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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ative Minds

치밀한 스콧vs. 유연한 아문센 미지의 땅 남극정복은 적응력이 갈랐다

이병주 | 145호 (2014년 1월 Issue 2)

 

 

편집자주

창조와 혁신이 화두인 시대입니다. 예술가, 문학가, 학자, 엔지니어, 운동선수 등 창작가들의 노하우는 기업 경영자에게 보석 같은 지혜를 제공합니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이 새로운 관점에서 바라본 창조의 노하우를 소개합니다.

 

1910 61일 수많은 고위관리들과 영국 시민들이 런던의 템스강에 모여 남극으로 떠나는 테라노바호를 향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런던을 떠난 후 보름 동안 해군 범선이 테라노바호를 예인해 영국 해안을 돌았다. 포틀랜드 부두에서는 세계 최강의 영국 해군 전함들이 양쪽으로 쭉 늘어서 테라노바호가 가로질러 나갈 길을 만들었고 갑판 위에 도열한 군인들이 뜨거운 환호성을 보냈다. 영국인들은 이번 탐험을 이끌고 있는 해군 대령 스콧(Robert Falcon Scott)이 세계 최초로 남극점을 정복할 것을 확신했다.

 

20세기 초는 각국이 극지방 탐험 경쟁을 통해 국력을 과시하던 때였고 강대국 영국이 다른 나라를 월등히 앞서나가던 시점이었다. 영국은 이미 지난 10년 동안 두 번에 걸쳐 남극에 탐험대를 출항시켰다. 1901년에는 스콧이 이끄는 디스커버리호를 통해 무려 2년 동안 남극에 머물면서 지형을 탐사했으며 1907년에는 스콧 밑에 있던 섀클턴(Ernest Shackleton)이 님로드호를 타고 남위 88 23, 즉 남극에서 불과 180㎞ 떨어진 곳까지 정복하고 돌아왔다. 두 번의 탐사를 통해 남극 지방의 지형이나 지질에 대한 자료가 충분히 쌓였고 남극점으로 가는 안전한 루트를 개척했다. 이로 인해 남극 탐험은 영국인들 간의 경쟁이 됐다. 또 영국은 왕립지리협회를 통해 남극 탐험에 폭넓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다른 나라에서는 탐험가가 정부와 후원자를 찾아 다니며 부족한 자금을 조달했지만 영국은 왕립지리협회에서 모든 준비를 해놓고 탐험가를 모집했다. 여기에 이미 남극 탐험 경험도 있고 여행기를 출판해 유명해진 스콧이 뽑힌 것이다. 영국은 거금을 들여 모터썰매를 개발한 후 노르웨이의 산악지대에서 실험을 했다. 남극 지방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위해 생물학자, 지질학자, 기상학자 등 12명의 과학자들도 탐사에 동행했다. 이처럼 준비를 철저히 했으니 영국인들은 이번 탐사의 성공을 굳게 믿었다. 국민적 여망을 담고 스콧과 60여 명의 대원들은 모터썰매 3, 조랑말 19마리, 시베리아산 개 33마리를 태우고 남극으로 향했다.

 

 

스콧이 영국을 돌며 선상 퍼레이드를 하던 67일 밤, 노르웨이의 아문센(Roald Amundsen)도 남극을 향해 프람호의 닻을 올렸다. 그는 스콧과 달리 세상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밤에 조용히 출항했다. 그 이유는 북극 지방을 탐사한다고 후원자들에게 거짓말을 했기 때문이었다. 아문센도 처음에는 북극 항로를 개척하면서 북극점을 정복하려 했으나 1909년 가을 미국인 피어리가 북극을 정복했다는 소식에 목적지를 갑작스럽게 바꾼 것이다. 이 사실을 친형과 일등항해사에게만 알리고 남극 탐험을 혼자서 준비했다. 출항 후 한참 지난 후에야 노르웨이 국왕과 언론, 그리고 후원자들에게 편지를 보내 목적지 변경을 알렸다. 심지어 대원들도 오랫동안 사실을 알지 못했다.

 

스콧이 남극에 대한 풍부한 경험과 자료, 풍족한 자원과 최신식 장비를 등에 업고 탐사에 나섰던 데 반해 아문센은 그린란드산 개 100마리와 약간의 식량만 준비했다. 부족한 식량은 현지에서 사냥을 통해 해결할 셈이었다. 스콧은 매우 과학적이었으나 남극에 대한 지식이 적었던 아문센은 주먹구구식이었다. 남극 탐험이라는 고도의 불확실한 모험에서 어떻게 아문센이 막강한 스콧을 이길 수 있었을까?

 

남극은 스콧의 생각과 달랐다

합리적인 스콧은 왕립지리협회의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고 매우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아문센이 오로지 개썰매 하나에만 의지한 데 반해 스콧은 다양한 이동 수단을 준비했다. 우선 이번 탐사를 위해 체인을 단 모터썰매를 개발했다. 무겁고 속도가 느린 게 단점이지만 대원들의 체력을 절약할 수 있었다. 추위에 잘 견디는 몽고산 조랑말은 빠르면서도 힘이 세서 짐을 옮기는 데 효과적이었다. 다만 개에 비해 산세가 험준한 곳에서 이동이 힘들고 극지방까지 갈 정도로 추위에 강하지 않다는 게 약점이었다. 조랑말은 셰클턴이 지휘한 두 번째 탐험에서 시험 삼아 써봤는데 짐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랑말을 대폭 늘려 중간 지점까지 활용할 계획이었다. 여기에다 전통적으로 극지방에서 활용하는 개썰매 팀과 스키 장비를 장착하고 직접 썰매를 끌고 가는 팀을 구성했다. 네 가지 이동 수단은 각기 속도가 달라 체계적인 이동 전략을 세워야 했다. 팀을 나눠 스키를 타는 조가 먼저 출발하면 속도가 느린 모터썰매가 뒤를 잇는다. 한참을 기다린 후에 짐을 가장 많이 실은 조랑말이 이동을 시작하고 속도가 가장 빠른 개썰매가 마지막으로 출발한다. 스콧은 여러 번의 시행을 통해 각각의 이동 수단의 속도를 정확하게 측정해 목표 거리당 이동 시간을 산출했다. 이에 따라 출발시간을 배분했다. 그렇게 해서 거의 같은 시간에 목표 지점에서 만날 수 있게 만들었다.

 

이렇게 복잡한 전략을 세운 이유는 가능한 한 많은 짐을 옮기면서도 대원들의 힘을 아끼기 위함이었다. 수개월 이상 소요되는 여정은 식량이나 연료 등 물자가 많을수록 유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피로해진 대원은 모터썰매를 타면서 체력을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극지방에 가까운 곳까지 최대한 많은 대원과 물자를 이동시킨 후 체력 상태가 가장 좋은 대원을 뽑아 남극점을 정복할 계획이었다.

 

스콧의 계획은 남극에 도착한 첫날부터 뒤틀어졌다. 테라노바호에서 모터썰매를 내릴 때 무거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얼음이 깨져 바닷속으로 가라앉아 버렸다. 두 대밖에 남지 않은 모터썰매도 문제를 일으켰다. 통상 탐험대는 6월에 북반구에서 출발해 남극의 여름인 1월에 도착한다. 그래야 바다가 얼지 않아 남극점에 가장 가깝게 배를 정박시킬 수 있다. 베이스캠프를 구축하고 6∼7월의 겨울을 나면서 식량기지도 건설하고 주변 지형도 탐사하며 준비기간을 갖는다. 그리고 초여름인 10월에 출발해 온도가 영하20도까지 올라가는 한여름을 지나 2월에 끝마친다. 여러 차례 추운 지역에서의 테스트에서도 문제가 없었던 모터썰매가 1년 가까이 혹한의 기후에 노출되다 보니 내구성이 떨어졌다. 금방 만들었을 때는 잘 작동됐지만 영하60도까지 내려가는 추위를 오랜 기간 견디지 못하고 엔진이 멈춘 것이다. 게다가 모터썰매를 제작한 엔지니어는 이번 탐사에 데리고 오지 않았다.

 

조랑말도 문제였다. 조랑말은 눈이 많이 내리면 눈 속에서 옴짝달싹하지 못했다. 조랑말을 책임지는 대원들은 눈 속에서 조랑말을 끄집어내느라 온 힘을 다해야 했다. 또 조랑말은 눈발을 무서워해 날씨가 나빠지면 달리지 못했다. 폭풍이 몰아치면 눈 속에 그냥 서있는 조랑말을 보호하기 위해 대원들이 짚으로 몸을 문질러줘야 했다. 안개가 끼면 조랑말의 몸에 습기가 스며들어 얼어붙었다. 대원들은 연신 조랑말을 문지르느라 힘이 다 빠졌다. 조랑말은 짐꾼 역할은커녕 오히려 짐이 돼버렸다. 남극 탐험을 시작하기도 전에 식량기지를 건설하며 조랑말 절반이 죽어나갔다. 그래도 스콧은 남은 조랑말을 활용해 탐사팀을 꾸렸다. 계획대로 수많은 짐을 옮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조랑말이 필요했다. 결국 조랑말은 행군을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탐사에 방해가 돼 모두 사살했고 그 짐들은 모두 개들이 넘겨받았다. 개들도 지쳐서 생각보다 빨리 죽었다. 스콧은 맨 걸음으로 걸어가야 했다. 스콧은 1911 1214일 도착한 아문센보다 한 달가량 늦은 이듬해 117일에야 남극점에 도착했다. 결국 스콧과 동료 네 명은 돌아오던 길에 기력이 쇠해 모두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이처럼 계획과 실제 상황은 전혀 다르게 전개된다. 특히 불확실성의 공간인 남극은 스콧의 머릿속 계획과는 전혀 달랐다. 인간이 아무리 똑똑해도 불확실한 미래를 그대로 예측할 수는 없다. 한두 번은 맞출 수 있다 하더라도 예측에 예측을 거듭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계획이 들어맞을 확률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 불확실성은 예측하는 게 아니라 대응하는 것이다. 남극에 대한 정보가 미미했던 아문센은 남극 탐험에 그렇게 접근했다.

 

아문센은 스콧과 무엇이 달랐나

아문센이 남극 정복에 성공한 첫째 이유는 가장 중요한 본질, 추위를 이기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아문센은 오랫동안 북극점 정복을 꿈꿔왔다. 선박회사를 경영하는 부잣집 아들로 태어난 아문센은 31세가 되자 상속받은 유산으로 형제들의 반대에도 배를 구입하고 후원자들을 구해 북극 탐험에 나섰다. 4년 가까이 걸린 이 탐험에서 최초의 북서항로를 개척하는 성과를 올렸으나 기상조건이 맞지 않아 북극점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북극 정복을 위한 생존방법을 키우기로 결심했다. 배를 돌려 귀국하지 않고 극지방에서 에스키모들과 함께 생활하며 겨울을 보내기로 다짐했다. 아문센과 친해진 에스키모 가족은 그에게 풍속과 관습을 가르쳐줬다. 그는 에스키모의 생존방식을 완벽히 습득할 때까지 극지방을 떠나지 않았다. 결국 3시간 만에 이글루를 짓는 법을 배웠고 개와 교류하는 기술을 터득했다. 이외에도 모피 옷의 장점과 썰매의 활주부를 얼려 매끄럽게 타는 법을 알아냈다. 이런 훈련 덕분에 남극에 도착하자마자 그린란드산 허스키들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었다. 18마리가 썰매 세 대를 끌고 첫 번째 식량저장고를 설치하기 위해 길을 나섰을 때 아문센은 스키를 잘 타는 대원에게 앞서서 달리라고 지시했다. 허스키들은 무리를 이끌 지도자가 있어야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문센은 탐험 내내 대원들도 에스키모 개들과 직접 경험을 쌓고 추위를 이기는 능력을 기르도록 전력을 기울였다. 식량을 많이 준비하지 않은 것도 에스키모처럼 물개나 바다표범, 펭귄을 잡아먹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문센이 불모의 땅에 스스로를 적응시키려고 한 것과 달리 스콧은 미지의 자연을 인간의 과학기술로 정복하려고 했다. 모터썰매를 만들고 다양한 이동 수단을 가져온 것도 이런 생각 때문이었다. 심지어 스콧은 본토에서 가져온 식량만으로 탐험 기간을 보내려고 했다. 수십 명의 대원과 개들이 먹을 육류를 운반하기 위해 배에다 거대한 냉동실을 만들었다. 여기에다 양 162마리와 소 세 마리를 비롯해 송아지 요리 통조림 등을 3톤의 얼음 속에 차곡차곡 저장했다. 결국 짐의 무게가 늘어나 탐험에 장애물이 됐다.

 

다양한 환경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무기를 갖추기보다 단 하나의 본질과 핵심에 집중하는 게 더 낫다. 짐 콜린스가 연구한 위대한 기업들은 모두 업의 본질을 꿰뚫고 핵심가치에 집중했다. 불확실성을 극복하고 위대한 기업으로 도약한 기업들도 대부분 열정을 가지고 잘할 수 있는 일에 매달렸다. 본질을 추구한 것이다.

 둘째, 임무에 맞는 적합한 사람만 뽑았다. 지식이나 다른 능력은 보지 않고 오로지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사람으로만 대원을 구성했다. 그래서 학자보다 얼음 바다에서 직접 경험을 쌓은 사람들을 고용했다. 강인한 체력과바다사람 근성외에도 구체적으로 두 가지 기술을 지니고 있는지 집중적으로 살폈다. 개를 다룰 수 있는 기술과 스키를 타는 능력을 검증했다. 스키 챔피언은 이렇게 뽑힌 것이다.

 

 

 반면 스콧은 남극 탐사에서 계획한 업무 중심으로 여러 분야의 사람들을 뽑았다. 심지어 모험을 해보고 싶다며 돈을 내고 항해에 참가한 사람도 있었다. 그는 기병대 대위로 조랑말을 잘 다룰 것 같아 대원으로 받아줬다. 과학자들은 탐사에는젬병이었다. 가령 동물학자들이 부화 단계에 있는 황제펭귄의 알을 얻기 위해 탐사에 나섰을 때 책임자인 스콧도 따라 갔다. 그들 중 스키를 탈 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므로 손수 썰매를 끌었다. 하루에 1∼2마일밖에 전진하지 못해 5주가 지나서야 겨우 황제펭귄의 알을 가지고 기지로 돌아왔다. 이렇게 시간을 허비했다.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인재전쟁이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했다. 경영환경이 급변해 시스템이나 제도로는 대응이 불가능하고 사람의 임기응변 능력이 더욱 필요해졌기 때문이다. 지식근로자와 경영진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적합한 인재를 찾기는 점점 힘들다고 한다. 그만큼 업의 본질에 적합한 사람이 중요한 시대가 됐다. 스콧의 사례는 불확실성 시대 기업의 인재 등용에 중요한 반면교사가 될 수 있다.

 

셋째, 아문센은 상황을 단순화했다. 목표는 오로지 남극 정복밖에 없었다. 왕실과 후원자들에게 약속한 과학적 탐사는 배에 오르자마자 뒤로 제쳐뒀다. 아문센은 어린 시절 탐험 여행을 하고 탐험가들의 책을 읽으면서 소신을 키웠다. 그는 이런 글을 남겼다. “나는 극지방 탐험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범한 한 가지 치명적인 실수를 발견해냈다. 언제나 탐험대장은 선장을 겸하지 않았다. 탐험대장은 함선의 지휘를 경험 많은 뱃사람에게 위임했다. 그래서 항해를 시작하면 두 사람의 지도자가 지휘를 해야 했고 결국 파국을 불러왔다. 탐험대장과 선장 사이에서 마찰이 생기면 부하 대원들도 두 개의 파벌로 나뉘었다. 나는 선장 능력을 갖추기 전에는 절대로 탐험대장 자리를 맡지 않겠노라고 결심했다.”

 

 아문센은 간단명료한 것을 좋아했다. 남극 탐험 전략도 단순했다. 일단 남극에서 직선 거리로 가장 가까운 곳에 베이스캠프를 설치했다. 심지어 이곳은 빙붕, 즉 바다 위에 떠 있는 얼음 위였다. 지형 자료가 많은 스콧은 빙붕의 얼음이 갈라지거나 이동할 수 있기에 이곳을 피했지만 아문센은 딱딱한 땅과 다름없다고 믿었다. 아문센에게 1500㎞의 원정 거리 중 스콧보다 목표점에서 150㎞나 가까운 곳에 기지를 구축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했다. 여기서부터 100일간 무슨 일이 있어도 직선코스로 하루 28㎞를 행군할 생각이었다. 지형과 날씨에 상관없이 매일 위도의 4분의 1, 나흘에 위도 1도씩 주파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식량도 최소화해 죽은 개를 다른 개들에게 먹였고 나중에는 대원들도 먹었다. 이런 단순한 전략으로 하루 과제를 빨리 완수한 날은 좀 더 쉬었고 그렇지 못한 날은 덜 쉬면서 계획대로 주파했다.

 

스콧은 애초에 복잡한 목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왕립지리협회는 섀클턴의 탐험 이후 남은 180㎞ 정복에만 자금을 지원하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학문적 탐사를 목표로 해야 했다. 영국의 경험과 탐험 경쟁이 스콧에게 불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그래서 스콧은 돌아오는 길에 지질학 탐사를 위해 행군을 중단하기도 했다. 무려 15㎏짜리 광석을 기지로 가져가려고 썰매에 싣기도 했다. 스콧 일행은 저장기지에서 불과 18㎞ 떨어진 곳에서 죽었다. 하루 거리도 안 됐다. 만약 남극점 정복에만 집중했더라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복잡한 환경일수록 단순함이 최고의 전략이 된다. 단순해야 많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고, 빠르게 움직이게 할 수 있다. 또 단순함은 혼란을 막고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넷째, 아문센의 탐험대는 겸손함을 유지했다. 추위를 이기는 것에 집중하고 단순한 목표와 전략을 선택했지만 아문센은 탐험을 쉽게 보지 않았다. 항상 무슨 일이 생길 수 있다는 생각으로 철저히 준비했다. 평소에 대원들에게 바지 단추 하나라도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고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개를 100마리씩이나 데리고 온 것도 필요하면 식량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아문센은 남위 80도와 82도 사이에 식량저장고를 세 개나 설치했지만 스콧은 80도에 커다란 저장기지 하나만 세웠다. 또 아문센은 탐험대 전원이 예비용 스키를 마련하도록 지시했다. 반면 스콧의 대원들은 예비용 스키를 준비하지 않았다. 탐험 도중 측량기사의 스키가 고장났다. 한 사람의 스키만 없어도 행군의 보조가 맞지 않아 전체에 피해가 갔다. 결국 나머지 대원들도 스키를 버리고 행군했다. 아문센의 팀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랜 기간 불확실성을 연구해온 경영학자 와익(Karl Weick) 2000 5월 미국 뉴멕시코주에서 발생한 산불 사례에서 통찰을 얻었다. 소방관들은 큰 산불을 방지하기 위해 군데군데 작은 산불을 내 목초들의 연결을 막는다. 이때도 산불 방지를 위해 관목을 태우던 중이었다. 불이 대부분 꺼졌다고 생각해 피곤해하는 소방관들을 퇴근시켰는데 작은 불씨 하나가 살아나 점점 번져나갔다. 급기야 주변 지역의 모든 소방 인력으로도 막을 수 없게 돼 2주에 걸쳐 10억 달러의 피해를 초래한 세로 그란데(Cerro Grande) 화재로 이어졌다. 와익은 기업이 예상치 못한 위험에 빠질 때도 이와 똑같은 모습이라고 경고한다. 큰 위험은 작은 불씨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확실성과 예기치 못한 위험에 잘 대처하는 기업은 항상 자신의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작은 불씨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다. 자신감과 확신이 있더라도 상황의 역동성 때문에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다고 느껴 조심스레 접근한다. 이들은 잘나갈 때도 겸손하다.

 

머리보다 체질이 더 중요

아문센은 어린 시절 아침이면 어머니에게 혼나기 일쑤였다. 추운 겨울에도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이불을 덮지 않은 채 덜덜 떨며 잠을 잤기 때문이었다. 당시 노르웨이에서는 극지방을 탐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쓴 여행기나 탐험에서 사라져버린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인기를 끌었다. 아문센도 이런 책을 보며 북극을 정복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북극으로 항해를 떠나 선배 탐험가들이 겪었던 고난을 체험하고 영웅이 돼 고향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17세 때에는 같은 반 친구들과 서쪽에 위치한 산악지대로 겨울 행군에 나서기도 했다. 자신이 고통을 어디까지 견딜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어머니의 반대로 의대에 진학했지만 여전히 관심은 북극에 가 있었다. 3학년 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애도 기간이 지난 후 곧바로 서부 고원을 가로지르는 스키 여행을 감행했다. 이후 겨울만 되면 더 추운 지역으로 여행을 떠나 극지방과 비슷한 추위를 몸소 체험했다. 이런 경험을 통해 그는 추위에 강한 체질로 서서히 단련돼갔다.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 기업들은 다양한 기법을 도입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모두 불확실한 미래를 더 정확히 예측하기 위한 장치들이다. 아문센이 극지방 탐험을 위해 서서히 체질을 길렀듯 기업들도 이런 자세가 필요한지 모른다. 불확실한 환경에서는 머리보다 체질, 즉 전략보다 역량을 키우는 게 더 중요하다고 아문센은 증언한다.

 

이병주 생생경영연구소장 capomaru@gmail.com

이병주 소장은 연세대 경영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LG경제연구원에 재직하면서 창의성, 변화관리, 리더십 등을 연구했다. 저서로 <애플 콤플렉스> <> <3불 전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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