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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렴 強國 만든 리콴유, 영원한 國父가 되다

신장섭 | 174호 (2015년 4월 Issue 1)

“내가 병상에 누워 있거나 묘지에 묻혀 있더라도 싱가포르에 뭔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껴지면 나는 벌떡 일어날 것이다.”

 

- 1988 89일 싱가포르 건국기념일 연설

 

 

싱가포르의 국부(國父) 리콴유가 싱가포르를 건국한 지 정확히 50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싱가포르 국민들의 마음에 영원히 남아 있다. 17년 전 건국기념일에서 얘기했던 것처럼 그는 지금 저승에서도 싱가포르가 잘돼가고 있는지 눈을 부릅뜨고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뭔가 잘못된다고 생각하면 저승을 뚫고 이승으로 돌아올 태세를 갖추고 있을 것이다.

 

싱가포르 사람들에게 리콴유는 무서우면서 존경하는 지도자였다. 아들 리셴룽 총리와 크게 대비된다. 리셴룽은 큰 눈에 서글서글한 인상이다. 얘기하는 것도 부드럽다. 그러나 리콴유는 눈도 작고 날카롭게 얘기한다. 젊었을 때 연설하는 장면들을 보면 가슴을 섬뜩하게 하는 것들도 있다. 자신은 여론조사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강한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것과 두려워하는 것 중에서 선택하라면 나는 마키아벨리가 옳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나는 의미가 없어진다.”

 

리콴유의 카리스마는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해내고, 말레이시아 연방에 합류하고, 연방에서 쫓겨난 뒤 아무 것도 없던 조그만 섬나라를 미국보다 1인당 국민소득이 높은 선진국으로 키워낸 가장 큰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목표를 달성하고자 하는 불굴의 의지, 상황을 타개해 나가는 유연한 정치행보, ‘깨끗한 정부와 기업가정신의 결합 등은 리콴유만이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래서 지금 싱가포르의 경쟁력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사진: 로이터 뉴스

 

“호랑이의 등을 타고

싱가포르국립대의 전신인 라플즈대를 우등으로 졸업한 리콴유는 2차 세계대전으로 학업이 중단된 뒤 전후 영국으로 건너가 케임브리지대 법학부를 수석으로 졸업했다. 리콴유는 영국에서 취직할 수 있었지만 싱가포르를 독립시키겠다는 꿈을 안고 1949년에 돌아와 노동조합 변호사로 정치 활동을 시작한다.

 

당시는 영국이 싱가포르를 독립시켜 주지 않고 영국인이 이끄는 괴뢰 정당을 만들어 형식적인 민주주의를 실행하고 있을 때였다. 독립운동을 가장 강력하게 벌이던 세력은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영국인이 이끄는 정당인 노동전선(Labor Front)은 부정부패로 싱가포르인들의 공분(公憤)을 사고 있었다. 리콴유는민중행동당(People’s Action Party)’이라는 중도좌파 정당을 만들어 일단 공산주의자들과 연합전선을 폈다.

 

리콴유는 독립을 쟁취하는 데 성공하고 소수파라는 약점을 극복하며 1959년 싱가포르 초대 수상에 취임한다. 조 여(Joe Yeoh)가 싱가포르 건국 과정에 대해 쓴 책에는 <호랑이 길들이기(To Tame a Tiger)>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리콴유가 호랑이의 등을 타고 영국인과 싸우는 그림이 표지로 들어가 있다. 여기에서 호랑이는 공산주의자들이다. 리콴유는 독립을 얻어내자마자 냉전상황을 이용해서 영국과 미국의 힘을 빌려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했다. 재판도 거치지 않고 연금시켰다. 중공으로 가겠다는 사람들은 중공으로 보내줬다.

 

 

 

 

총리가 된 리콴유에게 가장 시급한 과제는 싱가포르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수입대체 공업화가 경제개발의 경전(經典)처럼 받아들여지던 때였다. 국제경쟁력이 떨어지는 후진국들은 보호장벽을 쌓고 내수시장을 활용해서 공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구 200만 명에도 못 미치던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내수시장이라고 할 것이 없었다. 대신 인구가 제법 되고 자원도 풍부한 말레이시아(당시는 말라야)와 합치면 경제발전을 제대로 할 수 있었다. 한편 인도네시아에는 수카르노의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 있었고 보루네오 섬에서 인도네시아군과 영국군 간에 치열한 게릴라전이 전개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냉전 상황에서 자본주의의 보루를 지키기 위해 말레이시아 연방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변국들을 종용하고 있었다.

 

리콴유는 싱가포르 국민들을 설득해서 1963년 싱가포르를 말레이시아 연방에 합류시킨다. 리콴유에게는 단순히 경제발전을 넘어 정치적 야심도 있었다. 정치가 리콴유에게 싱가포르는 너무나 작은 나라였다. 말레이시아라는 큰 나라를 이끄는 정치지도자가 되고 싶은 큰 꿈을 키웠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보루네오 섬의 사바(Saba)와 사라왁(Sarawak)에는 화교 인구가 많았다. 이들까지 말레이시아 연방에 합류하면 표 대결을 하더라도 중국계가 이끄는 PAP가 말레이시아 연방의 최대 정당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말레이시아 연방 합류는 2년도 되지 않아 비극으로 끝난다. 화교와 말레이인들 간에 인종 분규가 벌어지고 유혈사태로까지 치달았다. 특히 말레이인들의 불만이 컸다. 비록 경제권력은 화교에게 내주고 있었지만 정치권력은 자신들이 잡고 있었기 때문에 자존심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싱가포르와 연방이 되면서 정치권력까지 화교에게 내줄 가능성이 생겨나자 말레이인들의 불안감이 높아지고 인종분규가 곳곳에서 벌어졌다.

 

말레이시아 연방 초대 총리 퉁쿠 압둘 라만(Tunku Abdul Rahman)은 리콴유를 불러탈락, 탈락, 탈락(Talak, Talak, Talak)”이라고 말했다. 말레이 회교도들이 자신의 부인에게 이혼을 선언할 때에 하는 말이다. 집을 나가라는 것이다. 리콴유는 기자회견을 하며평생 나는 싱가포르와 말레이의 통합을 믿어왔다고 말한 뒤 눈물을 닦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1965 89일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서 축출됐고 제2의 건국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3세계국가에서1세계국가로

싱가포르에는 이제 혼자 살아가는 길밖에 남지 않았다. 리콴유는 동료들과 고민을 거듭했다. 그 결과를 리콴유는 자서전에서 아래와 같이 밝힌다.

 

“점차적으로 나는 우리의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양면 전략(two-pronged strategy)을 구상하게 됐다. 첫번째는 이스라엘이 했던 것처럼 우리 지역을 건너 뛰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은 아랍국가들에 둘러싸여 우리가 처한 것보다 더 적대적인 상황에서 유럽이나 미국과 교역을 하면서 활로를 찾았다. 우리도 인접국들이 우리와의 연계를 줄이려고 하는 상황에서는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과 연계해서 그들의 제조업체들을 싱가포르로 끌어들여 그들의 제품을 선진국에 수출해야 했다.… 두 번째는 제3세계 지역에 제1세계 오아시스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주변국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공공과 민간의 안전, 건강, 교육, 통신, 교통이나 서비스를 제1세계 수준으로 제공하면 동남아 지역에서 사업을 하려는 기업가, 엔지니어, 경영인, 기타 전문가들이 싱가포르를 베이스 캠프로 활용할 것이다.” (Lee Kuan Yew (2000) 75-76)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 연방에 있을 때에는 수입 대체 공업화가 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불가능해졌다. 싱가포르 국내에 자본가라고 할 만한 세력도 거의 없었다. 다국적 기업들을 끌어들여 경제를 발전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싱가포르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대안이었다. 리콴유가 처음부터 싱가포르의 성장전략이 성공하리라는 확신을 갖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영국 식민지시대부터 동남아 지역의 교통 및 무역의 허브(Hub)로 기능해왔고 영어를 할 수 있는 상당수 인구가 있기 때문에 이를 경제발전에 활용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여기에 덧붙여 다국적 기업들을 많이 끌어오면 국가안보에 도움이 되리라는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다.

 

리콴유의 다국적 기업 유치전략은 다행히 그 이후 진행된 세계적 조류와 잘 맞아 떨어졌다. 기업사가들에게 1960년대는 다국적 기업의도약기(take-off period)’. 그 후 다국적 기업들은 전 세계로 빠르게 확장했다. 그전에는기업 내 무역(Intra-firm trade)’이라고 하는 것이 거의 없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세계무역에서 기업 내 무역이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로 다국적 기업의 세계적 생산망과 판매망이 세계 경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이러한 세계화의 바람을 일찍 타면서 경제기적을 일구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경제개발 전략 논쟁에서 싱가포르 방식의 다국적 기업 투자유치를 통한 경제발전이 오히려 주류(主流)의 자리를 차지했다. 1960년대에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던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한 세대가 지난 뒤 경제개발 전략에서도 혁신국가가 됐다고 할 수 있다.

 

 

 

 

1960년대에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갔던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는 한 세대가 지난 뒤

경제개발 전략에서도 혁신국가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깨끗한 정부와 혁신적 기업가정신의 결합

리콴유가 싱가포르를 발전시키는 데에 가장 크게 관심을 기울인 것은깨끗한 정부’, 그러면서 능력 있는 정부를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리콴유는 처음 정권을 잡고 총리에 취임할 때에 다른 PAP 각료들과 함께 하얀색 셔츠와 하얀색 바지를 입었다. 청렴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영국 통치하에서 각종 부정부패에 신물이 난 국민들에게 새로운 정부에 대한 확신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나 다른 주변 동남아국가들과 차별화된다는 자부심을 심어주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

 

공무원들이 청렴하면서도 국가를 위해 열심히 뛰게 만들기 위해 리콴유는당근과 채찍의 양면 정책을 썼다. 리콴유는 공무원들의 월급을 대폭 올렸다. 능력 있는 인재들을 민간 부문에 빼앗기지 않고 정부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그래서 싱가포르 고급 공무원들은 현재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연봉을 받는다. 현재 리셴룽 총리의 연봉은 200만 싱가포르달러( 16억 원)가 넘는다. 공무원들이 너무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비판에 따라 3분의 1 이상을 삭감했는데도 세계 정치지도자 중 최고 연봉이다. 차관급만 돼도 연봉이 100만 달러( 8억 원)가량 된다. 아주 유망한 관료는 30대 초반에 30만 달러( 24000만 원)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놨다. 공무원들 입장에서 보면 열심히 일해서 월급만 잘 저축해도 평생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으니 부정부패를 할 필요가 없어진 셈이다. 이 때문에 유능한 인재들이 정부에 머물렀고 정부의 경쟁력도 유지됐다.

 

반면 부정부패에 대해서는 엄벌로 다스렸다. 총리 직속으로 있는 부패행위조사국(CPIB)은 어느 나라의 기관보다 광범위한 권한을 갖고 있다. 한국은 장차관 정도로 거명돼야지 재산형성내역에 대한 검증을 받지만 싱가포르에서는 모든 공직자들이 CPIB로부터 문의가 들어왔을 때 보유 재산의 형성 내역을 밝혀야 한다. 해명하지 못하는 재산은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것으로 간주한다.

 

무엇보다도 리콴유 본인이 부정부패를 추호도 용납하지 않았다. 1984년 당시 국가개발부(Ministry of National Development, 한국의 건설부에 해당)의 테칭완 장관이 건설업체들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정보가 CPIB에 포착됐다.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테칭완은 CPIB 고위관료에게 자신의 죄를조정(bargain)’하려고 했고 리콴유에게 따로 만나자는 연락을 보냈다. 리콴유는조사가 끝날 때까지 만날 수 없다고 응답했다.

 

일주일 뒤 테칭완은 자살했다. 리콴유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남겼다. “총리 각하.… 저는 이 불행한 사건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명예를 중시하는 동양의 신사로서 저는 제가 한 잘못에 대해 최대의 벌칙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싱가포르의 기적은 싱가포르 정부가 만든 기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싱가포르 공무원들은 기업인들처럼 움직인다. 외국인 투자가들을 위해원스톱 서비스(One-stop service)’ 체제를 처음 만든 곳도 싱가포르다. 중앙은행인 싱가포르통화청(MAS)은 금융감독 및 정책 기능을 뛰어넘어 투자은행, 헤지펀드, 연기금 등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뛰어다니며 비즈니스를 한다. 리콴유도 은퇴한 뒤 아들 리셴룽 총리와 함께 중국을 방문해서 싱가포르가 홍콩에 준하는 위안화 역외거래센터가 될 수 있는 자격을 얻어냈다. 싱가포르가 국제금융센터로 발전하는 데에는 정부의 결집된 역량이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

 

리콴유는싱가포르와 같은 젊은 나라에게는 한 가지 방향으로의 기회밖에 없다. 그것은 사다리를 타고 계속 올라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리콴유는 평생 싱가포르를 선진화시키는 외길을 걸었다. 선진화된 싱가포르가 앞으로 번영의 길을 어떻게 더 지속할지는 후대 지도자들 손에 달려 있다.

 

 

신장섭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

필자는 한국의 현대 경제사를 연구하는 경제학자다. 케임브리지대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기획재정부 장관 자문관, 매일경제신문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 <금융전쟁> <김우중과의 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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