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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litary vs. Business Strategy

자살폭탄·반값공세 같은 ‘극한요법’ 때론 필요하지만, 지속할 순 없다

김경원 | 174호 (2015년 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전략, 인문학

  

 

전쟁 사례: 노몬한 사건

1939년 몽골과 만주국의 국경지대인 할힌골 강 유역에서 일본 관동군이 소련군 및 몽골군과 대치해 패배한 전투. 일본은 비록 할힌골전투에서 패했지만 적군 탱크에 육탄으로 돌격해 엔진 부위에 화염병을 던져 큰 피해를 입혔음. 이 때문에 일본군 수뇌부는 탱크, 장갑차 등 기갑 장비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하고맨몸으로도 탱크를 잡을 수 있다는 맹신에 빠지는 우를 범함

 

경영 사례: 피플익스프레스의 몰락

파격적인 저가 운임을 내세우며 1980년대 미국 항공계에 돌풍을 일으킨 대표적인 저가 항공사. 급증하는 승객 수에도 불구하고 전산 시스템에 대한 투자를 게을리해피플 디스트레스(People Distress)’라는 불명예스런 별명까지 얻음.

 

편집자주

전략은 원래 전쟁에서 생겨난 말입니다. 전략의 이론은 중국의 <손자병법>부터 시작해서 19세기 독일의 클라우제비츠에 이어 20세기 영국의 리델 하트에 이르기까지 수천 년에 걸쳐 정립되고, 또 실전에서 적용돼 왔습니다. 그만큼 경영전략은 실제 전쟁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점이 많습니다. 현장형 경영전략 전문가인 김경원 박사가 전쟁 사례로부터 얻은 전략적 교훈이 어떻게 실제 경영사례에 적용될 수 있는지를 소개합니다. 역사 속에 존재하는 전쟁 사례를 통해 의미 있는 경영 전략의 지혜를 얻어가시기 바랍니다.

 

<손자병법>()’ 편에는기정(奇正)’이라는 용어가 나온다. 적을 이기기 위해서는비정규 전술[]’정규 전술[]’을 둘 다 잘 활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장군들에게 비정규 전술은 기발함으로 인해 아군의 기본 역량에 의지하는 정규 전술보다 더 선호되기 마련이다. 기업에서도 마찬가지다. 전략 수행 시 기발한 아이디어로 목표를 달성하면 경영진은 이 방법을 고수하려는 경향이 있다. 심지어 이 방법이 일회용인 경우조차 이를 신봉하고 자사의 핵심역량 배양을 도외시하곤 한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곧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다음의 전쟁과 경영 사례는 이를 잘 보여준다.

 

전쟁 사례

노몬한 사건

1931년 중국으로부터 만주를 탈취한 일본은 이곳에 괴뢰정권인 만주국을 세우고 관동군을 상주시켰다.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당시 소련의 영향권하에 있던 몽골(괴뢰정권인 몽골연합자치정부)로부터 만주국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중 1938 7월 말 관동군과 소련군은 두만강 북쪽에 있는 장고봉(張鼓峯)에서 첫 충돌을 기록했다. 양측이 휴전에 합의하며 충돌은 곧 끝났으나 관동군은 이 봉우리를 소련군에게 빼앗겨 사실상 패배했다. 복수를 다짐했던 관동군은 다음해 만주의 동쪽 국경이자 몽골의 서쪽 국경에서 기회를 잡았다. 당시 소련과 일본은 이 지역에서 주장하는 그들의 위성국 간 국경선이 달랐다. 일본은 국경이 할힌골, 즉 할하 강이라고 우겨댔다. 반면 소련은 이 강의 동쪽에 있는 마을인 노몬한의 동쪽 편이라고 주장했다.

 

1939 511, 70∼80명의 몽골군 기병이 말에 먹일 풀을 찾아 할하 강을 넘어왔다. 이들을 발견한 만주군 기병은 이들을 공격해 강 너머로 쫓아 버렸다. 그런데 이틀 뒤 훨씬 많은 수의 몽골군이 강을 넘어왔다. 수가 너무 많아 만주군 기병이 이들을 쫓아내지 못하자 다음날 관동군 제23사단의 연대 병력이 도착해 몽골군을 쫓아냈다. 하지만 곧 몽골군은 소련군과 함께 다시 몰려와 관동군을 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이노몬한 사건’, 소련은할힌골전투’라 부르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관동군은 장고봉에서 당한 패배를 반드시 설욕하고야 말겠다고 결심했다. 몽골뿐 아니라 소련과의 전면전까지도 불사하겠다며 전의를 불태웠다.1 관동군 지휘부는 곧바로 3만이 넘는 병력을 보내 소련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계획했다. 소련군도 이를 눈치채고 대비 태세에 들어갔다. 1939 65, 훗날 독소전의 최대 영웅으로 떠오른 게오르기 주코프가 사령관으로 부임해 스탈린에게 일본군을 상대하기에 충분한 지원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장차 독일과의 싸움에서 동쪽 전선의 화근을 제거할 목적으로 주코프의 청을 들어줬다. 트럭 수천 대가 동원돼 물자를 나른 결과, 7월 들어 소련군은 400대 이상의 탱크와 300대 이상의 장갑차 등의 장비 및 탄약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소련군의 이런 반격의지 및 준비상태를 알아채지 못하고 주로 육군의 병력 수를 늘리는 데만 주력했다. 탱크도 동원해 왔지만 그 숫자는 총 100대가 되지 않았다. 관동군은 병력 수만 믿고 6∼7월 두 달간 계속 소련군을 공격했다. 그러나 소련군도 반격에 나서 전반적으로 전선은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 과정에서 관동군의 보병들은 공격해오는 소련의 탱크들을 아주 잘 막아냈다. 당시 소련군이 장비한 탱크의 주력은 ‘BT-5’’BT-7’이라는 20톤 미만의 경전차들이었다. 당시탱크를 잡는 가장 좋은 무기는 탱크라는 군사 상식이 있었다. 하지만 일본군은 탱크의 수도 적은데다 ‘97식 전차등 자국의 최신형 탱크조차 성능이 크게 떨어져 소련군 탱크를 상대할 수 없었다. 게다가 적의 대전차포에도 쉽게 격파돼 30대 정도 격파된 시점부터 더 이상의 피해를 감내할 수 없었던 지휘부의 결정으로 후방으로 빠졌다. 적의 탱크를 잡을 무기는 이제 대전차포와 병사밖에 없었다. 그런데 소련군 탱크가 가솔린 엔진을 장착한 것에 착안한 관동군은 세계 최초로 탱크를 파괴하는기발한 방법을 개발했다. 바로화염병을 사용한 아이디어였다. 적 탱크 엔진 부위에 화염병을 던지면 크게 불이 붙어 작동 불능이 됐다. 물론 이를 수행하는 것은 보병으로서 적 탱크의 기관총 사격에 의한 희생을 감수하며 최대한 가깝게 다가가 화염병을 던져야 했다.

 

 

 

이런 일본군의 분전을 무릅쓰고 주코프는 그해 8월 소련군의 전력을 총동원해 관동군에 대한 최후의 대공세에 나섰다. 막강한 포 사격 지원을 받으며 할하 강을 건넌 뒤, 관동군의 양 옆을 돌파해 가위의 두 날처럼 에워싸며 공격해 최후의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이 마지막 공세에서도 관동군은 상당수의 소련군 탱크를 화염병 공격으로 잡아냈다. 비록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소련군은 이 과정에서 총 400여 대의 탱크 중 250대 이상이, 장갑차는 300여 대 중 124대가 재사용이 불가능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는 피해를 입었다.

 

노몬한에서의 패배 이후 일본군 수뇌부는 소련과의 강화 조약을 체결하고 다시는 북방으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이 전투에서 앞으로의 전쟁은 탱크 및 장갑차 등 기갑 장비가 주도할 것이라는 교훈을 얻지 못했고 맨몸으로 상당수의 탱크를 잡아낸 경험을 과신했다. 성능이 현저히 떨어져 제대로 적 탱크를 상대하지 못한 아군 탱크의 문제점에는 눈을 감고, 오로지맨몸으로도 탱크를 잡을 수 있다는 맹신에 빠졌다. 그 결과 일본군 수뇌부는 이후에도 적 탱크를 잡을 아군의 탱크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이는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이 톡톡히 대가를 치르는 결과로 이어졌다. 미군은 소련군의 경전차보다 훨씬 강한 탱크를 몰고 왔다. 그러나 일본군은 미군 탱크도 여전히 화염병 등을 무기로 상대하려 했다. 그러나 이 전술은 아까운 병사들의 목숨만 낭비하며 전혀 먹히지 않았다. 미군 탱크에 대적할 아군(일본) 탱크의 성능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과달카날전투 이후 일본군은 종전(終戰)까지 한번의 승리도 거두지 못했다. 지상전의 핵심역량이라 할 수 있는 탱크의 개발을 도외시한 게 결정적인 이유였다.

 

오로지맨몸으로도

탱크를 잡을 수 있다는

맹신에 빠졌다. 그 결과

일본군 수뇌부는 이후에도

적 탱크를 잡을 아군의 탱크를

개발하려는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경영사례

피플익스프레스 항공의 급부상과 빠른 몰락

 

1981 430, 피플익스프레스항공(People Express Airlines)이라는 신생 항공사가 뉴저지 주 뉴어크와 뉴욕 주 버펄로 간의 노선에서 첫 취항에 나섰다. 투입된 비행기는 구형 보잉 737기로서 독일의 루프트한자항공사로부터 인수한 것이었다. 이 항공사는 미국 의회가 1978년 항공산업에 대한 진입 및 요금 규제를 대폭 없애는 법안을 통과시킨 뒤 가장 먼저 생겨났다. 창업자인 돈 버는 지역 항공사인 텍사스인터내셔널항공(Texas International Airlines)의 최고경영진으로 일한 경력이 있었다. 당시 그는 텍사스인터내셔널항공의 오너이자 이사회 회장인 프랭크 로렌조와 함께땅콩 요금이라는 일종의 반값 요금제를 내놓아 크게 히트를 친 적이 있다. 돈 버는 여기서 더 나아가 요금을 획기적으로 낮출 수 있는 사업구상을 로렌조에게 제안했지만 이 아이디어는 묵살됐다. 이에 돈 버는 회사를 떠나 새로 창업에 나서 자신의 아이디어를 직접 구현하기로 결정하고 피플익스프레스항공을 만들었다.

 

피플익스프레스 비즈니스 모델의 핵심은 비용 절감과 효율 극대화를 통해 저가 운임으로도 이익을 남긴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1) 중고 비행기를 구입하거나 리스(lease)해 승객 수가 많은 단거리 노선에 시내버스처럼 자주 운행하고, 2) 직원들을 여러 임무에 투입할 수 있도록 훈련시켜 필요 인력을 최소화하되 항공기 정비 등은 외주로 돌려 고정비용을 절약하고, 3) 비행 중 제공되는 음료 등 무료 서비스는 최소화하거나 없앤다는 것이었다.

 

첫 취항 이후 피플익스프레스는 소위인민 특급이라는 말이 시사하듯 마치 사회주의 국가의 항공사처럼 승객들에게 항공 이외의 어떤 서비스도 무료로 제공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콜라 같은 소다류나 꿀땅콩 스낵에도 50센트의 돈을 받고 제공했다. 기내 반입이 가능한 크기의 가방 하나는 공짜였지만 이 사이즈를 넘어 화물칸으로 부치는 수하물에는 하나당 3달러의 가격을 매겼다. 또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컴퓨터 시스템에 투자하는 대신에 기내 승무원들이 승객들로부터 직접 탑승 운임을 징수하도록 했다. 이러한 철저한 비용절감 노력에 힘입어 이 항공사는 고객들에게서 최저의 운임만을 받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처음 취항한뉴어크-버펄로노선( 644)의 편도 운임은 23달러에 불과했다. 이는 같은 거리를 자동차를 타고 갈 때 드는 비용보다도 저렴한 것이었다.

 

저가 운임에 대한 고객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피플익스프레스는 곧 여러 도시로 취항노선을 확장하며 고속성장을 거듭했다. 1981년 말에는 이미 95만 명 이상의 승객이 이 항공사를 이용했다. 첫 취항에 나선 지 2년 여가 지난 1983 5 26일에는 드디어 국제선에도 취항하기 시작했다. 중고 보잉 747기 한 대를 리스해 뉴어크에서 런던까지 논스톱 운항을 시작한 것이다. 국제선인데도 불구하고 149달러라는 파격적인 항공 운임을 제시한 덕택에 취항 후 몇 달 동안 전 편이 계속 매진되는 호황을 누렸다. 여세를 몰아 피플익스프레스는 캐나다의 몬트리올과 벨기에의 부뤼셀에도 운항노선을 추가했다. 그 결과 1984년 이 회사의 매출액은 20억 달러를 돌파했다.

 

외형은 날로 커져갔지만 고속 성장과 함께 여러 문제 역시 자라고 있었다. 기존 항공사들이 저가 요금제를 앞다퉈 출시하면서 피플익스프레스의 경쟁우위를 위협하기 시작한 것은 오히려 작은 문제였다. 피플익스프레스는 승객과 노선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도 불구하고 전산 시스템에 전혀 투자하지 않고 오로지 전화로만 예약받는 시스템을 고집했다. 여행사들이 이 회사의 컴퓨터 망에 접속해 승객의 예약을 대행해 주는 건 아예 불가능한 구조였다. 이로 인해 뺏기는 잠재 고객의 수는 하루 6000명가량 되는 것으로 추산됐다. ‘오버부킹문제도 큰 걸림돌이었다. 승객이 이 항공사에 예약했다 약속을 어겨도 예약 시 알려준 신용카드 번호로 페널티를 부과하는 등의 불이익은 전혀 없었다. 이는 전산시스템도 없고 요금도 현장에서 직접 징수하다 보니 생긴 당연한 결과였다. 이에 따라 예약을 펑크 내는 승객의 수가 많아 비행 편마다 탑승 정원의 2배가량 정도 예약을 받는 게 관행이 돼 버렸다. 이로 인해 손님들이 예약을 취소하지 않고 다 몰려들면 승객 중 상당수는 예약하고도 비행기에 타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그 결과 피플익스프레스에는피플 디스트레스(People Distress)’라는 불명예스런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붙게 됐다. 신속한급행(express)’ 서비스가 아니라고통스런(distress)’ 경험만 안겨준다는 고객들의 비아냥이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였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피플익스프레스의 최고경영진도 방법을 모색했다. 1985 10월 이 회사는 자체적으로 전산 시스템을 새로 개발하는 대신 시스템을 갖춘 다른 항공사를 인수했다. 프런티어항공(Frontier Airlines)이라는 회사였다. 피플익스프레스 경영진은 프런티어항공의 시스템을 가져다 쓰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으로 믿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프런티어항공은 메이저 항공사처럼 소위풀 서비스항공사여서 피플익스프레스의 시스템과는 도무지 맞지가 않았다. 게다가 프런티어항공은 엄청난 부채를 지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피플익스프레스는 한때 1억 달러에 달했던 사내 유보금을 프런티어항공의 부채 및 이자를 갚는 데 써버렸다. 합병 이후에도 과거 프런티어항공이었던 부문에서 계속 큰 폭의 적자가 나는 통에 회사 전체의 수익성을 끌어내리는 역할을 했다.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면서 코너에 몰린 피플익스프레스의 경영진은 프런티어항공을 인수한 지 불과 1년이 되지 않아 1986 9월 회사 전체를 매각하기에 이른다. 공교롭게도 피플익스프레스를 인수한 회사는 돈 버의 옛 직장이었던 텍사스인터내셔널항공의 지주회사인 텍사스에어(Texas Air Corporation)였다. 옛 상사였던 프랭크 로렌조가 텍사스에어의 오너이자 CEO로 계속 남아 있었다.

 

피플익스프레스는 저가 운임을 가능케 한 기발한 구상을 실천에 옮기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항공사였다. 이 항공사의 저가 정책은 한때 기존 메이저 항공사들을 위협할 정도로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회사의 성장에 발맞춰 회사의 크기에 걸맞은 핵심역량을 키우는 노력을 게을리했다. 그 대가는 회사의 소멸이었다. 부상도 빨랐지만 첫 취항부터 불과 6년도 안 돼 사라질 만큼 몰락도 빨랐다.

 

 

김경원 디큐브시티 대표 alexkkim7@gmail.com

필자는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 주립대(매디슨)에서 경영학 석사, 컬럼비아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에서 금융연구실 실장, 글로벌연구실 실장, IMF T/F 팀장을, 삼성증권에서 리서치센터장을 각각 역임했다. 2009 CJ그룹 전략기획 총괄 부사장으로 부임해 전사 전략 및 M&A 전략 수립을 주도했다.

 

  • 김경원 김경원 | -(현) 디큐브시티 대표이사 겸 대성산업 수석 이코노미스트
    -(전) 삼성경제연구소 금융연구실장, 리서치센터 센터장
    -(전) 삼성경제연구소 전무, CJ그룹 전략기획총괄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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