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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vs. Business Strategy

수비형 영웅, 몽고메리·아이아코카. 변칙적 공격 필요할 때 힘 못썼다

김경원 | 190호 (2015년 1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상황에 맞는 리더 기용의 중요성

전쟁사례: 북아프리카의 영웅에서 유럽의 패장으로 전락한 버나드 몽고메리

1942년 롬멜 휘하의 독일 전차군단을 엘 알라메인에서 격파, 전국(戰局)에 승기를 마련. 그러나 노르망디 상륙작전 영국군 총사령관으로 부임했을 때 주도한마켓 가든 작전은 대 실패로 마감. 전형적인 전황의 전개를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는 상황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지만 전황의 변화에 따라 순발력 있게 대응하는 공격 상황에 취약함을 드러냄

 

경영사례: 1980년대 초(턴어라운드) 1980년대 말(성장 추구) 아이아코카의 부침

1978년 포드에서 크라이슬러의 구원투수로 영입. 기존 계획을 뚝심 있게 처리해 위기에 빠진 크라이슬러를 회생시키는 데 성공. 강력한 추진력과 카리스마적 리더십의 결과. 하지만 사업이 정상 궤도에 올라 성장 전략을 취해야 할 때도 뚝심만 고집하다 결국 독선으로 변질되며 조직에 위기 초래

 

편집자주

전략은 원래 전쟁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전략의 이론은 중국의 <손자병법>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독일의 클라우제비츠에 이어 20세기 영국의 리델 하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에 걸쳐 정립되고, 또 실전에서 적용돼 왔습니다. 그만큼 경영 전략은 실제 전쟁 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점이 많습니다. <전쟁에서 경영전략을 배우다>의 저자인 김경원 박사가 전쟁 사례로부터 얻은 전략적 교훈이 어떻게 실제 경영사례에 적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소개합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전쟁 사례를 통해 의미 있는 경영 전략의 지혜를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손자병법>구변(九變)’ 편에는필사(必死·만용스러운 장수)’ ‘분속(忿速·화를 잘 내고 성급한 장수)’ 등 성향에 따른 장수의 5가지 유형을 언급하고 있다. <손자병법>의 분류가 아니더라도 실제 전쟁에서 상황에 따라 가장 맞는 유형의 장수를 기용해야 승리를 기약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강한 공격이 필요할 때에는 과감한 것은 물론 전황변화를 잘 읽어 임기응변에 능한공격형장수를, 철저한 방어가 필요할 때에는 신중하고 뚝심 있는수비형장수를 쓰는 게 바람직하다. 기업의 전략 수립 단계에서도 수립된 전략을 누가 실행할지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어 성장 전략을수비형리더에게 맡기면 그의뚝심고집으로 바뀌면서 전략이 엉뚱한 방향으로 실행될 위험이 있다. 반대로 위기에 빠진 기업의 회생을 위한 턴어라운드(turnaround) 전략을공격형리더에게 맡기면 정해진 계획을 따르지 않고 단번에 큰 성과가 나는 방향으로 선회하는 등의 과욕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크다. 다음의 사례는 전쟁이나 기업 현장에서 상황에 맞지 않는 리더 기용으로 조직 전체가 큰 피해를 본 사례들이다.

 

전쟁 사례: 북아프리카의 영웅에서 유럽의 패장으로 전락한 몽고메리

 

2차 세계대전 중 영국을 대표할 만한 명장은 버나드 몽고메리다. 그는 개전 초 벨기에에 주둔하는 영국군 제3사단의 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연합군이 케르크(Dunkergue·프랑스 북부의 항구 도시)까지 몰리는 위기 상황에서도 전투력을 거의 완벽하게 보존한 상태로 영국까지 철수시켰다. 하지만 그는 성격이 곧고 직언도 잘해 상관들과 사이가 안 좋았고, 그 결과 본국에서는 후방 부대 지휘 등 한직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그에게 다시 실전에서 능력을 증명할 기회가 왔다. 아프리카에서 영국군은 롬멜 휘하의 독일 아프리카 전차군단에 연전연패한 끝에 1942년 카이로에서 200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엘 알라메인(El Alamein·이집트 지중해 연안에 있는 도시)까지 밀려났다. 처칠 수상은 그해 8월 아프리카 전선을 시찰한 후 오킨렉 사령관을 몽고메리로 교체했다.

 

 

몽고메리는 사령관으로 부임하자마자 무엇보다도 먼저 장교와 병사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주력했다. 그는 저격의 위협을 무릅쓰고 최전선에 자주 나타나 병사들을 격려했고 직접 담배를 나눠주기도 했다. 또한 향후 반격에 대비해 무기, 탄약 등을 본국에서 꾸준히 조달해 전력을 비축하는 것은 물론 정교한 수비 플랜을 세워 적이 공격할 때마다 강한 수비로 적의 힘을 쏙 빼놓는 전술을 구사했다. 여기에다 야전 화장실 관리 등 위생에도 힘썼다. 식수의 질이 나쁜 북아프리카에서 수인성 전염병이 병사들의 전투력을 심하게 갉아먹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해 10월 말 보급품과 탄약, 무기 등은 물론 병사들의 건강상태 및 사기 면에서 철저한 준비를 마쳤다고 판단한 몽고메리는 공세로 돌아섰다. 이즈음 지중해를 통해 오는 독일의 수송선단은 제해권을 장악한 영국해군에게 속속 격침됐다. 독일 아프리카 전차군단의 보급 상황은 갈수록 나빠져 탄약, 식량은 물론 연료도 떨어져가고 있었다. 게다가 신선한 식수를 구하지 못한 병사들은 상당수가 수인성 질병에 걸려 있었다. 이런 상태에서 영국군이 대공세에 나서자 이 군단은 큰 타격을 입고 패주하기 시작했다. 신병 치료 차 베를린에 가 있던 롬멜이 급거 전선으로 복귀했지만 상황을 되돌릴 수 없었다. 이후에도 패배를 거듭하다가 이듬해 3월 튀니지에서 항복했다.

 

이 전공으로 몽고메리는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영국군의 총지휘를 맡았다. 하지만 연합군의 총사령관 지위는 미군의 아이젠하워에게 맡겨졌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연합군 10개 사단 중 5개 사단이 미군일 정도로 연합군 내에서 미국의 비중이 컸기 때문이다. 그런데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후 단숨에 파리까지 점령했던 연합군의 공격 속도가 벨기에에 다다르자 현저히 지체되기 시작했다. 연합군이 진격해 나감에 따라 보급선이 길어지면서 일선 부대 보급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다. 이 교착 상태를 뚫고자 그해 9월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를 설득해 독일 본토로 곧바로 진격할 수 있는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이른바마켓 가든 작전(Operation Market Garden)’이었다.

 

 

마켓 가든 작전의 개요는 네덜란드에서 독일로 향하는 좁은 고속도로를 먼저 공수부대가 장악하고 이를 통해 주력군인 영국 30군단이 탱크를 앞세워 독일 본토로 진격해 들어가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작전은 처음부터 문제가 많았다. 우선 이 고속도로는 총 길이가 100㎞에 달하고 매우 좁아서 중간에 탱크가 하나라도 파괴되거나 고장으로 서 버리면 모든 대열의 행진이 멈춰 시간이 크게 지체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이 고속도로에는 총 7개의 다리가 있었다. 이 다리 중 하나라도 적군의 공격을 받아 파괴되면 진격 자체가 불가능해졌다. 7개의 다리 모두 아군이 완벽하게 확보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 다리 확보 임무는 공수부대에게 맡겨졌다. 하지만 공수부대는 특성상 중화기를 가져갈 수가 없어 탱크 부대 공격에 취약하다. 만약 다리 주변에 적군의 탱크 부대가 배치돼 있다면, 설령 공수부대가 다리를 확보한다 한들 오래 버티기는 힘들어 결국 작전이 실패로 돌아갈 위험이 컸다. 그러나 몽고메리는 이 모든 가능성을 가벼이 여겼다. 심지어 독일로 넘어가는 아른헴(Arnhem) 다리 근처에 탱크 부대가 있다는 정찰기의 보고도 묵살했다.

 

917일 작전 첫날 영국군 제1공수사단이 독일로 가는 아른헴 다리 입구를 확보하는 등 다른 공수 부대들도 대체적으로 다리 확보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미군 공수부대가 확보하기로 한 두 개의 다리는 이미 독일군이 폭파했거나 적군의 저항으로 장악에 실패했다. 심지어 영국군 30군단은 진격도중 적 공격으로 선두전차가 파괴돼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봉착하게 됐다. 그런 상태에서 아른헴 다리 입구를 지키던 영국군 제1 공수 사단에 독일군 탱크 부대인 제10 친위대 기갑사단이 들이닥쳤다. 결국 제1 공수사단은 925일 새벽 6시에 부상병을 남겨 놓고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로써 이 작전은 대 실패로 마감했다. 연합군 17000여 명이 전사했다. 특히 제1공수사단은 당초 투입됐던 1만 명의 병력 중 7842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다.

 

아프리카 전선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렸던 몽고메리가 유럽에서는 왜 이런 실패를 보게 됐을까? 몽고메리는 전형적인수비형장군이었다. 본인이 직접 전선을 확인할 수 있고 전황의 전개를 예상할 수 있는 수비전에서는 발군의 실력을 드러냈다. 하지만 수비형 장군이 공격 상황에 투입되자 상황이 달라졌다. 본인이 직접 전장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막연한 가정에 기초해 수비전에나 알맞은 계획을 세워 밀고 나간 게 화근이었다. 공격전에 임하는 지휘관은 예상보다 강한 적의 저항 등 전황 변화에 따라 작전계획도 몇 개의 백업 플랜을 가지고 있거나 유연하게 작전을 변경할 순발력을 갖춰야 한다. 몽고메리는 그렇지 못했다. 더구나 작전 성공에 대한 욕심과 확신이 너무 강한 나머지 탱크부대의 존재 등 자신의 전략 목표 달성에 차질을 줄 정보는 과소평가하거나 아예 무시했다. 만약 처칠이 공격전에 맞는 다른 장군을 기용했더라면 이런 결과는 없었을 것이다.

 

경영사례: 1980년대 초(턴어라운드)1980년대 말(성장 추구) 아이아코카의 부침

 

1970년대 말 크라이슬러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었다. 1978년 포드에 리 아이아코카가 구원투수로 영입됐다. 그는 1979년 의회를 설득해 파산 지경에 다다른 크라이슬러의 부채 15억 달러를 미국 정부가 보증하도록 하는 데 성공했다. 의회의 도움으로 시간을 번 그는 대량의 인력 및 사업 구조조정과 함께 예정돼 있던 신차 개발 계획(아이아코카가 크라이슬러에 오기 전부터 진행 중이었던 개발 계획)을 뚝심 있게 밀어붙여 위기를 돌파해갔다. 그 결과 크라이슬러는 1981년 닷지 에어리스 및 플리머스 릴라인어트 등 소위 ‘K-라고 불리는 신()차종을 출시했다. 이후 외관이 조금씩 차별화된 여러 차종의 승용차를 계속 내놓았다. 이는 한 개의 차대를 이용해 여러 다른 차종을 생산하는 것이었다. 이를 통해 다양한 차종을 생산해 여러 소비자의 기호를 맞추되 생산비와 가격을 크게 낮출 수 있었다. 또한 이들 차종은 모두 전륜 구동 방식을 택해 연비가 뛰어났다.

 

시장의 반응은 뜨거웠다. K-카들은 날개 돋친 듯 팔렸고 크라이슬러의 재무상황은 곧바로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1983년에는 이 차대를 기초로미니밴이 탄생됐다. 닷지 캐러밴 등의 모델명을 달고 나온 미니 밴 역시 판매 돌풍을 일으켰다. 그 덕에 크라이슬러는 재무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의 배경에는 강한 카리스마로 의회를 설득하는 등 대외활동에서 소기의 성과를 거둔데다 제품개발을 밀어붙여 성과를 낸 아이아코카의 리더십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크라이슬러가 회생에 성공해 본격적인 성장 궤도로 들어서자 아이아코카의 리더십은 걸림돌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턴어라운드 당시 빛을 발했던 그의 카리스마가 갈수록 아랫사람들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 독선으로 변해갔기 때문이다.

 

아이아코카는 회사가 정상화되면서 보유 현금이 쌓여 가자 회사 덩치를 키우기 위해 의욕적으로 기업 인수에 나섰다. 그런데 이 가운데에는 당시 미국 내 4위 자동차 업체인 AMC나 이탈리아의 람보르기니 같은 자동차 업체들도 있었지만 걸프스트림이라는 자가용 제트기 메이커 및 렌터카 회사, 금융회사 등 자동차 제조업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회사들이 많았다. 모두 아이아코카가 주도한 M&A였다. 이는 당연히 신차 개발에 투입돼야 할 재원이 별로 남지 않는 결과로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아이아코카의 독선이 신차 개발에도 악영향을 미쳤다. 그 무렵 크라이슬러는 K-카의 후속 차대를 개발하고 이를 공유하는 자동차 모델들을 디자인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C-. 그러나 재원 부족으로 완전히 새로운 차대를 개발하기보다는 기존의 K-카 차대를 연장하는 형태에서 그쳐 근본적으로 신차의 경쟁력은 떨어졌다.

 

 

그의 개입이 문제가 된 경우는 또 있다. 그 당시 자동차 시장의 메인 트렌드는공기역학(aerodynamics)’이었다. 포드는 이를 반영해 1986년 토러스라는 혁신적인 디자인의 신차를 출시했다. 이 차종은 디자인 자체만으로도 소비자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이에 자극 받은 GM도 공기역학을 반영한 신차들을 속속 내놓았다. 그런데 크라이슬러는 이런 경향과 반대로 나갔다. 아이아코카 때문이었다. 그는 신차 디자인에 적극 개입했다. 그리고 자신의 취향이라며 신차종을 모두 각이 진 형태로 만들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988년 발매된 이 차종들은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크라이슬러의 재무상태는 곤경으로 치달았다. 대폭 할인이 아니면 잘 팔리지 않아 회사의 수익성을 갉아먹었다. 1984 24억 달러의 순이익을 자랑하던 이 회사는 1989 4·4분기부터 큰 손실을 내기 시작, 급기야 1991년에는 79500만 달러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언론에서는 크라이슬러가 1970년대 말의 존립 위기 당시로 다시 돌아가 결국 파산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떠들기 시작했다. 그해 걸프전의 여파로 미국 경기가 크게 나빠진 탓도 있지만 주력 차종의 경쟁력이 모자란 게 더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1970년대 크라이슬러처럼 회사의 존립 여부가 불투명한 위기 상황에선 구조조정이라는 명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뚝심 있게 달려가는 게 중요했다. 아이아코카는 이 일에 적임자였다. 하지만 어느 정도 안정적 궤도에 올라와 모든 기능이 정상으로 돌아온 이후에는 시장의 변화를 정확하게 간파해 기민하게 반응하는공격형’ CEO가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아이아코카는 몽고메리의 경우처럼 전형적인수비형’ CEO에 속했다. 그가 ‘K-개발에 성공할 수 있었던 건 이미 세워져 있는 계획을 뚝심 있게 밀어붙였기 때문이지 그가 스스로 신차 개발 계획에 대한 밑그림을 그렸던 게 아니었다. 실제로 아이아코카는 자동차 시장의 메인 트렌드가 공기 역학으로 흘러가는 데도 이를 무시하고 각진 자동차만 만들어 내는 우를 범했다. 모두 전세의 변화, 시장 판도를 제대로 읽어내는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다. 그런 와중에 계속해서 강력한 리더십만 고집하다보니 결국 독선적 리더십으로 변질돼 회사에 악영향을 끼치고 말았다. 아이아코카는 1991년 말 임기를 마치고도 회사에 더 남겠다고 공언했지만 나빠진 실적 탓에 이사회의 압력으로 1992년 은퇴했다. 만약 크라이슬러가 1980년대 후반 아이아코카 대신에 안정적인 성장기에 맞는 새로운 리더를 택했더라면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의 위기는 없었을 것이다.

 

김경원 대성합동지주 사장 alexkkim7@gmail.com

 

필자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매디슨)에서 경영학 석사,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금융연구실 실장, 글로벌연구실 실장, IMF T/F 팀장을, 삼성증권에서 리서치센터장을 각각 역임했다. 2009 CJ그룹 전략기획 총괄 부사장으로 부임해 전사 전략 및 M&A 전략 수립을 주도했다.

  • 김경원 김경원 | -(현) 디큐브시티 대표이사 겸 대성산업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실장, 리서치센터 센터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CJ그룹 전략기획총괄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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