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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생도라지

항공기 생산 방식, 도라지 재배에 접목하다

이방실 | 113호 (2012년 9월 Issue 2)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영호(KAIST 경영과학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도라지 도라지 백도라지/심심산천에 백도라지/한두 뿌리만 캐어도/대바구니 철철철 다 넘는다….”

 

조선시대 유래한 것으로 추정되는 민요인도라지 타령에는 흥미로운 구절이 나온다. 한두 뿌리만으로 대바구니에 차고 넘칠 정도의 도라지라니 대체 얼마나 크다는 걸까? 우리가 나물 반찬으로 즐겨 먹는 도라지 크기로는 대바구니는커녕 바가지를 채우기도 힘들다.

 

도라지는 보통 2년에서 길어야 3년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 그 이상이 지나면 저절로 뿌리가 썩어 죽어버린다. 그 때문에 일반 도라지가 크는 데는 일정 한계가 있다. 당연히도라지 타령에 등장할 정도의 크기가 되기에는 어림도 없는 수준이다. 대바구니에 담아 철철 넘쳐 날 정도의 크기라면 수십 년은 족히 된 오래 묵은 도라지여야 한다.

 

도라지의 평균 수명을 생각할 때 이런 도라지가 존재하기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렵다. 그런데 이 도라지의 수명을 무려 20년 이상 연장시키는 재배법을 찾아내 특허까지 받아 사업화한 기업이 있다. 바로 ㈜장생도라지다.

 

회사명이자 등록상표이기도 한 장생도라지는 21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생장한() 도라지를 가리킨다. ㈜장생도라지는 기존에 흔한 나물로만 인식돼 온 도라지를 각종 약리 효능이 입증된 고급 건강식품으로 포지셔닝해 연평균 약 80억 원(2007∼2011)의 매출액을 올리는 벤처기업으로 성장했다. DBR이 농산물의 고부가가치화를 실현한 ㈜장생도라지의 성공 요인을 분석했다.

 

 

집념과 우연이 알려 준 자연의 섭리

장생도라지는 다년생 도라지 재배법 및 약리 효능 파악에 한평생을 바친 이성호 옹()의 집념으로 개발됐다. 이영춘 현 ㈜장생도라지 대표의 부친이기도 한 이성호 옹은 어릴 적 기관지 천식과 폐결핵을 앓던 동네 어른이 산에서 큰 도라지를 캐 먹고 병이 나은 걸 직접 목격한 후 연근(年根)이 오래 된 도라지 재배에 인생을 바쳤다. ‘오래 묵은 도라지는 산삼보다 낫다는 옛말과 자신의 개인적 경험, 그리고사람으로 태어난 이상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의로운 일 한 가지는 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바탕으로 내린 결단이었다.

 

도라지를 오랜 기간 재배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심은 지 2∼3년 정도 지나면 저절로 뿌리가 썩어 없어지는 작물 자체의 특성 탓이었다. 갖은 농법과 비료를 써가며 수천 평의 밭에 각기 다른 방법, 다른 비료를 줘가며 애를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렇다 할 수입이 없는 상태에서 도라지를 심고 썩히는 일을 수년간 계속하다 보니 가세는 기울 대로 기울었다. 도라지 재배를 위해 여기저기서 얻어 쓴 빚도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급기야 빚쟁이들 등살에 더 이상 동네에서 도라지를 키우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이성호 옹은 가족들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야반도주를 했다. 도라지씨앗과 솥 단지 하나, 소금 한 자루만 달랑 들고 지리산 깊은 골짜기로 들어간 그는 움막을 짓고 가재와 개구리, 솔잎과 칡뿌리로 연명하며 도라지 재배를 이어갔다.

 

그렇게 지리산에서 도라지 재배에 미쳐 있은 지 5년째 되던 1970년의 어느 날, 그 어떤 식물도 자랄 수 없을 것 같은 시뻘건 황토에서 다른 도라지보다 훨씬 생기 있게 돋아난 도라지 순을 발견했다. 뿌리가 썩어가는 도라지를 그냥 버리기가 아까워 움막 옆 황토에 꽂아 넣듯이 심어 둔 썩은 도라지 뿌리에서 난 새순이었다. 척박한 황토에 심어 놨던 이 도라지의 뿌리를 살펴보니 마치 썩은 상처를 밀어내고 새살을 돋아내듯이 뿌리가 새로 생겨나고 있었다. 온갖 비료를 부어대며 정성을 다해 좋은 토양에서 기른 도라지는 뿌리가 썩어 다 죽어가는데도 척박한 황토에서는 오히려 시들시들하던 도라지까지 원기를 회복해가며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었던 것.

 

이성호 옹은 이를 보고 도라지는 거름기를 먹고 사는 식물이 아니라 땅의 기운을 흡수해 그 영양분을 뿌리에 저장하는 식물이라는 통찰을 얻게 됐다. 따라서 뿌리가 썩지 않도록 하려면 거름기 없는 척박한 땅에 심되 비료와 거름을 일절 줘서는 안 된다는 자연의 섭리를 깨닫게 됐다. 도라지에 매달려 산 지 15년 만에 다년생 도라지 재배법의 비밀을 깨닫게 된 순간이었다.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던 오래 묵은 도라지의 효능 입증

도라지는 땅속의 기()와 영양분을 흡수해 자란다는생장의 비밀을 알아낸 이성호 옹은 자신의 통찰을 바탕으로 실험 재배에 나섰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아무리 척박한 땅에 심어 도라지를 튼튼하게 재배할 수 있다 하더라도 3년 정도 지나면 다시 거름기 없는 땅으로 옮겨 심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터득하게 됐다. 주기적으로 척박한 황토에 옮겨심기를 해 줘야 원래 있던 뿌리 곁에 새 뿌리가 나오면서 도라지의 수명을 연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예닐곱 번 정도 옮겨심기를 거쳐 21년 이상 장생에 성공한 도라지는 뿌리 몸통이 어린이 팔뚝만해지고 길이도 20㎝가 넘는 여러 개의 뿌리로 갈라진다.

 

1988년에 이르러 이성호 옹은 최고 22년 근을 포함해 10년 이상 된 도라지를 다량 보유하게 됐다. 다년생 도라지 재배의 비밀을 밝혀낸 후로도 근 20년을 도라지 재배에 투자한 것. 10년 넘은 약도라지가 있다는 소문이 퍼지자 전국 각처에서 도라지를 사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이성호 옹을 찾아왔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도라지를 팔지 않았다. 오래된 도라지가 왜 효과가 있고 어디에 도움이 되는지를 밝히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명확한 근거 없이 함부로 돈을 받고 도라지를 파는 건 옳지 않다고 판단한 이성호 옹은 도라지의 효능을 밝히기 위해 독학으로 한의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다 우연히 연근(年根)별로 술에 담아놓은 도라지들을 관찰하다 한 가지 신기한 점을 발견했다.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담은 놓은 도라지 술이었는데 1년 된 도라지 술부터 20년 묵은 도라지 술은 모두 같은 색인 반면 유독 21년 근 도라지가 담긴 술만 훨씬 짙은 빛을 띠고 있었다.

 

이성호 옹은 이에 따라 1989 21년 근 도라지를 들고 경상대 식품공학과에 성분 분석을 의뢰했다. 그 결과 3년 근 일반 도라지와는 확연히 다른 성분을 찾게 됐다. 심어진 지 20년을 경계로 도라지의 일부 성분이 획기적 변화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분석 결과 도라지가 오래 생장할수록 이눌린의 과당 중합도가 낮아 혈당강화, 면역증가, 항암효과 등 약리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사업화와 함께 닥쳐온 위기

평생을 바쳐 재배한 다년생 도라지의 효능이 과학적으로도 증명되자 이성호 옹은 드디어 본격적인 사업화에 나섰다. 우선 1990 27개 주요 일간지에 ‘21년생 도라지의 약리성분 분석결과를 발표했다. 오래 된 도라지의 효능을 입소문으로 전해 들은 사람들이 일부 있긴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여전히 도라지를 흔히 먹는 밥 반찬 정도로 생각했다. 따라서 이성호 옹은 사람들의 이 같은 인식을 바꾸기 위해선오래 묵은 도라지는 산삼보다 낫다는 옛말이 전혀 근거 없는 소리가 아니며 과학적으로도 증명된 사실이라는 점을 홍보하는 게 가장 먼저라고 판단했다.

 

이듬해인 1991년엔다년생 도라지 재배방법으로 특허를 획득했다. 산야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농작물, 그것도 서민들 밥상에 오르는 나물 재배법이 어떻게 특허가 될 수 있느냐는 논란에도 불구하고 통상 3년이면 죽는 도라지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늘리기 위해 노력한 이성호 옹의 집념과 열정, 평범한 도라지에서는 볼 수 없는 약리 특성 등이 인정돼 전통 작물의 재배법으로는 유례없던 특허를 얻게 됐다.

 

이어 이성호 옹은 1993년 진주전문대(현 한국국제대), 경상대, 조선대 등과 함께 산학협력을 맺고 다년생도라지의 성분 분석 및 효능 입증 관련 연구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 결과 장생도라지에서 산삼이나 인삼에 많다는 사포닌 성분을 30종 이상 추가적으로 찾아냈다.

 

지적재산권(특허) 및 과학적 연구 결과(산학협력 연구)를 바탕으로 이성호 옹은 1995년 성호 다년생도라지 영농조합을 세우고 1996년 진주시 금산면에 가공공장을 설립했다. 그러나 곧바로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제대로 사업 한번 시작해 보지 못한 채 위기를 맞았다. 투자를 위해 은행 대출(17억 원)은 물론 악성 사채(11억 원)까지 끌어다 쓰다 보니 사업 첫해부터 부도 위기에 내몰렸다. 1997년 당시 자본금이 35000만 원이었던 조합의 총 부채는 28억 원에 달했고 월 금융비용만 7000∼8000만 원이 들어갔다.

 

이성호 옹은 결국 자식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가족회의 끝에 장남인 이영춘 현 장생도라지 대표가 구원투수로 나섰다. 당시 삼성항공(현 삼성테크윈) 인사과장으로 재직 중이던 이영춘 대표는 안정적인 직장을 포기하고 가업을 택했다. 그의 결정을 두고 가족은 물론 주변 사람들 모두가 만류했다. 이영춘 대표 스스로도당시 조합의 회생 가능성은 5%도 안 되는 절박한 상황이었다고 털어놓을 정도다. 그는 그러나아버지가 평생을 바쳐 일궈 온 사업을 자식 된 도리로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위기 극복과 ㈜장생도라지 출범

삼성중공업, 삼성항공 등 대기업 근무 경력만 20여 년에 달하는 이영춘 대표의 관리 능력이 발휘되면서 회사는 급속히 정상화되기 시작했다. 부도 직전의 회사를 떠맡은 이영춘 대표는 우선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정책자금을 지원받아 재무구조를 바로 잡는 데 주력했다. 이영춘 대표는당시 부친께서 끌어다 쓴 사채의 이자율이 낮게는 22%에서 높게는 50%에 달했다금융비용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7∼8% 이율의 정책자금을 조달해 사채부터 갚아나가며 악성 부채를 털어내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직원들의 의식 개조에도 나섰다. 이영춘 대표는당시 종업원이 8명밖에 없었지만이합집산’ ‘오합지졸’ ‘천방지축등 안 좋은 사자성어들은 다 갖다 붙일 수 있을 정도로 의식 상태가 형편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직원들의 인식이 변하지 않는 한 어떤 노력도 의미가 없다고 판단,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시간당 강연료가 백만 원이 넘는 에티켓 강사, 웃음치료 강사 등을 초빙해 직원 교육에 나섰다. 직장에서 지켜야 할 기본 예의범절 및 태도부터 하나씩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부친인 이성호 옹조차대기업에서나 통할 일을 왜 쓸데 없이 중소기업에서 하느냐며 핀잔을 줬지만 이영춘 대표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그렇다고 외부 전문가들에게만 의존한 것은 아니다. 출근시간, 복장, 사무실 청소 등 시시콜콜한 기본 사항부터 고객 명단 관리, 고객 응대 매뉴얼, 사내 정보 공유 체계 등 회사 운영에 필요한 필수 사항들까지 이영춘 대표가 하나하나 챙기며 체계를 잡아갔다. 화장실 청소까지 몸소 할 정도로 대표가 앞장 서서 솔선수범을 보이자 패배의식에 빠져 있던 직원들도 하나둘씩 의욕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이영춘 대표는 1999년 ㈜장생도라지를 설립하고 그해 11월 국제표준 품질경영시스템 ‘ISO 9001(국제표준기구(ISO)에서 제정한 품질경영 시스템 국제규격)’ 인증을 획득, 벤처기업으로 인증받았다. 부친이 세운 영농조합의 경우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기에는 용이하지만 해외 진출 등을 고려할 때 장기적으로 주식회사 형태가 유리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영춘 대표는 국내 법인 설립과 동시에 같은 해 일본과 홍콩에도 지사를 설립하는 추진력을 발휘했다. 인삼이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으며 높은 마진에 팔리는 것처럼 도라지도 해외 수출 시 더 높은 수익성을 낼 수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기존 영농조합은 원료 재배와 1차 관리를, 신설 법인인 ㈜장생도라지는 제품 개발 및 생산, 영업, 마케팅을 각각 맡는 이원적 구조로 사업 영역을 구분했다.

 

 

항공기 생산 방식의 공정관리 시스템 구축

㈜장생도라지 출범 후 이영춘 대표는 엄격한 품질 관리를 위해 전 직장이었던 삼성항공의 항공기 생산방식을 도라지 생산 프로세스에도 적용했다. , 제품 제조 공정을 주요 순서에 따라 세분화하고공정관리 기록서(work control document)’에 의거해 모든 작업을 수행하도록 했다. 특히 공정마다 작업자와 검사원을 배정했다. 작업자는 정해진 공정관리 기록서에 따라 작업을 수행하며 작업 결과를 실시간으로 기록하고 해당 공정마다 중요 항목에 대해 검사원의 확인(날인)을 받아야만 다음 공정을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번거롭긴 하지만 이렇게 정해진 매뉴얼과 검사원의 확인을 거치게 되면 작업자의 건강 상태나 심리 상태 등에 따라 작업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을 최소화해 제품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영춘 대표는 또한 제조 과정에서 사용된 원료, 투입일, 작업자, 기타 조건들을 꼼꼼히 기록하게 함으로써 언제라도 제품의 생산 이력을 추적해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비행기를 제작할 때는 원료 확보부터 완제품 생산에 이르기까지 모든 과정을 문서화하고 점검표(check-list)를 작성해 사소한 결함 하나까지도 사전에 완벽하게 잡아낸다이렇게 모든 과정을 낱낱이 기록해서 작업하면 만약 사고가 발생했을 때 어디에서 문제가 일어났는지를 쉽게 추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비행기 제작 시 품질에 만전을 기하는 건 조그마한 기체 결함도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며식품을 만드는 것도 사람들의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니만큼 품질에 만전을 기하는 항공기 생산 방식을 적용하면 큰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사소한 결함 하나까지도 철저히 점검하고 엄격하게 관리하는 작업은 ㈜장생도라지 제품의 품질을 일정하게 유지해줬고 이는 결국 고객과 해외 바이어들의 깊은 신뢰로 이어졌다.

 

 

재배지 이력 관리 전산화로 투명성 확보

현재 ㈜장생도라지는 지리산 일대 함양, 산청, 거창 등지 15만 평의 땅에서 250여 농가(작목반)와 위탁 계약을 맺고 도라지 원료를 재배하고 있다. 이들 농가에 ㈜장생도라지가 지급하는 재배비용은 연간 약 6억 원 수준. 비료와 농약을 사용하지 않고 개간지 등 유휴지를 활용하기 때문에 재배 농가 입장에선 일반 작물의 2∼3배에 달하는 고소득을 올릴 수 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특히 매년 수확량과 시세 변동에 관계 없이 재배 면적에 따라 일정하게 재배 농비를 지불하기 때문에 재배 농가들은 안정적인 수입원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문제는 이 도라지들이 250여 농가를 평균 3년 주기로 돌아다니며 재배된다는 점이다. 장생도라지가 고객에게 제공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 기준은 연근(年根)이다. 그런데 도라지는 산삼의 뇌두처럼 외관상 연근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아 제 아무리 전문가라 하더라도 몇 년 생인지 육안으로 구별하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따라서 21년간 예닐곱 차례 이상 주기적으로 옮겨 심어야 하는 원료의 특성상 재배 이력을 객관적으로 보증해 주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를 위해 이영춘 대표는 사업 초기부터 부친인 이성호 옹이 장부에 수기로 기록해 온 수십 년간의 재배 관련 자료를 집대성해 DB로 구축, 독자적인 재배지 이력 관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종묘 도라지, 재배지(), 재배자 각각에 고유의 코드(code)를 부여해 씨앗부터 최종 성체에 이르기까지 전 이력을 데이터베이스(DB)화했다. 씨앗부터 성체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사업 초기부터 구축함으로써 원료의 투명성을 일찌감치 확보한 셈이다.

 

 

특허 및 학술 연구 통해 프리미엄 제품으로 포지셔닝

이영춘 대표도 부친인 이성호 옹처럼 장생도라지 제품의 효능을 알리기 위해 특허 출원 및 학술 연구에 힘썼다.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데이터를 마케팅 수단으로 쓰지 않고는 제품 홍보를 하기가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영춘 대표는제품을 홍보하기에 구조적으로 가장 어려운 산업 중 하나가 식품업이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청정 지역인 지리산 인근 함양에서 재배한 장생도라지라 하더라도지리산 청정지역인 함양에서 맑은 이슬을 먹고 자란 도라지같이 설명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특정 지역 이름을 쓰는 것도, ‘청정 지역같은 문구를 집어넣는 것도 다 과대광고에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이영춘 대표는조금만 홍보를 적극적으로 해도과대 광고허위 광고로 간주되기 십상이라 식품업계에선별 한두 개 안 달고 일하기 힘들다는 말까지 있다제품의 약리적 효능을 홍보하는 게 핵심인 ㈜장생도라지로선 지식재산권을 확보하는 데 전력투구할 수밖에 없었다고 귀띔했다.

 

2012 6월 기준 ㈜장생도라지가 보유하고 있는 국내 특허는 23건에 달한다. ‘장생도라지 추출물을 포함하는 고지혈증 치료용 한방제제(특허 제0315000, 2001)’ ‘장생도라지 추출물을 포함하는 당뇨병 치료용 한방제제(특허 제0315001, 2001)’ ‘장생도라지 추출물을 유효성분으로 포함하는 간장의 항섬유화제(특허 제0513125, 2005)’ ‘암전이 억제 효과를 갖는 장생도라지 추출물(특허 제0541248, 2005)’ ‘장생도라지 추출물을 유효성분으로 함유하는 기관지 질환의 억제 및 치료용 약학적 조성물(특허 제0543878, 2006)’ ‘피부노화 방지 및 주름생성억제 효과를 나타내는 도라지 지하부 추출물을 함유하는 화장료 조성물(특허 제0761330, 2007)’ ‘장생도라지 조추출물 또는 이로부터 분리된 정제 분획물을 유효성분으로 함유하는 알러지 질환의 예방 및 치료용 조성물(특허 제0943754, 2010)’ 등 각종 질환 관련 특허부터 피부 미용 관련 특허까지 종류도 다양하다. 국내 특허뿐 아니다. 퇴행성 뇌질환 및 폐암 예방 등과 관련해 일본, 미국 등 해외에 등록된 특허도 6개나 된다.

 

2002년엔 장생도라지생명과학연구소도 출범했다. 현재 연구소 종사 인력은 ㈜장생도라지 전체 직원(38, 성호 장생도라지 영농조합법인 인력 포함)의 약 16%에 해당하는 6(박사급 3, 석사급 3)이다. 현재 생명과학연구소는 ㈜장생도라지가 설립되기 이전부터 활동해 왔던 장생도라지연구회(회장·경상대 자연과학대 성낙주 교수)와 연계해 장생도라지의 약리적 효능 연구 및 기술 개발에 힘쓰고 있다. 1993년 출범한 장생도라지연구회의 경우 처음엔 경상대, 한국국제대 등 경남지역 대학 교수들 몇몇이 주축이 됐지만 지금은 부산대, 충남대 등 타 지역 대학은 물론 한국화학연구원, 생명공학연구원, 경남농업기술원 등 연구기관 및 동인당한방병원 같은 임상병원 소속 연구진까지 참여해 있다. 2012 6월 기준으로 이들이 지금까지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한 장생도라지 관련 논문만 43(국내 학술지 13, 국제학술지 30)에 달한다. SCI급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 편수만도 26편이나 된다.

 

이 밖에 ㈜장생도라지는 국내외 식품박람회와 한의학 박람회 등에 꾸준히 참가하며 브랜드를 알렸다. 특히 거점 국가인 일본의 경우 현지에서 매년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는 것은 물론 현지 지사 및 총판을 통해 각종 건강강좌와 세미나도 열고 있다. 이 같은 노력 덕분에 장생도라지는도라지=나물이라는 소비자들의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프리미엄 건강식품으로서의 브랜드 가치를 획득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성과

현재 ㈜장생도라지에서 판매하는 제품군은 8개 품목 20여 개 제품이다. 사업 초기엔 생체(장생도라지를 있는 그대로 판매) 아니면 액상 추출 제품 판매에 불과했다. 하지만 도라지 수확량 자체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부가가치를 극대화하기 위해선 보다 다양한 가공상품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액상 추출 제품 대비 도라지 함유량이 적은 대신 도라지의 효능을 돕는 보조재를 섞어 분말과 환 형태의 새로운 제품군 개발은 물론, 캔디, 젤리, 한방차, 화장품, 술 등 기호성 상품으로도 제품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기존 제품군도 고객들의 다양화된 니즈에 맞추기 위해 세분화하는 노력을 계속해 나갔다. , 액상 추출 제품의 경우 초기에 단일 품목으로만 존재했지만 목표 질환 및 도라지 배합처방에 따라 기(), (), 생기(生氣), 활맥(活脈) 등으로 세분화해 제품군을 확대해 나갔다.

 

이 같은 노력에 힘입어 ㈜장생도라지는 1997년 매출액 2400만 원에서 1998 101600만 원, 1999 195000만 원, 2000 291500만 원 등 해마다 매출 기록을 갱신해 나갔다. 2000년대 초반 40억 원대에서 매출이 정체 상태를 겪었지만 일본 진출 6년 만인 2005년 일본 ㈜고양사와 300만 달러 규모의 대형 수출 계약을 맺음으로써 매출액이 80∼90억 원대(2006∼2009)로 두 배 이상 늘어나며 비약적으로 성장했다. 동일본 대지진 및 원전 폭파 사고 등 연이은 악재로 최근 2년간 대일(對日)수출 물량이 줄어들면서 타격을 받긴 했지만 여전히 60억 원대의 건실한 매출액을 기록하고 있다. (그림1)

 

 

성공요인

㈜장생도라지는 구전으로 내려오던 오래 묵은 도라지를 과학기술로 현대화하고 이를 통해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개발했다. 흔한 산나물로 알려진 도라지를 한국의 대표적 농업수출상품으로 개발, 미국과 일본, 홍콩 등 세계 소비자들로부터 호평을 받고 있다는 점에서 성공한 농업 벤처기업의 대표 사례로 꼽힌다.

 

①초기 산업재산권 확보로 안정적 비즈니스 기반 구축

나물 반찬 외에 별다른 수요가 없던 도라지 시장에서 장생도라지는 그 자체로 큰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블루오션이었다. 하지만 도라지에는 한 가지 큰 약점이 있다. 인삼과 달리 외관상 생장년수를 판별하기가 용이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는 실제 20년이 넘지 않은 도라지도 장생도라지인양 둔갑할 수 있는 소지가 크다는 뜻이다. 매력적인 블루오션임에는 분명하지만 만약 저급 유사품의 난립으로 소비자의 신뢰를 확보할 수 없게 된다면 금세 외면받을 게 뻔한 시장이기도 했다. 이런 위험성을 일찌감치 간파한 이성호 옹은 장생도라지 재배법에 대한 특허를 획득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했다. , 재배 특허권을 획득해 소재의 독과점화를 추진함으로써 안정적인 사업 기반을 구축하는 데 성공한 것. 이로써 ㈜장생도라지는 계약된 농가로부터 일정 년 수 이상 자란 도라지를 매입해 생장년수와 품질을 관리하는 게 가능해졌고 소비자들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었다.

 

②유기적인 산학연 협력 통해 프리미엄 제품으로 포지셔닝

㈜장생도라지는도라지=나물이라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고급 기능성 건강식품으로 포지셔닝함으로써 사업화에 성공했다.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 게 가능했던 이유는 무리하게 과장·허위 광고를 하기보다는 유기적인 산학연 협력을 통해 약리 효능을 과학적으로 입증하고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회사 출범 이전부터 장생도라지연구회를 조직, 연구 결과물들을 축적함으로써 SCI급 국제 학술지에도 장생도라지의 효능을 입증하는 논문들을 게재할 수 있었다. 첫 특허인 장생도라지 재배법 특허 이외에도 회사 연혁보다 더 많은 수의 특허를 출원하고 획득함으로써 다수의 지식재산권을 확보한 벤처기업으로서 자리매김했다.

 

③ 장인 정신과 경영 마인드의 절묘한 조합

㈜장생도라지가 탄생하는 데에는 이성호 옹의 열정과 집념이 가장 큰 밑거름이 됐다. 모두들 도라지는 반찬으로나 먹는 나물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성호 옹은 이런 고정관념을 거부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의로운 일 한 가지는 해야 한다는 신념하에 옛 선조들이 말하는 약도라지가 존재할 것이라 믿고 그의 인생 전부를 바쳐 장생도라지 재배법을 찾아냈다. 또한 도라지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비법을 발견해 놓고도 당장의 금전적 수익을 위해 도라지를 내다 팔기보다는 정확한 효능을 알기 위해 기다렸다. 그 결과 장생도라지의 비밀을 파헤쳐낼 수 있었고 더 큰 사업화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이성호 옹의 장인정신에 더해 대기업 출신인 이영춘 대표의 경영 마인드가 결합됨으로써 ㈜장생도라지는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이영춘 대표는 열정만으로 창업했던 이성호 옹의 뒤를 이어 시스템 경영을 주도했다. 항공기 생산 방식의 공정체계를 도입하고 대기업에서 체득한 품질관리를 적용함으로써 위기에 처했던 회사를 회생시킬 수 있었다. 그 결과 자칫 사장될 수도 있었던 농산물을 시장성 있는 상품으로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이방실 기자 smile@donga.com

 

  • 이방실 이방실 |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기자 (MBA/공학박사)
    - 전 올리버와이만 컨설턴트 (어소시에이트)
    - 전 한국경제신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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