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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브로드밴드 프리미엄 셋톱박스 B box 출시 2년 후

“예쁘긴 한데 비싸고 복잡하대요” 스마트 홈을 향한 시행착오… 교훈은?

주재우,조진서 | 212호 (2016년 11월 lssue 1)
Article at a Glance

2014년 SK텔레콤이 기획/설계하고 SK브로드밴드가 판매한 셋톱박스 ‘비박스(B box)’는 여러 모로 혁신적인 제품이었다. 외형부터 고급스러운 조명등 이미지였고 리모콘에도 터치스크린과 충전식 배터리가 제공됐다. 홈 모니터링, 화상전화 등 ‘스마트 홈 허브’ 기능도 추가됐다. 하지만 출시 첫해부터 디자인은 전통적인 셋톱박스의 형태로 되돌려졌고 브랜드는 서서히 사장됐다.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파격적 디자인에 따른 단가 상승, 발열, 안전 우려 등 제조 측면에서의 어려움
2. 회사 내부의 다른 프리미엄 제품과의 경쟁
3. 고급 소비자 접점 확보의 어려움과 유통채널의 차별화 부재


지난 2014년 7월, DBR 157호는 그해 1월 SK텔레콤이 출시한 셋톱박스 B box(비박스)의 사례를 케이스 스터디로 게재했다. 상업적 성공을 판단하기 이른 초기 제품이었지만 그 자체로 혁신성이 높고 문제의식과 제품 개발 과정이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 DBR은 “1∼2년 후 상업적 성과를 판단할 수 있는 시점에서 성공 혹은 실패 요인을 분석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2년여가 지난 2016년 11월 DBR 212호에서 이 사례를 재조명한다.


DBR 157호에 실렸던 케이스스터디

기획


비박스는 케이블 TV 셋톱박스 기능에 홈 모니터링 기능, 인터넷 기능 등을 추가해 가정의 통신/엔터테인먼트 허브 역할을 하도록 기획된 상품이었다. 외관은 매끈한 백자 도자기 느낌으로 만들고 무드 조명 기능을 갖췄다. TV 장식장에 처박아두는 셋톱박스가 아니라 ‘밖으로 꺼내놓고 싶은 인테리어 소품’을 목표로 했다.


이 제품은 2012년 초부터 기획됐다. 당시 SK텔레콤은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 휴대폰 시장과 유선 인터넷 시장에서 새로운 돌파구를 찾고자 했다. 차세대 성장을 위한 상품 기획을 하다보니 다음 격전지는 홈(home)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회사가 가진 유무선 인프라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들어보고자 했다. 프로젝트 이름은 판매와 운영을 맡게 되는 자회사 SK브로드밴드(broadband)의 브랜드 정책에 맞춰 ‘B box’가 됐다.

가정에 인터넷/통신 허브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기를 만들려는 시도는 예전부터 무수히 존재했다. 삼성전자 등 소비자 가전기기를 만드는 회사들은 인터넷 기능이 부착된 냉장고나 인터넷 기능을 갖춘 ‘스마트 TV’ 등을 출시하며 이 시장을 선점하려 노력해왔다. 반면 SK텔레콤은 자회사 SK브로드밴드를 통해 서비스하고 있던 인터넷 TV, 즉 셋톱박스를 홈 허브의 주인공으로 삼기로 했다. 셋톱박스를 홈 허브로 부각시킬 수 있다면 그 다음부터는 자사가 보유한 유무선 통신망과 무수한 서비스들을 이용해 다양한 신규 사업을 벌일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단, 이때까지 물리적 실체가 있는 소비재 제품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시스템을 기획하고 제조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 걸림돌이었다.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는 광통신망 등 통신 인프라를 구축하고 휴대폰과 인터넷 서비스를 판매하는 일에서는 탁월했지만 자체적으로 휴대폰이나 셋톱박스 같은 소비자용 하드웨어 기기를 제작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프로젝트를 기획부터 외주업체에 맡길 수는 없었다. 기존에 없는 새로운 개념의 제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뿐 아니라 팬택, 삼성전자, 인터넷 포털 업체 등 내외부에서 다양한 인력을 데려와 정예 프로젝트 팀을 구성했다. 또 전문 UX(user experience) 디자인 업체인 플러스엑스와도 협업했다.



비박스 팀의 1차 목표는 소비자들이 셋톱박스를 독립적인 브랜드로 인지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보통 사람들은 케이블TV나 IPTV를 설치할 때 볼 수 있는 채널이 몇 개나 되는지, 월 사용료는 얼마인지 등을 기준으로 사업자를 선택한다. 이 과정에서 셋톱박스라는 하드웨어 장치는 관심 밖이다. 대부분은 설치 기사가 집에 오기 전까지는 셋톱박스를 구경할 기회도 없다. SK텔레콤이 소비자 조사를 해보니 대부분의 고객들은 셋톱박스의 미관에 대해 불만족도가 높았다. 최대한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많았다. 셋톱박스(set-top box)라는 이름부터가 ‘TV 위에 놓는 상자’라는 뜻인데, 대부분의 고객은 TV 장식장 안에 셋톱박스를 숨겨놓으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젝트팀은 상식을 깨는, ‘out of the box’적인 아이디어를 냈다. 셋톱박스를 별도의 브랜드로 인지시키고 이에 대해 프리미엄 가격을 지불하게 하기 위해서는 기존 셋톱박스와 외관부터 차별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밖으로 꺼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예쁜 셋톱박스를 만들기 위해 여러 요소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들을 시도했다. 기존 제품들은 대부분 검은색이었지만 비박스는 눈에 띄는 흰색을 택했으며, 아예 TV 장식장 안에 들어가지 않는 정육면체 박스 형태로 디자인했다. 전통 백자 도자기 느낌이 나도록 표면은 매끈하고 이음새 없게 코팅했으며 모서리도 둥글게 처리했다.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조명이었다. 케이스 안쪽에 발광체를 넣어 은은한 불빛이 나오는 무드등 스탠드로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

리모콘 역시 주요한 차별화 포인트였다. TV 시청자가 늘 접하는 건 사실 셋톱박스가 아니라 리모콘이기 때문이다. 단가 상승을 무릅쓰고 고급스러운 느낌으로 마감된 흰색 플라스틱을 사용했다. 버튼 역시 일반 리모콘에 들어가는 물컹물컹한 고무가 아니라 단단한 느낌의 고급 플라스틱을 사용했으며 중앙에는 노트북에서나 쓰는 터치스크린을 넣었다. 건전지를 갈아 끼우는 불편함을 없애기 위해 일반 스마트폰 충전 케이블을 연결하도록 충전식으로 설계했다는 것도 특별했다.

이렇게 외형 디자인에 중점을 두는 동시에 제대로 된 스마트 홈 허브 기능을 할 수 있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설계도 진행됐다. 추가된 주요 기능은 다음과 같다.

- 홈 모니터링: TV 위에 화상카메라를 설치해서 집안 상황을 스마트폰으로 볼 수 있음
- 영상통화: TV 화면을 통해 비박스 사용자끼리, 혹은 비박스와 스마트폰 간 HD급 영상통화
- 인터넷: TV 화면에 최적화된 브라우저 제공
- 패밀리보드: 가족들이 사진/동영상/일정을 공유할 수 있는 게시판 기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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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I(user interface)도 새롭게 설계했다. TV를 켰을 때 나오는 첫 화면은 스마트폰의 ‘위젯’ 방식을 사용하되 중앙에 현재 선택된 채널의 TV 화면이 크게 나오도록 했다. 또 VOD(주문형 콘텐츠) 기능은 검색에 초점을 뒀다. 기존 다른 셋톱박스들은 원하는 영화나 TV 프로그램을 찾으려면 메뉴-채널-프로그램 순으로 메뉴를 따라 찾아 들어가야 한다. 비박스는 사용자의 시선 이동 없이 선택된 메뉴가 항상 화면 중앙에 나타나는 중앙정렬 방식을 택했다. 사용자가 메뉴를 쫓아가는 게 아니라 메뉴가 사용자를 따라오게 한 것이다. 리모콘의 터치센서를 이용해 손가락으로 리스트를 넘겨볼 수 있게도 했다.

이상의 추가적인 하드웨어/소프트웨어 설계 요소 때문에 비박스는 일반형 셋톱박스보다 제작단가가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소비자 임대 가격 역시 기본형 셋톱박스에 비해 2000원 높게 책정됐다(3년 약정 기준). 시장에서의 성패를 가로 지을 관건은 소비자들이 과연 이 제품에서 월 2000원 이상의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것인지 여부였다.



출시, 그리고 쇠락


약 2년간 준비한 끝에 비박스는 2014년 1월23일 일반에 공개됐다. 본격적인 프로모션과 유통은 3월부터 시작했다. 우선 주목한 것은 산업디자인 업계였다. 독특한 디자인과 사용자 편의를 강조한 설계 덕분에 세계 3대 디자인어워드 중 2개(iF product design award 2014, IDEA design award entertainment 부문)에서 본상을 수상했다. 출시 초기 시장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출시 3개월 만에 연간 목표량의 30%를 달성했으며 연간 판매 목표도 늘려 잡았다.

그해 5월, 비박스 프로젝트는 SK텔레콤에서 자회사 SK브로드밴드로 87억6000만 원에 유무형 자산이 완전 이관됐다. 친부모의 손을 떠나 양부모에게 넘어간 셈이다. 그로부터 2년 5개월이 지난 2016년 10월 현재, 이 제품은 어떻게 성장했을까.

존재를 확인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비박스라는 브랜드는 거의 잊혔다. SK브로드밴드는 현재 셋톱박스를 3개 라인으로 구별해 마케팅하고 있다.(사진 3) 고급형 UHD 셋톱박스, 스마트셋톱박스, 그리고 기본 셋톱박스다. 이 분류에 따르면 비박스는 중간 단계인 ‘B TV 스마트 셋톱박스’에 속하지만 비박스라는 브랜드명은 사용되지 않는다. 홈페이지에 소개된 제품 디자인 역시 초기 비박스 제품과는 유사점을 찾기 힘들다. 아직 시중에 풀려 있는 물량은 있으나 브랜드는 슬그머니 단종된 것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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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브로드밴드는 셋톱박스별 누적 출하량을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이 프로젝트가 상업적으로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손익분기점을 맞췄는지 여부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독자적인 셋톱박스 브랜드를 만들겠다거나 셋톱박스를 TV 장식장 밖으로 꺼내놓아 인테리어 소품으로 인정받겠다는 최초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전문가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누가 봐도 혁신적인 외형과 기능을 갖췄던 제품이 왜 2년여 만에 시장에서 모습을 감추게 됐을까. 이유는 아래와 같다.

1. 혁신적 하드웨어 제작의 어려움

비박스는 셋톱박스와 리모콘 디자인에서 차별화를 시도했다. 기획과 디자인은 사내에서 했고 제작 공정은 외주 셋톱박스 제조사에 맡겼다. 아이디어는 좋았지만 멋진 셋톱박스를 만든다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우선 발열이 문제였다. 비박스 케이스를 무드등으로 쓸 수 있는 조명장치를 달아놓았는데 이것이 셋톱박스 자체의 발열과 맞물려 지나치게 뜨거워지는 경우가 있었다. 또 조명의 조도 역시 소비자 개인 취향에 따라 불만을 갖는 경우가 생겼다. 여기에 단가 상승 문제도 발목을 잡았다.

결국 출시 1년도 되기 전에 외형이 바뀐 두 번째 모델을 내놓아야 했다. 오리지널 비박스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기능이자 제품의 상징과도 같았던 무드등 기능이 제거됐다. TV 장식장 안에 들어갈 수 있도록 전체적인 외형도 보수적으로 납작한 셋톱박스 형태로 원위치시켰다. (사진 5) 현실과 타협한 것이다. 이 두 번째 모델도 색깔만큼은 오리지널 모델의 하얀색을 유지했고 둥근 모서리의 느낌도 그대로 살렸지만 ‘장식장 밖에 꺼내놓고 싶은 인테리어 소품이 되겠다’는 최초의 기획은 접어둘 수밖에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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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신적이라 찬사를 받았던 리모콘 역시 문제를 일으켰다. 비박스 프로젝트팀은 소비자들이 TV 리모콘 건전지 갈아 끼우는 것을 귀찮게 생각한다는 점에 착안해 노트북이나 휴대폰에서 쓰는 리튬이온 배터리를 이용한 충전식 리모콘을 도입했다. 자체적인 사용자 분석에 따르면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세련된 충전식 리모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리튬이온전지는 충격에 취약하고 심한 경우 폭발의 위험도 있다. 이는 안전과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에 회사 입장에선 민감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용자 편의성은 높지만 리스크도 그만큼 컸다. 게다가 리튬이온 배터리가 내장된 충전식 리모콘은 사용자가 건전지를 구매해서 넣는 일반 리모콘에 비해서 생산 단가가 2∼3배가량 비싸지만 판매 가격은 동일하게 유지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결국 이런저런 문제들과 걱정들 때문에 리모콘 역시 1년도 지나지 않아 전통적인 건전지 내장 리모콘 방식으로 변경됐다. 우호적인 소비자 반응에도 불구하고 눈물을 머금고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제조와 관련된 이슈 때문에 리모콘과 셋톱박스의 디자인 차별화 포인트들이 사라지자 비박스만의 개성과 브랜드를 살리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는 이 제품이 갖고 있던 사내에서의 입지에도 영향을 줬다.



2. 자사 상품 간 자원 분배의 어려움

비박스는 2012년부터 2014년 초까지 SK텔레콤에서 기획하고 개발해 2014년 5월 SK브로드밴드에 이관한 제품이다. 제품의 오너십이 바뀐 것은 제품 자체와는 상관없이 전사적인 조직 정비 차원에서 이뤄진 일이다. 이에 따라 두 가지 문제가 생겼다.

우선 제품의 성능 업데이트가 어려워졌다. SK브로드밴드로 일단 넘어간 비박스에 대해서 SK텔레콤 개발팀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개선하기 위한 업데이트 지원을 할 경우 재벌기업의 계열사 부당지원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왔다. 안 그래도 민감한 문제에 괜히 긁어 부스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고객 AS와 컴플레인에 대한 응대도 민첩성이 떨어졌다.

두 번째 문제는 내부 경쟁이다. SK브로드밴드는 비박스 개발 당시부터 SK텔레콤과 밀접하게 협업했지만 SK브로드밴드 내부적으로도 따로 프리미엄 셋톱박스 제품군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충돌이 불가피했다. 실제로 SK브로드밴드는 비박스의 출시 전후로 ‘스마트 셋톱박스’와 ‘UHD 셋톱박스’라는 프리미엄 제품 2 종을 출시했다.

● 2013년 11월 SK브로드밴드가 준비한 스마트 셋톱박스 출시
● 2014년 1월 비박스 출시
● 2014년 9월 SK브로드밴드가 준비한 UHD 셋탑박스 출시

특히 초고화질 영상을 볼 수 있게 해 주는 UHD 셋톱박스는 회사가 현재까지도 마케팅에 중점을 두고 있는 하이엔드 제품이다. UHD(ultra high definition)는 기존의 고화질 포맷인 Full-HD(high definition)보다 해상도가 4배 높은 비디오 포맷이다. 2014년을 전후해서 많은 영화와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이 UHD 포맷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UHD 셋톱박스를 임대했을 때 고객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월간 임대료가 높다. 2016년 기준 이용료는 월 4000원으로 스마트 셋톱박스보다 1000원, 기본형 셋톱박스보다 2000원 비싸다. 또 이를 통해 서비스하는 고화질 비디오 콘텐츠 역시 저화질 비디오 콘텐츠보다 가격을 높게 책정할 수 있다. 즉 IPTV나 케이블TV 업체에 있어서 UHD는 저비용 고매출의 캐시카우 비즈니스다. 한 가정이 두 개의 셋톱박스를 사용하는 경우는 거의 없으므로 회사 입장에서 양쪽에 마케팅 자원을 모두 쏟아부을 수 없었고, 비박스의 디자인적인 차별성도 줄어들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집에서 키운 효자’인 UHD 셋톱박스 쪽에 관심이 더 집중됐다.

3. 고급화 전략의 원천적인 어려움

경쟁이 치열한 레드오션 시장에서 활동하는 많은 기업들은 새로운 수익원을 창출하기 위해 기존 제품보다 한 단계 급이 높은 프리미엄 제품을 기획하는 경우가 많다. 프리미엄 제품은 더 나은 수익을 가져다줄 수도 있고 기업의 이미지를 끌어올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제품 가격이 올라가는 경우 그 가격에 맞는 시장 수요가 충분한 크기로 존재하는지 아는 것이 무척 어렵다. 프리미엄 신제품의 적정 가격과 시장 규모를 예측하기 위해서 현업에서는 컨조인트(conjoint) 시장 조사, 포커스그룹 토의, 다른 카테고리의 제품별 가격 조사 등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지만 예측이 엇나가는 경우가 많다. 비박스 역시 기획 때부터 이런 조사들을 수행했고 그 결과는 대부분 긍정적이었지만 실제로 출시 이후 제품을 접한 소비자의 반응은 개인마다 호불호가 갈렸다.

전통적인 유통 채널의 한계 역시 비박스와 같은 프리미엄 제품의 시장 안착을 어렵게 만든다. 기획과 개발 단계에서 주입된 고급스러움이 유통 채널을 거치면서 희석될 가능성이 존재하는 것이다. 비박스의 경우 한 달에 2000원을 추가 지불할 의향이 있는 소비자를 위해서 기존에 존재하지 않는 고급스러운 셋톱박스를 개발하는 데는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제품에 대한 니즈를 가진 소비자들을 찾아내고 그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마케팅 캠페인이나 대리점 점주와 설치기사들에 대한 교육과 훈련은 ‘프리미엄’ 이미지에 맞게 고급스럽지 못했을 수 있다. 비박스라는 프리미엄 제품만을 전문적으로 팔기 위한 채널을 따로 마련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가치가 기획 단계에서 생각했던 것만큼 고객에게 온전히 전달되기 어렵다. 이것은 고급화 전략을 도입하는 기업들이 보편적으로 겪는 문제다.



‘Lessons learned’는 있었다

출시 3년도 되지 않아 비박스라는 브랜드는 소멸단계에 이르렀지만 SK텔레콤과 SK브로드밴드에 있어 이 프로젝트가 실패라고만 볼 필요는 없다. 직접 매출 외에도 간접적으로 얻은 효과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선 판매와 운영을 맡은 SK브로드밴드는 비박스와 UHD 셋톱박스 등 고가 IPTV 상품들의 선전에 힘입어 지속적으로 실적이 좋아지고 있다. IPTV 시장점유율은 2014년 29.2%에서 2016년 6월 기준 30.5%로 소폭 상승했고 사업 매출 역시 2014년 1조3389억 원에서 2015년 1조4787억 원, 2016년 상반기 8222억 원으로 상승 추세에 있다.(회사 공시 보고서 기준) 여기에 비박스 제품군이 얼마나 기여했는지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단순했던 제품 라인업을 풍성하게 하고 프리미엄 브랜드 이미지를 더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새로운 시장 잠재력을 발견한 것도 적지 않은 소득이다. 과거의 셋톱박스 비즈니스는 소비자들이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 걸림돌이 되지 않도록 생산 단가와 가격을 낮추는 것이 핵심이었다. 비박스는 이와 반대 방향을 택했다. 소비자에게 더 나은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서 가격을 과감히 높였다. 이로써 새로운 제품을 기꺼이 수용하는 얼리어댑터와 추가 비용을 지불할 의향이 있는 고급 사용자들의 데이터를 확보했다. 만일 회사가 추후에 다른 프리미엄 제품이나 서비스를 판매할 계획이 있을 때 이들을 대상으로 추가 마케팅을 실시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것이다.

그럼 비박스를 만들어낸 친어머니 SK텔레콤에게는 어떤 유산이 남았을까. SK브로드밴드로 87억여 원에 자산이관을 하면서 초기 투자비용을 회수한 것보다 더 중요한 소득은 조직학습 효과다.

당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한 회사 관계자는 이렇게 평가한다. “스마트 홈, 홈 허브라는 방향성은 제대로 맞췄다고 생각한다. 이후로도 수많은 스마트 홈 기기들이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여러 가지 부족한 점도 있었고 또 조직 개편 등의 이유로 이 프로젝트가 큰 성공을 거뒀다고 볼 수는 없지만 ‘lessons learned’는 분명히 있었다.”

비박스 프로젝트에 참여한 기획자들은 셋톱박스라는 영역에서 고가의 신제품을 구상했고, 이러한 구상을 바탕으로 에이전시 소속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제품을 개발했다. 마지막으로 개발된 제품이 내부에서 사장되지 않고 시장에서 실제로 판매됐다는 점 모두 중요한 학습이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내외부의 다양한 분야에서 영입해 구성했던 프로젝트팀 멤버들은 현재까지 모두 회사에 남아서 여러 신제품 개발 프로젝트를 맡으며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소비자용 하드웨어 기기와 소프트웨어를 모두 아우르는 개발 경험을 갖춘 인력 풀이 생긴 것이다. 여기에 SK텔레콤은 2014년 11월 디지털 오디오기기의 명가 아이리버를 인수하면서 하드웨어 디바이스 관련 사업으로의 확장도 계속 모색하고 있다.

신제품 개발은 시장에서 나오는 단편적인 결과보다 제품 개발 과정에서 얻는 학습효과가 더욱 중요하다. IT 등 혁신 산업에서는 매일같이 신제품들이 쏟아져 나온다. 신제품이 시장에서 성공을 거둘 확률은 1%도 되지 않는다. 낮은 성공률에도 불구하고 기업들이 매년 끊임없이 새로운 제품을 시장에 내놓는 이유는 지난 결과의 학습을 통해 시장에서의 성공 확률을 조금씩이라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시도를 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다. 특히 어느 정도의 시행착오를 감수할 수 있는 여력이 있는 대기업이 실패를 두려워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비박스와 같은 의미 있는 시도가 이 회사뿐 아니라 다른 기업까지 전방위적으로 확산돼 다양한 학습이 일어나길 기대해본다.

주재우 국민대 경영대학 교수 designmarketinglab@gmail.com
조진서 기자 cjs@donga.com

주재우 교수는 서울대에서 인문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를, 캐나다 University of Toronto의 Rotman School of Management에서 마케팅 박사 학위를 받았다. 행동적 의사결정 심리학을 바탕으로 디자인 마케팅, 신제품 개발, 소비자 행동에 관해 주로 연구하고 있다.


생각해볼 문제

1. ‘셋톱박스를 예쁘게 만들면 사용자들이 TV장식장 밖으로 꺼낼 것이다’는 비박스 프로젝트의 기본 전제는 옳았을까.

2. 프로젝트 팀원이 경험한 실패의 교훈(lessons learned)을 조적 전체에 전파할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3. 스마트 셋톱박스와 UHD 셋톱박스 이후, IPTV 사업의 수익성을 한 단계 더 올릴 수 있는 혁신은 어디에서 올까?
  • 주재우 주재우 | 국민대 경영학과 교수

    필자는 서울대에서 인문학 학사와 경영학 석사를 받았고 토론토대에서 마케팅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신제품 개발과 신제품 수용을 위해 디자인싱킹과 행동경제학을 연구하며 디자인마케팅랩을 운영하고 있다.
    designmarketinglab@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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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진서 조진서 | 동아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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