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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s from Classic

“도움은 받되 의존하지 않는다” 거장과 조력자의 ‘전략적 거리두기’

김혜옥 | 114호 (2012년 10월 Issue 1)

 

독보적인 문화인들이 보여주는 창조력의 원천은 어느 것에서 비롯될까. 이에 대한 사회학자나 문화경제학자들 사이의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대부분의 분석들은 콘텐츠를 생산하는 창작자의 입장에 초점을 맞춘다. 하지만 예술가 본인의 재능뿐 아니라 그 과정에 개입하는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관점에서 보면 어떨까?

 

클래식 음악의 경우 1830년대 이전까지는 음악가를 고용하는 고용주, 즉 후원자격인 귀족과 왕족의 입김이 작품에 강하게 반영됐던 시기였다. 이들은 재정 지원에서부터 작품 시연에 이르기까지 창작활동의 많은 부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으므로 이들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 또 한 음악가의 성공에는 본인의 성과를 인정해줄 수 있는 당시 음악계의 원로들과 동료 음악가들의 호응도 중요했다. 동료들의 관심 범위에서 벗어난 작품들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거나 주류에서 멀어졌다. 실제로 문화수도였던 빈이나 파리에서 활동하지 않았던 체코의 작곡가 젤렌카(Zelenka)는 뛰어난 작품성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200년도 훨씬 지난 1970년대가 돼서야 비로소 재조명받았다. 마지막으로 당대 거장들이 누구를 보고 배웠는지도 주목해볼 만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의 대가들은 대부분 선배들의 테크닉과 정신을 모방하는 데서 창작을 시작했다.1

 

이런 여러 방면의 조력자들이 단순히 자신들의 문화적 욕구를 만족시키거나 영향력과 재산을 과시하기 위해 음악가를 도왔던 것은 아니다. 정치가 혼란스럽고 경제적 불확실성이 심했던 근대 유럽의 시대적 상황에서 누군가를 꾸준히 돕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려한 작품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음악가들의 가능성을 꿰뚫어본 훌륭한 주변인들의창조적 관심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선두주자가 된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바로크 시대의 작곡가들은 자신들의 연주 노하우나 악기의 사용 방식 등을트리티스(Treatise)’라는 이론서 형태로 남겼다. 이것은 악보에 연주법을 일일이 표기하지 않았던 시대에 일종의 참고서 역할을 했다. 중요한 트리티스를 많이 쓴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안토니오 비발디(Antionio Vivaldi). 그는 오랜 세월 동안 기악 연주의 표준으로 존경받은

<조화의 영감(Le’stro armonico)>이라는 책을 남겼다. 사계를 비롯해 그가 남긴 바이올린 협주곡과 오케스트라 작품들은 많은 작곡가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됐다. 바흐나 헨델을 비롯한 대가들도 비발디의 작품을 꾸준히 학습하고 자신의 성악곡이나 종교극에 비발디 작품의 일부를 차용하기도 했다. 한편 바로크 시대의 모차르트라고 불리는 이탈리아의 페르골레지(Pergolesi)나 영국의 헨리 퍼셀(Henry Purcell)의 기여도 눈여겨볼 만하다. 그들은 성악과 오케스트라가 절묘하게 결합되는 양식을 고민했던 초창기 혁신가였다. 오늘날의 오페라는 이들에 의해 그 틀이 짜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심지어 바흐는 페르골레지가 쓴슬픔의 성모(Stabat Mater)’의 모든 악장을 복사하다시피해 독일어로 된 칸타타 작품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퍼셀의 경우에도 열광적인 모방의 대상이 돼 후대 영국의 작곡가들이 그의 오라토리오나 오페라에서 아이디어를 빌려 썼다.

 

그러나 이런거장들의 거장들은 작품의 영향력은 있었지만 자신들의 전략적 우위를 오랫동안 유지하지는 못했다. 페르골레지와 퍼셀의 경우에는 일찍 생을 마감했다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발디는 62세까지 비교적 장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불우하게 인생을 마쳤다. 그는 바로크 초기 독보적인 역량을 가진 음악가였고 선두주자(first mover)였지만 숱한 후원자들에게 계약을 거절당한 채 쓸쓸히 죽었다. 캐서린 아이젠하트(Katherin Eisenhardt) 교수는초기 시장에서 개발된 지식과 자원들은 오랜 시간 노출되면서 모방과 해체의 대상이 된다고 지적한다.2 이들 거장이 처음 음악계에 등장했을 때에는 독보적이고 새롭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이름을 알리고 난 후에는 경력을 관리하는 데 치중하느라 혁신을 계속하지 못했다. 비발디만 하더라도 교회음악학교 교사, 오페라 작곡가, 협주곡 창작자 등으로 활동무대를 확장하는 데만 바빴다. 기본적으로 차별화된 작품 역량만 유지하면 자신의 이미지와 명성에 힘입어 독점적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이다. 그 결과 비발디를 비롯한 초기 이탈리아 바로크 시대의 거장들이 남긴 수많은 작품들은 오늘날 지나치게 비슷비슷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후대의 작곡가 차이콥스키는 인상적인 비판을 남기기도 했다. “비발디가 500곡이라고요? 모든 곡을 똑같이 만들면 누구나 할 수 있죠!” 과거의 성공에 매몰된 초기 혁신가들은 후배들에게 곧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과의 전략적 거리 유지

동시대 작곡가들의 지지와 인정도 중요하다. 아무리 천재라도 동료들에게 외면당하면 자신의 역량을 입증받을 수 있는 길이 없었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삶을 분석하면서 이야기했듯이 음악가들에게는 특히 꾸준히 명사들에게 입소문을 내줄 수 있는 음악계 원로들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다. 이들 원로는 음악시장의 질서와 규범, 문화를 만들어내는 존재였다.

 

바흐가바빌론 강가에서의 즉흥 패러디곡을 바쳤다고 알려진 얀 애덤 라인켄(Jan Adam Reincken) 100세가 되기까지 함부르크의 성 카타리나교회에서 대표 작곡가로 군림했던 당대 음악계의 맹주였다. 그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후배들의 작품에 대한 적극적인 검증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90세에 접어들었을 무렵 성 카타리나교회가 그의 후임을 선발하는 문제를 고민하다 바흐의 친구인 요한 마테존(Johann Matheson)을 고려한 적이 있었다. 그러자 라인켄은 함부르크 시 정부와 의회의 세력을 동원해 마테존이 함부르크에 아예 발을 붙이지 못하게파문 조치를 단행해 버렸다. 자신의 허락 없는 후계 선임을 저지한 것이다.

 

라인켄의 친구이자 후배였던 디트리히 북스테후데 역시 뤼베크에서 오르가니스트 겸 교회 재무책임자로 활동하면서 영향력을 과시했다. 당시 상인들의 기부금을 바탕으로 설립된 루터교회는 일종의 지역경제포럼 역할을 했다. 북스테후데는 그 모임의 사무총장이자 상임이사 역할을 하면서저녁 음악회(Abendmusiken)’라는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이 인정한 후배 작곡가들에게 연주 기회를 주곤 했다. 이처럼 원로들은 음악계의 플랫폼을 설계하고 질서를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한편 동료 음악가들끼리의 친목과 적절한 거리 두기도 경쟁 생태계를 건강하게 만들어 나가는 데 한몫했다. 서로의 아들들에게 대부 역할을 해줬던 텔레만과 바흐의 관계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각각 주요 종목을 달리하면서 작품세계를 만들어나갔다. 텔레만은 오페라의 중심지 드레스덴에서 화려한 극음악과 색채적인 협주곡의 결합을 선보였다. 반면 바흐는 인접도시인 라이프치히에서 종교음악과 기악을 작곡하는 데 주력했다. 각각타펠 뮤직(Tafel Musik)’오라토리오(Oratorio)’를 대표 브랜드로 성장시키는 데 집중한 것이다. 경영전략 연구자인 딥하우스(Deephouse)가 언급한 것처럼 이들은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바흐는 건반음악과 종교 작품의 대가로 자리매김했고 텔레만은 오페라를 비롯한 성악곡과 협주곡의 권위자로 인식됐다.3

 

이처럼 동업자라 할 수 있는 음악계 원로들과 동료 작곡가들로부터의 관계에서는 상호의존과 자율추구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다. 트렌드에 지나치게 영합하거나 꾸준한 변화를 선보이지 못했던 창작자들은 쉽게 외면받았지만 반대로 트렌드를 너무 무시하거나 기성 문화계와의 연대를 소홀히 한 이들도 경쟁력을 갖지 못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관행으로부터 너무 떨어지지도 않고 너무 관행에 영합하지도 않도록 정치적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천재 작곡가들의 전략적 역량을 유지하는 원동력이 됐고 음악 생태계로부터 성과가 저조한 이들을 걸러내는 필터작용을 하기도 했다.

 

 

 

 

음악 후원자들은 문화기술산업의 벤처투자가

그렇다면 예술가들에게 연주의 장을 열어주고 경제적 도움과 사회적 지위까지 줬던 후원자들은 어떤 동기를 갖고 있었을까? 군주와 귀족들은 일반인들과 차별화된 기호를 갖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소비의 문제는 아니었다. 대부분의 후원자들은 딜레탕트(전문적인 수준까지 예술적 표현을 동원할 수는 없지만 어느 정도 수준은 갖춘 애호가)들이었다. 따라서 자신들이 직접 구현할 수 없는 창의적인 표현을 전문음악인들의 힘을 빌려 보이고 싶었던 것이다. 특히 당대의 현명한 군주로 손꼽히던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황제가 대표적이었다.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문화의 힘을 믿었다. 그리고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베를린과 빈의 도심에 당시로서는 최첨단 음악 인프라를 건설하는 데 주력했다. 살리에리, 모차르트, 디터스도르프와 같은 이들이 이때 성장할 수 있었다.4

 

귀족과 왕족의 음악후원은 단기적인 수익성을 노린 투자가 아니었다. 종종 그들은 장기적으로 대중의 소비기호를 바꿀 수 있는 창조적 변화를 원했다. 이는 기업경영자의 능력과도 관계가 깊은 측면이다. 단기적으로 최적화된 목표를 지향하는 리더라면 수익을 창출하는 데 주력할 것이다. 그러나 거시적 목표에 관심을 가진 경영자는 R&D 투자나 생산 패턴의 변화와 같은 도전적인 과제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물론 상당수 후원자들은 근시안적인 태도를 갖고 있기도 했다. 취향의 문제로 작곡가와 싸우기도 하고 창의적인 결과물을 고스란히 빼앗아 자신의 작품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단기성과에 집착하고 리스크를 감수하기 싫어하는 리더들은 결국 음악가들에 의해 버림받는다. 헨델이 여러 번 직장을 옮긴 것이 대표적이다.

 

리스크의 또 다른 이름은 호혜성(reciprocity)과 신뢰다. 이런 후원관계는 상호 간의 믿음이 있어야 지속된다.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기일수록 후원자들의 협상력은 약해졌고 예술가들의 권리 주장과 변덕은 점점 심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원관계를 단순한 투자가 아닌 신뢰의 문제로 보았던 군주와 귀족들은 꾸준한 심리적 지지를 보냈다. 이렇게 강력한 신뢰로 구축된 의리는 이따금 예술가들에게 뜻밖의 용기를 주기도 했다. 합스부르크 추기경에 의해 감화를 받았던 베토벤은 당대의 영웅 나폴레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상당수 작품들을 오스트리아 귀족에 헌정했다.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프랑스 부르봉 왕가의 전폭적 지원을 받았던 루이지 케루비니(Luigi Cherubini)는 시민혁명의 서슬 퍼런 시기에도 처형된 루이 16세를 위한 레퀴엠(Requiem) 미사곡을 작곡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렇듯 음악가들에게 작품 위촉자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후원자들은 점점 도태돼 갔지만 인간적인 동기 부여를 해줄 수 있는 후원자들은 그들 스스로가 하나의 문화적 상징으로 인식됐다. 작곡가를 고용하는 일이 단순히 고급 취향을 과시하는 것이었다면 그 관계는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에게 후원은 문화기술(cultural technology)에 투자를 하는 것이었고 그를 통해 자신들이 추구하는 문화적 가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유통업자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다

작곡가들은 대부분 작품을 자신의 명의로 남기고 싶어했다. 이따금 군주와 귀족들의 후원을 받았다는 사실 자체가 해당 작품의 질에 대한 보증서 같은 역할을 하기도 했지만 자기 노력과 창의력의 결과를 오롯이 자기만의 것으로 누리고 싶었던 욕구도 있었다. 고용주와의 계약조건을 어기지 않는 범위에서 다른 작품을 출간하는 방법이 있었는데 이런 경우 작품을 선별하고 유통하는 것은 콘텐츠를 공급하는 작곡가의 입장이 아니라 유통자인 출판업자의 재량에 맡겨졌다. 따라서 고유의 명성을 구축하지 못한 창작자들은 헐값에 작품을 팔아 넘길 수밖에 없었다.

 

출판업자들은 훌륭한 작곡가들을 식별해 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프리랜서 작곡가들의 숨통을 틔워주지 못했다면 헨델이나 비발디처럼 인생의 부침이 심했던 천재들은 도태됐을 가능성이 크다. 안정적으로 후원자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음악을 하며 상업적 가치를 당당하게 입증하고자 했던 창작자들은 오랜 세월 야인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도 비슷한 역할을 했다. 그들은 작품의 구조에 대해 전문적으로 알지 못하는 대중들에게 음악에 대한 이해를 돕는 역할을 했다. 베토벤을 비롯해 거의 모든 낭만시대의 대작곡가들은 비평가들의 지지와 비판 여부에 큰 영향을 받았다. 또 출판업자와 비평가들이 문화시장의 전면에 등장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예술가들이 충분히 교섭력을 가지고 콘텐츠 공급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유명 작곡가의 경우에는 오히려 여러 출판업자들과 계약함으로써 불확실성을 줄이는가 하면 자신에게 우호적인 비평가 진영을 구축하는 경우도 있었다.

 

근본적으로 출판업자와 비평가들은 작품의 시장화 가능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진단할 수 있었지만 음악가 본인들만큼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는 없다는 한계점도 있었다. 베토벤의 선배였던 음악가 클레멘티(Clementi)가 런던에서 출판업으로 성공했던 것도 다른 사업가들이 갖추지 못한 전문성과 감식안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평가들 역시 트렌드를 읽고 매체를 통해 독자적인 의견을 제시하기보다는 다른 전문 분석가들의 견해를 모방하거나 감정적인 대응을 하기 일쑤였다. 바흐의 음악은 1740년대가 되면서부터는보수적이고 고루한 음악이라고 공격을 받는가 하면 베토벤의 푸가(Fugue) 작품들도청자에 대한 배려라고는 없고 어렵기만 한 작품으로 맹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부족하긴 해도 음악가들이 세상과 교류할 수 있는 소통의 통로였고 결과적으로는 작곡가들이 직접 나서서 매체 활동을 통해 자신의 작품을 설명할 수 있는 동기 부여 역할을 했다. 외부 여론을 통해 끊임없이 창작자들을 자극함으로써 예술가가 논쟁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을 자각하게 했던 것이다.

 

혁신을 추구하는 생태계의 본질은상호의존성

베토벤의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작곡가의 뜻을 살려 작품의 가치를 알릴 수 있는 미디어 채널은 많지 않았다. 다만 작곡가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을 찾아 개인적 호감이나 개인적 계약을 바탕으로 도움을 구할 뿐이었다. 이는 시장경제 시스템에 의한 가치교환이라기보다는 정치적 과정에 의한 이익 배분에 가까웠다. 이른바비시장 전략(non-market strategy)’이 이 시대 음악가들의 생존전략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고전음악가들의 시대는 이전 시대와 비교할 때 비교적 독립적인 역량을 바탕으로 교섭력을 갖고 본인의 상황에 맞는 경쟁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북독일의 원로 작곡가들과 살리에리, 또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었던 프랑스의 부르봉 왕조의 군주들의 후원을 받았던 음악가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이 시대의 작곡가들은 여러 파트너들과의 전략적 상호의존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그들 자신이 갖고 있는 명성과 지위를 이용해서 자율성과 중심적인 위치를 보장받기를 원했다. 19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낭만 작곡가들의 시대가 되면 이는 거의 일반화된 전략에 속한다. 비교적 문화예술 분야의 전문성이 극대화된 상황에서 오랫동안 시장 참여 경험이 쌓이며 자연스럽게 전략적 생존을 위한 노하우를 습득한 것이다.

 

또 지금까지 언급한 후원자들, 음악계 원로들, 후원자나 출판업자들이 가졌던 전략적 포지셔닝을 단순히책략(tactic)’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지나친 단순화다. 조직생태학자인 존 패지트(John Padgett)가 언급했던 것처럼 이들은 음악가에 대한 균형적인 투자를 통해 작품 자체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이상이 문화적으로 구현되기를 원했다.5 이들은 신뢰, 심리적 지지, 시대 정신에 호소하는 공감지능과 같은 심성적 가치들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점차 구시대의 계층적, 계급적 관념에서 벗어나 자유와 낭만의 예술적 가치가 강조되는 시대가 되자 이러한 예술적인 요소들이 이들의 중요한 동인이 된다. 단순히 시장 안의 이해관계자로서 서로의 이익을 조정(moderation)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의 창조자이자 조력자로서 각자의 정체성을 명료화(articulation)하는 기회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창조적인 작곡가들의 성과는 개인의 능력뿐 아니라 혁신적인 관점과 전략적 관심을 지닌 조력자들과의 상호의존성이 낳은 음악생태계 전체의 산물이다. 이것이야말로 천재들뿐만 아니라 천재들에게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그 결과를 향유하는 이들 또한 진정 행복해 질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김혜옥 연세대 음악대학 합창지휘전공 교수 hokimbangeunice@gmail.com

필자는 줄리어드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웨스트민스터콰이어 칼리지에서 교회음악 및 합창지휘 석사, 맨해튼 음대에서 같은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레건 바흐 페스티벌, 한국합창제 등을 통해 전문 연구자 및 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현재는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 겸 연세 콘서트 콰이어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2010년 스페인 문화부 주최 국제하바네라콩쿠르에서 최고 지휘자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천영준 연세대 창조경영센터 선임연구원 taisama@naver.com

천영준 선임연구원은 연세대 경영학과 및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정보산업공학과 석사 과정에서 비즈니스 모델 개발 및 경영 전략을 연구했다. 현재 연세대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연세대 창조경영센터에서 협업적 혁신(Collective Innovation) 및 소셜 컴퓨팅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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