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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시장조사를 무시해야 한다

허지성 | 11호 (2008년 6월 Issue 2)
모든 마케팅 활동은 시장조사로 시작한다. 철저한 시장조사 없이 정교한 마케팅 전략이 수립될 수 없고 부실한 시장조사는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시장조사 무용론에 찬성표를 던지는 기업들이 늘어가고 있다.
 
야후는 2005년 말부터 대표적 시장조사 기법 중 하나인 FGI, 즉 포커스 그룹 인터뷰를 중단했다. 그 이유는 인터뷰 과정에 피면접자들이 다른 피면접자의 영향을 받아 자신의 실제 의견을 제대로 피력하지 못하는 문제가 생각보다 심각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미국 의류 브랜드 갭(Gap)은 2002년 폴 프레슬러의 회장 취임과 함께 회사의 시장조사 기능을 대폭 강화했지만 일부 디자이너와 머천다이저들이 시장조사 강화 이후 회사가 창의성을 상실했다고 주장하며 회사를 떠났다. 결국 회장 취임 초기 반짝 상승했던 매출은 다시 하락세로 돌아섰다. 디자이너의 감각을 믿을 것이냐, 고객 선호조사 결과를 믿을 것이냐의 기로에서 고객을 선택한 것이 디자이너들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과연 패션 트렌드는 ‘읽어야’ 하는 것일까, ‘만들어야’ 하는 것일까?
 
시장조사 방법의 한계가 지적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조사원의 영향이나 응답자의 불성실 응답 등의 여러 문제에도 시장 조사 기법은 끊임없이 진보해 왔고 고객의 소리(voice of the customer)를 듣는 유일한 대안이었다. 그렇다면 왜 최근 들어 이러한 시장조사가 위기에 직면한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조사대상인 ‘시장’, 즉 ‘고객집단’ 특성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다. 유사한 특성을 지닌 대규모 소비자 집단을 찾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 이른바 ‘파편화한 시장(fragmented market)’이 등장한 것이다.
 
고객 집단의 특성 변화
상품 정보의 부족으로 인해 자신의 니즈를 적당히 양보하며 대다수가 찾는 ‘인기상품’을 선택할 수밖에 없던 소비자들은 이제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니즈에 최적화한 제품 및 서비스를 훨씬 적은 노력으로도 찾을 수 있게 됐다. 따라서 니즈는 더 세분되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기업들은 시장조사를 통해 얻은 가지각색의 정보를 일반화하는 데 커다란 어려움을 겪게 됐다.
 
주도권이 기업에서 고객으로 넘어가면서 기업이 ‘시장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상품조사’를 하는 형국이다.
 
게다가 프로슈머로 대표되는 적극적인 소비자들은 신속한 의사소통과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시장 및 제품 트렌드의 빠른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시장조사를 끝내고 나면 이미 그 보고서는 시장의 상황을 더 이상 반영하지 못한다고 말할 지경에 이르렀다. 소비자들이 생산해내는 각종 정보는 깊은 전문성을 바탕으로 하며 기업의 마케팅 슬로건보다 일반 소비자들로부터 더 높은 신뢰를 얻음으로써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한다.
 
이와 같은 시장의 급격한 변화에 직면한 기업들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장조사를 하자니 유용성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시장조사를 하지 않고 제품을 출시하기에는 너무 불안하지 않은가?
 
새로운 통찰을 찾아라
시장에서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업체들의 움직임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기존 조사기법과 상이한 새로운 방식의 시장조사를 수행하거나, 아니면 시장조사를 포기하고 통찰력에 의존한 시장주도 전략이다.


인텔은 오래 전부터 인류학적 조사 기법을 소비자 조사에 적극적으로 활용해왔다. 이른바 문화인류학의 한 분야인 ‘기술(記述)적 민족학(Ethnography)’이 대표적인 것으로 현지조사를 통해 사회조직이나 생활양식 전반에 관한 내용을 체계적으로 기술하는 조사방법이다. 이는 실험자가 피실험자에게 끼치는 영향으로 인해 조사 결과의 유의성이 낮아지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다. 장기간에 걸친 피실험자의 사회문화적 배경 및 행동 패턴 관찰과 해석을 통해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하는 조사 방식을 의미한다. 인텔은 인류학자, 심리학자 등이 포함된 조사 팀을 통해서 소비자들의 행동 패턴을 장기간 조사하고, 그 결과를 제품 개발에 활용하고 있다. 기술적 민족학에 기반한 소비자 행동 조사는 인텔의 무선 인터넷 노트북 PC 플랫폼인 센트리노의 개발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노인을 위한 헬스케어 PC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한 연구가 진행중이다.
 
노키아도 신흥시장 공략을 위해 2007년에 올웨이즈온(Always on)이라는 참여관찰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를 통해 우간다 등 아프리카 지역의 마을별 전화 공유 형태를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프리카 지역에 최적화된 휴대전화 단말기를 개발, 시장 공략에 성공한 바 있다.
 
인터넷을 매개로 한 차별화된 시장조사 방법도 적극적으로 이용되고 있다. 기존 시장 조사가 특정 시점의 정적인 소비자를 상정해 수행된다면 일부 혁신적인 기업들은 시장의 트렌드를 읽기 위해 능동적인 소비자들과의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시장 정보를 확보하고 있다. 대표적인 글로벌 소비재 기업인 P&G는 트레모아(Tremor)와 보컬포인트(Vocal Point)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과 지인 네트워크를 통해 활동하는 회원들은 P&G의 마케팅 조사와 입소문 홍보를 동시에 수행한다.
   

소니 “고객에게 묻지 마라”
반면에 소니나 애플처럼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극단적으로 지양하는 업체도 있다. 소니의 창업주인 아키오 모리타 회장은 생전에 “고객에게 묻지 마라. 오히려 새로운 아이디어로 시장을 선도하라”고 주장했다. 시장조사 결과, 판매실적이 낮아질 것이라고 예상되었으나 과감히 출시한 워크맨은 대성공의 신화를 가져왔고 그 이후 소니의 시장조사에 대한 불신은 최고조에 달했다.
 
아이팟, 아이폰 등 차별화된 제품으로 대박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애플도 시장조사에 대해 거부감을 가진 대표적인 회사다. 애플은 제품 컨셉트 개발을 위한 시장조사를 별도로 하지 않는 대신, ‘우리가싫어하는 것은 뭘까?’, ‘싫어하는 것을 개선해 다시 만들기 위한 기술을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가?’, ‘우리가 개발할 제품은 결국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바탕으로 격렬한 내부 토의 과정을 거쳐 제품을 개발한다고 한다. 제품 개발에서 소비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을 지양함으로써 오히려 소비자의 예상과 기대를 뛰어넘는 제품을 개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지향적(market-driven) 기업들이 시장주도적(market-driving) 기업으로 전환하는 가장 큰 이유가 여기에 있다.
 
상상력이 결여된 일반 소비자에게서 답을 찾기보다는 시장에 대한 통찰력과 제품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바탕으로 획기적인 제품과 서비스를 만들고, 이를 확산시키는 쪽에 마케팅 노력을 기울이는 편이 훨씬 현명하다는 것이다. 포춘지의 칼럼니스트 저스틴 마틴은 “고객을 무시하는 것만이 획기적인 상품을 창조하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넘쳐나는 정보와 변화무쌍한 고객으로 인해 시장조사는 명백한 위기에 직면해 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시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마케팅이 아니라 도박이다. 고객을 위한 진정한 가치를 창조하려 한다면 그것이 경험을 기반으로 한 통찰력이든 고객의 솔직한 심정을 읽어내는 첨단 조사기법의 결과물이든 소비자의 니즈에 대한 철저한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 시장조사를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그 답은 명백하다. 지금 하고 있는 식의 시장조사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필자는 연세대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국내외 벤처 기업에서 일했으며 서울대 경영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친 후 현재 구글 코리아에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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