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Military vs. Business Strategy

때론 희생 큰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오지마 전투·IBM PC사업부 인수처럼…

김경원 | 179호 (2015년 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단순한 계산을 넘어 점령 목표의 전략적 가치는 따로 봐야 한다.

전쟁사례 - 미군의 사이판·이오지마 점령

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은 사이판, , 티니안 섬으로 이뤄진 마리아나 제도와 이오지마 섬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무려 1만여 명의 전사자가 발생했음. 이는 당시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군 전사자 총수의 10분의 1에 해당함. 과다해 보이는 피해이긴 하나 일본 본토 공격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함으로써 결국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음.

경영사례 - 레노버의 IBM 인수

중국 내수시장 기반의 PC 사업자라는 타이틀에서 벗어나 글로벌 기업으로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 일견 무리해 보이는 IBM PC사업부를 인수. 당초 IMB 측에 제시했던 인수 금액(11억 달러)보다 60% 할증된 액수(175000달러)로 최종 계약을 마무리했지만 그 결과 세계 3위의 글로벌 PC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 

 

편집자주

전략은 원래 전쟁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전략의 이론은 중국의 <손자병법>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독일의 클라우제비츠에 이어 20세기 영국의 리델 하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에 걸쳐 정립되고, 또 실전에서 적용돼 왔습니다. 그만큼 경영전략은 실제 전쟁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점이 많습니다. 현장형 경영전략 전문가인 김경원 박사가 전쟁 사례로부터 얻은 전략적 교훈이 어떻게 실제 경영사례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전쟁 사례를 통해 의미 있는 경영 전략의 지혜를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손자병법>지형(地形)’ 편에 나오는통형(通形)’이란 먼저 점령하면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 땅이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이상의 대가가 필요하다. 기업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다른 기업을 인수할 때, 피인수기업의 가치를 산정할 때 이 기업의 미래 현금창출 능력에 기초한적정가치보다 가격을 더 쳐주면 인수기업의 주가가 떨어지는 사례가 많다. 단순히 주가 하락에 머물지 않고승자의 저주에 내몰리는 경우도 많다. 치열한 기업 인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과도한 비용을 지불한 탓에 재무구조가 악화되고 설상가상 M&A로 인해 기대했던 시너지도 얻지 못해 큰 후유증을 앓는 경우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볼 수도 있다. M&A에 승자의 저주가 뒤따르는 것을 많은 경영자들이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높은 비용을 치르는 경우가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바로전략적 가치때문이다. 피인수기업이 회사의 고성장을 위해 꼭 필요한 교두보적 가치가 있다면 그 가치는 따로 보아 더 쳐줄 용의가 있어야 한다. 다음의 전쟁과 경영의 사례는 목표 자체의 가치보다전략적 가치를 봐서 대가 지불을 불사했던 경우다. 목표 자체의 가치보다 훨씬 더 많은 희생이나 금전적인 비용을 치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이상의 보상이 돌아왔다.

 

 

전쟁 사례

큰 희생을 무릅쓴 미군의 사이판·이오지마 점령

1944 615일에 미군은 사이판, , 티니안 섬으로 이뤄진 마리아나 제도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미군 상륙부대는 해병대 제2사단과 제4사단, 육군 제27사단으로 이뤄진 대부대였다. 이 섬들을 지키던 일본군은 총 31000명으로서 역시 만만치 않은 전력이었다. 일본군의 저항은 거셌다. 수비하던 일본군 병력의 100%에 가까운 3만 명 이상이 전사한 후인 79일에 이르러서야 미군은 이 섬을 완전히 장악했다. 미군의 희생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들 섬에 상륙한 총 71000명의 병력 중 3500여 명이 전사했고 13000명 이상이 부상을 당했다.

 

이들 섬에 상륙하자마자 미군은 비행장을 점령하고 활주로 등을 정비해 그해 11월에 100대 이상의 B-29 전략 폭격기를 배치했다. 이것이 바로 미국이 이 섬들을 점령하려 했던 이유였다. 사이판은 일본 본토로부터 2100㎞ 떨어져 있고, B-29의 작전 반경은 2400㎞다. , 이들 폭격기는 도쿄를 폭격하고 귀환할 수 있는 거리 안에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이곳에서 발진하는 B-29의 일본 본토 폭격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B-29에는 지상에서 10㎞ 떨어진 고공을 날아가며 폭격할 수 있도록 정밀조준 장치가 장착돼 있었다. 이 고공 폭격은 최고 고도가 훨씬 낮은 일본 전투기들의 요격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어 폭격기 승무원들은 이를 선호했다. 그러나 편서풍이 많은 일본의 기후 때문에 고공에서 떨어뜨린 폭탄이 엉뚱한 곳에 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1944 12, 폭격기 사령부의 지휘관으로 새로 부임한 커티스 르메이 소장은 전략적 가치가 큰 군사시설 등에 대한 고공 정밀 폭격이 일본 전장에는 맞지 않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폭격의 정확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대신 주요 도시에 대한 무차별 폭격으로 전략 방향을 수정하고 목조건물이 많은 일본 도시의 특성상 소이탄을 이용한 공격이 효과적이라 판단했다. 르메이 소장은 소이탄을 잔뜩 실은 B-29가 최고 고도보다 훨씬 낮은 고도로 비행하면서 폭격을 실시하도록 했다. 1945 2 B-29 172기를 동원해 실시한 소이탄 폭격은 도쿄 도심의 상당 부분을 태워버렸다. 그런데 고도를 낮추자 이 폭격기를 잡기 위해 요격 나오는 일본 전투기에 의한 미군의 피해는 갈수록 심각해졌다. 유럽에서도 초기 이런 문제가 있었으나 미국이 항속거리가 긴 전투기들을 개발해 폭격기를 호위하면서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사이판의 비행장에서 B-29와 같이 출격해 일본 본토까지 호위해주고 돌아와 줄 만큼 긴 항속거리를 가진 전투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1945 219일 아침 9시경, 미군은 사이판 섬과 일본 본토 사이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화산섬인 이오지마 섬에 상륙했다. 7만 명의 해병대 병력을 동원해 22000여 명의 일본군 수비병력이 지키고 있는 이 섬을 공격한 것이다. 그런데 방어 책임을 맡은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중장은 미국 하버드대 등에 유학한 적이 있는 지장(智將)이었다. 그는 1년여 동안에 걸쳐 섬 전체를 지하 요새화한 채 미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 동굴들을 통로로 연결시키고 이를 이용한치고 빠지는게릴라 전술로 진격해오는 미군들을 부단히 괴롭혔다. 이에 따라 미군은 동굴 하나하나를 수색하고 화염 방사기와 수류탄으로 적을 제압하고 전진할 수밖에 없었다.

 

미군은 상륙한 지 한 달 일주일이 지난 326일에서야 이오지마 섬을 장악했다. 희생은 매우 컸다. 전사자 수는 총 6800명이 넘었으며 부상자 수도 19000명을 크게 상회했다. 이는 상륙한 병력 중 반에 가까운 병력이 죽거나 부상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오지마 섬의 점령으로 전장에서 맹활약을 펼쳤던 P-51 머스탱 전투기의 작전 거리 안에 일본 본토가 들어오게 됐다. 이 전투기의 작전 반경은 1500㎞를 상회해 도쿄로부터 남쪽으로 1200㎞ 떨어진 이 섬의 비행장에서 이륙하면 B-29 폭격기의 임무 수행을 지원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당연히 이때부터 미군 폭격기의 피해는 크게 줄어들었다.

 

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선에서의 미군 전사자 총 수는 약 10만 명이었다. 이들 가운데 10분의 1이 넘는 전사자 수(3500여 명+6800여 명=1300여 명)가 마리아나 제도와 이오지마 상륙작전에서 나왔다. 전술하다시피 일본 본토 공격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떤 희생을 치르고도 꼭 점령해야만 했던 지역이었다. 결국 1945 8월 마리아나 제도에서 이륙한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에 이어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며칠 후 미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받아냈다. 비록 작은 섬들에서 발생한 피해라는 점을 고려하면 과다해 보이긴 하지만 그 희생은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경영 사례

‘값비싼’ M&A로 세계로 도약한 레노버

2004 12, 중국의 레노버는 대표적인 글로벌 IT 기업인 IBM으로부터 PC사업부를 인수하는 데 최종 합의하고 다음 해 5월에 인수계약을 마무리 지었다. 이 회사는 인수를 위해 상당한 매각 금액을 지불하는 것은 물론 중국 국영 기업으로는 이례적으로 18.9%의 자사 지분을 IBM에 넘겨주기까지 했다.

 

레노버는 1984년 중국과학기술원 산하 계산기연구소에서 근무하던 11명의 연구원들이 창업한 일종의 사내 벤처였다. 1990년 초반까지 중국의 PC 시장은 IBM, HP, 컴팩, 델 등 글로벌 업체가 잡고 있었다. 레노버는 이들 글로벌 브랜드 컴퓨터의 유통업에 나서 중국 내 PC 유통망을 잠식해 나아가는 한편 제조에도 뛰어들었다. 결국 사업 개시 후 20년의 짧은 시간 동안 레노버는 중국 국내 PC 산업을 완전히 장악했다. 중국의 10억 명이 넘는 인구에 기반한 폭발적인 컴퓨터 수요를 등에 업고 자사의 제조 역량에 힘입어 2005년 중국 내 1위 업체로 올라서는 데 성공한 것이다. 당연히 레노버의 다음 목표는글로벌 기업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글로벌 기업으로 도약하기에는 브랜드 파워와 세계 시장 유통망이 턱없이 부족했다.

 

2005년 당시 IBM 20년의 짧은 기업 역사를 가진 레노버와 달리 1911년 창립돼 9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IT 제조업체였다. 이 회사는 1981년 각 가정에서 쓸 수 있는 개인용 컴퓨터 ‘IBM PC 5150’을 출시했다. 이 모델은 출시 직후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출시 4개월 만에 5만 대 이상 판매됐다. IBM이 모델명으로 사용했던 PC라는 용어는 이후 컴퓨터를 통칭하는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 그러나 IBM PC 사업은 1990년대 들어서면서 델, HP 등 강력한 후발주자들의 추격으로 부동의 시장점유율 1위 자리를 위협받기 시작했다. 결국 1994년까지 전 세계 1위 자리를 후발주자들에게 양보해야 했다. 소프트웨어 사업마저 마이크로소프트에 밀리며 큰 손해를 보기도 했다.

 

거듭되는 악재로 이 회사는 1992 497000만 달러의 손실을 내며 경영난에 직면하게 됐다. 이에 1993년 새로운 CEO로 취임한 루이스 거스너는 대대적인 사업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IT 제조업 위주에서 고부가가치의 지식 서비스업으로 사업의 중심을 옮기자는 것이었다. 2000년에 거스너의 후임 CEO가 된 샘 팔미사노는 전임자의 경영노선을 그대로 승계하고 강화하며 IT 솔루션 개발, 구축, 컨설팅 등 통합 IT 서비스 제공업체로의 변신을 지속해갔다. 그는 내친 김에 한때 IBM의 상징이었던 PC사업부까지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IBM PC사업부는 그리 매력적인 인수 대상은 아니었다. 2003년 이 사업부의 세계 시장점유율은 5.6%로 떨어졌고 연속으로 거액의 적자를 내고 있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2001년부터 3년 동안 IBM은 레노버에 PC사업부 매각을 지속적으로 제안했다. 이에 레노버 경영진은 이 제안을 진지하게 검토한 후 11억 달러의 인수가격을 제시했다. 그들은 IBM PC사업부의 심각한 적자 상태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기업가치 산정에 쓰는순현가 방식으로 계산한다면 이는 도저히 나올 수 없는 가격이었다. 그러나 160여 개국에 달하는 IBM의 글로벌 유통망과 브랜드 가치를 높게 평가해 나름 후하게 가격을 쳐준 것이다. 하지만 2004년 여름부터 2005년 초까지 긴 협상 과정을 거쳐 최종 합의된 가격은 6억 달러의 현금과 자사주식 등 총 175000달러였다. 이는 레노버가 애초에 제시한 가격에서 약 60%나 할증된 것이다.

 

당시 레노버의 PC사업 매출액은 연간 30억 달러였고 IBM PC사업의 연간 매출은 120억 달러였다. IBM PC사업부의 적자가 심화된다면 합병 후 덩치가 훨씬 커진 상황에서 레노버 전체가 위험해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IBM이 인수해간 주식을 손절매 목적으로 대량 매도할 경우 주가가 폭락할 상황도 생길 수 있었다. 실제로 시장도 그런 우려를 반영했다. 레노버가 상장돼 있는 홍콩 증시에서는 인수 발표 전인 2004 12월 초에 비해 인수 작업이 마무리된 다음 해 5월 말 사이에 항셍 주가지수는 2% 조금 넘게 떨어진 반면 이 회사의 주가는 같은 기간 9% 가까이 떨어졌다.

 

이러한출혈에도 불구하고 레노버 경영진은 일견 무리해 보이는 인수 결정을 밀고 나갔다. 레노버의 최고경영진은 글로벌 회사로 도약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위해 IBM PC사업부 인수는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 판단은 주효했다. 2003년 세계 PC 시장점유율이 2.2%에 불과했던 레노버는 인수 직후 PC 생산량 약 1200만 대, 매출액 120억 달러의 세계 3위 글로벌 PC 기업으로 도약했다. 이후에도 가파른 성장을 거듭한 결과 마침내 2012 3분기 HP를 제치고 글로벌 PC업계 정상을 차지했다. 진짜 글로벌 기업이 되겠다는 그들의 당초 목표가 완성된 것이다. 만약 레노버가 미래 현금흐름 등에만 기초해 최초에 제안한 인수가격 11억 달러를 고집하다 거래가 무산됐다면 이런 성과는 없었을 것이다. 때로는웃돈을 얹어주면서라도 전략적 가치를 평가한 결단이 필요하다.

 

레노버의 최고경영진은

글로벌 회사로 도약한다는

전략적 목표를 위해 IBM PC사업부

인수는 꼭 필요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김경원 디큐브시티 대표 alexkkim7@gmail.com

필자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매디슨)에서 경영학 석사,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금융연구실 실장, 글로벌연구실 실장, IMF T/F 팀장을, 삼성증권에서 리서치센터장을 각각 역임했다. 2009 CJ그룹 전략기획 총괄 부사장으로 부임해 전사 전략 및 M&A 전략 수립을 주도했다.

 

 

  • 김경원 김경원 | -(현) 디큐브시티 대표이사 겸 대성산업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실장, 리서치센터 센터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CJ그룹 전략기획총괄 겸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