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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 기고

시나리오 플래닝, 전담조직 만들어라

김동재 | 5호 (2008년 3월 Issue 2)
미래에 대한 우리의 감(感)은 생각보다 그다지 정확하지 않다. 인지심리학적인 특성상 인간은 앞으로 펼쳐질 일에 대해서 상당히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거나 많은 경우 근거 없이 낙관적인 성향을 갖기도 한다. 더구나 날로 복잡해지고 있는 기업 경영환경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한층 높여가고 있다. 특히 글로벌화로 인해 이제 지구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은 잠재적으로 언제라도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됐다. 이처럼 미래 불확실성이 커지는 상황에서 기업 경영자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을까. 많은 경우, ‘일단 지켜보자’는 자세다. 불확실성이 많아 어디로 튈지 모르는 상황이니 시간을 두고 지켜본 다음에 일이 구체적으로 일어나면 그 때 대응하자는 것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다른 유형도 있다. 어차피 불확실한 상황이니까 어느 한 쪽에 ‘몰아서 베팅을 하자’는 부류다. 하지만 두 가지 모두 바람직한 경우가 아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에 적절히 대비하는 취지로 연구 개발된 방법론이 바로 ‘시나리오 플래닝’이다. 시나리오는 한마디로 미래에 일어날 만한 그럴 듯한 이야기다. 시나리오 플래닝이 정리된 방법론으로 제시된 것은 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 랜드(RAND) 연구소에서 허먼 칸(Herman Kahn)을 중심으로 한 연구진이 냉전체제하에서의 핵전쟁 발발 가능성 등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면서부터다. 이후 칸은 1960년대 중반 ‘Hudson Institute’를 설립해서 시나리오 플래닝을 군사 이외의 영역으로 확산시키기 시작했다. 1970년대 로열 더치 셸(Royal Dutch Shell)이 중동지역의 정세와 급변하는 세계 정세를 기반으로 OPEC의 설립을 예상하게 되고, 그에 따라 사업전략을 수립해 다른 석유 메이저들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내게 되면서 시나리오 플래닝에 대한 관심이 급격히 증가했다. 이후 많은 기업과 조직들이 시나리오 플래닝을 활용해서 미래전략을 수립하고 있지만, 그 잠재력에 비해 실제 활용도는 제한적인 범위에 머물러 왔다.
 
한국 기업의 경영자들도 1997년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급변하는 경영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럽게 시나리오 플래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기업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대다수는 아직까지 초보적인 수준에서 시나리오 플래닝을 시도해 오고 있다. 일견 상식적일 만큼 쉬워 보이지만 실제 시나리오 플래닝을 제대로 기업경영에 활용해 의도하는 성과를 내기란 만만치 않다. 이 기법을 활용해 기대하는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몇 가지 유념해야 할 것들이 있다.
 
우선, 시나리오 플래닝을 일시적인 경영기법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단발적인 치료약 정도로 생각해서는 그 효과를 보기 힘들다는 의미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전략을 잘 수립하기 위한 방법론이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시나리오 플래닝의 결과 일차적으로 생산되는 것이 이런저런 미래에 대한 시나리오들인데, 그 시나리오 자체가 잘됐다거나 잘못됐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시나리오를 음미해 보면서 경영자들이 나름대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하고 이를 통해 얻어낸 새로운 생각을 자유롭게 교환하며 토론하는 과정을 거쳐 전략적 시사점을 추출해 가는 것이 시나리오 플래닝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다. 로열 더치 셸의 경우 시나리오 플래닝 팀이 제시한 대안적인 미래의 모습을 최고경영진이 진지하게 생각하고 깊이 고민해 보면서 미래 전략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오랫동안 정착시켜왔기 때문에 시나리오 플래닝의 효과를 충분히 거두고 있는 것이다. 시나리오 플래닝이 전략수립 과정을 통해 조직 내에 체화돼야 되며, 이런 목표를 갖고 시나리오 플래닝을 시도해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시나리오 플래닝을 일회성 프로젝트로 보고 그때 그때 외부 컨설턴트의 도움을 얻어서 하려고 하면 안 된다. 물론, 외부 전문가의 도움은 간혹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조직 내부에 시나리오 플래닝을 전담하는 상시 부서가 있어야 한다. 이런 내부 시나리오 플래닝 팀의 규모가 클 필요는 없다. 세계적인 다국적 기업들의 경우에도 시나리오 전담 팀의 규모는 불과 20명 내외 정도다. 오히려 작게 시작해서 최소한의 자원으로 작은 효과를 보면서 학습을 하다가 점차 인원과 자원을 늘려가는 것을 권하고 싶다. 실제로 이런 취지의 팀을 공식화할 경우, 조직 내에서 꼭 필요하다는 정당성을 부여받는 것이 쉽지는 않다.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힘들고, 당장 필요한 일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더라도 일단 조직내부에 미래에 대한 고민을 전담하는 팀을 두면서 역량을 개발해 나가야 장기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다.
 
끝으로 내용적인 측면에서 제대로 된 시나리오 플래닝 방법론을 개발, 축적해 나갈 필요가 있다. 시나리오 작성을 너무 상식적인 일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고, 따라서 제대로 된 방법론을 연구하기보다는 상식적 차원에서 일상적인 업무 정도로 진행해 가는 경우가 많다. 시나리오 플래닝은 분명히 전문적인 학습과 노력이 필요한 영역이다. 위에서 언급한 시나리오 플래닝 팀을 본 궤도에 올리려면 회사 차원에서 적어도 수년간의 지속적인 투자가 이뤄져야 한다. 낙관적, 비관적 시나리오 식의 단편적인 정도가 아니라, 세상의 흐름을 체계적으로 들여다보고 그런 흐름에서 전략적 통찰력을 이끌어 낼 수 있어야 한다. 막연한 미래가 아니라, 전략적 문제 위주의 구체적인 미래를 생각해야 하고 그저 복잡한 세상을 묘사하기보다는 복잡성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불확실성의 동인(動因)을 파악해 내야 한다. 나아가 주요 사인포스트(signpost·지침)를 규명해서 실제 미래가 어떻게 진화하는지를 선제적으로 감지해야 한다.
 
예전에는 시나리오 플래닝이 미래의 환경에서 제기될 만한 중요한 위협적 요인들에 대한 상황적응 전략의 수립에 많이 활용됐다. 하지만 최근 극한 경쟁과 격심한 환경변화로 경영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시나리오 플래닝을 새로운 환경에서 회사 혹은 조직이 나아갈 길을 시사하는 식의 비전 창출, 완전히 새로운 미래전략의 수립 등에 활용하고 있다.
 
아무도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는 없다. 시나리오 플래닝 역시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노력 여하에 따라, 특정 회사나 조직이 경쟁사 혹은 다른 회사나 조직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래에 대해 대비를 더 잘할 수는 있다. 남들보다 미래에 대해 좀 더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엄청난 차이를 불러올 수 있다. 작은 차이가 큰 결과를 빚을 수 있는 것이 시나리오 플래닝이다.

  • 김동재 김동재 | - (현) 연세대학교 국제학대학원 교수
    - 맥킨지 컨설턴트
    - 미국 일리노이 어바나-샴페인대 경영학과 교수
    dkim@yonsei.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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