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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전진국 KBS 편성본부장

대중의 상상력 뛰어넘지 못하면 ‘OUT’

최한나 | 150호 (2014년 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전략

 예능만 30년 가까이 다뤄온 프로듀서(PD)가 제시하는선택받는 프로그램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일단 참신해야 한다. 새롭지 않으면 눈길을 받을 수 없다. 둘째, 참신해야 한다. 어디서 본 듯한 프로그램을, 시청자는 곧바로 리모콘을 들어 넘겨버린다. 셋째, 참신해야 한다. 익숙한 장면이 반복되면 대중은 곧바로 다음을 예상한다. 대중의 상상력을 뛰어넘지 못하면 아웃이다. 패턴을 읽혔다면 폐기처분하라. 불가피하게 후발주자가 됐다면 차별화된 강점을 확보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살아남는 프로그램의 비결이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정준(홍익대 경영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방송통신은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변화의 속도가 빠르고 불확실성이 큰 분야다. 잠시만 눈을 뗐다가 돌아보면 새로운 콘텐츠와 플랫폼들이 얼굴을 들이밀며 존재감을 주장한다. 화려한 출연진이나 막대한 투자비용, 기존의 성공 경험들은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의 성공률을 높여주지 못한다. 소비자 마음을 파고들기 위해 매일 피 튀기는 아이디어 전쟁이 벌어지는 이 곳, 바로 방송국이다.

 

뉴스, 드라마, 다큐멘터리 등 아이디어를 고민하지 않는 분야는 없겠지만 그중에서도 예능은 가장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곳 중 하나다. 주말 저녁, 주중의 부담을 잠시 내려놓고 TV 앞에 앉은 사람들은 관대하지 않다. 잠시만 지루해도 바로 채널을 돌린다. 공중파 3사밖에 선택할 수 없는 시대는 지났다. 케이블과 종합편성 TV, 해외 유수 방송사들까지 간택을 기다리며 대기하는 중이다. 덕분에 무수히 많은 프로그램들이 야심 차게 도전장을 내밀었다가 초라한 성적표를 받아들고 조기 퇴출되거나 먼저 나온 다른 프로그램의 아류라는 비난을 받다가 무대 뒤로 조용히 사라지기도 한다.

 

전진국 KBS 편성본부장은 1985년부터 TV 프로듀서(PD)로 일했다. ‘100분 쇼’ ‘가요톱텐’ ‘토요대행진등 주말 황금시간대를 주름잡던 프로그램을 두루 거쳤다. ‘12’ ‘불후의 명곡’ ‘개그콘서트등 요즘 인기 있는 예능 프로그램도 그의 손을 거쳤다. 17년이나 지속적으로 제자리를 지키며 생존하고 있는사랑의 리퀘스트도 그의 작품이다. 그는 무한 경쟁을 피할 수 없는 시대, 살아남는 콘텐츠는 무엇보다도 참신함을 무기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DBR이 그를 만났다.

 

 

 

전진국 1985 KBS에 입사해 예능 분야 PD로 활약했다. 100분 쇼, 토요대행진, 가요톱텐, 사랑의 리퀘스트, 열린음악회, 지구촌영상음악, 뮤직뱅크 월드투어, 12, 불후의 명곡, 개그콘서트, 안녕하세요 등 수많은 프로그램이 그의 손을 거쳤다. 예능국장을 거쳐 현재 편성본부장을 맡고 있다.

 

현재 편성본부장직을 맡고 있다.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후보군으로 올라올 텐데 그중에 선택받는 프로그램은 어떤 특징을 지니나.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참신함이다. 방송국에 있는 사람들은 매일예측 가능함을 두고 대중과 전투를 벌인다. 대중은 항상 새로운 것을 원한다.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들보다 상상력이 더 풍부하다. 익숙한 장면이 두 번만 나오면 이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어떤 위기가 닥칠지, 결론이 어떻게 될지 미리 예측해낸다. 우리가 제시하는 것을 뛰어넘는 그 이상을 요구한다. 따라서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대중의 상상력을 넘어서는, 반전의 능력이 요구된다. 이 능력을 나는 의외성이라고 부른다. 대중이 예상하지 못했던 어떤 것을 제시하는 능력, 이것이 있어야 그들을 끌어들일 수 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버라이어티 콘셉트가 예능 프로그램의 주도권을 잡아온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버라이어티 콘셉트는 다른 어떤 프로그램보다 다양한 패턴을 가능하게 한다. 작가와 PD가 설정한 기획대로 흘러가는 기존 예능 프로그램으로는 대중의 상상력을 뛰어넘기 어려운 시대다.

 

기존 프로그램과 비슷하거나 어디서 본 듯한 포맷은 아무리 간판을 바꿔 달아도 후발주자다. 요즘은 시청자가 전 세계를 뒤져가며 각국의 주요 프로그램을 꿰고 있기 때문에 어떤 것을 따라 했다는 평가가 붙는 순간 그 프로그램은 생명력을 잃고 만다. 아예 다른 포맷이든지, 소재가 새롭든지, 정 안 되면 출연자라도 아주 뜻밖이어야 한다.

 

그 다음은 완성도다. 아무리 좋은 주제나 소재라도 어떻게 엮느냐에 따라 작품의 질이 굉장히 달라진다. 주제를 어떻게 표현하고 얼마나 밀도 있게 구성하느냐가 관건이다. 누가 제작하느냐도 중요하게 본다. 특히 예능 프로그램은 소재나 출연진이 좋더라도 역량이 부족한 사람이 만들면 제대로 터지지 않는다. 이 분야에서 꾸준히 경험을 쌓고 노하우를 가진 사람이 만들면 아이디어가 좀 부족하더라도 연출의 힘으로 커버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도와 제작자보다는 참신함이 훨씬 중요하다. 다른 산업군도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이 분야는 그야말로 자다가도 코 베이는 무한 경쟁이다. 아찔할 만큼 변화 속도가 빠르다. 잠시만 뒤처지면 금세 잊히고 만다.

 

‘안녕하세요’라는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벌써 5년 차 중견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고 현재 제작을 맡고 있는 PD는 공채 30기로 아직 젊은 축에 속한다. 이 친구가 새내기였던 시절, 내부에 자극을 좀 주려고기수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연출할 기회를 준다. , 기획안이 참신해야 한다. 무조건 전부 기획안을 내라 PD들을 다그쳤다. 제시한 기간이 지나고 다양한 기획안들이 쌓였다. 안들을 하나씩 넘겨보다가 이 친구가 낸 기획안을 봤다. 전에 없던 포맷이었다. 눈에 확 들어왔다.

 

사실 매주 일반인을 주인공으로 내세운다는 것은 엄청난 리스크다. 잘 훈련되고 방송에 익숙한 연예인을 상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연예인이 출연하면 어느 정도 시청률을 확보할 수 있다. 반면 일반인은 아마추어고, 같은 설명을 매주 다시 해야 하며, 실수가 발생할 가능성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디어가 좋았다. 살면서 누구나 하나쯤 가슴 깊이 묻어둔 고민이 있지 않나. 제발 누군가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판단을 내려줬으면 싶을 때가 있지 않나. 분명히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포맷이었다. 그 기획안을 채택했다. 무조건 연출해라, 기회를 주겠다고 했다. 당시 기준으로 2∼3기 정도 아래 기수인 새내기 PD를 발탁해서 입봉시킨 셈이 됐다. 내부가 술렁거렸다. 쟨 뭔데 저렇게 빨리 입봉하냐, 위에 끈이라도 있는 것 아니냐 샘내고 흉보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도 밀어붙였다. 입봉하고 싶으면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와라, 기존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프로그램을 들고 오라며 반발을 막았다.

 

그러면서도 사실 이 프로그램이 잘될지 어떨지는 확신하지 못했다. 일반인을 주인공 삼아 만드는 방송이 얼마나 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새롭고 참신하다는 점만은 분명했다. 시청자들에게도 색다르게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첫 방송이 나가고 3∼4개월 정도 시청률이 바닥을 기었다. 한자릿수도 아주 낮은 한자릿수였다. PD를 불러서 말했다. 시청률 생각하지 말고 계속해라, 6개월까지는 지켜보겠다. 5개월이 넘어가면서부터 탄력이 붙었다. 일단 방송을 타고 나니 프로그램 형식에 익숙해진 시청자들이 늘었다. 처음 출연하는 사람이라도 완전히 아마추어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누구나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소재가 강점이었다.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고민은 물론, 유별나고 이색적인 고민에도 시청자들은 쉽게 감정을 이입했다.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참신한 형식과 현장에서 직접 투표하게 하는 참여적 성격, 진행하는 연예인들의 탁월한 입담 등이 어우러져 시청률을 높였다. 현재 이 프로그램은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놓지 않는 효자 프로그램이다.

 

최상의 참신함은 다른 사람이 하지 않은 어떤 것을 새롭게 시도했을 때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새로울 수만은 없는 것 아닌가.

참신함이 가장 먼저지만 불가피하게 후발주자가 됐다면 반드시 차별화된 강점을 확보해야 한다. 뒤늦게 나가면서 단지 따라 했을 뿐이라면 존재 가치가 없다. 그리고 남과 다른 차별성은 남과 다른 시각, 다른 질문에서 출발한다.

 

지금은 한풀 꺾였지만 서바이벌 오디션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을 때다. 당시 예능국장을 맡고 있었는데아메리칸 아이돌이나 ‘The Voice’ 등이 잇따라 히트하는 것을 보면서 자극을 받았다. 우리도 뭔가 준비해보자고 PD들과 모여 의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접근을 달리 했다. “매번 새로운 스타만 찾는 것은 식상하지 않을까?” “기존 스타들 중에 재능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을 발굴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윤곽을 잡아가며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을 때 경쟁사에서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튀어나왔다. 기존 가수들을 주인공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우리가 준비하던 프로그램의 핵심과 거의 일치했다. 우리도 몇 달에 걸쳐 애써 준비하던 것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타사에서 먼저 나온 형식을 그대로 유지할 수는 없었다. 다시 머리를 맞댔다. 다른 각도에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서바이벌 형식을 도입하는 통에 피곤해 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점이 눈에 들어왔다. 막판까지 결과를 알 수 없는 극적인 서바이벌 형식은 긴장감을 고조시키며 보는 이를 조마조마하게 만든다. 처음에는 자극적이고 재미있을지 모르나 이런 프로그램들이 난무하고 반복되면서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지나친 경쟁을 지양하고 신구 세대가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형식으로 시도해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온 프로그램이 바로불후의 명곡이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젊은 가수들이 짧게는 20∼30, 길게는 50∼60년 전 노래를 요즘 색으로 편곡해서 부른다. 등장인물은 아이돌인데 부르는 것은 흘러간 옛 노래다. 주말 저녁, 온 가족이 둘러앉아 보기에 무리가 없다. 서바이벌 범주에 들어가기는 하지만 벌벌 떨고 긴장하는 경쟁이 아니라 다함께 즐기고 서로 격려하는 축제다. 지금까지 기획했던 안이 아까우니 첫 안을 그대로 가져가자고 고집했다면 지금처럼 인기 있는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지는 못했을 것이다. 첫 번째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면 차별점이 무엇인지 반드시 고민해야 한다. 대중의 기호는 산발적으로 분산돼 있기 때문에 잡아내기 쉽지 않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적절한 질문이다. 질문은 방향을 잡아준다. 질문을 제대로 던진다면 대중의 마음과 시대적 흐름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참신한 아이디어는 어떻게 포착할 수 있나.

일단 생각을 잘해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경험이 재료가 돼서 생각이 만들어진다. 생각을 잘하려면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경험은 꼭 내가 겪은 일이 아니어도 가능하다. 읽을 수도 있고 들을 수도 있다. 모든 경험은 몸과 마음에 생각으로 새겨진다. 하지만 모든 생각이 아이디어가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들이 떠다닌다. 그중에서 건져 올린 생각만 아이디어가 될 수 있다. 아이디어로 만들기 위해서는 생각을 체계화해야 한다.

 

일반적으로는 생각에서 아이디어까지, 발상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비즈니스에서는 생각에서 아이디어까지의 과정보다는 실행에서 보완의 과정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아이디어가 좋다고 해도 어떻게 실행하고 어떻게 보완해나가느냐에 따라 최초 생각의 가치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실행하고 보완하는 일련의 과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일단 경험화(Experience). 생각의 재료인 경험을 쌓는 과정이다. 경험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생각을 탄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좋은 생각을 하기 위해서는 경험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어야 한다. 두 번째는 체계화(Organize). 생각들 속에서 아이디어를 건져내는 과정이다. 수많은 생각 중에 해당 가치에 부합하는 생각만 아이디어로 승화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제작화(Produce). 구체적인 실행이다. 아무리 준비를 잘했더라도 실패와 좌절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실패 과정을 거치며 아이디어는 현장에서 재탄생한다. 네 번째는 편집화(Edit). 의도에 맞도록 콘텐츠와 플랫폼을 재조합하고 구성하는 과정이다. 다섯 번째는 진화화(Evolve). 대중에게 선보인 후 콘텐츠와 플랫폼을 어떻게 보완하고 발전시킬지 고민하고 실행하는 단계다. 진화하지 못하는 콘텐츠와 플랫폼은 생존조차 장담할 수 없다.

 

‘개그콘서트’를 이끌어가는 개그맨들은 일주일 단위로 새로운 콘텐츠를 선보인다. 이들이야말로 콘텐츠 제작의 달인이다. 말이 쉽지 일주일마다 새로운 소재로 웃음을 이끌어낸다는 것은 그야말로 밥 먹고 그 일만 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그래서 이들은 항상 촉을 세운다. 먹고 자고 만나고 경험하는 일상생활에서 소재를 얻지 않으면 다음 주 무대에 설 수 없다. 뭔가 부딪쳤는데 신선하다 싶으면 프로그램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 곧바로 고민한다. 개콘에서 선보였는데 반응이 좋거나 나쁘면 이것을 어떻게 진화 또는 변형시킬 수 있을지 그 다음 버전을 생각한다. 전형적인 경험화체계화제작화편집화진화화의 단계를 보여주는 셈이다.

 

‘사랑의 리퀘스트라는 17년 장수 프로그램을 만들기도 했다. 주로 만들던 예능 프로그램과 다른 성격의 프로그램은 어떻게 나왔나.

‘사랑의 리퀘스트가 처음으로 전파를 탄 것은 1997 10월이다. PD로 일한 지 12∼13년 차쯤 만든 프로그램이다. 예능 쪽에서만 10년 넘게 일하면서 웬만한 프로그램은 다 해봤다. 예능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은 재미도 있고 만족도도 높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더는 해볼 프로그램이 없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뭔가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었다. 음악 프로그램을 하면서 한참 민감할 시기의 청소년에게 악영향을 주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라며 부정적인 눈초리를 받으면서 더욱 그랬다.

 

그런 생각들로 머리가 복잡하던 어느 날, 교회에서 목사님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목사님이 문득 그런 말씀을 하셨다. 음악 프로그램은 청소년에게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치는데 음악을 통해 뭔가 좋은 일을 할 수 있지는 않을지 고민해보면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전후 맥락 없이 뜬금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게 마음을 쳤다. 마치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전부터 속으로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다면 목사님 말씀이 아무리 좋은 뜻을 담고 있었더라도 내게 흡수되지 않고 그저 스쳐지나갔을 것이다. 어떤 프로그램이든 탄생되기까지의 과정도 비슷하다. 무수히 많은 아이디어들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둥둥 떠다니다가 뭔가 결정적인 모멘텀을 만나 뻥 터지곤 한다. 그러니까 아이디어는 모여 앉아 머리를 맞대는 기획회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회의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런저런 모양들로 뒤죽박죽 떠올리는 생각 덩어리들에서 나오는 것이다.

 

 

 

콘텐츠 제작의 다섯 트랙

첫 번째 트랙: 경험화(Experience)

생각하기 위해서는 관찰, 경청, 독서 등 다양한 경험이 필요하다. 모든 경험은 생각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생각에는 클래스가 있지만 경험에는 클래스가 없다.

두 번째 트랙: 체계화(Organize)

생각이 아이디어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모든 일이 생각에서 출발하는 것은 맞지만 생각에서만 끝나면 콘텐츠도 플랫폼도 될 수 없다. 수많은 생각 중에 해당 가치에 부합하는 생각만 아이디어가 된다.

세 번째 트랙: 제작화(Produce)

실행이다. 콘텐츠와 플랫폼의 성패는 현장에서 결정된다. 책상 위에서 얻은 아이디어보다 현장에서 얻은 아이디어가 백 배는 더 유익하다.

네 번째 트랙: 편집화(Edit)

현장에서 만들어낸 콘텐츠를 어떻게 꾸밀 것인지 살펴보는 과정이다. 의도했던 연출 방향에 맞도록 콘텐츠와 플랫폼을 재조합하고 구성하는 능력이 핵심이다.

다섯 번째 트랙: 진화화(Evolve)

실제 대중과 만난 콘텐츠와 플랫폼을 어떤 방식으로 추가 보완할지, 발전 방향을 고민하는 순서다. 콘텐츠와 플랫폼은 론칭할 때부터 브랜드라는 생명력을 갖는데 방치하면 죽고 관리하면 활성화된다.

 

 

 

처음 기획안을 짜서 올렸을 땐 통과되지 못했다. 지금까지 한번도 해본 적 없는 형식이라는 게 이유였다. 가수가 노래 부르는 것을 보다가 전화를 걸어서 불우이웃을 돕게 한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보고된 바 없는 프로그램이었다. 선배들을 아무리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다. 윗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쫓아다니다가 개편 시즌을 놓쳤다. 다음 시즌에도 안 됐다. 결국 기획안만 만들어놓은 채 1년이 흘렀다. 정규 편성 때는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통 안 보여서 크리스마스 특집으로 한번 내보내보자고 주장했다. 반응을 보고 괜찮으면 정규로 편성하자고 우겨볼 참이었다. 그래도 결국은 성사되지 못했다. 이대로 끝나는 건가 싶었다. 그 다음 해 사장이 새로 왔다. 그분이 다음 시즌 개편안을 쭉 보다가 명색이 공영방송인데 뭐 공익적인 프로그램 없을까? 하면서 다시 고민해보라고 주문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던 기획안을 들고 갔더니한번 해보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전격적으로 성사된 정규 편성이었다. 개편 프로그램들이 시작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한 달, 밤샘 작업이 이어졌다. 정신없이 섭외하고 물색해서 프로그램을 만들기 시작했다.

 

잘한 걸까, 과연 사람들이 이런 형식에 호응을 해줄까, 무모한 시도는 아닐까. 방송이 나가는 내내 조마조마했다. 생방송을 내보내는 날, 주변에 아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었다. 내가 방송 하나 새로 시작하는데 보고 전화 좀 해달라고. 첫 방송부터 참여율이 저조하면 자칫 프로그램이 사라질 수도 있었다. 생방송 중 전화가 얼마나 왔고 얼마가 모금됐는지 화면 상단에 계속 노출되기 때문에 방송이 끝나자마자 성과가 체크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통화당 1000원이니까 2000만 원, 2만 통 정도만 걸려온다면 체면 유지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방송이 나가는 동안에도 주변 스태프들에게 계속 전화를 걸면서 한 통만 해달라고 부탁했다. 얘기할 만한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라도 해야 불안이 줄어들 것 같았다. 방송이 끝나고 떨리는 마음으로 최종 집계를 보는데, , 12만 통이었다. 채 한 시간이 안 되는 사이 12000만 원이 모인 것이다. 나도 놀라고 같이 만든 스태프들도 놀라고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그렇게 한 달여 지나고 IMF 구제금융 시기가 닥쳤다. 망했구나 싶었다. 다들 어렵다고 난리인데 누가 나서서 남을 도울까 했다. 마음을 비웠다. 기대치를 확 낮췄다. 모금액은 잠시 주춤하는 듯했다. 하지만 1998년으로 넘어가면서 최종 집계금액이 다시 상승곡선을 그렸다. 지금 돌아봐도 1998년 모금액이 가장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정이 많구나, 참 감성적인 민족이구나 그때 여실히 느꼈다.

 

프로그램이 감성을 자극하는 내용으로 구성된 영향이 클 것이다. 이 프로그램에 심은 감성을 자극하는 코드에는 무엇이 있나.

일단 출연한 연예인이 누구든 무조건 사연 속 주인공을 찾아가 직접 보고 느껴야 한다는 원칙을 강조했다. 아무리 연기에 능통한 연예인이라도 직접 가서 보는 것과 말로 전해 듣기만 하는 것은 천지차이다. 대충 그림만 만들고 대타를 쓰거나 거짓으로 흘리는 눈물로는 시청자를 함께 울게 할 수 없다. 실제로 가서 어려운 이웃의 얼굴을 보고 어떻게 사는지 둘러보고 봉사도 하고 대화도 나눠봐야 진심에서 우러나는 멘트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톱스타든, 아이돌이든 이 원칙은 처음 방송 때부터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함없이 지켜지고 있다.

 

불우이웃의 스토리를 소개할 때는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예컨대 부모님이 안 계신 어린 남매 둘이 살고 있는 가정을 소개한다고 한다면 그저 엄마아빠가 안 계셔서 학교도 잘 못 나가고 준비물도 잘 못 산다고 두루뭉술하게 나열하기보다는 누나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오늘따라 머리카락이 빗에 엉킨다, 마음이 복잡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술 시간에 쓸 찰흙을 사가야 하는데 엄두도 낼 수 없는 사치다, 그보다는 학교에 다녀올 동안 혼자 집을 지켜야 할 남동생이 걱정이다는 식이다. 실제 그들이 겪는 일상을 덤덤하게 보여주되 굉장히 구체적이고 디테일하게 설명한다. 과장은 금물이다. 가식적으로 보일 수 있다. 요즘은 워낙 인터넷이 빠르고 구석구석 접근하기 때문에 거짓으로 만들어낸 일은 금세 들통 난다.

 

첫 방송 진행은 이계진 아나운서가 맡았다. 방송 내용상 무조건 따뜻한 이미지를 지닌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소 투박하지만 다정한 말투를 지닌 아나운서를 물색했고 이계진 아나운서에게 부탁을 했다. 다음은 이금희 아나운서가 바통을 넘겨받았다. 이들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시청자 마음을 좀 더 진하게 건드렸을 것이다.

 

홍보도 열심히 했다. 특히 프로그램을 막 시작했을 때는 최대한 많이, 자주 노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평가를 받는 것은 그 다음이다. 지금은 이 프로그램이 많이 알려졌고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초기에는 무조건 널리 알리는 것을 목표로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것은 당시 라이벌로 겨루던 HOT와 젝스키스를 번갈아 출연시키며 경쟁을 붙였던 일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일단 젝스키스를 먼저 출연하게 한다. 얼마 후 HOT를 섭외해놓고지난번에 젝스키스 나왔을 때 모금액이 얼마였다고 슬쩍 흘린다. 그리고 나면 생방송 중에 팬클럽 차원의 대항전이 벌어진다. 팬클럽은 전국적으로 조직을 짜서 열광적으로 전화를 걸어온다. 한 사람당 3통까지만 걸 수 있기 때문에 아는 인맥을 총동원한다. 모금액이 쑥쑥 올라갔다. 당시 HOT 3억 원 정도 모은 적이 있는데 출연자 기준 역대 최대 금액인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 이 기록은 깨지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한국인의 민족성을 이해하고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었다는 점일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웃의 어려운 사정을 접했을 때 내 일이 아닌데도 눈물을 흘린다. 그리고 실제로 행동에 나선다. 이 프로그램은 모르고 지나칠 수 있는 사연을 눈앞에 펼쳐주고 좀 더 쉽게 행동할 수 있도록,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법을 제시했다는 데 의의가 있다.

 

 

 

최한나 기자 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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