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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nterview: 크리스토퍼 맥케나 옥스퍼드대 사이드경영대학원 교수

환상적 기술에 대량생산 실현··· 전쟁의 과잉연구가 전후 기업의 젖줄

고승연 |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전략, 인문학

 1차 세계대전이라는 글로벌한 전쟁은 오히려세계화의 쇠퇴를 가져왔다. 애국주의 속에 각 국가별 경제발전과 경쟁이 이뤄졌고 중산층이 폭발했다. 군대에서 개발됐던 수많은 첨단기술들은 애초 개발되던 때와 전혀 다른 용도로 민간에서 활용됐고 상품화됐다. 기회를 잡은 기업은 성공했고, 변화를 감지하지 못한 기업은 쇠락했다. 삼성, LG 같은 한국의 대기업들은 많은 돈을 들여서 기술을 개발한다. 1차 대전, 2차 대전 당시 각국 군대가 기술개발에 투자한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 기술을 어떻게 유용한 용도로 쓸지 더 잘 궁리할 수 있는 건 대기업 외부의 주체들이다. 대기업이 훌륭한 기술을 개발하지만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용도를 그 기업 혼자서 찾아내기는 힘들다. 따라서 대기업이 많은 자원을 들여 개발한 기술을 외부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이를 지렛대 삼아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1차 대전이 한국 경영계에 주는 교훈이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종희(단국대 경영학과 4학년) 씨와 장은빈(연세대 사회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인 1914 628, 오전 1050. 사라예보에서 울린 총성이 1차 세계대전이라는 비극의 서막을 알렸다. 진정한 의미의 20세기는 이렇게총성비극으로 시작됐다. 비극은 또한 엄청난 아이러니를 낳았다. 귀족과 평민은 사라졌고 여성들은 사회로 쏟아져 나왔다. 산업이 발전했고 각 국가별로 국부가 커졌으며 평등은 확산됐다.

 

전쟁에 동원된 평민 노동계급 남성들은기관총 앞에서의 평등을 맛보았고 자신들의 피의 대가로 보통평등선거권을 얻어냈다. 전장으로 떠난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들이 공장으로 들어갔고 목소리를 높일 기회를 얻었다. 대규모로 기업이 동원된 최초의 전쟁은 기업들을 바꿔놓았다. 호치키스는 기관총을 공급했고, 쿨만, 생 고뱅, 알레에 카마르크(현 알루미늄 제조업체 페시네의 전신) 같은 민간 기업들이 국영병기창과 화약제조창에서 생산된 것만큼 많은 화약과 폭약, 군용가스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브레게·이스파노수이자·파르만·코드롱·부아쟁 같은 항공기업체들도, 르노·들라주·푸조·베를리에 같은 자동차 제조사들도 결정적인 도약을 했다.1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만들어진 각종 조직이론과 인사관리기법, 물류와 생산 효율화 방식은기업의 혁신을 만들어냈다. 전쟁이 만든 애국주의는애국적 대중소비국가 간 경제 전쟁을 통한 세계 전체 경제의 시너지를 형성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가장 큰 전쟁(Great War)’은 엄청난 사상자를 낸 비극적 사건이면서 동시에 전 세계에 충격적인 변화를 유발한 동인이기도 하다.

 

100년이 지났다. 기술발전과 세계화, 초연결 시대의 도래, 파괴적 비즈니스 모델 등장 등으로 영원히 성장하고 번영할 것 같았던 많은 기업들이 위기를 맞고 있다. 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맞는 우리가 다시 그성찰과 지혜의 샘앞에서 스스로를 돌아볼 때다.

 

DBR 1차 세계대전 100주년을 맞아 영국 옥스퍼드대 사이드경영대학원에서 기업사(business history)를 가르치는 크리스토퍼 맥케나(Christopher Mckenna) 교수를 전화로 인터뷰했다. 미국 앰허스트대에서 경제학을 공부하고 존스홉킨스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맥케나 교수는 2000년부터 옥스퍼드대에서 주로 MBA EMBA 학생들을 가르쳐왔으며 2010년엔 경영 컨설팅 산업의 역사를 다룬 저서를 펴내기도 했다. 그는 옥스퍼드대 Novak Druce Centre for Professional Service Firms의 디렉터직도 맡고 있다.

 

 

크리스토퍼 맥케나 옥스퍼드대 사이드 경영대학원 교수

 

1차 세계대전 후 100년이 지났다. 그 전쟁이 인류에게 준 가장 큰 영향은 어떤 것이었나.

여러 견해가 있지만 내가 생각하는 결정적인 영향은 세계화의 쇠퇴였다. 10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우리는 그때의 세계화 수준, 세계의 통합수준을 회복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세계적으로 통합적인 경제 체제가 유지되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이 끝난 뒤에는 결코 그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지 않았다. 최근 십수 년간 세계화가 급격히 재부상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대표적인 예로금본위제얘기를 해보자.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국가 간 외환거래가 아주 쉬웠다. 모두가 화폐가치를 금에 고정시켜 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쟁 이후에는 변동환율제가 도입되며 각국 통화의 상대적 가치가 중구난방이 됐다. 이렇게 1차 세계대전이 세계화의 수준을 쇠퇴시키자 나타난 건 바로 국수주의였다. 곳곳에서 애국주의와 민족주의가 발호했다.

 

내가 살고 있는 영국 입장에서 보면 한 가지 더 있다. 전쟁에서 영국인들 전 세대가 고르게 엄청난 수가 죽어나갔다는 사실 때문에 영국 국민들에겐 그 어떤 전쟁과 사건보다 1차 세계대전의 여파와 후유증이 컸다. 빅토리아 시대의 종말, 영국의 세계 지배 종말과 함께 왔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전쟁 직후에는 글로벌 비즈니스라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나.

그렇다. 전쟁이 끝나자 자국 제품을 해외로 판매하고 무역하는 것이 더 힘들어졌다. 전쟁 중에야 당연히 거래가 활성화되기 어려웠을 것이고 그 이후에는 통화 교환에 문제가 생겼다. 물품 구입이 어려워졌고 국가 간의 물적 이동이 줄었다. 그렇게 국내에서의 물품 생산과 소비가 확산됐다. 즉 소비자들이 기존 국제시장에서 거래되던 물품들을 국내 시장에서 찾아 구입하게 된 것이다. 국경을 넘어온 다양한 제품을 사던 관행은 오히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강했지만 점점 시들었고, 전쟁 이후에는 해가 지날수록 세계화는 후퇴하고 국내 시장 중심 생산과 소비가 강화됐다.

 

다시 세계화가 1차 세계대전 수준으로 회복된 지금 유럽을 비롯한 많은 나라에서 극우주의가 득세하며 국수주의가 나타나고 있다. 이 역시 세계화의 압력이 다시 만들어내는 부분적인 반동이라고 할 수 있다. 각국이 세계 무역의 영향력으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경향도 생긴 것이다.

 

경제의 흐름이 국내적 생산과 소비로 바뀌었다고 했는데 좀 더 설명해 달라.

2차 세계대전 발발과 그 이후까지 연결돼 있는 얘기다. 국내 시장 위주로 비즈니스가 돌아가기 시작했고 소비자들의 새로운 수요가 발생했다. 사람들이 새로운 제품을 원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전기가 각 가정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각종 가전제품과 전축, 사진기 등이 보급됐다. 나중엔 텔레비전도 상용화됐다. 작지만 중요한 변화도 있었다. 며칠 전에 버밍엄에 다녀왔는데 버밍엄은 원래 세계 펜 산업의 중심지였다. 이전까지 깃털로 만들던 펜은 휴대하기 불편했다. 그런데 휴대할 수 있는 만년필이 개발됐고 이는 1차 대전 중 전쟁터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그래서 1930년대부터 만년필이 급속도로 보급됐다.

 

소비자들은 이런 소비재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그 수요에 맞게 생산성도 증가했다. 소비자들은 제품에 대한 값을 지불할 수 있었다. 중산층의 폭발이 있었다. 이런 변화는 1차 대전 이후에 본격화됐고 2차 대전까지 지속됐다. 그 사이에 끼어 있는 대공황 역시 소비자 혁명을 촉발한 요인이다. 제품의 혁신만으로는 경제시스템이 새로 형성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냉장고가 발명됐다고 해서 중산층 사람들이 갑자기 냉장고에 보관하는 인스턴트 음식을 사먹게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1차 대전으로 인한 제품과 기술의 혁신 후에도 이런 소비자 혁명이 완성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다.

 

1차 세계대전과 소비자 혁명은 기업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가.

다양한 기업들이 이런 기회를 잡아냈다. 네덜란드 전자회사 필립스의 예를 들어보자. 그들의 본격적인 비즈니스는 1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시작됐다. 군 병원에서 사용할 엑스레이 기계를 만들기 위해 전구를 개량해 진공관과 브라운관을 만들었고 이는 전쟁 후 민간영역에서 전자제품을 만드는 데 쓰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 때 사용되던 군대의 기술들이 냉전 이후 민간에 쏟아져 나온 것과 같은 이치다. 반도체 기술인 실리콘 웨이퍼는 원래 2차 대전 중 군용 로켓에 쓰기 위해 개발됐다.

 

자동차 혹은 자전거조차 처음 만들어질 때에는 아주 고가였지만 전쟁 기간 동안 대량생산 제조기법이 보급되며 일반화됐다. 군대 등과 같은 정부기관에서 사용되던 제품과 기술이 민간시장에 공개됐고 잘 팔려나갈 수 있었다. , 앞서 말했듯이 세계화가 쇠퇴하고 국가주의가 퍼지면서 1차 대전을 기점으로 필립스처럼 글로벌, 즉 전 유럽을 상대로 영업하던 회사들이 이젠 각각의 개별 국가 시장별로 영업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다시 말해 1차 대전으로 인해 이전까지는 글로벌(global) 기업이었던 회사들이 멀티내셔널(multinational), 혹은 멀티-도메스틱(multi-domestic) 기업 형태로 전환됐다.

 

IBM도 성장을 살펴보자. IBM (1911) 작은 기계들을 생산하는 여러 소기업이 합쳐져서 만들어졌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강한 영업문화를 도입해 사무기기 회사로서 시장의 강자가 됐다. 그리고 기업의 사무직 근로자들이 늘어나면서 그들과 함께 더욱 성장했다. 마치 군대처럼 말단에서 시작해 점점 승진해 올라가는 정규직 사무 조직 문화가 퍼지면서 그 안에서 회사원들이 타이핑을 치고 편집을 하며 표를 작성할 수 있는 기계들을 제공한 것이다.

 

메릴린치도 1차 대전을 계기로 성장한 기업 중 하나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는 일반인들 사이에서왜 주식투자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팽배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중산층의 소득이 상승하면서 주식투자가 활발해졌다. 이전까지는 철도회사나 은행들이 주식을 주로 발행했지만 1차 대전 후부터는 IBM 같은 온갖 종류의 기업들이 다 주식을 발행해 거래되기 시작했다. 바로 이때 메릴린치는 월스트리트(Wall Street)에서 메인스트리트(Main Street)로 진입한다. 다시 말해 메릴린치는 그때까지 전문 금융투자자들과 금융회사에 주로 팔아왔던 주식을 일반 시민들에게도 팔기 시작했다. 그 덕분에 주식투자는평범한 개인도 당연히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GM의 사례도 볼 만하다. GM 1차 대전 과정에서 탄생한대량 생산 자동차에 색상과 모델을 다변화해 시장에 내놨다. 소비자가 딱 한 가지 차만 고를 수 있었던 초기 시장에서 각자의 취향에 맞는 차를 고를 수 있는 성숙시장으로 전환되던 시기였다. GM은 이 성숙시장의 초기 단계에 적절하게 진입해 크게 성공할 수 있었다. 이런 일들이 미국, 영국과 유럽대륙 전역에서 벌어졌다.

 

앞서서 내가 1차 대전 이후 세계화가 쇠퇴했다고 말했지만 일부 세계화가 진전된 산업도 있다. 석유산업과 섬유산업이다. 텍사스에서 석유가 발견됐고 곧이어 중동에서도 석유개발 붐이 일어나면서 석유회사들이 글로벌화됐다. 이들은 석유가 있는 곳을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사업을 했다. 또 섬유산업에서는 일본이 글로벌 시장을 공략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때까지는 독일이 방직기 제작에서 1인자였지만 1차 대전 후부터 일본이 독일을 앞서나가 세계 최고의 방직기 기술을 보유하게 됐다. 그 회사가 바로 도요타자동차(Toyota)의 전신인 도요다(Toyoda)였다.

 

앞서 나열한 기업들이 1차 대전 이후에 크게 성공한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앞서도 잠시 얘기한 중산층의 폭발과 이들 기업의 성장은 궤를 같이한다. 사무직의 대대적 증가와 그들에게 적합한 제품을 제때에 공급해 준 IBM, 꼭 부유층이 아니어도 돈을 불리기 위해 투자를 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주고, 실제로 그게 가능하다는 걸 보여준 메릴린치, 그리고 자동차에 대한 중산층 소비자들의 욕구를 파악한 GM. 하나하나의 사례가 바로 중산층과 연결돼 있다.

 

1차 대전 이후 등장한 영향력 있는 사업가들 중 상당수는 전쟁 당시 군인이었다.

조직 운용, 명령과 통제에 능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경영 컨설팅 업체 중 하나인 부즈앨런의 설립자인 에드윈 부즈가 대표적이다.

 

기업의 사업전략과 조직관리, 인사관리 등에는 어떤 영향이 있었나.

사업가들은 전쟁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웠다. 1차 대전은 군대의 이동, 군수물자 확보와 보급이 아주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전쟁이었다. 전장에서 발생하는 물자의 수요를 파악해 여기에 적절한 타이밍에 정확한 수량을 확보해 보급하는 것이 이전의 전쟁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했다. 생산관리, 조달 등의 현대적 경영기법을 군대로부터 배울 수 있었던 셈이다.

 

더 중요한 건 바로사람을 뽑는 기술이다. 전 국민을 대상으로 대규모 징집을 하는 최초의 전쟁이다 보니 군인으로서 적합한 사람을 선별하는 작업이 필요했다. 바로 이 때문에 정신과학과 심리학 실험이 크게 발전하게 됐다. 현대적인 개념의 심리테스트와 IQ 테스트가 널리 쓰이게 것도 바로 이때다. 이후 사무실과 공장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이런 테스트가 활용되기 시작했다. 이처럼 인사와 생산관리, 구매조달의 기법을 잘 받아들여온 기업들은 성공할 수 있었다.

 

다만 경영 전략 측면에서는전략의 중요성이 전쟁으로부터 온 건 맞는데 그건 1차 세계대전보다는 2차 세계대전의 영향이 더 컸다. 1차 대전은 전략보다는 조직과 조직설계 관점에서 기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조직구조라는 게 군대에서 가장 먼저 발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1차 대전 이후 등장한 영향력 있는 사업가들 중 상당수는 전쟁 당시 군인이었다. 조직 운용, 명령과 통제(command and control)에 능숙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경영 컨설팅 업체 중 하나인 부즈앨런(Booze Allen & Hamilton)의 설립자인 에드윈 부즈가 대표적이다. 그는 원래 대학에서 심리학을 연구한 심리학자였다. 1차 대전 때 군대에서 심리학자, 조직연구자로서 일하면서 물자 보급과 관련된 일도 했다.

 

그렇다면 컨설팅 산업의 탄생도 1차 대전의 결과물인가.

컨설팅 산업만큼은 1차 대전과 거의 관련이 없다. 나중에 등장한 컨설팅 펌의 창립자들이 1차 세계대전 중 군대에서 훈련을 받았다는 건 사실이지만 그것이 곧바로 컨설팅사의 등장, 그리고 성장과 크게 관련이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1920년대 금융산업이 번성하고 그 과정에서 대출 규제 등의 다양한 조건이 형성되자 이에 부응해 상황에 맞는 전략을 짜 주는 컨설팅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즉 컨설팅은 금융산업에서 파생돼 나왔다고 볼 수 있다.

 

경영 컨설팅 산업의 부흥은 사실 2차 세계대전과 더 관련이 크다. 그들은 2차 대전 중에 군대에 도움을 줬고 그들 스스로도 그 안에서 많은 인맥들을 형성했다. 컨설턴트들이 군대, 특히 공군과의 비즈니스를 통해 신뢰를 얻었다. 이렇게 형성된 신뢰는 다시 그 컨설턴트들이 전후 비즈니스를 펼칠 때 활용됐다. 군 프로젝트에서 얻은 명성을 기업계 영업에 이용하고, 다시 기업에서 얻은 명성을 군 프로젝트를 따는 데 이용하는 영리한 전략을 썼다.

 

여전히 하버드 경영대 등에서는 군 출신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그들이 일하는 방식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고 항상 준비돼 있기 때문이다. 또 미국 군대는 항상 외부에서 베스트프랙티스를 찾기 때문에 컨설팅사도 자주 접촉한다. 그들은 항상 준비된 상태에 있어야 하는 조직이다. 계속적으로 외부에 대응하고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훈련한다. 그리고 혹시나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없는지 걱정하고 찾기 위해 노력한다.

 

비즈니스 관점에서 1차 대전으로부터 우리가 여전히 얻을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일까?

긍정적인 교훈과 부정적인 교훈이 있다. 긍정적인 교훈은 1차 대전이 국제기구의 기원이라는 점이다. 비록 경제적 통합 차원에서의 세계화는 후퇴했더라도 국제사회가 모여 관세와 복지, 국내 과세, 무역 및 국제법 등에 대해 서로 조율해 보려 노력했다. 물론 1차 대전 이후의 이런 노력은 실패했고 2차 대전으로 치닫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 노력 자체는 우리 시대에도 여전히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부정적인 교훈은 아까도 말한 것과 같이 세계화의 쇠퇴와 국가주의의 부흥이다. 무역장벽들이 올라갔고, 국제주의가 약해졌고, 심지어 외국어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줄어들었다. 물론 그런 와중에서도 세계화를 위한 진전은 있었다. 팬암과 같은 국제 항공사가 생겨 항공여행이 일반화됐다.

 

양차 세계대전 이후, 1차 대전 이후 세계 각국은 자국 내 경제를 활성화하는 데 집중했고 많이들 성공했다. 그리고 20세기 후반부터 필요성에 의해 다시 세계화의 진전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이 시점에서 다시 돌아봐야 한다. 1990년대부터 세계화가 심화되고 경제적 불균형과 불평등이 곳곳에서 나타나자 특히 유럽에서 다시 100년 전과 같은 국수주의가 발호하고 있다. 이것들이 글로벌 비즈니스 생태계에 악영향을 주거나 국제 정세적인 위기를 만들어내선 안 될 것이다.

 

군대 안에서 개발된 기술은 과잉투자, 과소활용 상태로 있게 된다.

기술은 군에서 개발하지만 그걸 가지고 유용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건 민간 영역이다.

 

마지막으로 한국 경영계에 해주고 싶은 조언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 중 개발된 많은 기술은 이후 일반 영역에서 쓸모 있는 제품과 서비스로 만들어졌다. 스탠퍼드대를 비롯한 많은 미국 대학들은 냉전시절 군사기술을 발전시키기 위해 키워졌다. 그 학교가 강한 엔지니어링 문화를 갖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GPS 기술이나 반도체 기술 등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군사기술로 만들어졌다. 민간 기업의 힘으로는 개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인터넷 역시 마찬가지다. 요즘 구글은 구글 글라스에 쓰기 위해 성대의 떨림을 포착해 음성을 인식하는 센서를 연구하고 있는데 이 역시 군대에서 나온 기술이다. 저격수들끼리 무전을 주고받을 때 속삭이기만 해도 성대의 떨림으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기술로 개발됐었다. 이런 군사기술들이 민간 영역에 들어와 성공적으로 꽃피게 되면 사람들은 그게 원래 군사기술이었다는 사실도 잊게 된다.

 

환상적인 기술들이 전쟁 중에 많이 개발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전쟁으로 인한 수요가 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그것들이 근본적으로 거품(bubble)이라는 거다. 기술개발에 평상시라면 하지 않을 투자를 하게 되는 게 전쟁이고 그게 전쟁 후에는 민간 영역으로 옮겨져서 군에서는 의도하지 않았던 다른 용도로 쓰이게 된다. 군대 안에서 개발된 기술은 과잉투자, 과소활용(over-invested, under-utilized) 상태로 있게 된다. 기술은 군에서 개발하지만 그걸 가지고 유용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건 민간 영역이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게 한국의 대기업들이 작동하는 방식과 유사점이 있기 때문이다. 삼성, LG 같은 한국의 대기업들은 많은 돈을 들여서 기술을 개발한다. 1차 대전, 2차 대전 당시 각국 군대가 기술개발에 투자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그 기술을 어떻게 유용한 용도로 쓸지 더 잘 궁리할 수 있는 건 대기업 외부의 주체들이다. 대기업이 훌륭한 기술을 개발하지만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용도를 그 기업 혼자서 찾아내기는 힘들다. 따라서 대기업이 많은 자원을 들여 개발한 기술을 외부에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이를 지렛대 삼아 혁신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이것이 1차 대전이 한국 경영계에 주는 교훈이라 생각한다.

 

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조진서 기자 cj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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