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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siness Trend in Japan

밉지만 살펴봐야 할
일본 부품·소재 기업 경쟁력

이지평 | 278호 (2019년 8월 Issue 1)
한국에 대한 일본 정부의 무역 규제 공세가 거세다. 한일 기업 활동에 미칠 부정적인 파장이 우려되는 가운데 한국도 대응책을 마련하기 위해 고심 중이다. 일본제 첨단 소재, 부품, 기계류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장기적인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물론 쉬운 과제는 아니다. 일본 제품의 경쟁력이 강력하고 세계시장 점유율도 높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럴 때일수록 일본의 부품·소재 기업을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적을 제대로 알아야 승리할 수 있다’는 옛말처럼 일본이 부품·소재 산업에서 어떻게 경쟁력을 확보했는지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이들의 강점을 한국 부품·소재 산업에 적용해 제품 경쟁력을 키우는 원동력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부품·소재 기업들은 어떻게 한국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됐을까. 첫째, 일본 기업들은 여러 사업에 무분별하게 진출하지 않고 특정 분야에 집중해 이를 세계 시장 1등 상품으로 육성하는 데 주력해 왔다. 이번에 일본 정부의 무역 공세와 관련해 대상 품목이 된 불화수소 생산업체인 ‘스텔라캐미화(Stella Chemifa)’는 불화수소에 집중하면서 고순도 제품의 제조 역량을 강화해 왔다.

초기 이 회사의 고객은 원래 자동차, 가전기업 등에 불과했다. 이후에는 점차 불화수소 기술을 발전시켜 다양한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해왔다. 그 결과 세계 각국의 반도체, 디스플레이, 의료용 분야 등으로 고객을 확장했다. 불소화학 기술을 원자력 발전소용 재료 분야로 확장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여기에서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인 재료는 암 치료용 약제로 응용되기도 했다. 한 가지 분야에 집중한 후 기술적으로 연계된 관련 분야를 개척해 글로벌 시장을 석권한 것이다. 이를 통해 일본 기업들은 의도치 않은 이점도 얻게 됐다. 세계 각국 고객 기업의 투자 동향이나 기술의 방향 전환을 경쟁사보다도 일찍 파악할 수 있어 빠르게 대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둘째, 제조기술을 끊임없이 혁신하려는 일본 기업들의 노력이다. 일본 제조업의 강점은 끊임없이 현장을 개선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이를 철저하게 강화한 것이 첨단 소재, 부품, 기계 등의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 분야들은 상대적으로 디지털화가 덜 이뤄졌다. 현장 중심의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뤄지는 일본의 경쟁력이 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다. 소재 분야에서도 범용화학 수지의 경우에는 규격화된 플랜트를 설치해 표준적인 프로세스를 따라 생산된다. 반면 첨단 소재의 경우 고객 기업과 수많은 성능 및 품질 조건을 하나하나 맞춰가면서 제품을 개발하고 있다.

이는 일본의 TV, 휴대폰 등 대규모 전자 세트 분야의 경쟁력이 약해지자 이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소재, 부품, 기계 기업들이 한국이나 중국 기업 등과의 분업을 통해 특정 분야의 제조기술을 계속 개선하면서 경쟁력과 혁신 능력을 유지 및 강화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기능성 화학 재료를 생산하는 제온사의 경우 액정 디스플레이용 소재 등에 사용되는 시크로올레핀폴리머(COP)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일반적인 생산 설비를 조합하는 식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대신 공정마다 생산설비를 자체 생산하거나 개량하면서 생산 공정의 새로운 프로세스 개발에 주력해 성과를 거뒀다.

세 번째로 장기적인 성과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는 일본 기업의 성향을 강점으로 들 수 있다. 도레이는 1960년대부터 탄소섬유 개발에 주력한 회사다. 매출이나 수익이 부진한데도 불구하고 수십 년간 투자를 지속해 왔다. 기술적인 어려움 때문에 미국계 기업 등은 대부분 사업을 포기했다. 도레이사 자체적으로 개발 중지 결정을 내렸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도레이 연구개발 담당자들이 자발적으로 연구개발 활동을 지속한 결과 성과를 냈다. 일본식 경영의 특징 중 하나는 장기적으로 성과를 평가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첨단 소재, 부품, 기계 등의 분야에서 유리하게 작용한다고 판단된다.

일본의 소재, 부품, 기계 산업의 강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기업 사례로 무라타제작소를 들 수 있다. 이 회사는 핵심 전자부품인 세라믹 콘덴서 시장에서 점유율이 가장 높다.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세라믹 콘덴서는 1대의 고급 스마트폰에 1000개, 전기자동차에 1만 개 정도 탑재되고 있다.

무라타제작소가 시장에서 세계 최고의 기업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현장 기술력 덕분이다. 소재를 포함한 핵심 기술을 강화하는 동시에 최신 트렌드에 맞게 제품 및 기술을 고도화해 품질 경쟁력을 철저하게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전자부품 기업이지만 핵심 소재인 세라믹을 자체 생산하는 등 소재부터 차별화된 기술력과 품질경쟁력을 강화해 온 것이다.

교토에 자리 잡은 무라타제작소는 이 지역의 도자기 기술을 응용해 세라믹 기술을 발전시켰다. 공정 과정도 세밀하게 나눠 전문성을 강화했다. 세라믹을 소결하는 기술, 세라믹을 분쇄해 균일한 결정체로 만드는 기술 등 90개의 구체적인 강점 기술을 선정해 이를 8개 그룹으로 나눴다. 각 그룹의 담당자가 90개 핵심 기술을 개발하고 정제하면서 세계 최고 수준으로 만들어냈다. 이 핵심 기술들을 다양하게 조합해 새로운 제품을 지속적으로 개발할 수 있다는 무라타제작소의 경영 방침에 따른 것이다.

자사의 핵심 기술을 지속적으로 심화하는 한편 스마트폰의 성장 등 경제·사회의 변화 트렌드에 맞게 자사 핵심 기술을 응용하는 데도 주력하고 있다. 막연하게 트렌드를 관찰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체계적인 시스템하에 트렌드에 맞는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노하우를 보유하고 있다. 즉, 10년 앞을 내다보는 기술 로드맵(TRM, Technology Road Map)과 그것을 활용한 무라타의 제품 로드맵(PRM, Product Road Map), 그 부품을 사용하는 고객 기업의 제품 로드맵(MRM, Market Road Map) 등 세 가지를 작성하면서 연구개발 장기 구상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무라타제작소는 5G 시대를 맞이해 차세대 배터리인 전고체전지 분야에 주력하고 있다. 배터리 발열 문제를 억제할 수 있는 신구조의 리튬이온전지 개발에 나서는 한편 액체전해액을 고체 재료로 바꾸는 전고체전지를 2020 회계연도 중에 월간 10만 개 규모로 생산한다는 계획이다. 배터리 산업에서도 주도력을 확보하겠다는 전략인 셈이다.

물론 제품 개발뿐만 아니라 제품의 품질 경쟁력이 중요하다. 무라타제작소는 제조 과정 등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품질 문제를 데이터베이스로 축적하면서 철저하게 원인을 규명하고 개선점을 찾는 데 활용하고 있다. 기존의 전자기기보다 제품 라이프 사이클이 짧은 PC, 스마트폰 시장이 중요해지면서 이러한 IT 사이클에 맞게 품질을 개선하는 체제를 강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블루투스 부품의 기반이 되는 세라믹스는 소성(燒成, 광물 가공 방식 중 널리 사용되는 고온 처리 방식)할 때 수축하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수축의 편차를 억제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라타제작소는 수축의 편차가 발생하는 원인을 찾기 위해 제조공정에서 1만3500개 항목의 정보를 정밀 분석했다. 그 결과 편차가 발생하는 원인은 원재료의 특성이나 소결 방식 등의 원인들이 복합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불량 원인을 좀 더 자세하게 분석한 결과 가공과정에서 원재료에 포함되는 물질이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밝혀냈다. 무라타제작소는 이 불량 분석 결과를 토대로 원재료에 포함되는 물질의 함유량을 측정하고 원재료를 선별하는 조치를 취함으로써 불량률을 20분의 1로 줄이는 성과를 거뒀다.

이처럼 일본의 부품·소재 기업들은 오랜 경험을 통해 축적한 노하우와 압도적 점유율을 기반으로 성장했다. 따라서 일본 기업을 대체하기 위해 단순히 부품·소재 제품을 국산화하는 데만 그쳐선 안 된다. 처음부터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는 전략으로 접근해야 한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한국의 최종 조립 분야와 소재, 부품, 기계 등의 산업 기반 분야가 긴밀하게 분업하거나 연구협력을 강화하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일본 기업이 아직 진출하지 않는 새로운 기술 분야를 개척하는 전략 방향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국가적인 과학지식과 현장 기술을 결합해 이노베이션 인프라를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파괴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기대되는 도전적인 연구개발을 강화하는 한편 당장 성과를 기대하지 못하지만 산업의 기반이 되는 분야에 장기적으로 투자해 연구 성과를 축적해 나가야 한다.



필자소개 이지평 LG경제연구원 상임 자문위원 jplee@lgeri.com
필자는 1963년 일본 도쿄에서 출생, 호세이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한국으로 건너와 1988년 고려대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대통령 자문 기구인 동북아경제중심추진위원회의 남북 대외협력 전문위원회 위원, 산업자원부 제조업 공동화 대책회의 위원, 미래부 미래성장동력위원회 위원 등을 역임했다. LG경제연구원 상근자문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는 일본을 닮아가는가』 『일본식 파워경영』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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