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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동 나비엔의 성장 및 글로벌 전략

고객니즈 정조준한 기술개발 옹고집, 국내시장 넘어 미국과 러시아 공략 성공!

고승연 | 147호 (2014년 2월 Issue 2)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지현(중앙대 신문방송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여보, 아버님 댁에 보일러 놓아 드려야겠어요.”

 

20여 년 전 처음 전파를 탄 이 TV광고 속 카피는 잔잔한 감동을 일으켰다. 지금처럼 인터넷이나 SNS가 없던 시절임에도 코미디프로는 물론 각종 TV쇼에서 패러디까지 됐을 정도다. 경동나비엔(구 경동보일러)의 이 광고는 보일러 역사상 최고의 광고로 꼽힌다. 국내 TV 광고 중감성마케팅의 전설처럼 회자되고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 광고 이후 경동나비엔은 최악의 시련기를 보낸다. 물론 크게 히트 친 광고 때문은 아니다.

 

경동나비엔은 90년대 들어서 린나이와 귀뚜라미에 이어 가스보일러 시장점유율 3위에 머무르는 뼈아픈 시절을 보낸다. 그것도 2위와 차이가 많이 나는 3등이었다. 이 시기가 바로 경동나비엔의잃어버린 10이다. 기름보일러 시장에서는 여전히 경쟁사와 시장을 양분하고 있었지만 당시 기름보일러에서 가스보일러로 대세가 바뀌던 시점이었음을 감안하면 경동나비엔의 아픔은 컸다. 하지만 2000년대 초반부터 경쟁사와 1위를 놓고 경합을 벌이는 수준까지 올라섰다. 1999년까지 시장점유율 3위였던 경동나비엔이 불과 3∼4년 만에 1위를 다투는 수준이 되고 또다시 4∼5년이 지난 2009년이 되자 시장점유율 30%를 넘기고 매출에서도 경쟁사를 앞서는 독보적 1위가 됐다. 국내 시장 1위만 된 게 아니다. 2008년부터 제품을 출시하며 진입한 미국에서는프리미엄 온수기시장을 스스로 만들어내며 전체 순간온수기 분야 2, 콘덴싱 순간온수기 분야 1위가 됐다. 비슷한 시기에 진출한 러시아에서도 벽걸이 가스보일러 시장 1위에 올랐다. 2012년 한국무역협회 기준 국내 보일러 및 가스온수기 수출액의 63%를 점하고 있으며 현재 국내 시장 점유율은 35%를 넘나들고 있다.1

 

 

10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DBR이 기름보일러 강자에서 가스보일러 시장 3위로 추락했다가국내 시장 1해외 진출 성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경동나비엔의 성공 스토리를 취재했다.(그림 1)

 

 

 

아시아 최초로 콘덴싱 기술 개발, 그러나

 

1980년대 이전까지는연탄보일러의 시대였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연탄 아파트가 바로 연탄으로 방바닥과 물을 덥히는 보일러를 갖춘 주택이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기름보일러가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80년대의 대세는 누가 뭐래도 기름보일러였고 보일러 시장 전체의 성장도 기름보일러가 이끌었다. 1980년대 후반 기름보일러 시장은 연간 150만 대 수준이었다. 그런데 바로 이때부터 신도시 건설계획에 따라 대규모 아파트 단지 건설 붐이 일어나고 서울·수도권 지역 곳곳에도시가스 배관이 깔리면서 가스보일러의 시대가 도래한다. 기름보일러는 현재 연간 20만여 대 수준으로 축소됐고 가스보일러는 120만 대 이상 시장으로 성장했다. 전통적인 온돌 난방 문화를 바탕으로, 인구의 50%가 밀집돼 있는 지역(서울, 수도권)부터 도시가스 보급률이 90%에 육박하는 등 가스 공급 인프라가 갖춰졌다. 그 어느 나라보다 보일러 시장이 커졌고 이후 도시가스로의 전환도 빨랐다. 실제 한국은 현재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보일러 시장이기도 하다.2  그러나 기름보일러 시대를 지나 가스보일러로 패러다임이 바뀌고 시장도 커지던 시기에 경동나비엔은 가장 큰 어려움을 겪게 된다.

 

경동이 처했던 어려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 보일러 산업의 특징과 경쟁구조부터 살펴봐야 한다. 1980년대 대세였던 기름보일러 시장은 전통적으로 경동과 귀뚜라미가 양분하고 있었다. 90년대 가스보일러로의 전환 과정에서는 새로운 플레이어가 하나 등장하는데 바로 린나이다. 가스보일러 시장은 기름보일러의 두 강자를 린나이가 제압하면서 형성된다. 과점시장인 보일러 시장에서 가스보일러 부문 시장점유율 75%를 린나이, 귀뚜라미, 경동이 놓고 다투는 상황이 됐고 90년대 초반 일본 기술 기반의 린나이가 온수기 기술을 핵심으로 하는 가스보일러 기술의 표준규격을 함께 들고 들어오면서 시장을 장악해 30% 이상의 점유율로 시장 1위를 차지하게 된다. 대략적으로 귀뚜라미는 25% 2, 경동은 16% 정도의 점유율로 시장 3위 업체가 됐다. 앞서 언급했듯, 1위와 2위 간 차이보다 훨씬 큰 격차가 나는 3등이었다.

 

문제의 원인은 너무 앞서간 기술이었다. 1988년 가스보일러의 시대가 도래할 것을 예상한 경동나비엔(당시 경동보일러)은 네덜란드 회사와 기술제휴를 하며 과감한 투자를 감행해 국내 최초, 아시아 최초로콘덴싱 기술을 개발한다.3  당시 유럽에서는 이미에너지 효율성이 화두였고 콘덴싱 기술을 도입한 보일러를 사용하면 국가에서 보조금을 줄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달랐다. 경동의 과감한 투자와콘덴싱 보일러대량 생산은 90년대 내내 독이 됐다. 우선 가격이 2배였다. 물론 3∼4년만 쓰면 에너지 소비 효율성으로 인해 충분히 값어치를 할 수 있는 제품이었지만 국내 보일러시장은 B2B 중심이었다. 80년대 후반과 90년대 초반을 거치면서 불어 닥친 아파트 건설 붐에 따라 가스보일러의 가장 큰 시장이 열렸고 건설회사들은 자신들이 지불하지도 않을 미래의 가스요금을 생각하면서 굳이 2배 비싼 경동의 콘덴싱 보일러를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즉 경동은 당시 보일러를 개별 설치하는 단독주택 거주자들만 공략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다만 기름보일러 시장에서 여전히 점유율을 유지하고 있었고 현금이 계속 돌았기 때문에 10년간의 암흑기를 버틸 수 있었다.

 

10년간의 인내와 교훈, 그리고 도약

 

1) 반전의 기회를 잡다

 

‘회사가 진짜 어려워 질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감돌 무렵, 결정적인 반전의 계기가 찾아온다. 첫 번째 계기는 초기에 보급된 가스보일러의 교체시기가 도래한 것4 이었다. 두 번째 반전의 요소는 경동이 또 한 번 기술혁신에 성공한 것이었다.

 

보일러는 교체시기가 도래하면 비즈니스의 특성이 B2C로 바뀐다. 아파트 부녀회든, 다가구 주택 입주자든, 단독주택 거주자든 스스로 새 보일러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 된다. 10년간의 암흑기에도 꾸준히 콘덴싱 기술을 연구개발하면서 일반 보일러 대비 1.5배 수준으로 가격을 낮추면서 전력투구하던 경동은 때마침 신임 회장의 강력한 드라이브에 따라 일반 보일러와 가격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콘덴싱 보일러를 만들게 된다. 여기에 심지어 린나이의 첨단 기술인비례제어’5  기술과 각종 안전장치 기술까지 가미된다. 소비자들이 경동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가 생긴 셈이다. 이 두 가지가 맞아 떨어지면서 경동의 가스보일러 시장 점유율은 다시 오르기 시작한다. 1998∼1999년에는 여전히 3위였지만 불과 4∼5년이 지난 2001년과 2002년에는 린나이, 귀뚜라미, 경동나비엔이 25∼26%의 시장점유율을 각각 차지하면서 엎치락뒤치락하는 상황이 됐다. 90년대 중반의 가스보일러 교체 수요까지 몰리는 2008∼2009년에는 30% 점유율을 달성하고 이후 35%까지 오르며 독보적 1위가 된다. 기술혁신과 교체시기 도래(B2C로의 시장전환)라는 결정적인 두 요인만으로 경동의 부활을 전부 설명할 수는 없다. 결정적 계기에 적절하게 대응한고객중심주의역시 큰 역할을 했다.

 



2) ‘설치 기술자(인스톨러)’가 열쇠다

 

 

보일러 시장이 B2C로 바뀌었다고 해서 곧바로 최종 소비자(사용자)들이 브랜드를 고르고 제품을 선정하는 건 아니다. 각 지역과 동네마다 각종 수리와 보일러 설치를 해주는설치 기술자(인스톨러)’가 존재한다. 이들은 지역 토박이들로 각 집마다 어떤 보일러가 언제 설치됐는지를 꿰고 있다. 또 보일러 품질에 대한 여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보일러 설치의 성수기는 보통 11월에서 이듬해 1월까지 3개월이다. 하루에 열 건씩 일감이 몰려들기도 하는데 이때 설치가 쉽고 운반하기에 가볍고 초기 고장이나 오류가 없는 제품을 공급해야 한다. 주문이 밀려드는데 이미 설치했던 곳에서 연락이 와 스케줄을 빼야 한다면 유일한 성수기의 황금 같은 시간을 빼앗는 셈이 된다. ‘잃어버린 10동안에도 뚝심 있게 밀어붙였던 기술개발투자와 2001년 다시 시장점유율 경합을 벌이는 과정에서도 지속해온 기술력은 이때 힘을 발휘했다. 경동나비엔만이 갖고 있는 스테인리스 열교환기 브레이징(용접) 기술은 보일러의 무게와 크기를 줄이면서도 내구성을 강화할 수 있었고 많은 보일러 설치 기술자들은 자연스럽게 경동나비엔을 최종 소비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설치해줬다. 또 각 브랜드의 대리점 운영자들이 이 같은 상황을 파악하고 타 브랜드에서 경동나비엔으로 옮겨오는 일도 벌어졌다.

 

설치기술자와 대리점주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경동나비엔은 다른 업체들보다 한발 앞서 설치기술자들을 위한핫라인을 개설하고 기술적인 문의와 설치과정에서의 의문점 등을 풀어줬다. 6개월간의 실전 테스트에서도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점이 이들에 의해 발견되면 신고 즉시 연구센터로 보고가 올라가 문제를 개선할 수 있도록 했다. 작년에는 경동나비엔을 취급하는 보일러 설치기술자들과 대리점주들을 모아 평택에 있는 경동 인재개발원에서 12일로 교통비까지 지급하면서 신제품 특성 설명과 설치방법을 교육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3) “B2C 시장이 열렸다. 콜센터부터 만들라

 

 

경동나비엔은 대리점주와 모든 브랜드를 취급하는 보일러 설치기술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에 그치지 않고 최종 소비자의 니즈도 충실히 파악해나갔다. 보일러는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막연하게물 덥히는 기계’ ‘난방 하는 기계정도로 생각할 뿐 어떤 원리로 어떻게 작동하는지 잘 모른다. 어느 제품이 좋은지 물어볼 만한 곳도 마땅치 않고 문제가 생겨도 전문가가 오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런데 보통 추울 때 가장 필요한 제품이다 보니 문제가 생겼을 때의 절박함은 다른 기계나 전자제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최종 소비자에게는 보일러 회사나 기술자가이 될 수밖에 없고 수리비의 경우부르는 게 값이 되기 쉬운 구조다. 경동나비엔은 이 같은 상황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2000년대 초반 경쟁사들과 치열한 1위 다툼을 하던 시기에 국내 최초로 소비자 콜센터를 만들고 이후 무상수리 3년 보증에 나선다. AS가 확실한 브랜드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졌고 실제로 혜택을 본 사용자들은 또 한번 입소문을 냈다. 결국 다른 업체들도 똑같이 콜센터를 만들고 따라왔지만 초기에 먼저 구축한 ‘AS 되는 보일러’ ‘언제든 전화해 궁금한 걸 물어볼 수 있는 브랜드라는 이미지는 강력했다. 다른 보일러 회사들이규격 기관등과 가까워지려 할 때 B2C로의 비즈니스 성격 변화를 읽고 소비자에게 접근한 경동나비엔의 전략은 큰 효과를 발휘했다. (그림 2)

 

북미와 러시아에서의 성공신화를 만들다

 

1) 글로벌 기업의 꿈

 

국내 시장에서의 1위 자리가 탄탄해질 무렵인 2007∼2008, 경동나비엔은 또 한번의 도전을 감행한다. 바로 연간 1000만 대 규모의온수기시장이 형성돼 있는 미국과 현재는 100만 대 수준의 시장이지만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큰 러시아 시장 진출이다. 사실 국내 보일러 내수시장은 교체 수요로 크기가 유지되는 한편 소득 증대에 따른고급 보일러’ ‘첨단 기술 보일러수요까지 생기면서 매출액 기준으로는 시장이 더 커질 것으로 예측되는 상황이었다. 굳이 경동나비엔이 해외 진출에 목을 맬 이유는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손연호 회장은 국내 시장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30조 원으로 추정되는 전 세계 보일러/온수기 시장에서 150명의 연구인력으로 30년간 R&D에 힘써 온 경동나비엔이 언젠가 글로벌 1위가 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미 2004년에글로벌 No. 1 비전 선언까지 해둔 상태였다. 전자회사나 타 업종에서 영입한 최고의 인재들을 해외로 내보냈다.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미국과 러시아 진출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준비기간을 거쳐 러시아와 미국에서 각각 2008년부터 경동나비엔의 제품이 출시됐다. 러시아에서는 보일러를 팔았고, 미국에서는 온수기를 팔았다. 본래 온수기와 보일러는 제품의 구조가 같기 때문에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러시아에는 2∼3조원 규모의 매출을 자랑하는 독일 보시사와 바일란트사, 그리고 영국의 박시사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보일러보다 온수기 위주의 수요가 존재하는 미국에서는 미국 업체들의 저탕식 온수기에 맞서 린나이 등 일본 업체들이순간온수기시장을 만들어 시장지분의 약 3%를 차지하고 있었다. 매출 3000억여 원 수준의 경동나비엔은 오직기술력하나만 믿고 러시아와 미국에서 각각 전투에 나섰다.

 

2) 동토의 땅 러시아에서 독일 업체와 한판 붙다

 

2008년 초 러시아로 건너간 김용범 마케팅본부장은 보일러/온수기 박람회에 참석해 업계 관계자, 설치기술자, 유통업자 등과 인사를 나눈다. 이미 연매출 2조 원 이상의 글로벌 플레이어들이 장악하고 있던 시장이라 부담감과 두려움도 컸다. 그런데 그날 김 본부장은이상한 불만을 듣게 된다. “한국의 보일러 업체에서 나왔다” “콘덴싱 기술을 비롯해 훌륭한 기술력을 가진 회사라고 소개하자 대부분여긴 독일제를 주로 쓰는데 고장이 너무 잘난다. 당신 회사 물건이 고장이 잘 안 나는 물건이라면 살 의향이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정밀과학과 기계기술의 결합체인 첨단 보일러를 독일의 글로벌 회사가 제대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 고장이 잘 난다는 얘기는 아무리 들어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주로 물을 가열하고 일정 정도 가열이 끝나면 멈춰주도록 하는컨트롤러가 작동을 자주 멈춘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김 본부장은고장난 컨트롤러를 들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경동나비엔의 신뢰성(품질관리) 부서, 연구소 등에서는 문제점 파악에 돌입했다. 기계에는 전혀 이상이 없었다. 뛰어난 품질을 자랑하고 있었다. 답은 다른 곳에 있었다. 전기공급 인프라가 취약한 러시아에서는 전기사용량이 폭증하면 전압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독일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보일러 컨트롤러는저전압 현상이 나타나면 보일러 오작동이나 전자기기 이상을 예방하기 위해 자동 차단되는 안전장치가 있었다. 그래서 작동이 멈췄고 기술자가 와서 컨트롤러를 갈아주는 등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우수 기술자 부족으로 문제의 원인을 잘 짚어내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문제의 원인을 정확히 파악하고 나자 해법도 찾을 수 있었다.

 

‘러시아에 적합한 컨트롤러를 개발한 것이다. 보일러가 가동될 수 있는 전압의 한계선을 찾은 뒤에 안전상 문제가 없는 최저선을 다시 찾고 전압이 낮아지더라도 계속 보일러를 돌릴 수 있도록 했다. 만약 경동나비엔이고장이라는 단어를 오해하고 단지 독일제 보일러보다품질이 더 우수한 보일러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면 분명 실패했을 확률이 높다.

 

새로 개발한 컨트롤러를 단 보일러를 들고 다시 러시아를 찾았고 시제품 테스트에서고장이 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본격적인 세일즈에 나섰다. 경동나비엔은 이미 전압공급이 안정적인 대도시와 공공기관의 비싼 보일러는 독일제가 장악하고 있고 콘덴싱 보일러 같은하이엔드제품에 대한 구매력은 떨어지는 시장이라는 점을 감안해 중저가 전략을 썼다. 마침내 러시아 최대 난방기기 유통업체인 라바라토리야 오브 히팅사() 2009년부터 5년간 최대 30만 대 규모의 가스보일러 장기 수출계약을 체결하기에 이른다. 2009, 때마침 러시아에 15년 만에 한파가 찾아와 NAVIEN이라는 경동나비엔 보일러의 러시아 론칭 브랜드를 고객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 경동나비엔은 2012년 러시아 가정용 벽걸이 보일러 시장에서 글로벌 강자들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3) 1000만 대 온수기 시장 북미, 프리미엄 온수기로 승부하다

 

온수기 1000만 대 시장인 북미에서도 성공했다. 2006년 미국 현지법인을 설립한 뒤 곧바로 제품을 출시하지 않고 시장상황을 살피고 있었다. 미국의 온수기 시장은 저탕식 온수기6 가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경동나비엔처럼 순간적으로 물을 가열하는 순간온수기 시장에는 일본의 린나이, 노리쯔 등 쟁쟁한 회사들이 지분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틈새시장 자체는 생각보다 작았다. 뛰어난 기술력으로 수조 원의 매출을 올리는 일본의 글로벌 강자들이 북미에서는 수백억 원의 매출도 못 올리며 1000만 대 온수기 시장에서 겨우 연 30만 대 정도를 팔고 있었다. 역시나 뭔가 이상했다. 잘 안 팔리는 이유 역시잦은 고장이었다. ‘기술 강국의 일본 업체들이 고장이 잘 나는 제품을 만들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연구에 돌입했다.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미국의 도시가스 배관은 50∼60년 전에 구축된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100년 전에 깔린 배관도 있었다. 당시에는 현재와 같은 가스 수요를 예측하지 못했기 때문에 관의 굵기를 가늘게 했던 게 문제였다. 순간적으로 많은 양의 가스를 끌어와 빠르게 가열해야 하는 순간온수기 방식에는 맞지 않는 배관 굵기였다. 일제 최첨단 순간온수기 역시 순간 가열에 필요한 가스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으면 가스 공급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작동을 멈춰버렸다. 순간온수기는 물을 덥혀 저장하는 방식도 아니기 때문에 몸을 씻는 도중 갑자기 냉수가 나오는 황당한 상황이 벌어진다. 소비자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다.

 

단지저전압 현상에도 문제없이 계속 보일러를 가동하도록 만들면 됐던 러시아와 달리 이번엔 경동나비엔에도 시간이 필요했다. 가스공급량의 문제를 해결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각 주택 인근에 깔린 가스 배관을 바꿀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기술 개발에 들어가는 한편 2008년부터 제품 판매를 시작했다. 당장 일본 온수기 업체들이 겪고 있던 문제를 해결한 건 아니었지만 열효율 82% 수준의 일본제 순간온수기보다 98.8% 효율을 인정받은 경동나비엔의 콘덴싱 온수기는 경쟁력이 있었다. 때마침 오바마 행정부는에너지 고효율 제품을 쓸 경우 세금 환급을 해주는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다. 세계 최고 효율을 내세워 일본 제품보다 비싸게 팔아도 1500달러의 세금 환급을 받을 수 있었던 소비자들은 과감하게 경동나비엔 제품을 선택했다. 그리고 2012년 고효율 모델의 후속모델로 98% 효율은 유지하되 가는 가스관으로부터 순식간에 가스를 빨아들여 안정적으로 순간 가열을 할 수 있는 온수기를 개발해 판매하기 시작했다. 그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프리미엄 순간온수기 시장이 열렸다.

일본제 순간온수기보다 20% 이상 비싸서온수기의 캐딜락이라 불리는 NPE라는 제품을 무기로 경동나비엔은 2012년 콘덴싱 순간온수기 시장에서 1위가 됐고 2013년 미국 전체 순간온수기 분야(콘덴싱+일반)에서 2위가 됐다. 2014년에는 1위가 거의 확실시되고 있으며 일본 업체들이 거의 파이를 키우지 못했던 순간온수기 시장 자체를 키우고 있다. 북미법인의 매출액은 2008년부터 연평균 41%씩 성장해 현재는 1억 달러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그림 3)

 

보일러 패러다임의 변화, 또 한번의 위기이자 기회

 

경동나비엔은 최근 가스보일러 시설의 모든 규격을 유럽식으로 통합한 중국 시장에 진출하기 위한 전략을 짜고 있다. 그러나 나라 하나하나에 맞게 진출 전략을 짜는 것 이외에도 보일러 시장 전체의 패러다임 변화에 대비하고 있다. 최근 세계 최대 가전쇼에 자동차가 등장하는 것에서 볼 수 있듯 전자제품과 자동차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조만간 보일러 시장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는 게 경동나비엔의 예측이다. 장성환 경동나비엔 기획실장은스털링 마이크로CHP 기술7 은 경동나비엔이 세계에서 네 번째로 개발했다. 친환경을 화두로 만들어진 기술인데 발전 기능까지 포함된 보일러라는 건 아주 혁명적인 물건이라며이처럼 보일러의 개념 자체가 바뀌는 상황에서 앞으로 어떤 시장이 열릴지는 아무도 모른다고 말했다. 또 최근 스마트폰으로 외출 후에도 보일러를 제어할 수 있는 기술도 개발했다. 보일러가 점점 최첨단 기술제품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격변기에 예측실수를 하거나 유연하게 대응하지 못하면 지금의 내수시장 1, 해외 진출 성공 등 모든 신화가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더군다나 경동나비엔 같은 기술력 기반의 원아이템 컴퍼니는 효율적인 R&D와 전략 수립 등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한 번의 경영판단 실수로 회사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약점 역시 갖고 있다. 경동나비엔이 겪었던잃어버린 10이 바로 그 위험성을 보여주는 사례다. 경동나비엔에는 또 한번의 위기이자 기회가 기다리고 있는 셈이다.

 

현재 경동나비엔은 2020년까지 세계 난방 시장 1위를 목표로 설정했다. 경기도 평택시 서탄면 일원에 13만 제곱미터( 4만 평) 규모의 신공장을 건설 중이다. 서탄 신공장은 연간 150만 대의 보일러와 온수기 생산능력을 확보할 수 있는 규모다. 기존 80만 대 규모의 생산시설에 더해 최대 230만 대까지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보일러의 패러다임변화는 시작됐지만 궁극적으로 변화의 방향이 정확히 어디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또 한번 과감한 투자에 나선 것이다. 향후 경동나비엔의 행보에 귀추가 주목되는 이유다.

 

성공요인 및 시사점

 

first mover advantage(선발주자 이점) time-compression diseconomies(시간압축의 비경제성)

 

국내 시장에서 경동나비엔이 시장의 선두주자로 부상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우수한 콘덴싱 기술에 다른 경쟁업체들보다 먼저 과감하게 투자를 하고 그 후로 지속적인 기술 개발과 제품개선, 원가 절감에 역량을 결집했다는 점이다. 경동나비엔이 콘덴싱 기술에 처음 투자한 시기는 아직 국내 시장이 기름보일러 제품에 의해 주도되던 80년대 후반이었다. 콘덴싱 기술은 에너지 효율성의 측면에서 분명히 기름보일러나 일반 가스보일러 기술에 비해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지만 가격의 측면에서 기존 기술 기반 제품들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보일러 구매가 주로 아파트나 주택 건설업자들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가격 경쟁력의 측면에서 열세인 경동의 콘덴싱 기술 기반 보일러는 뛰어난 기술적 우수성과 장기적인 경제성에도 불구하고 건설업자들의 외면을 받았다. 이 시기를 경동의 암흑기라고 표현할 만큼 경동은 콘덴싱 기술에 일찍 투자한 탓에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경동의 콘덴싱 기술에 대한 과감한 투자는 90년대 이후부터 그 빛을 발하게 된다. 경동은 콘덴싱 기술에 최초 투자한 1988년 이후 소비자들의 외면과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콘덴싱 기술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기술을 개선하고 제품의 생산단가를 낮추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 결과 경동나비엔은 가격을 일반 보일러 대비 1.5배 수준으로 낮추고 마침내는 일반 보일러와 가격 차이가 크게 나지 않는 콘덴싱 보일러를 만들게 된다. 과감하고 지속적인 기술 혁신에 대한 선구적인 투자는 경동에 시장 선도업체로 부상할 수 있는 도약의 기회를 제공했다. 보일러의 교체시기가 도래하는 90년대 후반부터 콘덴싱 기술에 기반한 경동 제품의 기술적인 우수성과 경제성은 최종 소비자들이 타사 제품이 아닌 경동 제품으로 갈아타는 충분한 이유를 제공했다는 얘기다.

 

1988년 최초 투자 이후 2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축적된 기술적인 역량과 노하우는 경동에 분명한 경쟁우위를 안겨줬다. 다른 경쟁자들이 결코 쉽게 모방할 수 없었다. 전략경영의 초석을 놓은 학자들 중 하나인 잉그마 디릭스와 캐럴 쿨8 은 기업의 경쟁우위를 설명하는 요인으로서시간의 중요성에 대해서 역설한 바 있다. 이들은 우량 기업의 경쟁우위의 원천으로서 시간의 중요성을 주장하며시간압축의 비경제성(time-compression diseconomies)’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이 개념은 20년 동안 하루 5시간씩 연구/개발에 시간을 쏟는 것이 10년 동안 하루 10시간씩 시간을 쏟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동의 콘덴싱 개발 이후 한참 뒤에야 비로소 같은 기술에 투자하기 시작한 경동의 경쟁자들의 입장에서는 아무리 많은 금액과 인력을 할애한다고 하더라도 십 수 년이 넘는 경동과의 시간적인 기술의 격차를 쉽게 극복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이처럼 경쟁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유망한 기술에 경쟁자들보다 먼저 투자하고 이러한 투자가 단기적으로는 재무적인 성과에 기여하지 못하더라도 이를 꾸준히 지속할 수 있는 전략적인 인내가 요구된다. 이 과정에서 경동나비엔이 보여준 성공은 보일러 산업은 물론 다양한 기계, 기술 산업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세계 2위 규모의 한국 시장에서의 강력한 역량 구축

 

경동나비엔이 해외 시장에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 시장에서 강력한 역량을 구축했기 때문이다. 온돌문화를 갖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난방은 필수요소다. 이로 인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큰 보일러 시장이 형성돼 있고 경쟁이 극도로 치열하다. 내수시장의 성장세는 제한돼 있는데 이는 지역난방의 활성화와 건설시장의 위축 등에 기인한다. 또한 현재 상위 3개 회사의 시장점유율이 약 80% 수준에 달하고 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포터 (Michael Porter) 교수가 제시한 국제화 다이아몬드 모델(Diamond Model)에 따르면, 기업의 국제경쟁력의 가장 중요한 원천은 바로 내수시장에서의 치열한 경쟁이다. 80년대 일본 전자업체들이 세계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높은 기술력에 기인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일본 전자업체들의 기술역량의 원천은 바로 일본 국민들의 전자제품에 대한 높은 기대와 이에 부응하기 위한 내수시장에서의 일본 전자업체들의 치열한 경쟁에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경동나비엔의 경우도 경쟁이 치열한 내수시장에서 린나이, 귀뚜라미 등의 우수 기업들과 생존과 혁신을 위한 경주를 30년 동안 지속해 오는 과정에서 상당한 기술적, 마케팅적 역량과 노하우를 습득하게 됐고, 이러한 역량들이 바로 해외 시장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둘 수 있게 해 준 원천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강력한 국내시장에서의 경쟁과 경쟁력을 바탕으로 한 해외 시장 진출은 국제경영 분야에서 기업의 국제화와 해외 진출을 설명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론이다. 내수시장에서 경쟁이 치열하거나 어렵다고 해서 그 대안으로 해외진출을 꿈꾸는 건 위험할 수 있다는 점, 내수시장의 경쟁력이 해외에서 성공할 수 있는 요건 중 하나라는 기본 중의 기본을 잘 일깨워 준다.

 

‘고객의 언어를 이해하고 국가별 특성 파악

 

어느 기업이든고객의 소리를 듣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실제 그게 제대로 반영돼 제품개선이나 혁신에 성공하는 경우는 드물다. 바로 고객의 언어 뒤에 숨겨진 진실을 파악하려는 노력을 잘 하지 않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나 미국에서나 유통업자와 설치 기술자들은보일러가 고장이 잘 난다고 표현했지만 복잡하고 자세한 얘기는 들려주지 않았다.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진실, 즉 러시아의 경우에는 들쭉날쭉한 전압 문제가, 북미지역에서는 순간온수기에 맞지 않는가는 배관의 문제가 숨어 있었다. 고객의 표현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고객들이 쓰는 언어의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찾고 노력하려는 연구를 하지 않았다면 미국이나 러시아에서 큰 실패를 맛봤을 확률이 높다는 말이다. ‘라는 질문을 통해고장이라는 단어에 합리적 의심을 품고 고객의 소리 이면을 파악하려는 노력이 진짜 고객의 소리를 듣는 과정이라는 점을 일깨워 준다. 고객의 소리 이면에 숨겨진 진실을 파악한 경동나비엔은 각 나라에 맞는 해법을 갖고 각각 다른 시장전략으로 해외 진출을 꾀했다. 이미 전압이 안정적인 대도시에서는 고가의 독일제품과 영국제품이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중소도시와 주변지역의 신규/교체 보일러 수요와 러시아시장의 전반적 구매력을 파악해중저가 제품 전략으로 세일즈를 펼쳐나갔다. 전압문제 해결은 대단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싸고 좋은 제품을 빠르게 만들어 팔 수 있었다. 그러나 북미시장에서는 일단에너지 효율측면에서 가장 앞서 있던 기술로 먼저 시장에 진출해 유통망을 구축하면서 미국의 배관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고도의 기술을 수년에 걸쳐 개발했고 이를 적용한 제품을 그 어떤 제품보다 비싼 가격에프리미엄화해 판매해 나갔다. 각기 다른 문제에 따라 다른 해법이 나왔고, 이를 고려해 철저하게 적합한 현지화 전략을 구사했다는 뜻이다. 각 국가의 제도, 문화, 심지어 기술적 인프라까지 고려해 제품 특성을 바꾸고 시장에서 어떤 등급의 제품을 팔 것인가까지 치밀하게 전략을 짜고 고민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대목이다.

 

고승연 기자 seanko@donga.com

 

강진구 고려대 경영대 교수 jg20605@korea.ac.kr

강진구 교수는 연세대 경영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미국 펜실베이니아대(University of Pennsylvania) 와튼스쿨(Wharton School)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싱가포르 난양경영대(Nanyang Business School) 교수를 거쳐 현재 고려대 경영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관심 분야는 경영전략, 혁신과 경쟁우위, 기업의 사회적 책임, 경영자 의사결정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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