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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그리스, 대제국 건설할 전술 채택 못한 이유는?

임용한 | 82호 (2011년 6월 Issue 1)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마케도니아는 그리스로부터 오랫동안 북방의 야만족 취급을 받았다. 발칸반도와 유럽대륙의 접합부에 위치한 이 지역은 지금도 유럽에서 제일 가난한 지역이다.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는 테베의 속국이었다. 15살이던 소년 왕자 필립(훗날 마케도니아 왕위에 오른 필립포스 2.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이기도 하다)은 테베에 인질로 보내졌다.

 

당시 테베는 스파르타마저 격파한 그리스의 패권자였다. 병학적으로도 그리스에서 제일 앞선 역량을 자랑했다. 테베는 우직하게 중장보병대만으로 승부하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통에서 좀 더 자유로웠다. 그들은 기병과 경보병을 활용해 좀 더 역동적인 전술을 사용했다. 명장 에파미논다스는 사선대형(중장보병대 전체를 동시에 충돌시키지 않고 사선으로 배치해 부대별로 시간차를 두고 충돌시키는 방법)을 창안함으로써 전쟁터를 보다 복잡하고 정교하게 만들었다. 기병이 없어 애를 먹었던 아테네, 스파르타와 달리 테베가 위치한 테살리아 지방(그리스 북부)부터 마케도니아까지는 좋은 말과 기병도 양산됐다.

 

중장보병대에 집착한 그리스

 

스파르타를 격파함으로써 테베는 페르시아전쟁 이후 그리스 도시국가 간 그리스의 맹주 자리를 놓고 다툰 펠로폰네소스전쟁의 최종 승자가 됐다. 이 덕택에 페르시아전쟁과 펠로폰네소스전쟁이라는 긴 전쟁 동안 그리스 곳곳에서 개발된 새로운 전술적 아이디어들이 테베에서 집약됐다. 이 중에는 혁신적 변화를 암시하는 놀라운 내용들이 많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혁신적인 아이디어들은 뭉개지고 사장되고 있었다.

 

테베는 비록 그리스의 전통적인 전술에 변화의 불을 댕겼지만 그리스의 전통에서 떠나려 하지도 않았다. 예를 들면 아테네의 장군 이피크라테스는 장창 전술을 고안했다. 기존 2∼3m였던 창을 3.6m로 늘렸다. 창이 길어지면 짧은 창을 든 적보다 먼저 찌를 수 있다. 그러나 이게 생각처럼 간단치 않다. 단지 창을 길게 하는 것만으로 적을 먼저 찔러 승리를 거둘 수 있다면 너나 할 것 없이 일찌감치 창을 늘렸을 것이다.

 

창이 길어지면 부러지기 쉽고 무거워서 다루기 힘들어진다. 장창과 단창이 일대일로 맞부딪칠 때 길기만 해선 오히려 짧은 창의 튼튼함과 정교함에 제압당하기 쉽다. 창의 약점은 창의 안쪽 공간이다. 적이 창날 안쪽으로 들어오면 손 쓸 방법이 없다. 장창은 길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 위험공간이 더 넓어진다.

 

장창의 길이가 주는 진정한 장점은 여러 명이 한 사람을 동시에 공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의 길이가 같다면 공격과 방어가 동시에 진행된다. 사실상 일대일 대결이 되면 다른 사람에게 신경쓸 여유가 없다. 하지만 창이 길면 적의 창의 사정거리 밖에서 방어를 신경 쓰지 않고 공격에만 전념할 수 있는 짧은 순간이 생긴다. 이때는 일대일 대결이 아니라 적군 한 명에 대한 집단공격이 가능하다. 또 창이 길면 뒷열의 창이 전열의 앞으로 튀어 나와 뒷열 부대도 함께 공격에 가세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장창은 단창에 뒤지는 기술과 정교함의 약점을 창의 수와 힘으로 상쇄할 수 있었다.

 

무겁고 긴 창을 신속하고 집단적으로 다루려면 중장보병의 신체를 가볍고 자유롭게 할 필요가 있었다. 이피크라테스는 과감하게 중장갑의 경량화를 시도했다. 8㎏이나 되던 금속방패를 가볍고 작은 가죽방패로 바꿨다. 다리를 가볍게 하기 위해 무릎 아래를 보호하던 금속의 정강이 보호대는 아예 버렸다. 몸통을 보호하는 청동 판금(板金) 갑옷도 아마포로 속을 누빈 훨씬 가볍고 편리한 형태로 바꿨다. 그리스군의 팀 전술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은 얼굴 전체를 감싸서 옆을 볼 수 없게 만드는 투구였다. 이 투구도 시야를 개방하는 트라키아식(후대의 로마군 투구와 비슷한 모양)으로 대체했다.

 

그러나 이피크라테스의 개혁은 인기가 없었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이 새로운 전술의 위력을 이해하지 못했던 탓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그것이 주는 파괴력을 너무나 잘 이해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리스 군대의 주력인 중장보병대는 지배층인 시민층에 의해 충당됐다. 중장보병이 된다는 것은 자신들이 나라를 지킨다는 것이고 이는 지배계급으로서 지배권리를 창출하는 근거였다. 그런데 중장보병이 되려면 비싼 청동장비를 자비로 마련할 수 있는 재산이 필요했다. 그 정도 재력을 지니려면 상당한 토지와 노예가 있어야 했다. 오늘날처럼 재산과 토지를 공증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였기 때문에 중장보병이 된다는 자체가 자신의 부와 신분을 증명하는 수단이었다.

 

장비가 경량화하면 장비값이 떨어진다. 보다 가난한 사람들, 즉 신분은 낮지만 부를 축적한 졸부들도 중장보병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지배층(시민층)의 증가는 결국 지배층으로서 시민들이 누리던 특권의 약화를 뜻한다. 자신들이 전쟁에 나가 피를 흘리는 것은 특권층으로서의 권리를 얻고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장비의 경량화는 거꾸로 전쟁을 통해 새로운 특권층이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전통 시민계층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필립포스 2세의 개혁

 

어린 시절 테베에 약 3년간 볼모로 잡혀와 있던 마케도니아의 왕자 필립은 그리스군의 다양한 전술들을 배워 고향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는 그저 모방하기만 하지 않았다. 고국 마케도니아로 돌아와 왕위에 오른 필립포스 2세는 그리스의 전통 전술과 신전술 모두를 관통하는 원리를 찾아냈다. 바로시민층의 계급적 특권 과시. 이 원칙은 그리스 중장보병대의 가입조건뿐 아니라 중장보병의 세부 전술 전체에 적용되는 원리였다. 그리고 이 원칙은전술적 효용성보다도 우선시되는 최상위 원칙이라는 점을 필립포스 2세는 간파해냈다.

 

그리스군은 하층신분이 참여하는 경보병을 전쟁에서 보조적인 수단으로만 활용했다. 경보병의 기동력을 이용하면 상대편 팔랑크스(phalanx·중장보병의 밀집 전투대형)를 손쉽게 제압할 수 있었지만 여간해선 그 전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전쟁터에 갈 때 중장보병은 갑옷과 무기를 여러 명의 하인에게 들어 나르도록 하고 정작 자신은 나들이 차림으로 마차를 타고 갔다. 명분은 체력을 절약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로는 신분의 과시였다. 전장에 도착하면 중장보병들은 갑옷을 입기 전에 먼저 하인들을 시켜 머리를 빗어 땋고 몸단장을 했다. 아무리 전쟁터라도 하급계층이 지켜보는 앞이다. 자신들의 품위와 권위를 훼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투는 격렬하더라도 가능하면 개개인의 힘과 명예를 과시하며 추악한 모습이 보이지 않도록 싸웠다. 승부가 나면 도망가는 적군을 추격해 살육하는 일도 되도록 피했다. 중장갑을 하고 있고 체력이 소진돼 아갈 기운이 없기도 했지만, 진실로 죽일 마음만 있다면 중장보병 대신 기병이나 경보병을 돌격시킬 수도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병은 귀했고 하층계급인 경보병을 돌격시켜 상위계급인 중장보병을 학살한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다.

 

시민단 위주의 체제였던 그리스의 폴리스와 달리 마케도니아에서는 이전부터 전제적인 왕정이 발달했다. 필립포스 2세는 이 장점을 살려중장보병의 시민적 권위전장의 효율성으로 대체했다. 마케도니아군은 이피크라테스의 개량 갑옷을 적극 도입해 중장보병의 경량화를 실현했다. 장창은 이피크라테스의 개량 방식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 , 창의 길이를 5m 이상으로 늘렸다. 워낙 창이 길어서 다섯 번째 열에 서 있던 병사들이 들고 있는 창이 중장보병대의 맨 앞 열로까지 튀어나왔다. 사리사(sarissa)라고 불린 이 창은 워낙 무거워 한 손으로 들 수 없었다. 양 손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마케도니아군은 방패를 작고 가볍게 만든 후 줄로 엮어 목과 팔꿈치에 걸었다.

 

장갑을 가볍게 했어도 이 무거운 창을 사용하려면 굉장한 훈련과 체력이 필요했다. 필립포스 2세는 중장보병이 그리스 군대처럼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사치를 허용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 중장보병은 자기 무장을 직접 둘러메고 뛰어야 했다. 마차에는 보급품을 실었다. 마케도니아군의 이동속도는 그리스군의 세 배였고 식량마차 덕에 장거리 원정을 훨씬 쉽게 할 수 있었다.

 

중장보병과 경보병의 신분적 차별도 없앴다. 중장보병에만 의존했던 그리스군과 달리 기병, 궁병은 물론 다양한 종류의 경보병을 적절하게 운영했다. 그들은 오직 전술적 원리에 따라 각자의 기능을 수행하면 됐다. 독특한 부대들도 편성됐다. 그중 하나가 돌팔매 부대였다. 원시적인 부대였지만 그들은 곧 가공할 명성을 누리게 된다. ‘방패를 든 자라는 뜻의 히파스피스타이(hypaspistai)라는 병종도 있었다. 이들은 분류상 중장보병대지만 이미 경량화된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보다 더 가벼운 무장을 했다. 가벼운 만큼 기동이 좋고 대형전환도 자유로웠다. 이들은 중장보병대를 급속하게 투입할 필요가 있을 때, 또는 팔랑크스 간의 전투에서 적을 속이고 유인하는 데 효과가 뛰어났다.

 

가벼워진 갑옷과 강훈련 덕에 팔랑크스의 대형 운영 능력도 훨씬 정교하고 다양해졌다. 그들은 상대와 상황에 따라 대형을 적절하게 변형시키고 필요한 병종을 적재적소에 투입할 수 있었다.

 

지구의 절반과 도시 하나를 바꾸다

 

기원전 338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필립포스 2세는 아테네, 스파르타, 테베까지 가세한 그리스 연합군을 무참하게 패배시켰다. 팔랑크스 전술의 창시자인 그리스인들은 전통적인 팔랑크스 전술이 정작 자신들이 고안해놓고 방기해버린 개량형 전술 앞에 얼마나 무력한가를 뼈저리게 체험해야 했다. 승패는 전투가 시작되기도 전에 갈렸다. 병력은 그리스군이 많았지만 이동 속도의 차이 덕분에 마케도니아군이 다 집결하는 동안 그리스군은 집결지에 절반도 들어오지 못했다. 마케도니아군은 도착 즉시 전투대형을 편성했지만, 아직 전쟁과 스포츠를 혼동하고 있던 그리스군은 머리를 빗으며 노닥거리고 있었다. 필립포스 2세는 그들을 기다려주지 않았다. 그리스군은 병력이 모두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전투에 돌입했다.

 

그리스군의 좌측에는 아테네와 여러 폴리스의 혼성부대가, 우측에는 테베군이 포진했다. 필립포스 2세는 우측이 좌측보다 시차를 두고 앞서 나가는 사선대형을 펼치면서 우측 편대에 방패잡이 부대인 히파스피스타이를 내세워 그리스 연합군의 좌익을 치도록 했다. 최초 충돌에서 장갑이 가벼운 마케도니아의 히파스피스타이는 아테네군을 당하지 못하고 뒤로 밀려났다. 기세가 오른 아테네군은 앞으로 밀고 나갔다. 그리스군의 좌군이 전진하고 우군은 대기하는 바람에 좌군과 우군 사이에 틈이 생겼다. 필립포스 2세의 아들로 훗날 전쟁사에 불세출의 명성을 날리게 되는 알렉산더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는 중장기병대를 이끌고 번개같이 이 틈으로 돌진해 들어갔고 적진의 뒤에서 좌회전해 테베군을 뒤쪽에서 공격했다. 동시에 테베군의 최우익은 우측 측면으로 돌아온 마케도니아의 경기병대에 공격을 받았다.

 

양쪽에서 기병대의 공격을 받으며 우익의 테베군은 괴멸됐다. 히파스피스타이를 쫓아간 아테네군은 사리사를 장착한 마케도니아 중장보병대에 걸려 참패했다. 그러자 알렉산더의 기병대는 목표를 바꿔 아테네군의 뒤를 쳤다. 보병과 기병에 정신없이 앞뒤로 두드려 맞은 그리스군은 무참하게 패배했다.

 

이 전투로 필립포스 2세는 그리스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는 다음 목표로 페르시아 원정을 준비했으나 암살되는 바람에 아들 알렉산더가 과업을 계승했다. 새로운 군대와 전술로 무장한 알렉산더군은 페르시아 제국을 멸망시키고 인도까지 진출, 동서 길이 상으로는 지구의 절반에 해당하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알렉산더의 성공은 그리스인들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는 위력적인 전술을 고안했다는 사실을 증명해줬다. 그러나 정작 그리스인들은 작은 도시 국가의 지배층이라는 특권에 집착하다가 자신들의 도시마저 잃었다.

 

오늘날 우리는 개혁의 시대에 살고 있다. 조직마다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이야기가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혁은 쉽지 않다. 개혁은 언제나 기득권의 희생과 불편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개혁에 동의하면서도 시행 시기를 늦추기 원한다. 이 상태가 지속되면 개혁의 타이밍을 놓치고 사태는 더욱 악화된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비정상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을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지만 이는 후유증도 크고 사회 전체의 대립과 긴장을 높이는 악순환을 유발한다.

 

극단적 해결책이 아니라 설득과 자각을 통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개혁을 성공시키려면 그리스의 사례처럼 기득권에 집착하는 게 얼마나 작고 초라한 것인가를 배우고 깨닫는 수밖에 없다.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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