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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지멘스㈜의 현지화 전략

본사 지식 이식받아 독자 역량 개발, 해외 물량 수주해 ‘한국 지사’ 한계 넘다

이방실 | 237호 (2017년 1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지멘스㈜ 솔루션 사업부의 현지화 성공 요인

1) 흡수역량 형성해 지식 이전을 위한 토대 마련 : 아태지역본부 출범 초기부터 사전 지식과 경험이 풍부한 국내 인력들로 조직을 구성, 새로운 외부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흡수역량을 사전에 형성함으로써 지멘스그룹 독일 본사로부터 효과적인 지식 이전을 가능케 하는 토대 구축.

2) 실제 프로젝트 수행하며 지식 이전 촉진 : 독일 본사에서 파견된 전문 기술인력과 한국인 엔지니어들이 협력해 아태지역본부 출범 직후 약 3년간 장문·당진·위례 3개 발전소 프로젝트 동시 수행. 1대1 멘토링 등 지속적인 상호 작용 활동을 통해 암묵지(暗默知)를 내재화하는 데 성공.

3) 한국법인만의 독자 역량 개발 : 독일 본사로부터 전수받은 지식을 현지 상황에 맞게 수정·응용함으로써 현지 실정에 보다 적합한 솔루션 개발. 그 결과 더 많은 자율성과 권한을 위임받아 그룹 내 지멘스㈜의 위상 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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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서쪽 신계지역 툰먼(屯門) 지구의 바다와 맞닿아 있는 블랙포인트발전소(Black Point Power Station)는 홍콩 내 최대 복합화력발전소1 다. 총 발전용량은 2500㎿로 전 세계적으로 보더라도 상당히 규모가 큰 발전소에 속한다. 홍콩 에너지기업인 CLP파워홍콩(CLP Power Hong Kong)이 운영하는 이곳은 1996년 단지 조성 이후 현재의 발전용량을 갖추기까지 오직 GE의 터빈만 써 왔다.

그러던 CLP파워홍콩이 지난해 처음으로 외도를 했다. 550㎿ 발전용량 증설을 결정하며 미국 GE의 100년 넘은 숙적인 독일 지멘스(Siemens)의 손을 잡은 것. 지멘스 입장에선 사상 처음 홍콩에서 수주한 복합화력발전 프로젝트였다. GE의 오랜 텃밭을 지멘스가 뚫고 들어갔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이보다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따로 있다. 블랙포인트 프로젝트의 수행 주체가 독일 지멘스 본사가 아니라 지멘스그룹의 일개 지사, 그것도 한국법인인 지멘스㈜라는 점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은 지멘스㈜가 지난 2013년 10월 전력 및 가스(Power & Gas·PG) 사업본부 산하 솔루션(Solutions·SO) 사업부2 의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3 를 한국에 유치했기 때문이다. 독일 본사가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 설치를 목적으로 한국 정부에 신고한 외국인 직접투자(FDI) 금액은 6600만 달러다. 지난 20여 년간 지멘스그룹이 한국에 투자한 돈이 총 2억5800만 달러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당한 규모라 할 수 있다.

현재 지멘스㈜는 아태지역에서 발전설비 건설 등 에너지 관련 솔루션을 제공하는 EPC(Engineering, Procurement, Construction·설계, 조달, 시공) 사업을 자체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갖고 있다. 과거 단순 영업 및 유지보수 서비스만 제공하던 수준에서 사업 영역이 크게 확대된 것이다. 지멘스㈜는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 유치를 계기로 고작 23명에 불과했던 조직을 4년 만에 208명(2017년 10월 말 기준)으로 늘리며 EPC 역량을 확충해 왔다. 단순히 몸집만 키운 게 아니다. 국내는 물론 해외 시장에도 적극 진출하며 사업을 확대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당진 4호기 복합화력발전소와 장문 복합화력발전소, 위례 열병합발전소4 등 3개의 국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완료했고, 현재 오는 2019년 완공을 목표로 홍콩 블랙포인트 프로젝트를 수행 중이다.

한국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 현지법인의 경우 주도적으로 사업을 수행하기보다는 글로벌 본사의 지침에 따라 수동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단순 영업에만 주력하지 본사의 기술이나 지식을 전수받아 한국 지사만의 독자적 역량을 확보해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경우는 드물다. 반면 지멘스㈜는 한국법인만의 고유 역량을 확충하는 데 성공, 현재 국내 시장은 물론 국경을 넘어 해외로까지 진출해 EPC 프로젝트를 주도적으로 수행해 나가고 있다. 다국적 기업의 성공적 현지화 모델을 보여준 지멘스㈜의 솔루션 사업에 대해 DBR이 집중 분석했다.

 

지멘스㈜, 40여 년 만에 첫 한국인 대표 영입

지멘스㈜가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를 유치하게 된 데에는 올해로 6년째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김종갑 회장의 공이 크다. 산업자원부(현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을 지낸 그는 지멘스가 1967년 한국에 연락사무소를 설치5 한 이래 역사상 처음 맞는 한국인 최고경영자(CEO)다. 김종갑 회장은 공직에서 물러난 직후인 2007년 3월, 안정적인 공기업 사장직 제의를 마다하고 하이닉스반도체(현 SK하이닉스) 사장직 공모에 뛰어들었다. 이후 4년여 동안 경영을 맡아 수렁에 빠져 있던 하이닉스의 회생을 주도했다. 그리고 2011년 6월, 제2의 도전을 위해 지멘스㈜로 자리를 옮겼다.

소위 정부 관료라는 ‘갑’의 위치에서 국내 기업 사장이라는 ‘을’을 거쳐 다국적 기업 지사장인 ‘병’으로 변신을 거듭한 김종갑 회장은 “솔직히 처음 지멘스㈜에 왔을 때 지멘스그룹 내 한국법인의 위상이 너무 낮아 놀랐다”고 털어놨다. 그가 대표이사로 취임하기 전 8년간 지멘스그룹 CEO(당시 피터 뤠셔)가 한국을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게 단적인 예다. 김종갑 회장은 “GE 같은 다른 회사들과 경쟁하기에 앞서 지멘스 중국법인이나 인도법인 등 그룹 내 다른 지사와 실력을 겨뤄 한국법인의 위상을 기필코 높여 놓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김종갑 회장이 지멘스㈜에 부임한 지 몇 달 뒤, 한국에 사상 초유의 ‘블랙아웃(2011년 9월15일 발생한 대규모 정전)’ 사태가 터졌다. 정부는 부랴부랴 전력공급 확대 정책 드라이브를 걸었고, 이를 계기로 한국전력 발전 자회사들은 물론 민자 발전소들까지 가세해 앞다퉈 발전설비 용량 확충에 나섰다. 김종갑 회장은 즉시 수완을 발휘, 2012년에만 한국남부발전, 포스코에너지, 에스파워, 대구그린파워 등 국내 발전사들에 H클래스 가스터빈6 총 7기를 납품하는 수주 계약을 맺었다. 지멘스가 2010년 H클래스 가스터빈을 출시한 이후 2012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총 18개 수주 계약을 맺었는데 이 중 약 40%를 한국에서 수주한 것이다.7 고효율 대용량 H클래스 가스터빈의 대량 수주에 성공하면서 지멘스그룹 차원에서 한국 시장을 보는 시각도 달라졌다.

때마침 글로벌 본사에서 신흥시장에 에너지 솔루션 사업과 관련해 지역본부를 설치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아태지역을 필두로 신흥시장에서의 발전 수요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대두되며 고객들의 니즈에 좀 더 기민하게 반응하기 위해서라도 지역본부를 두는 편이 낫지 않겠느냐는 공감대가 형성된 것이다. 이에 따라 지멘스그룹 내 중국,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필리핀 법인과 함께 한국법인인 지멘스㈜도 지역본부를 유치할 후보 대상에 오르게 됐다.

김종갑 회장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지역본부를 유치한다는 건 지사의 역할이 단순히 독일 본사에서 생산한 터빈을 가져와 현지 고객에게 판매하는 수준을 넘어 EPC 턴키(turnkey) 형태로 사업 영역을 넓혀갈 수 있다는 걸 뜻했다. 이는 역량만 갖춘다면 지사가 발굴할 수 있는 대상 고객이 현지 시장을 넘어 해외로까지 확대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김종갑 회장이 지멘스라는 글로벌 기업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꿈꾸던 일이 현실화될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다국적 기업의 한국 지사라고 굳이 사업을 한국에만 국한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한국의 탁월한 제조 기반과 우수한 기술 역량을 활용하면 국경을 넘어 해외에서도 충분히 사업을 수행할 수 있다고 봤다. 지역본부를 유치할 수만 있다면 엔지니어링이나 프로젝트 관리 역량을 독자적으로 구축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우수한 국내 업체들을 부품 협력사로 발굴할 수 있고, 국내 유수의 건설회사와도 협력해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할 수 있어 국가 경제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다. 비록 다국적 기업이라 해도 한국을 터전으로 삼고 있는 만큼 지멘스㈜는 물론 우리나라 토종 기업 모두가 ‘윈윈’ 하는 결과를 내고 싶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역본부를 한국에 유치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매달렸다.” 김종갑 회장의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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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멘스㈜는 독일 본사에 지역본부 유치 대상 국가로서 한국의 잠재력을 적극적으로 알리는 데 주력했다. 우선 한국이 EPC 역량과 관련해 최고 수준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피력했다. 즉, 현대중공업, 삼성엔지니어링, 두산중공업 등 EPC 경험이 풍부한 기업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데다 발전소에 들어갈 각종 부품 조달을 위한 협력업체들도 많아 중국 등 지멘스 내 경쟁 대상 국가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당시 공급 확대 기조가 뚜렷하게 반영된 한국 정부의 전력수급 계획을 제시하며 한국 시장 자체의 잠재적 성장 가능성에 대해서도 적극 알렸다.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문화가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독일 문화와 합쳐지면 강력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점도 강조했다. 지역본부를 유치하는 주된 목적이 현지 시장의 니즈에 좀 더 기민하게 대처하는 것인 만큼 신속한 커뮤니케이션 역량은 중요한 평가 기준 중 하나였다. 김종갑 회장은 “지역본부 유치 업무를 전담하는 팀을 별도로 만들어 놓고 본사에서 자료가 필요하다는 요청이 들어오면 밤을 새워서라도 작성해 그다음 날 아침 일찍 보냈다”며 “며칠은 걸려야 답변을 받을 줄 알았던 독일 본사에서 이 같은 열성에 탄복해 후한 평가를 줬다”고 말했다. 이어 “인건비가 저렴하고 원자재를 저렴하게 조달할 수 있는 중국과 마지막까지 경합을 벌였지만 결국 숙련된 기술 인력과 EPC 인프라 측면에서 한국이 훨씬 경쟁력이 있다는 점을 인정받아 지역본부를 유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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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G 사업본부 산하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 한국에 유치

2013년 10월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 유치를 계기로 지멘스㈜는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Siemens Energy Solutions)8 를 설립했다.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의 초대 사장은 독일 본사 출신 후보들 중 김종갑 회장과 본사 PG 사업본부 대표가 협의해 결정했다. 이와 함께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는 국내에서 적극적인 인력 충원에 나섰다. 지역본부를 유치하기 전까지만 해도 지멘스㈜에선 에너지 솔루션 사업과 관련해 단순 영업 및 유지보수 서비스만 담당해왔기 때문에 엔지니어링, 구매조달, 프로젝트 관리 등 새로운 업무를 수행할 인력을 확충하는 게 무엇보다 시급했다. 이에 따라 두산중공업, 현대중공업, 삼성엔지니어링, 대림건설 등 EPC 관련 다양한 국내 기업에서 최소 10년 이상 경험을 쌓은 숙련 인력들을 중심으로 채용에 나섰다. 김영탁 지멘스㈜ PG 사업본부 이사는 “2013년 첫해에 엔지니어와 영업직, 지원 조직을 포함해 국내에서 60여 명을 뽑는 데 무려 6000여 명이 지원했다”며 “신규 채용한 국내 인력들은 독일 본사에 최소 2주에서 4주 정도 트레이닝을 거치며 지멘스의 문화와 지멘스가 일하는 방식에 대해 배우고 올 수 있도록 했다”고 말했다.

동시에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는 독일 본사에 적극적으로 인재 파견을 요청했다. 지멘스의 발전소 솔루션 설계 지식과 관련 노하우를 전수받아 한국 엔지니어들의 역량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다. 김종갑 회장은 “솔직히 독일에서 직원을 하나 데려오려면 독일에서 받는 임금의 최소 2배는 줘야 하기 때문에 한국법인 입장에서 비용 부담이 상당하다”며 “당장의 손익계산만 따지면 가급적 국내 인력으로만 조직을 구성하는 게 훨씬 낫지만 최대한 많은 전문가들을 독일 본사에서 영입하기 위해 힘썼다”고 말했다. 설계 역량 같은 무형의 지식은 직원들끼리 같이 일하면서 실무적으로 교류해야 제대로 전수받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2013년 첫해 14명의 독일인 엔지니어가 본사에서 서울로 파견됐고, 이듬해엔 추가로 30명이 합류해 한국인 엔지니어들과 호흡을 맞췄다. 2013년과 2014년 한국인 엔지니어 수가 각각 32명, 98명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한국인 엔지니어 2명당 1명꼴로 독일인 전문가들이 배치되도록 한 셈이다. 구체적으로 엔지니어링 부서의 경우 팀장은 모두 독일인들이 맡았고 그 외 팀마다 최소 2명에서 5명의 독일인 코치(한국인 엔지니어들에게 지식 및 노하우 전수 역할을 맡은 전문가)들이 배치됐다. 코치들은 엔지니어링 분야별로 최소 10년에서 30년 가까이 전문 지식을 쌓은 이들이었다. 김영탁 이사는 “지역본부 출범 이후 대형 강당에서 여러 사람이 앉아 일방적으로 강의를 듣는 형식의 ‘집체 교육’은 단 한 번도 없었다”며 “철저한 ‘1대1 멘토링(mentoring)’ 방식으로 실제 업무를 같이하면서 독일 본사의 기술과 노하우를 전수받는 형태였다”고 설명했다. 가령 제안서를 작성할 때는 어떤 툴을 활용하는지 같은 사소한 사항부터 기술적으로 어려운 부분들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제들을 실무를 통해 익혔다고. 김영탁 이사는 “독일의 경우 전문 분야가 세세하게 나뉘어져 있고 분야마다 전문 기술자가 있기 때문에 이런 멘토링 훈련 방식이 유효했던 것 같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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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문·당진·위례 3개 프로젝트 성공적 완료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는 별도 법인 출범 6개월여 만인 2014년 3월 지멘스㈜가 입주해 있는 기존 충정로 풍산빌딩에서 나와 서울스퀘어로 사옥을 옮겼다. 당시 독일에서 파견된 전문가들을 포함해 전체 직원 수가 144명으로 늘어나면서 더 이상 기존 지멘스㈜ 사옥에서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 인력을 수용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지멘스에너지솔루션즈는 그해 4월부터 11월까지 장문 복합화력발전소(1800㎿), 당진 4호기 복합화력발전소(903㎿), 위례(450㎿) 열병합발전소 등 3개 프로젝트를 순차적으로 진행하기 시작했다. H클래스 가스터빈이 도합 7개나 들어가는 대형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한 것이다.

장문, 당진, 위례 3개 프로젝트는 고객사에 발전 솔루션을 제공해 주는 사업이었을 뿐 아니라 지멘스㈜ 내부적으로 독일 본사의 지식 및 노하우를 내재화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엔지니어링 파트의 경우 프로젝트매니저(PM)들은 모두 한국인이 맡았지만 PM마다 짝을 이뤄 일할 독일인 코치를 한 사람씩 배치했다. 2014년과 2015년 당시 무려 40명이 넘는 독일 본사 엔지니어들이 서울로 파견됐던 것도 거의 동시에 진행된 3개 프로젝트에 투입할 코치들이 대거 필요했기 때문이다. 독일인 코치들은 한국인 PM들이 프로젝트를 원활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조언자 역할을 했다. 장문 및 위례 프로젝트의 프로세스 엔지니어링 PM을 맡았던 이경훈 지멘스㈜ PG 사업본부 차장은 “처음엔 지멘스 시스템에 대해 속속들이 잘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의사결정을 내릴 때 독일인 코치에게 상당 부분을 의지했다”며 “하지만 1년 정도 시간이 지나 지멘스의 설계 철학(design philosophy)에 대한 이해도가 깊어지면서 코치에 대한 의존도는 점점 줄어들었다”고 말했다.

이처럼 지멘스㈜의 한국인 엔지니어들은 독일인 전문가들과 함께 3년여의 긴 기간 동안 3개의 발전소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하며 독일 지멘스 본사에서 일하는 방식이나 문제 해결 방법 등에 대해 익힐 수 있었다. 특히 경력직으로만 구성된 한국인 엔지니어들이 지멘스의 경쟁사인 GE와 미쓰비시히타치파워시스템(MHPS) 기기에 익숙하다는 사실이 독일 본사의 노하우를 익히는 데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한국 EPC 회사들은 특정 제조사의 가스터빈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프로젝트에 따라 여러 회사의 가스터빈을 선택해 왔기 때문이다. 이경훈 차장은 “기본적으로 발전소 핵심 주기기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데다 여러 회사에서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일하다 보니 학습 시너지가 컸다”며 “이해의 폭 측면에선 평생 지멘스 기술만 최고로 여겨왔던 본사 엔지니어들보다 지멘스㈜의 한국인 엔지니어들이 훨씬 더 낫다고 자부한다”고 말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서로 다른 문화 배경과 사고방식의 차이로 어려움도 많았다. 이경훈 차장은 “초기에 프로젝트를 함께 수행할 때에는 ‘외부’에 있는 고객사 요청을 들어주는 것보다 ‘내부’에 있는 동료 독일인들을 이해시키는 게 더 힘들 때도 많았다”고 털어놨다. 특히 ‘원리 원칙’을 고집하는 독일 방식과 ‘융통성’을 중시하는 한국적 방식이 부딪히며 갈등을 겪었다고. 구체적으로 독일 전문가들은 소위 ‘지멘스 스탠더드’를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고집해 발전 설비의 기능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까지 그 어떤 변형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대표적인 예가 인터페이스 설계에 대한 부분이다.




장문 프로젝트의 경우 발주처인 SK E&S가 기존에 써 왔던 시스템은 모두 GE 장비였다. 미국 GE와 독일 지멘스의 장비는 설계 철학이 매우 다르다. 특히 고객사 입장에서 볼 때 HMI(Human Machine Interface) 측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스마트폰도 아이폰을 쓰다가 안드로이드폰으로 바꾸면 처음엔 달라진 인터페이스를 익히느라 불편함을 겪는 것처럼 고객사 입장에선 익숙하지 않은 지멘스 장비를 쓰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그러다 보니 SK E&S는 기존 GE 시스템의 인터페이스와 유사하게 지멘스 시스템도 바꿔달라는 요청을 많이 했다. 가령 발전소 기기들의 작동 상태를 [지멘스 장비처럼] 개별적으로만 보여주지 말고 [GE 장비처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디스플레이 화면을 추가해 달라거나 분산제어시스템(DCS)에서 [지멘스 장비처럼] 논리연산제어장치(PLC)의 단순 작동 여부만 보여주지 말고 [GE 장비처럼] 상세한 상태 정보까지 파악할 수 있는 기능을 추가해 달라는 식이었다.

사실 이런 요구 사항은 발전 설비의 핵심 기능에는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는 것들이어서 충분히 맞춤화(customization)해 설계해 줄 수 있는 부분들이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그건 지멘스 스탠더드가 아니다” “어차피 버튼 몇 번만 더 누르면 확인할 수 있는데 왜 굳이 화면 하나를 더 만들어 달라고 하나?” “만약 PLC에 문제가 생기면 PLC에서 직접 문제를 해결해야지 DCS에서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왜 불필요하게 DCS에서 PLC 세부 상태 정보까지 보여달라고 하나?” 등의 반응을 보이며 맞춤 설계에 반대했다. 아예 확인할 수 없는 기능도 아니고 지멘스 장비에 익숙해지면 충분히 찾아 쓸 수 있는데 왜 쓸데없이 군더더기를 만들려고 하냐는 게 이들의 입장이었다. 심지어 “한국 고객들은 전 세계적으로 검증된 지멘스 시스템에 대해 좀 더 공부할 필요가 있다”며 고객사를 가르치려는 태도를 보인 독일인도 있었다고. 이경훈 차장은 “독일인들이 원래 실용성을 중시하는 데다 특히 지멘스 기술자들의 경우 자사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워낙 크다 보니 이런 반응을 보였지만 솔직히 한국적 정서에는 전혀 맞지 않는 사고방식이었다”며 “결국 한국인 엔지니어들끼리 머리를 맞대고 작업해 고객사 요구대로 기능을 추가해 줬다”고 말했다.

지나칠 정도의 꼼꼼함과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독일인 특유의 성향이 한국인 입장에선 너무나 느리고 답답하게 느껴진다는 것도 문제였다. 김종갑 회장조차 “독일인들은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는 수준이 아니라 ‘돌다리를 두들겨 안전하다는 게 확인이 돼도 섣불리 건너가지 마라’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고 평할 정도다. 이처럼 한국과 독일 간 극명한 문화 차이는 직원들 간 일상적인 커뮤니케이션에도 영향을 미쳤다. 가령 독일인들은 같은 테이블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일을 하는데도 대화 대신 e메일을 보내 커뮤니케이션할 때가 많았다고. 이경훈 차장은 “직접 얼굴을 보면서 말로 하면 단 몇 초면 끝날 일까지 e메일로 이야기하려는 태도가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며 “하지만 이런 방식이 비록 시간은 좀 더 걸릴지라도 일의 진행과정에서 책임 소재를 명확히 가릴 수 있고 좀 더 투명한 커뮤니케이션 결과물을 얻기 위한 독일인 나름의 방식이라는 걸 깨닫고 적응해 가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했다.

장문, 당진, 위례 3개 프로젝트는 모두 2017년 3∼4월 사이에 완료됐다. 특히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경쟁력 있는 한국 기자재 협력사들을 발굴해 원가 부담을 줄이는 데 성공했고, 대형 프로젝트였던 장문 복합화력발전소의 경우엔 고객사에 시운전 서비스 패키지(technical commissioning service package)까지 추가로 수주해 수익성을 크게 개선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이경훈 차장은 “아태지역본부에서 처음 수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해 솔직히 독일 본사에선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보자’는 시선도 있었다”며 “당초 독일 본사에서 예상했던 수익보다 훨씬 더 많은 이익을 내자 적지 않게 놀라워했다”고 귀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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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에서 수주한발전사업 프로젝트 독자 수행

지멘스㈜가 작년 12월부터 수행하고 있는 홍콩 블랙포인트 프로젝트는 발전설비 설계부터 조달 및 시운전을 독일 본사가 아니라 한국법인에서 주도하는 첫 번째 해외 프로젝트다. 실무 PM에 독일인 코치가 한 명씩 배치됐던 장문·당진·위례 프로젝트 때와 달리 한국인 PM 단독으로 모든 프로세스 엔지니어링을 수행한 첫 번째 프로젝트이기도 하다. 그만큼 한국법인의 독자적 프로젝트 수행 역량을 본사로부터 인정받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2015년 초 블랙포인트 발전소 증설 프로젝트가 발표됐을 때 원래 제안서 작업은 독일 본사에서 수행했었다. 지멘스그룹 차원에서 워낙 중요하게 여기는 프로젝트였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홍콩 발전시장은 GE가 거의 독점하다시피 한 시장이어서 이전까지 지멘스가 홍콩 복합화력발전 사업에 EPC 형태로 들어갔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지멘스 독일 본사로부터 첫 번째 제안서를 받아 든 홍콩 발주처(CAPCO·Castle Peak Power Company)9 는 2016년 초 지멘스에 가치분석(value engineering)을 다시 해달라고 요청했다. 최저 비용으로 건축 공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개선 방안을 마련해 오라는 요구였다. 지멘스㈜는 바로 이 지점에 개입해 지멘스 역사상 최초로 홍콩에서 복합화력발전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우선 지멘스㈜는 독일 본사 제안서에 포함된 유럽 부품사 대신 그동안 한국에서 새롭게 발굴한 50여 개 국내 협력사 네트워크를 활용해 비용 절감 방안을 도출했다. 또한 시공사의 토목공사 비용 부담을 크게 줄여줄 수 있는 설계 아이디어를 제시해 프로젝트 발주사인 CAPCO의 대주주이자 프로젝트 시공사인 CLP파워홍콩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터빈, 발전기, 폐열회수보일러(HRSG) 등 발전소 주기기 레이아웃을 재조정하고 배관 설치를 최적화하는 등의 엔지니어링을 통해 공사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안을 내놓은 것. 이와 함께 지멘스㈜는 프로젝트를 수주하게 되면 신속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누구보다 빠르게 고객 니즈에 대응할 수 있다는 점을 적극 강조했다.

“CLP파워홍콩의 경우 블랙포인트 프로젝트의 시공사로 나서긴 했지만 그동안 발전소 운영에만 집중해 왔기 때문에 엔지니어링 측면에 대한 지식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 향후 엔지니어링을 맡게 될 업체와 긴밀히 커뮤니케이션 하기를 강력하게 원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멘스㈜는 바로 이 점을 파고들었다. 고객사에 ‘기존 파트너였던 GE와 계속 일하면 12시간 시차가 있는 미국 본사가 설계를 맡게 돼 즉각적인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하지만 지멘스의 손을 잡으면 1시간밖에 시차가 나지 않는 한국에서 프로젝트를 수행해 거의 실시간으로 대응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극단적으로 오전 중에만 알려주면 그날로 비행기를 타고 홍콩에 와서 오후에 미팅을 할 용의도 있다고까지 말하며 고객사를 설득했다. 심지어 글로벌 PG 사업본부 수장은 물론 글로벌 지멘스 이사회 멤버까지 홍콩에 직접 가서 세일즈에 나서는 열의를 보인 덕에 프로젝트 수주에 성공했다. (이경훈 차장).”

현재 지멘스㈜는 블랙포인트 프로젝트의 기본 엔지니어링을 모두 마치고 구매 발주를 진행하고 있다. 배관 전문업체인 성화산업, 펌프 전문업체인 효성굿스프링스, 밸브 제작업체인 삼신밸브 등 다수의 국내 협력사들로부터 부자재를 조달할 계획이다. 특히 국내에서 장문, 당진, 위례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만 해도 모든 프로세스 엔지니어링 디자인에 대해 독일 본사로부터 디자인 검토를 반드시 받아야 했지만 홍콩 프로젝트부터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자율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국내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덕택에 본사에서 더 이상 세세하게 통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까닭이다. 이경훈 차장은 “블랙포인트 프로젝트의 프로세스 엔지니어링은 거의 대부분 자체적으로 설계 디자인을 확정했고 극히 일부 사안에 대해서만 독일 본사의 조언을 받았다”며 “과거에 독일 본사로부터 엔지니어링 디자인 리뷰를 한 번 받으려면 최소 3주는 기다려야 했지만 이 과정이 없어지면서 종전보다 작업 속도를 훨씬 높일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홍콩 블랙포인트 프로젝트 외에도 지멘스㈜는 지난해 5억5000만 달러 규모의 태국 방콕남부발전소(South Bangkok Power Plant)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 입찰에도 참여(발주처가 원하는 사양에 맞춰 발전소 설계 콘셉트를 제시하고 경쟁력 있는 최저 가격을 산출)해 수주에 성공했다.10 또한 독일 본사에서 주도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쿠라이스(Khurais) 유전지대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에도 참여해 HRSG 및 ACC(Air Cooled Condenser, 증기터빈에서 사용된 증기를 물로 바꿔주는 장치)의 설계와 구매 및 발전소 운전에 필요한 냉각수/응축수/급수 계통의 기본 설계를 책임지고 수행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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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화 성과 및 도전과제

김종갑 회장이 지멘스㈜ 대표로 취임한 후 지멘스그룹 내 한국법인의 위상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우선 지멘스㈜는 2013년 전 세계 30개 국가만 들어가는 ‘선도국가(Lead Country)’ 그룹11 에 선정됐다. 그 결과 지멘스㈜는 과거 중국(2010년까지)이나 싱가포르(2011년 이후)를 통해 보고하던 체제에서 벗어나 독일 본사에 직접 보고하는 체제를 갖추게 됐다. 2013년 8월 지멘스그룹 CEO 자리에 오른 조 케저(Joe Kaeser)는 2014년 이후 한 해도 빠지지 않고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있으며, 김종갑 회장의 경우 현재 전 세계 50명의 지멘스 임원(Top Fifty)들만 참석하는 글로벌 간부회의의 멤버다. 특히 지난 몇 년간 지멘스그룹 전체적으로는 종업원 수가 줄었지만 지멘스㈜의 근로자 수는 오히려 증가했다.12

이처럼 글로벌 그룹 내에서 지멘스㈜의 위상이 높아지게 된 배경에는 PG 사업본부 산하 솔루션 사업부의 아태지역본부를 한국에 유치한 게 큰 역할을 했다. 4차 산업혁명의 도래로 최근 스마트 팩토리(smart factory) 관련 사업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지멘스그룹 내 단일 사업본부 매출액 기준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건 PG다. 2016년 회계연도(2015년 10월∼2016년 9월) 기준, 총 9개 사업본부 중 지멘스그룹 전체에서 PG 사업본부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20%를 기록했다. 그만큼 지멘스그룹 내에서 PG 솔루션 사업은 중요한 비즈니스다.

눈여겨볼 점은 지멘스㈜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의 외국인 비중의 변화다. 엔지니어들의 비중만 따졌을 때 초기 2년간은 전체 엔지니어(2013년 46명, 2014년 142명)의 약 30%가 독일 본사에서 파견된 인력이었지만 2017년 10월 말 기준(164명) 이 비중은 13%로 크게 낮아졌다. 현재 아태지역본부에서 엔지니어링 파트와 관련된 팀들의 경우 과거엔 모두 독일인이 팀장이었지만 지금은 다 한국인들로 바뀌었다. 팀별로 2∼5명씩 배치됐던 독일인 코치들도 거의 독일 본사로 돌아갔다. 명실공히 인력 현지화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여전히 도전과제도 많다. 4년 전 아태지역본부를 출범시킬 때만 해도 지멘스㈜는 총직원 수를 500명까지 늘린다는 목표였다. 하지만 시장 상황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며 현재 그 절반도 고용하지 못한 상태다. 에너지 솔루션 사업부의 아태지역 본부 설립 논의가 처음 나왔던 5∼6년 전만 해도 가스터빈 발전 시장은 ‘장밋빛’ 성장이 기대됐지만 실제 수요가 당초 예상에 크게 못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한국의 경우, 2011년 전국적으로 대규모 순환정전사태를 겪으며 정부가 민간 발전소를 추가로 허가해 전력공급은 크게 늘었지만 수요는 계속된 경기 침체로 늘어나지 않아 현재 전력이 남아도는 상황이다. 이에 대해 김영탁 이사는 “당장 시장 전망이 정체 국면에 있는 건 사실이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성장성은 충분하다”고 말했다. 각국 정부의 친환경정책 기조에 따라 이산화탄소 배출 규제가 강화되면 배출량이 가장 적은 천연가스 발전 비중을 높일 수밖에 없다는 게 그 이유다. 또한 김영탁 이사는 “한국의 경우 정부의 탈원전 정책이 본격화되면 가스 발전과 관련한 전력수요 전망도 달라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홍콩 블랙포인트 발전사업 수주를 계기로 해외 무대에서 독자적으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긴 하지만 아직까지 EPC 턴키 형태로 프로젝트를 수주한 사례는 없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이에 따라 프로젝트의 범위 역시 파워 아일랜드13 에 국한돼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김종갑 회장은 “앞으로 국내 시공사들과의 협력을 보다 강화해 EPC 턴키 프로젝트 수주에 힘쓸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지난 10월 지멘스㈜ 솔루션 사업부 아태지역본부 대표로 새로 임명된 닉 문츠(Nick Muntz) 사장이 아시아 지역 내 PG 사업본부 전체 영업(Sales & Customer Operation)까지 총괄하게 됨으로써 더욱 적극적인 비즈니스 발굴 기회를 갖게 됐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김종갑 회장은 “스피드를 강점으로 하는 한국과 완벽성을 추구하는 독일의 강점을 결합해 장기적으로 서울을 전 세계 솔루션 사업을 총괄하는 글로벌 본부(global headquarter)로 키우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시사점

1. 흡수역량 형성해 지식 이전을 위한 토대 마련

다국적 기업의 성공적 글로벌화를 위해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본사가 축적한 기술이나 노하우 등 무형 자산을 해외 현지법인에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식시키느냐다. 특히 21세기 지식기반 사회에선 기업에 가장 중요한 자원이 지식이란 점을 고려할 때 본사와 해외 지사 간 지식 이전은 기업의 지속적 경쟁 우위 확보를 위해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Cohen & Levinthal(1990)은 지식 이전의 성패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로 ‘흡수역량(absorptive capacity)’이라는 개념을 제시한 바 있다. “새로운 정보의 가치를 인지하고 완전히 자기 것으로 소화해 상업적인 목적에 적용시키는 조직의 능력(a firm’s ability to recognize the value of new information, assimilate it, and apply it to commercial ends)”으로 정의되는 흡수역량은 새로운 지식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는 사전 관련 지식(prior related knowledge)과 다양한 배경(diversity of background)에 크게 의존한다.

지멘스㈜는 아태지역본부 출범 초기부터 현대중공업, 삼성엔지니어링, 대림건설 등 국내 EPC 관련 업체들로부터 고숙련 기술인력들을 적극적으로 채용함으로써 한국 현지법인의 흡수역량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한국인 엔지니어들은 발전소에 들어가는 주기기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갖춘 전문가 집단이었다. 본사와 자회사 간 지식 이전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려면 흡수역량 형성이 선행돼야 한다는 연구 결과(Minbaeva et al., 2003)에 비춰볼 때, 지멘스㈜는 사전 지식과 다양한 경험을 갖춘 인력들로 조직을 새롭게 구성함으로써 독일 본사로부터의 효과적인 지식 이전을 가능케 하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2. 실제 프로젝트 수행하며 지식 이전 촉진

지멘스㈜의 경우 지역본부를 출범한 직후 국내에서 장문·당진·위례 등 3개 프로젝트를 거의 동시에 수행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높은 비용 부담에도 불구하고 독일 본사에 기술 인력 파견을 적극 요청했다. 지식기반이론에 따르면 기업 특유의 지식은 암묵적(tacit)이고 접착적(sticky)인 성격을 갖는다(Teece, Pisano & Shuen, 1997; Grant, 1996). 이처럼 조직원 개개인의 행동에 체화돼 있는 암묵지(暗默知)는 지식 이전이 쉽지 않다. 지속적인 상호 작용과 원활한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점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지 단기적이거나 일회성 활동을 통해 성과를 얻기 힘들다. 지멘스㈜는 이 점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었고, 약 3년 정도 소요되는 발전소 건설 프로젝트 내내 독일인 기술자들이 현장에서 한국인 엔지니어와 함께 호흡하며 일하도록 했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드는 접근이긴 하지만 지멘스㈜는 이 같은 멘토링 형태의 훈련 체제를 통해 본사로부터 이전받은 지식과 노하우를 한국 현지법인의 조직적 루틴(routine)으로 내재화하는 데 성공했다.


3. 한국법인만의 독자적 역량 개발

지멘스㈜는 솔루션 아태지역 본부 출범 이후 3년간 국내에서 장문·당진·위례 3개 발전사업 프로젝트를 동시에 수행한 경험을 바탕으로 독자 역량을 축적하는 데 성공했다. 과거 국내에서 수행한 프로젝트의 경우 독일 본사로부터 설계 디자인 검수를 받는 게 의무사항이었지만 작년 12월 시작된 홍콩 프로젝트는 본사의 통제 없이 지멘스㈜ 자율적으로 진행했다. 또한 독일인 코치 없이 한국인 PM이 프로세스 설계를 모두 책임지고 수행하고 있다. 이는 지멘스㈜가 본사의 통제에서 벗어나 더 많은 자율성을 확보해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지멘스㈜의 권한이 커질 수 있었던 것은 독일 본사로부터 정형화된 해결책을 수동적으로 이전받는 데 그치지 않고 국내 고객사들의 다양한 니즈에 부응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펼친 결과라고 풀이된다. 가령 장문 복합화력발전소 프로젝트에서 지멘스의 고유한 인터페이스를 바꿔달라는 고객사 요청에 독일인 엔지니어들의 반응이 부정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엔지니어들은 자체적인 연구개발(R&D)을 통해 새로운 기능을 추가했다. 즉,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 위해 사전 지식과 경험을 기반으로 본사로부터 전수받은 지식을 현지 상황에 맞게 수정하고 응용함으로써 현지 실정에 적합한 솔루션을 내놓을 수 있었다. 이처럼 지멘스㈜는 현지법인만의 고유한 역량 개발에 힘씀으로써 지멘스그룹 내 지멘스㈜의 역할과 위상을 높이는 데 성공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신지원(고려대 영문학과/경영학과 4학년), 김경민(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이방실 기자 smile@donga.com

참고문헌

1. Cohen, W. M., & Levinthal, D. A. (1990). Absorptive Capacity: A New Perspective on Learning and Innovation. Administrative Science Quarterly, 35(1), pp. 128-152.

2. Grant, R. M. (1996). Toward a Knowledge-Based Theory of the Firm. Strategic Management Journal, 17(S2), pp. 109-122.

3. Minbaeva, D., Pedersen, T., Björkman, I., Fey, C. F., & Park, H. J. (2003). MNC Knowledge Transfer, Subsidiary Absorptive Capacity, and HRM. Journal of International Business Studies. 34(6), pp. 586-599..

4. Teece, D., Pisano, G., & Shuen, A. (1997). Dynamic Capabilities and Strategic Management. Strategic Management Journal, 18(7), pp. 509-533. 



  • 이방실 이방실 |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MBA/공학박사)
    - 전 올리버와이만 컨설턴트 (어소시에이트)
    - 전 한국경제신문 기자
    smi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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