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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문화

‘선택과 집중’ 패러다임 버리고 신뢰사회로 대변혁을

김광기 | 172호 (2015년 3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국내외에서 거대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고 대한민국호는 위태로운 상황이다.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대한민국이 환골탈태하려면 일부 그룹에만 예측가능성이 확보된확신사회가 아닌 모든 이들에게 예측가능한신뢰사회가 만들어져야 한다. 또 창조적 인간을 키울 수 있는 그릇을 만들어야 하며 특정 그룹을 집중 지원하는선택과 집중패러다임도 바꿔야 한다. 부의 형평성 문제에도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하다.

 

 

 

끝나지 않은 미국발() 금융위기

2008년 미국 월가에서 불거진 금융위기는 가히 세계적인 위기의 시발이었다. 그 위기의 화염이 진작에 진화됐다고 믿는 이들이 있다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는 청맹과니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은 전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양적완화 정책 덕분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막대한 유동성은 서민들을 위한 경제로 파고들지 못했고 부의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실제 미국 중산층 이하의 삶은 2008년 이후 나아지지 않았고 통화량 증가로 인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서민들의 삶은 더 궁핍해졌다. 유럽의 채무위기는 어느 순간엔가 사람들의 관심 영역에서 사라진 듯하지만 유로존이 세계 금융시장에 거대한 쓰나미를 몰고 올 확률은 여전히 존재한다. 이런 상황에서 대한민국은 저출산 및 노령인구 증가, 막대한 부채, 대책 없는 복지 정책 등 내부적 문제를 안고 있다. 이런 안팎의 쓰나미에 대비해 한국 사회는 어떤 해법을 찾아야 할까. 무엇보다 지금까지 우리가 관행으로 여겨왔던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한다. 그것들과 이별을 고하고 새로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지고 심기일전해 만반의 준비를 해야 실낱같은 희망의 빛을 발견할 수 있다. 환골탈태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사회문화적 측면에서 대한민국이 어떻게 환골탈태를 해야만 하는지를 제시해본다.

 

신뢰사회를 구축하라

신뢰는 사회를 이루는 기본이다. 이는 사회학의 대가들이 누누이 강조해 온 사회학의 기본이다. 이를테면 뒤르켐(Emile Durkheim)이나 슈츠(Alfred Schutz) 같은 사회학자들은 비록 가장 원시적인 형태의 사회에서도 구성원들이 신뢰를 가지고 있어야 그 사회가 존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뒤르켐은 그것을 종교에 빗대어 설명했다. 조금 쉽게 이야기하면 종교를 구성하는 두 개의 쌍두마차 중 한 대는 신앙(faith)이고, 다른 한 대는 제사(ritual)로서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문제가 생기면 종교는 존립할 수 없다고 뒤르켐은 주장했다. 뒤르켐이 분석의 대상으로 삼은 종교는 곧바로 사회로 대체할 수 있다. 그에게 있어 종교와 사회는 모두 사람들의 묶인 상태를 말한다. 종교에서 신앙에 해당하는 것은 사회에서는 신뢰이고, 종교에서 제사에 해당하는 것은 사회에서는 행위와 등치된다.

 

알기 쉽게 설명해 보자. 어느 한 사람이 지금 취업을 위해 면접을 치르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면접이라는 상황은 면접관이나 피면접자 어느 한쪽으로만 이뤄지지 않는,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공동의 집합체다. 즉 사회인 셈이다. 그 사회는 어떻게 일시적으로나마 가능할까? 그곳에 참여한 구성원(여기서는 면접관과 피면접자를 의미한다) 간의 신뢰와 행위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라고 뒤르켐은 설명한다. 여기서 신뢰는 피면접관이 면접관에게 자신이 지닌 강점을 알리되 다분히 예의바르게 행동할 것이란 믿음을 갖고 그 장면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느 참여자나 불시에 상대방에게 칼이나 총으로 위협을 당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면접 상황에 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애초에 그 면접 상황, 즉 면접이라고 하는 사회는 이뤄지지 않는다. 또 그런 믿음만으로 면접이라는 사회는 존립할 수 없다. 그런 신뢰나 믿음, 그리고 가정하에 실제로 면접자와 피면접자가 바로 그 특정 장소에 나타나고 또 질문하고 답하는 등의 실제적 행위(practical activities)가 있어야 면접이라는 사회가 발생한다. 뒤르켐이 말한 신앙과 제사(종교), 그리고 신뢰와 행위(사회)는 바로 이런 식으로 풀이된다. 뒤르켐보다 약간 후대 학자인 슈츠가 이야기하는 사회의자연적 태도(natrual attitude)’라는 것도 쉽게 풀이하면 특정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인들의가정을 의미하기에 우리가 여기서 짚고 있는 사회의신뢰와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왜 신뢰는 사회의 존립에 그토록 필수불가결한 것일까. 그것은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예측가능성(predictability)’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사회는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으로 이뤄지는데 그 상호작용이 임의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이미 짜여진 유형(pattern)들이 존재한다. 그 유형들을 통해 행위가 상호적으로 발생할 때 사람들은 편안함을 느끼게 되는데 이는 예측가능성이 담보되기 때문이다. 예측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불안감을 느낀다. 처음 만난 남녀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들은 생면부지의 사람들이지만 서로 어찌 행동해야 할지 이미 숙지하고 있다. 만일 서로가 마음에 든다면 남자는 여자에게 애프터 신청을 할 것이고 여자는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여기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통용되는 유형들이 존재한다. 이를테면 남자가 여자에게 꽃이나 선물을 준다는 것 등이다.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날이 시퍼런 식칼을 선물하면서 애프터 신청을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약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그들은 그날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 채 집으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사회구성원들은 아무리 처음 대하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과 상호작용에 돌입할 때 어느 정도의 예측가능성을 갖고 그 만남에 임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신뢰다. 그래서 지구상의 어떤 사회든 가리지 않고 그곳엔 신뢰가 개입돼 있다.

 

학연·지연·혈연 등으로 자동 부여된 확신으로 인해

특정인들에게만 예측가능한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신뢰가 형성된 사회에서만

비로소 특정 집단의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이들에게 예측가능한 사회가 구축될 수 있다.

 

 

 

 

 

두 가지 신뢰: 확신(confidence)과 신뢰(trust)

대한민국에 필요한 것은 기존에 있던 그런 종류의 신뢰가 아니다. 완전히 생소한 종류의 신뢰가 요구된다. 앞서 신뢰의 기능 중 하나로예측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런데 대한민국에 필요한 예측가능성은 바로모든 이들에게라는 전제가 붙는다. 이제까지 우리 사회는모든 이들이 아닌특정의 어떤 이들에게만예측가능한 사회였다. 특히 학연·지연·혈연으로 엮인, 이른바그들만의 리그내의 구성원들에게만 예측가능한 사회였던 것이다. 이런 예측가능성과 신뢰는 지금 대한민국에 필요한 신뢰가 아니다.

 

사회학자 애덤 셀리그먼(Adam Seligman)은 이와 관련해 매우 유용한 구분을 했다. 그는 신뢰를 두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확신(confidence)’이고 다른 하나는신뢰(trust)’. 확신은 동질적인 구성원들로 이뤄진 사회에서 보이는 신뢰이며 매우 공고하다. 사회 구성원들이 그것이 공고하다고 여기는 이유는 바로 그들이 태어나면서부터, 혹은 한 집단에 들어서면서부터 거의 자동적으로 그 확신의 수혜자이자 공여자가 되기 때문이다. 이런 확신상태에서는 설사 구성원이 큰 잘못을 해도 그를 바로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않는다. 인내의 한계를 넘어서기 전까지는 구성원에 대한 관용이 법의 지배를 앞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공고하다는 것이다. 반면 셀리그먼이 이야기하는 신뢰는 이질적인 구성원들로 이뤄진 사회에서 목도되는 것으로 매우 부서지기 쉽다. 믿을 것이 없는 곳에서 일단 믿고 시작하되 만일 상대방이 그 믿음을 깨면 그에게 부여했던 신뢰를 가차 없이 회수한다. 신뢰를 깨는 행위는 그것이 미미한 것이라 해도 사회생활의 종말을 고하는 서막임을 모든 사회 성원들이 인식하고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법의 지배가 관용을 앞선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갈 것은 이런 신뢰를 기반으로 한 사회에서 관용은 특정 집단의 구성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넘어선 모든 이들에게 공평하게 베풀어진다는 점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셀리그먼이 말한 신뢰는 애초에 어떠한 예측가능성도 불가능한 곳에서 싹튼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확신이 주는 예측가능성까지도 와해된 그런 곳(즉 신뢰의 황무지)에서 진정한 신뢰가 싹틀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신뢰가 제로상태인 곳에서라도 사람들끼리 교분을 맺기 위해서는 일단 상대방을 아무 근거 없이 믿고 시작해야만 그 관계가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에 필요한 신뢰는 바로 이런 종류의 신뢰다. 확신의 사회가 흔들리고, 심지어 와해돼야 진정한 신뢰가 확보될 수 있다. 즉 학연·지연·혈연 등으로 자동 부여된 확신으로 인해 특정인들에게만 예측가능한 사회가 무너지고 새로운 신뢰가 형성된 사회에서만 비로소 특정 집단의 사람들만이 아닌 모든 이들에게 예측가능한 사회가 구축될 수 있다.

 

신뢰를 다루는 많은 사회학자들이 한국 사회를 비롯해 동양 사회를저신뢰 사회로 묘사하는 것은 바로 이들 사회가 신뢰보다는 확신이 지배하기 때문이다. 확신은 소규모 집단에서는 탁월하게 기능할지 모르나 규모가 커지고 이질적인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판이 커지면 역기능이 나타난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이질성이 커졌지만 여전히 확신의 위력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중요한 인사 채용이나 인사 이동 시 동원되는 학연·지연·혈연 관행이 그 증거다. 한국에서 학벌이 중시되는 진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 사회에서 학벌은 실력보다 그 학벌을 통해 일종의멤버십을 얻어야 일이 쉽게 풀릴 것이란 판단에서 나온 문화적 상징이다. 확신의 단순한 수혜자로서 무임승차하는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는 이들이 사라지고 모든 이들(즉 낯선 이들, 필자는 이를이방인이라고 부른다)을 아우르는 신뢰 사회가 되지 않는다면 우리에겐 희망이 없다. ‘고신뢰 사회가 된다는 것은 곧 모든 이가 더 외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지구상의 모든 이방인은 외롭기 때문이다. 이방인에겐 학연·지연·혈연 등의 방패막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들을 모두 벗어 던진 채 광야에 홀로 선 단독자다. 그런 이방인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가져야 진정한 신뢰사회가 구축될 수 있다.

 

 

 

창조적 인간형을 허()하라

두 번째로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창조적 인간의 탄생이다. 우리는 막연하게나마 이제창조라는 개념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했다. 하지만창조적 인간이 하루아침에 탄생할 수는 없다. 특히 현재와 같은 시스템에서는 창조적 인간의 출현을 기대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목표는 제대로 잡았다. 앞으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창조적 인간이며 그들이 구성해낼 창조적 사회다.

 

지금까지는 창조적 인간과 창조 경제 없이도 사회가 잘 유지됐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우리는 선진국을 답습하고 모방하고 재생산하면서도 충분히 몸집을 키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창조적 인간보다는 말 잘 들으며 성실하고 싫은 내색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만을 완수하는 인물들이 유용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우리나라 기업이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기 위해서는 창조성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창조적 인간을 배출할 수 있는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야하는데 그 환경이 바로 앞서 말한 신뢰사회다. 창조적 인간형의 탄생을 위해서도 신뢰사회로의 모드 전환이 급선무다.

 

이에 대해 언급하기 전에 우선창조적 인간형이란 무엇인지부터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미국의 사회학자 토마스(William I. Thomas)의 분석에 귀기울일 만하다. 토마스는 인간을 행위 면에서 창조적 인간형(creative man), 속물형(Philistine), 방랑자형(bohemian) 등 세 가지로 구분했다. 속물형은 과거로부터 내려오는 모든 전통과 관행의 단순한 답습자이며 순응자다. 방랑자형은 속물형과 완전한 대척점에 서 있는 인간형이다. 어떠한 전통도 거부하며 그렇다고 자신만의 어떤 전통도 결코 만들려 들지 않는, 그야말로 조변석개의 달인으로 그의 별명은불안정이다. 토마스가 가장 이상적인 인간형으로 간주했던 것이 나머지 하나인 창조적 인간형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창조적 인간은 새로운 환경에 혁신적으로 대처하는 사람이다. 혁신과 전통을 적절하게 버무릴 줄 알고 새로운 길을 모색한다.

 

지금처럼 매일 학원에서 대학입시 문제만 풀어대는 학생들이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한창조적 인간의 탄생은 기대할 수 없다. 기계식 학습의 귀재를 뽑는 대학이 사라져야 한다. 나아가 학력 파괴가 선행돼야 한다. 기업은 고용 및 승진, 그리고 임금에서 학력 차별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 대학을 나와도 특별히 도움이 안 된다는 신념이 국민들의 뇌리에 박히면 확신의 울타리 속에서 달콤한 꿀을 향유하려는 시도가 좌절될 것이다. 이미 세상은 확신의 울타리에 안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그런데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확신의 세계에 미련을 둔다면 그것은 몸집은 훌쩍 커버렸지만 끝까지 배냇저고리를 고집하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이다.

 

국가주도적 발전 모델의 한계

지금까지 대한민국은 일류 기업과 일류 대학들을 키우기 위해 노력했다. 일류 반열에 끼지 못하는 기업과 대학은 홀대했다. 이런 상황이 계속돼서는 안 된다. 그들이 일류가 된 데는 성실성이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해방 후 폐허 속에서 생존을 위해 국가가 택했던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의 최대 수혜자였기 때문에 일류가 됐던 측면도 있다. 마치 한 가정의 장남을 집중적으로 교육시켜 집안을 일으키려 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이 일어서기 위해 이를 악물고 국가가 특정 기업과 대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에 이들이 현재의 위치를 점유하게 된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사회학에선 이를국가주도적 발전(the developmental state)’이라 부른다. 필자는 이것을장남 밀어주기로 달리 부르고 싶다.

 

 

확실히 장남 밀어주기가 통하던 시절이 있었지만 이제 그런 시절은 끝났다. 장남 하나 출세시키려고 온 가족이 허리띠를 졸라매고 온갖 희생을 감내하면서 살던 시대가 지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장남이 출세를 할 수 있는 시대도 아니고, 설사 그렇게 됐다고 해도 출세한 장남이 나머지 가족을 다 부양하기도 어렵다. 장남 밀어주기로 인한 폐해도 무시할 수 없다. 비유적으로 표현하면 식구들의 희생 덕분에 장남이 출세하고서는 나머지 가족들을 나 몰라라 외면한 것이다.

 

 

 

이런 현상으로 인한 폐해 중 하나로 우선 승자독식 현상을 꼽을 수 있다. 이런 현상이 만연하면 모든 이들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승자되기에 혈안이 될 뿐 합법적 절차나 과정이 무시될 수 있다. 올림픽에 나가 은메달이나 동메달 딴 것도 참으로 훌륭한데, 그리고 그것을 얻기 위해 그들이 흘린 땀이나 시간이 너무나 값진 것인데 우리는 오직 금메달만 바라보고 금메달만 따야 치켜세워준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교양시민이 될 양식을 쌓는 데 충분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과정이 대학을 가기 위한 전 단계로만 인식된다.

 

또 다른 폐해는 경쟁에서 진 패자들에게 기회를 다시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패자부활전이 없다는 것이 장남 밀어주기의 폐해다. 신뢰 사회가 아닌 확신으로 이뤄진 사회에서그들만의 리그입성까지만 죽어라 애를 쓸 뿐 입성하고 나서는 실력을 더 이상 키우지 않고 나태와 태만이 팽배해질 수 있다. 지금의 세상은 어느 순간 승자는 있을지언정영원한 승자는 결코 없다. 영원한 승자가 없는 세상에서 한곳에 무턱대고올인하는 것은 위험을 키우는 일이다. 지금은 국가가 일부 기업을 밀어줘서 몸집을 키울 수 있는 시대가 아니다. 대학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유명 대학 졸업장만 가지고 인생의 승부를 거는 시대는 끝났다. 심각한 청년실업률이 이를 여실히 증명해 준다. 현재 우리나라의 교육 문제는 부동산 문제, 사교육 문제, 저출산 문제, 국토의 불균형 발전 문제 등은 모두 특정 대학에 목매는 현 세태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다. 장남 밀어주기 관행을 과감하게 끊어야 희망이 있다.

 

부의 형평성 문제에 더 관심을

부의 형평성 문제에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앞서 지적했던 승자독식, 그리고 패자부활전과 깊은 관련이 있다. 조직이 일부 자원만 활용해서 이익을 극대화할 수 없는 것처럼 국가 차원에서도 일부 계층만 활용해서는 안 된다. 국가 전체의 인력풀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다. 이미 어떤 경쟁에서 뒤처진 사람들에게 눈길을 더 줘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새로운 잠재력과 재능을 발견할 수 있고 그것이 부가가치 창출에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은 짧은 기간에 성장에만 치중하다 보니 많은 혜택을 차지한 계층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제는 보다 광범위한 사람들에게 눈을 돌려야 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묻지마 성장만큼이나묻지마 분배도 큰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해법을 찾는 것이 관건이며, 그 해법을 도모할 때 반드시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지금처럼 정치권이 표를 의식해 정책을 수립하면 한순간에 국가 전체기 위기에 처할 수 있다.

 

김광기 경북대 일반사회교육과 교수 ingan1113@hanmail.net

필자는 성균관대 사회학과를 나와 보스턴대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전공은 사회학이론이다. 저서로는 <우리가 아는 미국은 없다> <정신 차려 대한민국> <이방인의 사회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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