 있다”고 발언했다. 그는 이어 “(가상 화폐 투자를 많이 하는 청년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으면 어른들이 가르쳐줘야 한다”고 말했다. 은 위원장의 발언 다음 날 비트코인 시세는 10% 이상 급락했고 청년들의 분노는 하늘에 닿을 기세였다. 특히 “어른들이 가르쳐줘야 한다”는 발언은 청년들의 ‘꼰대 혐오’에 불을 지폈다. 중요한 건 비트코인이 실제 내재 가치가 있는지 여부가 아니었다. 은 위원장은 서초구와 세종시에 아파트를 가진 다주택자였고, 세종시 아파트를 처분해 상당한 차익을 남긴 이력이 있다. 청년들이 보기에 기성세대는 속된 말로 ‘꿀 빨던’ 시절에 자산을 축적한 이들이다.

은 위원장의 발언 직후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글이 하나 올라왔다. 청원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비트코인 좀 그만 건드리세요. 한국의 20, 30대 남자들은 평생 노예로 살아야 합니까?” 이 글은 분노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림 2) “자신들은 집 사서 차익을 막대하게 쌓아 올려 벼락부자 되고 서민들은 벼락 거지 만들어 놓고 부동산도 하지 말아라, 코인도 하지 말아라 한다” “코인 판 망가뜨려서 사다리 걷어차 대한민국 청년들 계층 상승 꿈도 못 꾸게 한다”는 등 정부와 기성세대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가상 화폐는 더 이상 경제적인 투자의 영역을 넘어 일종의 사회적 계급 투쟁의 장으로 변질돼 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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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잘 알지도 못하는 비트코인인가

대체 가상 화폐가 뭐길래 이 난리일까. 사실 가상 화폐의 정의를 이해하기 쉬운 언어로 설명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2009년 사토시 나카모토(Satoshi Nakamoto)라는 인물이 맨 처음 도입한 비트코인은 가상 화폐의 일종으로, 개인 간 금융 거래가 중앙은행의 매개 없이도 투명하게 이뤄지도록 거래 내역을 공개된 장부에 기록하고 이를 모든 이용자에게 분산하는 시스템을 기반으로 운용된다. 중앙은행을 거치지 않는 금융 거래는 곧 화폐의 탈(脫)국가화를 의미한다. 화폐가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왜 나카모토는 화폐의 탈국가화를 꿈꾼 것일까.

오스트리아의 경제학자이자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는 1976년 『화폐의 탈국가화』라는 책을 발표했다. 그는 중앙은행이 끝없이 정치적 요인에 휘둘려 금융 불안을 야기하므로 민간이 시장에서 자유롭게 화폐를 발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그의 주장은 너무 파격적이어서 주류 경제학자들 사이에선 실행 불가능한 이상론 정도로 치부됐다. 그러나 그로부터 약 30년 후 비트코인이 등장하면서 하이에크의 실험적 사고(思考)가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비트코인이 등장한 2009년 1월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한 직후로 정부와 중앙은행의 통화 정책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던 시기였다. 나카모토는 본인의 블로그에 남긴 글에서 “기존 화폐는 중앙은행이 화폐 가치를 떨어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신뢰가 필수적인데 화폐의 역사는 이 믿음을 저버린 사례로 가득하다”고 비판했다. 결국 매개자(중앙은행)의 ‘신뢰’에 기반한 화폐 모델은 언제든 붕괴의 위험성을 내포하기 때문에 매개자 없이 개인 대 개인이 직접 금융 거래를 하고 대신 거래 내역을 암호화해 공식적인 장부에 기록하는 게 훨씬 안전하다는 게 나카모토의 생각이었다.

이 이상으로 깊이 들어가면 사실 가상 화폐에 대해 자세히 설명할 수 있는 이도, 이를 이해할 수 있는 이도 많지 않다. 오늘날 코인 열풍을 보면 가상 화폐를 정확히 이해하고 투자에 나서는 이는 그다지 많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데이터 분석 업체인 카디파이(Cardify)가 지난해 1330명의 가상 화폐 투자자를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상 화폐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다(strong understanding)고 응답한 사람은 15%에 불과했으며 그럭저럭 이해하고 있다(moderate understanding)는 응답이 49%,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limited understanding)는 응답이 37%였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가상 화폐 투자에 뛰어드는 것일까? 경제학적 시선에서 투자라는 것은 기대 손익의 대차대조표에 근거해 냉정한 이성으로 판단해야 하는 영역의 일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기대’라는 단어에는 이미 투자자의 ‘마음’이 녹아 있다. 기존의 경제학에서는 인간을 효용극대화를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로 전제한다.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기보다는 오로지 본인의 욕구 충족을 최대화할 수 있는 방향으로 자유로운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경제사회학에서는 개인을 이처럼 사회적 맥락 밖에 존재하는 원자화된(atomized) 존재로 간주하는 경제학적 관점을 거부한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경제 행위는 사회적 맥락을 배제한 채 이해될 수 없다. 경제 구조 역시 인간이 사회적으로 만들어 낸 것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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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의 가상 화폐 투자 열풍 또한 사회적 맥락에 대한 이해 없이 경제학적 지식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 대표적인 것이 ‘묻지마 투자’의 행태다. 가상 화폐는 주식보다도 묻지마 투자의 경향이 훨씬 강하다. 주식 투자는 기업의 잠재적 가치와 시장을 분석해 투자하는 경우가 많지만 가상 화폐의 경우 복권을 사는 심정으로 투자하는 이들이 많다. 가상 화폐의 작동 원리를 일반인이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탓이 크다. 한국에는 가상 화폐에 대한 기본적 정보를 담은 ‘백서(white paper)’도 변변치 않다. 일부 가상 화폐 거래소에서 영어로 작성된 백서를 요약해서 발표하지만 이를 꼼꼼히 읽고 투자하는 이는 그리 많지 않다. 더구나 백서를 읽어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자본시장연구원이 지난해 11월 발표한 ‘가상 자산 거래자 보호를 위한 규제의 기본 방향’ 보고서에 따르면 가상 자산 시장은 공시제도가 의무화돼 있지 않기 때문에 가상 화폐 발행인과 거래자(투자자) 간의 정보 비대칭성이 문제가 되며 이러한 정보 격차는 결국 불공정 거래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알트코인(비트코인을 제외한 모든 가상 화폐를 편의상 일컫는 용어)’은 가격 띄우기(펌핑), 내부자 덤핑, 허위 주문 등 다양한 유형의 불공정 거래가 발생하기 쉽다. 이렇게 위험천만한 코인 판에 별다른 정보도 없이 뛰어드는 행위는 경제학적 시선에선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해답은 가상 화폐의 최대 단점으로 꼽히는 지나친 변동성에 있다. 변동성이 크다는 것은 그만큼 인생 역전의 가능성을 내포한다. 지난해 4월 매일경제신문이 취업 포털 사람인에 의뢰해 직장인 1855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실시한 결과, 가상 화폐에 투자하는 이유는 ‘월급으로 목돈 마련이 어려워서’(53.0%), ‘소액으로 큰돈 벌 기회라서’(51.1%)가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티끌 모아 티끌’인 세상에서 가상 화폐는 ‘티끌 모아 태산’을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다.

특히 알트코인은 변동성이 훨씬 심하다. 예를 들어, 도지코인의 경우 1개 가격이 2020년 12월에는 4원에 불과했으나 2021년 5월에는 869원까지 올랐다. 만약 100만 원을 투자했다면 5개월 만에 2억 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인 셈이 된다. 대박의 가능성이 큰 만큼이나 쪽박의 가능성도 크다. ‘루나 사태’에서 보듯이 시가총액 10위권에 들던 가상 화폐가 하루아침에 휴지 조각이 되기도 한다. 루나는 2022년 4월 1개 가격이 119달러에 이르렀으나 다음 달 1달러까지 폭락했다. 이런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가상 화폐는 여전히 각광받는다. 이를 이해하려면 사회 양극화 문제를 다루지 않을 수 없다. 계층 사다리가 사라진 사회에서 이 정도 위험성은 계층 이동의 희소한 ‘가능성’을 붙잡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로 간주된다.

게다가 청년들은 가상 화폐 투자야말로 기성세대보다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시장이라고 믿는다. MZ세대는 어렸을 때부터 게임, 온라인, 디지털 기기에 익숙하다. 손에 만져지지 않는 ‘가상’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빠르다. 온라인상에서 게임 아이템 하나가 수천만 원에 거래되는 것을 거부감 없이 이해하는 세대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발표한 내부 보고서 ‘MZ세대의 특징과 금융 산업에의 시사점’에 따르면 MZ세대는 초고위험 투자에 익숙하며 이를 일종의 취미나 게임 등과 유사하게 인식한다. 무엇보다 MZ세대는 코인 시장을 “공정하다”고 인식한다. 부동산과 달리 소액으로도 진입이 가능하며 어차피 정보가 부족하기는 모두가 매한가지라는 점에서 리스크를 공평하게 짊어진다. 변동성이 지독히 크기 때문에 철저한 분석과 공부도 별 소용이 없어 보이는 것이 오히려 청년들의 진입을 부추긴다.

오늘날 많은 청년은 자신의 운세를 시험해보는 심정으로 코인 판에 뛰어든다. 여기에는 어차피 ‘노오오오력’1 이 작동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냉소가 서려 있다. 청년들의 코인 열풍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이 태어나서 줄곧 저성장의 시대를 살아왔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1970년대는 연평균 10%가 넘는 경제성장률을 기록했지만 최근 5년(2017∼2021년)의 경제성장률은 평균 2.3%에 불과하다. (그림 3) 올해 2월 한국경제학회가 학회 소속 전문가들에게 5년 후 경제성장률 예측을 물은 결과 응답자 37명 가운데 절반에 가까운 18명이 1%대로 떨어질 것이라고 답했다. 성장률이 0%대로 떨어질 것이라는 견해도 3명이었다. 지금의 청년 세대는 분명 이전 세대보다 물질적으로 풍족하지만 ‘가능성’이 사라진 시절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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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은 높아지는데 오를 사다리가 없다

성장의 ‘파이’가 더 이상 커지지 않는 세상에선 이미 주어진 ‘파이’를 얼마나 공평하게 나누는지가 중요해진다. 최근 5년간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큰 화두는 ‘공정’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2017년 대통령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하고, 과정은 공정하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만 해도 공정이라는 단어가 한국 사회를 이토록 뒤흔들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논란, 2019년 자녀 입시 비리 의혹으로 촉발된 ‘조국 사태’, 2020년 인천국제공항 정규직 전환 문제를 둘러싼 ‘인국공 사태’ 등 일련의 사건들은 ‘공정’에 대한 청년 세대의 심기를 건드렸다.

오늘날 공정에 대한 인식은 기계적 평등보다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차등에 더 가깝다. 2018년 한국리서치가 실시한 ‘한국 사회 공정성 인식 조사’에 따르면 “개인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보수의 차이가 클수록 좋다”는 입장이 66%를 차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의 한국 사회가 개인의 능력이나 노력보다는 부모의 배경이나 연줄 같은 요소들이 사회적 성공을 좌우하는 사회라는 점이다. 같은 조사에서 성공한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조건이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에 68%나 되는 응답자가 ‘부모의 배경’이 “매우 중요하다”고 답변했다. “약간 중요하다”는 응답(24%)까지 합치면 부모의 배경이 중요하다고 대답한 사람이 92%나 된다. (그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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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은 결국 ‘룰(rule)’에 대한 이야기다. 한국 사회는 현재 성공의 룰이 공정하게 운영되지 않고 있다는 불신이 지배하고 있다. 이른바 ‘수저계급론’으로 대표되는 부와 권력의 대물림이 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기존 성공의 룰이 붕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사회적 성공을 위한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학창 시절 열심히 공부해 명문대에 들어가고 사회적으로 각광받는 직업을 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은 명문대생조차 취업이 어렵고, 가까스로 취업해도 40대면 명예퇴직의 압박을 받는다. 심지어 최근에는 명예퇴직 대상 연령을 30대까지 낮춘 곳도 있다. 명문대 학위나 안정적 직장은 더 이상 계층 이동의 사다리로 작동하지 못한다.

반면 기존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는 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성공한 ‘먹방’ 유튜버의 경우 매월 수억 원에서 수십억 원의 수익을 올린다. ‘보람’이라는 이름의 여섯 살짜리 여자아이는 유튜브에 올리는 장난감 리뷰로 한 달에 30억 원이 넘는 돈을 벌어들였다. 2019년에는 보람이네 가족이 95억 원 상당의 강남 빌딩을 사들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으로 부자가 되는 사람들이 도처에 나타난다. 기존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새로운 사다리가 나타나기도 한다. 대체 어느 사다리를 올라타야 할지, 아니면 내 손으로 직접 새로운 사다리를 만들어야 할지 혼란스럽다.

기존의 지배적 규범이 약화되고 새로운 규범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이러한 상황은 사회적 아노미(anomieㆍ무규범상태)를 야기시킨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자살론』에서 사회규범이 흔들리고 개인의 가치관이나 기반이 무너질 때 ‘아노미적 자살’이 증가한다고 주장했다. 가령, 한 사회의 경제 상황이 격변하면 그것이 호황기라 할지라도 자살이 증가하는 것이다. 아노미를 연구한 미국의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Robert K. Merton)은 물질적 성공을 바라는 문화적 목표와 이를 달성하는 합법적 수단이 불일치할 때 아노미가 발생한다고 봤다. 예를 들어, 물질적 성공에 대한 목표를 추구하지만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수단이 마땅치 않을 때 비합법적 수단으로 목표를 달성하려는 욕구가 커지고 이는 범죄나 횡령, 탈세, 절도 등으로 이어진다. (그림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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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들어 급증한 횡령 범죄도 이러한 세태를 반영한다. 오스템임플란트(2215억 원), 계양전기(245억 원), 강동구청(115억 원), 아모레퍼시픽(35억 원), 우리은행(700억 원), LG유플러스(80억 원) 등 직원이 거액의 회삿돈을 빼돌리는 범죄가 끊임없이 신문 지면을 장식하고 있다. 이러한 횡령 사고의 대부분이 가상 화폐 투자, 선물옵션 투자 등 고위험 상품에 투자하려는 동기에서 유발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오늘날 한국 사회는 물질적 성공에 대한 욕망이 과열돼 있지만 이를 달성할 수 있는 제도적 수단은 막혀 있다는 것을 부분적으로 암시한다.

미국 여론 조사 기관 퓨리서치센터(Pew Research Center)는 지난해 전 세계 17개 선진국 국민들을 대상으로 ‘삶을 가장 의미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이 설문에서 한국인들은 유일하게 ‘물질적 행복(material well-being)’을 1순위로 꼽았다. 14개국이 ‘가족’을 1위로 뽑았고 스페인은 ‘건강’을, 대만은 ‘사회’를 1위로 꼽았다. 이것이 과연 한국인이 유난히 배금주의적 성향이 강하기 때문일까?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달리 보면 물질적 안정이 적법한 수단을 통해 이뤄지기 어려운 세태를 반영하는 것일 수도 있다. 더욱 주목할 것은 많은 국가에서 ‘직업’을 2순위로 꼽은 반면 한국에서는 ‘직업’이 아예 순위권에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노동’이라는 적법한 수단은 더 이상 ‘물질적 행복’이라는 문화적 목표를 지탱하지 못하는 곳이 지금의 한국 사회라고 할 수 있다. (그림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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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가 심화될수록 자본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반면 노동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산술적으로 증가한다. 이는 필연적으로 부의 양극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부의 격차가 작을 때는 키 작은 사다리로도 충분했지만 이제는 초고층 사다리로도 극복이 어렵다. 특히 코로나19로 인한 경기 침체를 방어하는 과정에서 전 세계에 유동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여기저기 벼락부자가 쏟아져 나왔다. 먹방 같은 희한한 방식으로 돈 버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개미처럼 살다가는 벼락 거지가 될 판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상 화폐는 계층 이동의 유일한 사다리로 급부상하지만 실상은 사다리가 아니라 ‘사다리게임’에 가깝다. 사다리게임은 노력이 전혀 필요치 않은, 철저히 운이 지배하는 게임이다. 동아줄을 고른 사람에게는 대박이 기다리고, 나머지 모두에게는 쪽박이 기다린다. 화폐의 탈국가화라는 거창한 철학과는 전혀 상관없이 가상 화폐는 그렇게 사다리게임으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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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오징어게임’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자본주의의 비정함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에미상 6개 부문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뤘다. 사람이 죽어 나가는 이 게임에 참여한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도박 빚을 진 백수, 주식 투자로 큰돈을 잃은 회사원, 사장에게 임금을 떼이고 집에 돌아갈 여비도 없는 외국인 노동자 등 자본주의의 잔인한 경쟁 구조에서 변방으로 밀려난 사람들이다. ‘오징어게임’의 중요한 메시지는 ‘왜 이 사람들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는 게임에 참여할 수밖에 없는가’이다. 자본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계속해서 사다리 밖으로 걷어차지만 동시에 사다리게임에 동참할 것을 끊임없이 유도한다. 위험천만한 가상 화폐 투자에 많은 사람이 뛰어드는 것을 단순히 일확천금을 꿈꾸는 허영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다.


김수경 한신대 사회복지학과 교수 sookim@hs.ac.kr
필자는 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동아일보 기자로 근무했다. 스탠퍼드대(Stanford University)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고려대 국제대학원 연구교수, 통일연구원 연구위원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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