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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 전투의 교훈

기술맹신의 시대, 현실 외면한 전술 탁상 위 매뉴얼이 병사를 죽였다

남보람 |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전략

1·2차 격전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솜(Somme)전투는 1차 세계대전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꼽힌다. 장교단은 과학과 이성의 발전을 맹신하고 낙관했으며 프러시아의 두 차례의 철도를 이용한 전투승리 방식을 따와 전략을 만들었다. 역사상 최초의대전략을 만들고 급격하게 시행했지만 세부적인 작전과 전투운용에서는 예전의 교리를 그대로 답습했다. 맹목적벤치마킹과 이성과 과학에 대한 맹신과 낙관, 그리고인간이 빠진 전략은 처절한 실패로 기록됐다. 오늘날 기업이 이 전투로부터 얻어야 하는 교훈이다. 

 

필자 주

이 글은 <전쟁이론과 군사교리(서울 : 지문당, 남보람, 2011)>의 일부, ‘군사교리 중심 접근법에 의한 전쟁사 연구를 참조해 재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렬로 진군하는 프랑스군

 

1차 세계대전 최악의 비극: (Somme) 전투1

1916 71일 오전 730.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수백 명의 소대장들은 일제히 호루라기를 불었다. 사전 브리핑에서 공유한 계획대로였다. 영국 제3, 4군의 병사들은 일제히 참호에서 나와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정렬을 마친 영국군은 독일군이 방어하고 있는 곳을 향해 그들의 교범에 적힌 대로 똑바로 선 채 서서히 전진해 나갔다. 영국군의 공격 교리 그대로였다. 영국군 제4군의 <사단 공격훈련을 위한 전투 전술>에는공격부대는 일정한 속도로 줄지어 전진해야 하며 각 열은 선행 열에 새로운 추진력을 공급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이 무모한 공격 정신의 유래는 프랑스였다. 영국군이 스스로 공격 교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15년부터다. 그 이전까지 영국군은 프랑스의 교리를 가져다 거의 그대로 썼다. 1년 만에 모든 교리가 바뀔 순 없었다. 프랑스군의 교리는 말 그대로 공격 그 자체였다. 프랑스의 포슈(Ferdinand Foch) 장군은전쟁을 한다는 것은 항상 공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 공격은 정말로 무모했다. 도대체 영국군 장교들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영국군은 공격 개시 전에 실시된 강력한 포병사격에 의해 독일군의 전투력이 대부분 상실될 것이라 판단했다. 무인지경이 된 평지를 진격해 상대방의 진지를 차지하고 나면 공격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일군은 연합국 군대보다 현실적이고 균형 잡힌 군사교리로 무장하고 있었다. 특히 전투의 현장에 있는 지휘자들에게 큰 융통성과 독립성을 보장함으로써 변화하는 상황과 위협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2 또한 독일군은 전쟁 수행 전 반드시 야전축성이나 참호구축과 같은 실전 훈련을 평소에 실시하고 있었다.3

 

따라서 연합국 군대가 공격전에 거의 300만 발의 포탄을 독일군 참호 위에 퍼부었지만 독일군은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9m가 넘는 깊이의 대피호 속에서 거의완벽하게보호받고 있었다.4 독일군은 영국군의 포격이 후방으로 넘어가자 일제히 준비된 참호로 나와 새로 전장에 배치된 기관총을 참호 위에 올려놓은 채 거의 망가지지 않은 철조망 지대로 영국군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군의 기관총 한 정에 1개 중대 병력이 괴멸(壞滅)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하지만 영국군은 공격 전술을 바꾸거나 상황을 타개할 만한 새로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결과는 끔찍한 대학살이었다. 공격 첫날 영국군 제29사단 선봉의 중대들은 공격개시선에서 50m도 전진하지 못하고 붕괴됐다. 피해는 계속해서 커져갔다. 전쟁지도 체계의 궤멸(潰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난국을 타개할 전환적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범에 쓰인 대로 더 많은 부대를 더 빨리 투입하는 것이 전쟁 지휘부의 유일한 결정이었다.

 

이것이 솜 전투에서만의 상황이었을까? 1914 11, 영국 원정군 7개 사단의 사상자는 9만 명에 달했다. 동원된 병력의 100%를 초과한 수치였다.5 전장에서 장병들이 사망하는 속도가 본국으로부터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는 그것을 앞질렀다는 얘기다. 사상자는 줄지 않고 계속 늘어갔다. 그러나 전쟁과 관련된 어떤 의미 있는 결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1917년 영국군의 하루 평균 희생자는 2500명에 달했다.6

 

후일, 프랑스 총사령관을 지낸 조프르(Joseph Joffre) 장군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문서화된 어떤 작전 계획도 없었다. (…) 단호한 결심 외에 어떤 사전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7

 

물론 연합국 군대는 당대에 유행하던 방식의 정밀한 전쟁 계획을 갖추고 있었다. 온갖 직선과 곡선, 거리와 시간과 고도를 검고 푸르고 붉은 색으로 표현한 복잡한 작전 계획이 있었다. 조프르 장군이어떤 계획도, 어떤 사전 계획도 없었다고 한 것이 문자 그대로 아무 계획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적 위협에 대한 잘못된 가정과 낙관적인 전제들, 전장 환경에 부합하지 않는 부적절한 군사교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표현이었다.

 

 

동시성, 표준성, 균질성에 대한 신화

1880년경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 과학기술과 문화 전반에 큰 변화가 있었다. 유럽 문물 전반이 최고조에 달한 이 풍요로운 시기를벨 에포크(belle epoque·좋았던 시절)’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전 세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시간과 공간을 인식하고 경험하기 시작했고 일상에서 사상에 이르는 모든 것은 이전과 뚜렷이 구분됐다.8

 

이 시대의 차별적 현상을 간명하게 정리한다면동시성(simultaneity)의 확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자통신, 철도와 같은 새로운 기술의 확산이 현재(the present time), 속도, 형태, 거리에 대한 서구사회의 관념을 완전히 바꿔 놓았기 때문이다.9

 

전쟁도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그 무엇이 될 것으로 기대됐다. 실제로 동시성 개념에 기반한 전쟁·전투의 새로운 아이디어와 개념이 쏟아져 나와 전쟁 수행 방식과 군사작전 활동에 다양한 변화가 있었다. 1870년대 프러시아는 병력 동원과 부대 이동을 위한 철도 시간표 작성을 장교 교육의 핵심 과목으로 편성했다. 1890년 독일의 몰트케는 군사적 목적을 위해 세계표준시를 도입할 것을 강력히 주장했다. 1914년의 전장에서는 시간을 맞춘 손목시계를 전투시작 전에 나눠줬다.10 모두 혁신적 시도였으며 당대로서는 이채로운 광경이었다.

 

말하자면 제1차 세계대전은 동시성을 핵심 개념으로 삼은 새로운 전쟁 계획의 실험장이었다. 장교들은 전자통신, 철도와 같은 새로운 기술과 수단의 등장으로 시공간을 통제하는 것이 이전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대규모의 병력 동원, 전선으로의 신속한 부대 이동, 전 정면에서의 동시공격 등 이전에는 실현될 가능성이 없었던 양상의 전쟁수행이 가능할 것으로 봤다.

 

솜 전투 당시 참호를 나와 진격하고 있는 영국군

 

상대국의 국경선을 따라 대규모 부대를 동원해 배치하고 동시에 진격시키는 전쟁 수행 방식은 단 한 번도 시도된 적이 없었다. 이러한 전쟁을 계획하는 데에는 어마어마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뚜렷한 적의 위협이 없는 한가한 때에전쟁 계획을 고안해뒀다가 가능성이 현실로 됐을 때 꺼내 쓰는새롭고 혁신적인 방법이 창안됐다.11 유럽 국가들은 인구 수를 바탕으로 가용한 전투력을 시기별, 지역별로 어렵게 도출해낸 후 동원 계획과 부대이동 계획을 산출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동일 시간대에 전투가 벌어질 장소를 연결한 일련의 진출선을 지도 위에 표기하는 초기 형태의 전쟁 계획을 하나둘 발전시켜 나갔다. 1904년경에는 모든 유럽의 군대들이 유사한 형태의 전쟁 계획을 보유하게 됐고 앞서 기술한 새로운 전쟁 계획과 수행 방식이 유럽의 군사적 사고를 지배하게 됐다.12

 

새로운 전쟁 계획의 신봉자들은 전쟁의 영역에도 자연법칙과 같은 과학성이 적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분적으로는 당대 계몽주의 사조의 영향이었다. 그들은 지도 위에 그려진 각종 선과 부대기호, 사이사이에 기입된 시간들을 보면서 전쟁 계획자들은 이번에야말로 불확실성의 공간이었던 전장을 인간 이성이 통제 가능한 공간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 봤을 것이다. 물론, 이는 자연법칙을 잘못 이해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군대와 전쟁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하는 소치(所致)였다.

 

말 그대로이상주의낙관이 지배했다. 현실과의 간극은 고려되지 않았다. 기술의 발전과 무언가 새로워 보이는 개념들에 들뜬 전쟁 계획자들은 제1차 세계대전의 준비와 계획, 실행 과정에서사람의 요소를 제거하고 대신 동시성, 균질성, 표준성 같은 세련된 용어를 채워 넣기 시작했다.그들은 땀, , 살점, 울부짖음, 욕설, 증오와 같이 대면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지도 위의 전쟁계획으로 덮어 버렸다. ‘보이지 않는 적, 땅속에 숨어야 하는 상황, 복잡한 다층구조를 지닌 방어체제, 귓전을 강타하는 포화소리, 밤과 낮이 바뀌고 또 바뀌면서 누적되는 피로와 같은 새로운 전쟁의 양상은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13 동시에 공격, 정신, 투쟁심과 같은 선동적인 구호를 군사교리에 집어넣음으로써 저항과 의구심을 교조적으로 차단하는 노련함도 보였다.

 

솜 전투의 참극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두 나라 모두 산업발전 수준, 경제력이 독일에 비해 훨씬 뛰어났고 당대 최강의 병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솜 전투 당시 참호에서 대기 중인 영국군

 

솜 전투 참극의 원인

장교단의 신념에 찬 기대에도 불구하고 실제 전장에서 관측된 것은 동시성, 균질성, 표준성과 같은 질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정반대의 현상인 과거와 현재의 혼재, 계획과 실제의 혼란, 대규모의 학살과 비극 같은 것들이 동시에 사방에서 터져나와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지속됐다. 1차 세계대전 시기 팽배하던 기술에 대한 맹신, 현실과의 간극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 솜 전투. 그 참극의 원인을 여기에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 전장 환경에 대한 낙관적 오판과 의사결정의 경직성14

솜 전투에서 영국군은 독일군이 기관총을 쏴대는 건너편 어딘가를 향해 쓰러진 아군을 밟고 넘어 계속 전진했다. 포격 계획은 빈틈없이 짜인 시간표에 의해 보병의 진격 속도나 교전 상황과는 무관하게 최초 계획된 순서대로 할당된 포탄을 지정된 곳에 쏴 넣을 뿐이었다.15 병사들은 전진하는 기계였다.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순서가 되면 먼저 쓰러진 동료들이 쌓여 있는 벌판으로 나갔다. 전장 환경에 대한 지휘부와 현장 지휘관들의 낙관적인 오판의 대가는 너무나 컸다. 1916 71일 하루에만 영국군 장병 19240명이 전사하고 35493명이 부상을 입었다. 솜 전투가 끝났을 때 영국군 사상자는 42만 명에 달했다. 그리고 그 대가로 종심 10㎞ 남짓의 펄밭을 얻었다.

 

솜 전투 당시의 프랑스 지도

 

1914년 전쟁의 발발 이후 사람들은 차차 연합국 군대와 동맹국 군대가 중요한 공통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양측의 전쟁 계획이 모두 승리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전 후에는 전쟁이 종료될 때까지 그 계획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공통점도 깨닫게 됐다.

 

키건은 솜 전투를 참극으로 만든 것은장교들의 미리 결정하려는 사고방식, 명령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태도등이었다고 단언했다. , 당시의 군부 지도층은 책상 위에서 면밀하게 짠 전투계획에 만족해 하면서 미래를 예측하고 지배하려고 했다. 이와 같은상당히 독특한 미래감각이 아래와 같은 작전계획에 그대로 반영됐다는 것이다. 몽고메리 장군은 또한 당시의 장교들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기관총과 철조망, 참호와 대포에서 비롯되는 엄청난 방어력에 대해 장군들이 내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결론은 그저 공격한다는 것뿐이었다.”16

 

한편 전전기(戰前期) 유럽 각국의 군대가 전쟁 계획의 작성과 같은 새로운 전쟁 수행 방식을 받아들인 규모와 속도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부분이 있다. 키건은 새로운 전쟁 계획과 수행 방식이곧 유럽의 군사적 사고를 지배하게 됐다고 적고 있다.17 실제, 1904년경에는 유럽의 대다수 군대들이 유사한 형태의 전쟁 계획을 보유하고 있었다.18 어떻게 전통과 자존심을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던 당대의 장교단 문화 속에서 그와 같이 급격하고 일률적인 변화가 가능했던 것일까. 변화가 절실히 필요할 때에도 항상 이를 꺼리는 것이 변하지 않는 조직 문화의 특성인데도 말이다.19

 

가장 단순한 추론은 이 같은 급격한 변화에 대해서 군 내부로부터의 저항이 그다지 크지 않았으리라는 것이다. 전쟁 발발 직전, 당대 전자통신이나 철도가 이룬 사회 전반에 걸친 변화에 장교단은 크게 고무됐다. 게다가 1870년 프러시아는 이미 잘 짜인철도 시간표를 활용해 프랑스에 대승을 거둔 바 있었다. 새로운 경험과 그럴듯해 보이는 전훈(lesson-learned)은 역시나 막 발달하기 시작한 전자통신, 철도를 통해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이 묶여서 장교단 내부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국가 지도자에서 상인 집단에 이르는 다양한 행위자들을 설득하는 지루하고 고단한 작업을 대신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유럽 주요 국가의 장교단은 제1차 세계대전과 관련된 전쟁 계획과 전쟁 수행 방식의 교조적인 변화에 무비판적인 수용 태도를 보이고 동조했다.20 물론 개중에는 풀러(J.F.C. Fuller)처럼 현재의 전쟁 수행 방식, 군사교리 등이 잘못된 것임을 과감히 지적하는 이도 있었다. 풀러는 징계를 받았다.21

 

2) 군사교리 적용의민첩성적절성부재

군사교리가 만일 정치적 환경이나 적의 능력, 또는 유용한 군사기술 등의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국제정치의 경쟁적이고 역동적인 환경에 맞춰 적절히 혁신적이지 못하다면 국가의 안보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전쟁이 발발한다면 그와 같은 교리는 패전을 낳는 요인이 된다.

- 베리포센(Barry R. Posen)

 

사실 이 글에서 분석하고 있는 솜 전투의 참극은 영국군과 프랑스군에게는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두 나라 모두 산업발전 수준, 경제력이 독일에 비해 훨씬 뛰어났고 당대 최강의 병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투입된 병력 수도 두 배였다.

 

22  

솜 전투가 끝나고 난 후 양측의 전사상자는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연합국 측이 623000여 명, 독일 측이 465000명이었다. 연합국 측은 압도적인 병력과 포병화력을 쏟아부었음에도 더 많은 사상자를 냈다. 실은 당대의 전투양상이라는 것은 병력 대 병력의 11 싸움에서 누가 더 많은 포병화력을 보유하고 있느냐로 결정되는 것이었다. 즉 솜 전투에서 연합국과 독일군의 대결 양상은 축구에서 11명의 선수가 다 참가한 팀과 6명의 선수만이 참가한 팀의 경기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합국은 독일보다 거의 16만 명 더 많은 손실을 입은 것이다. 전투의 목표달성이라는 측면을 놓고 보자면 양측 모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지지부진한 무승부지만 전투에서 입은 피해의 정도를 놓고 본다면 명확히 영국과 프랑스의 패배다. 장교단은 전쟁 와중에 발생한 변화에 재빠르게 대응하지 못했다. 환경과 위협이 변화했을 때 장교에게 필요한 덕목은 융통성과 기민함인데 이런 것은 쉽게 길러지는 역량이 아니었다. 현장 판단에 의한 부대지휘는 평소 부단한 훈련이 있어야 가능한데 연합국 군대는 그런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그런 종류의 훈련을 안내할 적절한 군사교리조차 없었다.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양측이 취한 초기 조치는 단지 더 많은 병력을 더 빨리 전장에 투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양측은 발달한 철강, 전기, 화학공업 기술 등을 적용한 신무기를 전장에 쏟아냈다. 기관총, 탱크, U보트, 전투기, 대형 곡사포, 독가스 등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처음 선보이거나 본격적으로 사용됐다. 그러나 이러한 물리적 요소들은 전황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저 양측의 사상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많아질 뿐이었다.

 

기술이나 물리적 수단이 전장에서의 우열을 좌우하는 데 결정적인 요소라면 솜 전투는 영국군이 전장에 탱크 47대를 몰고 온 순간 큰 변화가 나타났어야 했다. 그러나 다른 신형 무기, 장비류 등과 마찬가지로 탱크 역시 양측의 사상자를 늘리는 데 약간 기여했을 뿐이다. 많은 군사학자와 전쟁사학자들은 이러한 점에 주목해왔다. 바로 전쟁에서의 기술과 물리력의 한계다. 실제 상대를 압도하는 새로운 기술과 배가된 물리력에 의해 승패가 결정된 전쟁은 인류 역사에 손꼽을 정도로 드물다. 새로운 기술 등은 실전 투입을 통해 실제 위력과 가능성을 검증받는 과정을 필요로 하기 마련이고 적들은 그동안 그에 대응할 수단과 방법을 고안해내어 새로운 기술을 무위로 돌리려 노력해왔다.

 

무엇보다 탱크의 투입 등이 전황에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 이유는 영국군을 비롯한 연합국 군대가 이를 적절히 운용할 군사교리를 갖추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탱크가 전장에 투입되던 초기, 이들은 기관총 부대에 배속돼 운용됐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탱크 부대의 운용이 느슨한 형태일지라도 전격전과 흡사한 군사교리에 의해 인도됐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전쟁의 결과는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영국군의 탱크 사례와는 반대로 느슨한 형태로나마 존재하던 군사교리가 전황에 큰 영향을 미친 사례도 있다. 그것은 바로 종심방어(defense in depth)23  의 등장이다. 종심방어의 유래에 대한 논의는 칸네 전투(Battle of Cannae)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현대적 의미의 종심방어는 솜 전투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1916년 독일 제2군의 로스버그(Fritz von Lossberg) 장군은 영국군의 공격에 의해 전선이 지휘통제의 범위를 벗어나자 예하 대대로 하여금 현 전선을 내어주고 후방의 적절한 장소에서 진지를 새로이 강화할 것을 지시했다.24  이것이 종심방어의 초기 형태였다. 이후 독일군은 종심방어 교리를 더 체계화하고 이를 당대의 새로운 군사과학 기술(철조망, 참호, 기관총, 독가스 등)들과 조합해 승수 효과를 창출했다.

 

초기의 종심방어는 완전한 교리적 형태를 갖추지 못한 개념 수준의 지시에 의해 시행됐다. 그 효과는 상상했던 것 이상이었다. 용처를 찾지 못하고 산발적인 교전의 일진일퇴 정도에만 영향력을 미치던 신기술과 무기들은 적절한 군사교리를 만나자마자 작전과 전쟁 전반의 그림을 다시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종심방어는 곧 제1차 세계대전의 지배적인 전쟁 수행 방식이 됐다.

 

전사(戰史)는 기술, 무기와 같은 물리력이 전쟁의 승패에 영향을 미치려면 반드시 전격전, 기동전, 공지전(AirLand Battle), 네트워크 중심전(Network Centric Warfare)과 같은 군사교리에 의해 운용이 통제돼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군사교리를 착안해 성안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힘든 작업이다. 영국군은 탱크를 개발해 전장에 투입할 기술과 자본이 있었다. 그러나 이를 적절한 군사교리에 결합하지는 못했다. 솜 전투에 최초 투입한 47대의 탱크는 9대만이 귀환했다. 반면 독일군은 종심방어와 신기술을 연계해 전술적으로 큰 이득을 봤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전시에 탄생한 전쟁 수행 방식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혁신적인 개념이라 한들 평시 준비돼온 것이 아닌 만큼 전세를 역전시키거나 전쟁을 조기 종식시킨 것은 아니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엄청난 피해를 강요한 전진공격 위주의 부적절한 군사교리들은 끝내 수정되지 않았다. 연합국과 동맹국 어느 누구도 전쟁기간 내내 전세를 역전시킬 만한 작전을 시행하지 못했다. 솜 전투에서의 양측 합계 사상자는 130만 명이 넘었으나 연합군 측은 펄 지대를 따라 12㎞ 전진했을 뿐이며 전투를 종결시킨 것은 어느 누구도 아닌 1916 1118일 내린 폭설이었다.

 

독일군의 상황: 복잡성의 증대

 

 

유리한 기회가 왔을 때 독일군도 완벽한 승리를 잡아내지 못했다. 슐리펜 계획은 1차적 전술에서는 승기를 잡도록 해줬지만대전략의 차원에서는 실패했다. 1차 세계대전 역시 패배했다. 물론 여기에는 독일의 기본적인 산업력과 경제력이 연합국에 비해 부족했던 점이 큰 원인으로 꼽힌다. 이 글의 목적은 영국과 프랑스군의 오류를 통해 현대 조직에 주는 교훈과 시사점을 찾는 것이지만 독일군과 독일의 패배의 원인 역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독일의 전쟁 계획자들 역시 전쟁에 대한 피상적이고 잘못된 이해를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적어도 연합국 군대의 장교들보다는 전투 행위를 실체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독일이 특히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불리한 환경과 다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승리를 가져다줄, 기계적 엄격함(strictness)을 갖춘 전쟁 계획의 작성이었다. 독일의 전쟁 계획자들은 시간을 기준으로 모든 부대가 있는 곳과 어떤 부대가 있어야 할 곳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그 구분법에 입각해 이후의 예상되는 모든 전투과정을 시간순으로 짜깁기하려 했다.

 

슐리펜(Alfred Graf von Schlieffen)은 이 거대한 전쟁 계획을 1913 14일 죽기 전까지도 계속 수정했다.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한 것은 참모총장직에 오른 1891년부터다. 그는 탁자에 펼쳐진 지도를 때론 잠도 자지 않은 채 쳐다보면서 전쟁 계획을 만들어 나갔다. 1904년 영국과 프랑스가 우호협약(Entente Cordiale)을 맺게 되자 이에 위협을 느낀 독일 황제 빌헬름 2(Friedrich Wilhelm)는 슐리펜에게 프랑스와 러시아 국경 양 전역에서의 동시 개전을 상정한 전쟁 계획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그리하여 1905 12슐리펜 계획이란 이름으로 대프랑스, 대러시아 양면 전쟁의 계획이 수립됐다. 슐리펜은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선을 긋고 그림을 그려가며 부대를 이곳저곳에 배치하기를 수없이 반복했고 이를 물려받은 몰트케(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가 거기에 10년을 더했다.

 

결과적으로 슐리펜 계획은 실패했다. 그 원인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분분하지만 대체로 다음의 두 가지 의견에 근본적으로 수렴한다.

 

첫째, 영국의 저명학 전쟁사학자 리델 하트(B. H. Liddell Hart)의 것인데 그는 슐리펜 계획의 실패 원인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슐리펜 계획이 실패한 원인은 계획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계획이 전제하는 다른 군사적인 능력을 당대에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만약 한 세대 후에 전쟁이 발발했더라면 이 계획은 성공했을 것이다. 만약 항공전력으로 적의 우회 기동을 저지할 능력이 있었더라면 전쟁의 향방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물론 기계화된 전력이 보편화돼 속도와 템포를 중심으로 한 고속기동이 가능했더라도 이 계획은 성공했을 것이다. 하지만 당대에는 그런 군사과학기술이 막 개발단계에 있었을 뿐이고 그런 이유로 슐리펜 계획 역시 전쟁을 성공으로 이끌지 못한 것이다.

 

 , 계획 자체의 큰 틀은 유효했으나 당대의 군사과학기술이나 전력 등이 계획을 뒷받침해주지 못했다는 의미다. 물론 특정 계획이라는 것은 현실성 있는 능력에 의해 실행이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슐리펜 계획이 상정한 전쟁의 시점은 그것이 거의 완성된 1910년대 초반이 아니라 적어도 10년 후를 내다본 것으로 슐리펜 자신도 유럽 전역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최초의 세계 전쟁이 그렇게 빨리 벌어지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두 번째 의견은 기존의 연구와 슐리펜 계획 자체의 의의를 뒤집는 것이어서 흥미롭다. 데이비드 프롬킨(David Fromkin)이나 데이비드 스티븐슨(David Stevenson)과 같은 1차 대전 연구자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슐리펜이 전쟁 계획을 작성했을 때 그것은 실제의 전쟁을 위한 계획은 아니었다. 그는 그것이 전쟁을 계획하는 사고과정으로 참고되기를 바랐고 실제의 구성도 하나의 전쟁 연습처럼 돼 있다. 실제 슐리펜 계획을 자세히 분석해보면 그것은 작전과 관련된 일련의 수행절차라기보다는 개념적 계획을 명시한 것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지시하는 작전명령도 없다. 게다가 슐리펜 계획의 성공을 위해 슐리펜이 상정한 독일군 사단의 숫자와 철도의 이용 계획은 현실과는 너무 동떨어진 것이었다.

 

말하자면 독일은 구체적으로 발전하고 보완된 실제의 전쟁 계획이 아니라 슐리펜이 개념적으로 작성한 전체적인 밑그림만을 가지고 전쟁판에 뛰어든 것이다. 이러한 의견도 설득력이 있기는 하다. 오늘날 전쟁을 위한 계획 작성과 작전 계획의 준비는 군대에 매우 보편적인 것이지만 1차 대전 당시 이러한 분야는 막 보급되기 시작한 생소한 작업이었다.

 

슐리펜 계획의 두 가지의 오류는 현대 기업 조직과 전략에도 시사하는 점이 많다. 최고위 경영진은 여전히 완벽한 위기대응 시나리오와 경쟁전략을 실전에 도입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시나리오와 전략은 그것이 실행되기 전에는 그저 하나의 종잇장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최고위 경영진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의 아이디어나 전략을 실행할 능력이 현재 혹은 가까운 미래에 구비될 것인가를 세세히 살필 수 있는 균형감각이다. 게다가 불확실한 시장 경쟁 상황에서 언제 어떤 상황이 얼마간의 기간 동안 벌어질지, 업종의 불황이나 전 세계적인 경제 위기 등이 언제 발발해 얼마간 지속될지는 쉽게 예측하거나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따라서 겉보기에 좋아 보이는 시나리오와 전략을 갖추어 놓고 마치 그것이 이미 실행될 것처럼 간주하지 않고 항상 능력과 가능성을 구별할 줄 아는 자세가 중요하다 하겠다.

 

또한 최고위 경영진이나 외국에서 최신의 아이디어, 이론을 기업의 경영에 도입하고자 할 때의 유의점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슐리펜 계획이 하나의 사고 연습, 전쟁 기획을 위한 절차라고 했을 때 그것을 잘 활용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그것을 그대로 현실의 전장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도구로 사용해 현실적으로 실행 가능한 액션플랜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요즘 몇몇 기업 내부를 들여다보면 외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각종 이론과 도구를 기업 내에 적용하면 금세라도 조직의 운영 효율이 높아지고 곧장 이익 창출로 연결될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아무리 좋은 재료라도 그것을 올바른 곳에 사용하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또 아무리 좋은 재료라 하더라도 내가 할 일에는 필요치 않은 것이 있다. 그러므로 최신의 아이디어와 이론을 찾아 돌파구를 마련하려 하기보다는 기업의 특성과 현황에 맞는 것을 잘 활용하는 것이 더 낫다고 할 것이다.

 

다시 한번 당대 최고의 전략가였던 슐리펜의 생각을 들여다보자. 그는 왜 시간의 영역을 무리하게 통제하려 했을까? 전사 연구의 대가이며 훗날 전격전(Blitzkrieg)과 기동전(Maneuver Warfare)의 이론화에 영감을 제공하기도 한 슐리펜의 연속된 무리수는 전자통신, 철도 등 기술이 가져다줄 동시성에 대한 과도한, 그리고 검증되지 않은 기대 때문이었다. 존 키건(John Desmond Patrick Keegan)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는 덧붙이기를 ‘20세기 초 유럽 군대의 어떤 정교한 장비도 그러한 편의를 제공하지 못했다면서1차 세계대전을 통틀어 통신이란 교전과 동시에 끊기기 일쑤인 전화와 전신이 전부였다고 적고 있다. 빅데이터와 모바일 기술의 발달, ‘연결된 세계(connected world)’의 도래로 뛰어난 경영진 역시 100년 전 슐리펜이 빠졌던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첨단 기술이 가져다주는동시성을 맹신하며 과도한 기대를 하는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얘기다.

 

한편 당시 전쟁 계획의 엄숙한 비밀주의(solemn secret)는 이러한 오류들이 수정될 여지를 원천봉쇄했다. 슐리펜 계획 등은 가장 엄격한 군사 기밀로 취급돼 이를 수립한 자신들만이 그 내용을 알고 있었다. 국가 지도자라 할지라도 정확한 내용은 알 수 없었는데 심지어 군 내부에서도 서로 비밀로 했다. 따라서 책상 위에서 수립돼 전쟁발발 직전까지 서랍 속에 보관되던 당시의 전쟁 계획은 검증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계획에 의해 전쟁 준비가 제대로 이행되고 있는지 확인할 검증 시스템도 없었다. 오늘날의 전투실험, 워게임(war-game)과 유사한 형태의 참모 실험, 전쟁게임(kriegsspiel)이 당대 독일군에 존재하긴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시나리오를 수학적으로 발전시키는 데에 사용됐을 뿐 실현 가능 여부, 이행 정도를 검증하는 기능은 포함돼 있지 않았다.

 

이는 경영에서의전략을 최고위 경영진끼리만 공유하면서밖으로 새어나가면 큰일 날 수 있는 것으로 치부하는 몇몇 기업들의 오류를 바로잡을 수 있는 교훈을 준다. 세부적인 작전은 비밀이 중요하겠지만 전체적인 전략의 틀은 군대에서나, 기업 조직에서나 조직원들이 공유하고 이해하고 있어야 중간중간 잘못된 점이나 예상치 못한 문제를 바로잡고 조직원들이 체화해 실행할 수 있다. 전쟁을 수행하는 군대나, 경쟁을 펼치는 기업이나 이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다.

 

 

솜 전투에 최초로 등장한 탱크

 

솜 전투 참극으로부터 기업이 얻어야 할 교훈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과 오늘날의 상황은 많은 부분에서 접점을 가지고 있다. 기술 발전과 유용성에 대한 확신,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미래적 사고와 관념에 대한 열광, 넘쳐나는 성공에 대한 확신과 계획, 매뉴얼의 기계성은 놀랍도록 유사한 맥락을 가지고 있다. 특히 영국이 프랑스의 공격 교리를 성찰 없이 받아들여 결국 독일군의 기관총 사격을 향해 횡대로 전진하는 대목은 섬뜩할 정도다.

 

1) 무분별한벤치마킹의 위험성

우리 사회가 롤모델로 삼고 있는 미국을 위시한 서구 선발국가의 여러 미담사례들은 기술의 우위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그 기술을 운용하는 사회적 제도의 우수성에 기반하는 바가 크다. 한 국가의 사회적 제도들은 해당 국가, 사회의 특정한 신념 체계와 가치관의 산물이다. 그런데 오늘날 지구상의 많은 국가들은 미국을 위시한 선발국가의 제도들을 가져다가 쓰고 있다. 각종 조직과 조직 활동의 기초가 되는 매뉴얼은 거의 표절 아니면 번역서 수준이다. 매뉴얼이라는 것이 쉽게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서 스스로 잘 만드는 데 드는 비용보다 잘 만들어진 것을 가져다 쓰는 편이 훨씬 더 싸기 때문이다. 또 성안에 소요된 시간과 노력, 검증의 비용과 시행 과정에서 발생한 시행착오를 건너뛸 수도 있다. 프러시아가 처음 도입했던철도시간표에 따른 병력동원과 이동방식은 삽시간에 다른 국가의 군대들에 매뉴얼 그대로 도입됐다. 그 결과 솜 전투를 비롯한 1차 세계대전에서는 굳이 발생하지 않아도 될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

 

기업이라고 다를 게 없다. 아니, 오히려 성공하는 기업의 모델을 연구해 벤치마킹하는 것이 비일비재한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오랜 시간 특정기업이 성공의 조건으로 만들어온제도와 문화를 간과해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스스로 잘 만드는 것이 어려운 만큼이나 따라 하는 것도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얘기다.25 기업 구성원들의 문화와 관습, 가치관이 명백히 다른 만큼 문서화된 타 기업의 제도나 매뉴얼을 분석해 이리저리 어울리게 뜯어고친들 완벽히 그것을 이해하고 실행하기 어렵다.

 

더군다나 제도나 조직 매뉴얼의 모방은 잘 따라 했을 때의 이득보다 잘못 따라 했을 때의 손실이 더 크다. 본론의 솜 전투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해당 국가와 군대에 맞지 않는 군사교리는 그 국가의 안보에 피해를 주고 전쟁이 발발한다면 패전을 낳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2) 첨단 기법에 대한 맹신: ‘인간이 빠져 있는 전략

솜 전투를 수행하던 장교들은 1차 세계대전 당시 유럽의 철도와 통신기술 발달로 나타난동시성개념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뿐만이 아니다. 기호학과 수학의 발달, 각종 첨단기법의 도입으로 전쟁 계획자들은불확실성의 공간인 전장이 이제 과학적 법칙에 따라 설명될 수 있고 예측할 수 있는 곳이라 여기기 시작했다. 인구 수를 계산해 가용한 전투력을 도출하는 완벽한 (그렇다고 믿었던) 수식은 정작 각각의 전투를 직접 수행하는인간을 고려하지 못했다. 첨단기법에 대한 맹신, 이상주의, 낙관이 가져온 문제였다. 이는 현대의 기업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술과 자원은 결국인적 자원에 의해 운용된다. 빅데이터를 활용한 마케팅과 고객관리, 첨단 정보시스템에 의한 각종 인사관리와 생산관리 역시 아무리 치밀하게 계획을 짜고 실행하더라도 이를 실제 추진하고 실행하는 직원들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는 실패하게 된다.

 

 

효율성을 강조하기 위해 정형화해 짜 놓은 전략이 보이지 않는 자원인 개개인의 역량과 네트워크와 맞지 않을 때에는 유연성이 급격히 떨어지고 최초의 구성한 전략과의 적합성(fit)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그럴 때에도 오직 기업 스스로 구상했던핵심 역량에 집착하는 순간 이는 곧핵심 경직성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1차 세계대전의 각종 전투에서 드러난매뉴얼의 유연성 부재문제와 연결된다.

 

지금처럼 경영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물적 자원과 기법의 늪에 빠지는 순간, 유연성은 급격히 떨어진다. 오직 그들이 짜놨던 부대 편성과 작전 매뉴얼에 매몰돼 있다가 탱크부대마저 활용하지 못했던 솜 전투의 사례가 주는 교훈이다.

 

‘어떤 전쟁에서 누가 이겼느냐고 묻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지진에서 누가 이겼냐고 묻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자조 섞인 격언도 있다. 1차 대전이야 말로 누가 승자인지 가리기 어려운 처절하고 허무한 대지진과 같은 것이었다.

 

나가며

어떤 국가든 간에승리가 가능하고 그것에 비용을 댈 가치가 있다고 확신할 때 전쟁을 시작한다. 이것이 역사의 불변의 진리라고 많은 이들이 말한다.26 그러나 그 확신이 전쟁에 승리를 가져다준 적은 과연 몇 번이나 있었는지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본문과 후반부의 솜 전투 분석을 통해서 1차 세계대전이 어떻게, 그리고 왜 파국을 향해 치달았는지 살펴봤다. 유럽의 국가들이 산업 경제에 기반한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신기술의 창출로 벨 에포크를 꿈꿀 때 그들의 현실 감각은 이미 마비돼 있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동시성의 확산에 기여한 기술의 발전이 가져올 결과에 대한 신뢰는 거의 신앙적이었다. 군대도 당연히 시대상의 영향을 받았다. 유럽의 장교단은 전장의 통제가 더 용이해짐으로써 예로부터 장군들이 염원해오던전장의 질서가 탄생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번에야말로 서양 군대가 추구해왔던 일련의 규칙과 시행 세칙의 체계가 혼란스럽고 본능적인 행동들을 질서 정연하고 합리적인 행위로 인도할 것이라고 기대했다.27

 

그러나 기술의 발전은 인명 살상의 치열도를 가공할 정도로 증가시킨 것 외에 다른 곳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도리어 솜 전투를 위시한 주요 전역·전투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넘쳐나는 기술, 전술, 전략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국가와 그 군대들의 모습이었다. 키건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군대들이브레이크 없는 전술과 전략의 실행을 통제하지 못한 채 거꾸로 속절없이 끌려갔다고 쓰고 있다. 국가들은 그저 모든 국력을 전장에 쏟아 넣기에 바빴다. 전쟁이 끝나갈 무렵에는 유럽 전체의 인적 자원이 다 바닥났다. 그리고 어쩌면 그 단순하고 공포스러운 이유로 전쟁이 끝났다.

 

전쟁사 연구자들이 하는 일 중 하나는 전훈(lesson-learn)의 추출이다. 이렇게 100년 전 지구 반대편에서 벌어졌던 전쟁으로부터 오늘날 현대전의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교훈을 추려내는 것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러한 작업에 대한 의문도 없지 않다. ‘어떤 전쟁에서 누가 이겼느냐를 물어보는 것은 샌프란시스코 지진에서 누가 이겼냐고 물어보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자조 섞인 격언도 있다. 1차 세계대전이야 말로 누가 승자인지를 가리기 어려울 만큼 처절하고 허무한 대지진과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전 세계적인 공포와 상흔이 아물기도 전에 제2차 세계대전이 연이어 발발했다. 이에 대해 역사가 마이클 하워드(Michael E. Howard)도대체 어떻게 그 엄청난 전쟁을 경험한 뒤에 이것이 가능했단 말인가라고 반문하기까지 했다. 그는역사는 우리에게 교훈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역사 그 자체는 교훈을 얻기 위해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주장했다. 인류사 속의 전쟁들을 평생 연구한 그로서는 과연 인간이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기는 할까, 얻을 수는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법하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학자 조셉 나이(Joseph S. Nye Jr.)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으로 계획을 세우고 머릿속으로 미래의 여러 그림들을 검토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100년이 지났지만 우리가 여전히 이를 연구해야 하는 숙명적인 이유다.

 

 

남보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자료연구분석장교(소령) elzycamp@gmail.com

필자는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자료연구분석장교.

2012년 미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 파견연구원, 2013년 워싱턴 D.C. 미 육군군사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교환연구원으로 한미 관계 연방정부 기록물의 비밀해제 협상 및 국내 입수를 담당했다. 미 합동참모대학(JFSC) 합동작전 과정을 수료하고 국방대학교 군사전략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정치외교학 박사 학위 과정에 있다.

 

 

  • 남보람 남보람 | -(현)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세계전쟁사 연구원
    -2011~201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연구원
    -2012 워싱턴 미국립문서관리청 파견연구원
    -2013 워싱턴 미 육군군사연구소 교환연구원
    -2016 뉴욕 유엔아카이브 파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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