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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준비생의 도쿄

온라인은 거들 뿐… 오프라인 기회 재발견한 '아스톱'

이동진 | 231호 (2017년 8월 Issue 2)
편집자주

같은 장소를 여행하더라도 안정된 직장이 있으면 사업 아이디어를 거의 찾지 못하지만 퇴사를 준비하고 있거나 독립한 상황이라면 수많은 신사업 거리를 찾곤 합니다. 퇴사준비생의 시선에서 도쿄 여행을 하며 찾아낸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에 대한 이동진 대표의 인사이트를 소개합니다. 이 원고는 저서 <퇴사준비생의 도쿄(더 퀘스트, 2017)>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잃어버린 20년 동안 일본이 잃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타쿠의 재발견’이라는 수확을 거뒀다. 기존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오타쿠들은 어디서든 환영받는 신인류로 거듭났다. 특정 분야에 대한 이들의 광적인 몰입이 아낌없는 소비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오타쿠의 잠재력을 가장 먼저 알아본 건 아키하바라였다. 한때 잘나가던 전자상가 아키하바라는 1990년대 들어 버블 붕괴와 함께 활기를 잃고, 전자제품 할인매장의 공세에 밀려 스러져가고 있었다. 아키하바라는 부활을 위해 ‘취향저격’ 상품이라면 지갑을 여는 데 거침이 없는 오타쿠에 주목했다. 이에 피규어숍, 망가 카페, 메이드 카페(직원들이 메이드 복장을 하고 손님을 응대하는 양식의 카페) 등을 적극적으로 유치하며 아키하바라를 오타쿠의 성지로 만들었다.

오타쿠를 위한 다양한 콘셉트의 매장 중에서도 피규어숍은 소문난 지갑 도둑이다. 피규어는 소비가 아닌 소장용이고, 공급이 제한적이어서 가격대가 높다. 하지만 피규어의 인기에도 불구하고 재고 확보가 어려워 피규어숍을 운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그렇다고 수요가 있는데 사업 기회를 놓칠 수도 없는 노릇. 이러한 딜레마를 창의적인 비즈니스 모델로 해결한 피규어숍이 있으니 바로 아키하바라 요지에 자리 잡은 ‘아스톱’이다.

아스톱에 들어서면 일단 그 방대함에 압도된다. 바닥부터 머리 위 천장에 이르기까지 상하좌우 빽빽하게 피규어들이 진열돼 있다. 건물 한 층의 절반을 통째로 쓰고 있지만 동일한 피규어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상품만큼이나 가격도 천차만별이다. 아스톱에서는 비슷한 상품이어도 최대 1만 엔가량 가격 차이가 난다. 보통 피규어숍들은 재고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데 아스톱은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컬렉션을 확보할 수 있었을까?


#1. 아스톱 - 상품이 아닌 공간을 팔다

아스톱은 피규어를 직접 사들여 판매하는 유통 매장이 아니다. 백화점처럼 판매자를 입주시켜 그들이 직접 판매할 수 있도록 한다. 그렇기 때문에 판매자 수만큼의 다양한 상품 구성이 가능하다. 임대 단위는 큐브다. 0.03∼0.13㎥ 크기의 큐브가 무려 1000개나 있다. 피규어를 팔고 싶은 이들은 큐브 크기와 위치에 따라 800∼9500엔의 월간 이용료를 내고 판매에 따른 수수료 15%를 정산하면 된다. 큐브의 공실률은 제로에 가깝다.

아스톱의 모델은 안정적이다. 만실을 가정하고 큐브당 3000엔어치 피규어 1개씩만 팔아도 아스톱은 큐브 이용료와 판매 수수료로 아키하바라 상가 임대비용을 메우고도 남는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게다가 피규어는 수요 예측이 어려워서 다양한 상품 구색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데 그 과정에서 많은 상품이 현금화되지 못한 상태로 꽤 오랫동안 묶여 있어야 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아스톱은 유통업이 아닌 임대업으로 사업을 정의함으로써 현금 흐름의 병목현상을 없앴다. 여기에 상품의 소싱-검수-관리 프로세스 관련 인력도 필요하지 않아 운영이 더욱 가벼워졌다.



#2. 판매자 - 그들이 사는(Buy) 세상

큐브 임차인은 그저 큐브 한 칸이라는 공간만 사는 것이 아니다. 큐브에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권리를 사는 것이다. 일단 큐브를 어떻게 채울지는 온전히 이들의 몫이다. 대형 피규어 하나만 호기롭게 갖다 두기도 하고, 30여 개의 피규어를 켜켜이 쌓기도 하며, 하나의 애니메이션에 출현하는 캐릭터로만 채우기도 한다. 이들에겐 큐브가 자신만의 고유한 세상이자 바깥세상을 향한 제안이다.

가격 역시 그들이 정한다. 중고 거래가 대부분인 피규어는 고가인 데다 공산품이 아니다. 여기에 오타쿠적 깐깐함까지 더해지다 보니 구매 전 눈으로 상태를 확인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개개인이 오프라인에서 직접 판매할 기회가 많지 않아 그간 개인 판매자들은 가격 결정권이 거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피규어숍이 부르는 값에 넘겨야 하는데 원래 샀던 가격의 반 토막이 되기가 예사였다. 중고장터 등 온라인을 활용할 수 있기는 하나 잠재 구매자를 만나고 제품을 확인시키는 번거로운 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반면 아스톱을 이용하면 월간 이용료를 내더라도 가격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 판매자에게 더 큰 매력을 준다.


#3. 고객 - 뜻밖의 발견

아스톱에서는 손님을 방임하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더 나아가 상품 분류나 색인을 하지 않는 방식으로 손님들이 큐브 사이에서 길을 잃고 헤매길 유도한다. 뚜렷한 방향성 없이 돌아다닐 때 손님들이 뜻밖의 발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뜻밖의 발견을 위해 불편함만 남긴 것은 아니다. 아스톱은 온라인 사이트도 있는데 오프라인과 다르게 운영된다. 아스톱에서 판매 중인 모든 상품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아 편리하게 검색할 수 있게 했다. 매장 내에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며 원하는 상품의 위치를 찾는 사람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정도로 온·오프라인 간 연계성도 뛰어나다. 다만 온라인으로 구매는 할 수 없다. 손님들을 오프라인 매장으로 끌고 오기 위해 온라인에는 쇼룸 역할만 부여한 것이다. 오프라인 매장을 쇼룸으로 이용하는 여타 유통업자와는 반대의 행보다. 온라인 판매를 없앤 것은 큰 매출을 포기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진짜 가능성’은 아스톱만의 독특한 오프라인 매장에서 나온다고 생각했기에 내린 결정이다. 당장 온라인 매출을 올리기보다는 오프라인에서의 뜻밖의 발견이 새로운 수집으로 이어지길 기대하는 것이다. 오타쿠의 습성을 잘 이해한 결과다.





오프라인 플랫폼의 가능성

아스톱이 오타쿠에 특화된 비즈니스 모델이라거나, 일본에서나 가능하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렌털 쇼케이스(공간 제공 위탁판매)는 수제품, 중고 가전, 중고 의류 등에도 다양하게 활용되고 있다. 개인 단위의 판매자와 구매자가 충분히 존재하고 오프라인 거래가 필요한 상품이면 된다. 아스톱의 사례가 보여준 가능성은 그래서 더욱 의미가 있다. 아스톱은 쉽게 말해 지마켓, 옥션 같은 오픈마켓 플랫폼을 오프라인으로 옮긴 것이다.

유통업으로만 생각했던 피규어숍을 임대업으로 탈바꿈한 발상은 사업 모델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에서 나왔다. 기존에 없던 새로운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콜럼버스의 달걀’과 같이 틀을 깨는 창의적 시도가 필요하다. 나중에는 당연한 것이 되겠지만 지금은 낯선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된다. 



이동진 트래블코드 대표 dongjin.lee@travelcode.co.kr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올리버와이만과 CJ E&M에서 전략기획 업무를 수행했다. 현재는 여행의 가치를 새롭게 디자인하는 여행콘텐츠 기획사 트래블코드를 운영하고 있다.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퇴사준비생의 도쿄>를 공동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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