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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獨, 회전문 전략으로 강국과 맞서다

임용한 | 62호 (2010년 8월 Issue 1)
 
카이사르의 로마군이 갈리아로 진격한 이래 게르만족은 언제나 위협적인 존재였다. 그들은 갈리아인보다 머리 하나는 클 정도로 몸집이 컸고, 강하고 끈질겼다. 비록 문명은 미개했지만 머리는 영리했다. 그러나 카이사르 시대 이후 1700년이 지나도록 게르만족은 여전히 잠재력만 큰 ‘다크호스’에 불과했다. 유럽의 모든 군주들이 두려워하는 군사적 자질을 지녔지만 통일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분열돼 있었다. 독일의 장병들은 최고의 용병으로 명성을 떨쳤고 이런저런 전쟁에 동원되고 이용당했다. 유럽의 복잡한 외교사와 전쟁사를 비틀어보면 독일의 통일을 방해하려는 주변국의 끈질긴 노력의 역사가 드러난다.
 
프리드리히 2세는 유럽 연합군의 방해를 뚫고 프로이센을 강국의 반열에 올려놨고, 독일 통일의 기초를 놓았다. 19세기말 수상 비스마르크가 이끄는 프로이센은 마침내 통일 독일 건설에 성공했다. 통일 독일로 가는 마지막 관문이 바로 프랑스와 벌인 보불전쟁(1870∼1871)이었다. 모든 국가들은 불리하다고 했지만, 독일은 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통일을 이뤄 유럽의 세력 판도를 바꿨다. 이 기적과 같은 승리를 일궈낸 장본인이 독일의 참모총장 몰트게(1800∼1891)였다.
 
독일은 강대국이 됐지만 프랑스, 영국, 러시아와의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 4개국은 유럽의 패권, 더 나아가 세계의 주도권을 두고 힘겨루기를 시작했다. 신생 강국 독일은 새로운 고민에 빠졌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가 함께 독일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이 3개국을 한꺼번에 대적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잘 나갔던 프리드리히도 이 3개국과 동시에 싸우지는 않았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이 유일하게 전 유럽과 싸웠지만 결국 패망했다. 나폴레옹도 실패한 전쟁을 독일이 승리해야만 했다. 독일은 고민에 빠졌다.
 
“전쟁은 반드시 일어난다”
 
이 고민의 시기에 독일군을 이끈 인물이 몰트게의 후임인 알프레드 폰 슐리펜(1833∼1913, 재직: 1891∼1906)이었다. 슐리펜은 전쟁은 분명히 일어난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독일군의 전력은 적들의 60% 정도에 불과했다. 프랑스와 러시아 사이에 끼어 있는 지정학적 위치도 치명적 약점이었다. 프랑스, 러시아와 한꺼번에 전쟁을 하려면 전선을 둘로 나눠야 했다. 오늘날 독일은 산업국가로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농업국가에 가까웠다. 자원, 공업 기반, 재정 등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내내 독일의 포탄 생산량은 프랑스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난감한 상황에서 슐리펜은 적국을 분석했다. 그리고 난마처럼 얽힌 고민을 풀어갈 중요한 단서를 얻었다. 러시아는 넓고 후진적인 철도와 산업체계, 더 후진적이고 부패한 행정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러시아가 병력을 동원해서 참전하는데 40일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여기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양쪽의 적과 싸우기란 불가능하다. 적은 각개격파 해야 한다. 프랑스와 러시아와의 참전 사이에 약 40일의 시간이 있다. 이 시간에 프랑스를 함락시켜야 한다. 그러면 모든 병력을 동부전선으로 돌려 러시아의 대군과 승부를 걸 수 있다는 계산이 섰다. 슐리펜의 발상은 손자병법의 관점에서 병법의 기본원칙에 어긋나 있었다. 손자는 전쟁은 무모한 모험이 아니라 철저히 계산되고 준비된 행동이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손자는 귀납법적 접근을 선호한다. 먼저 분석하고 주어진 데이터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
 
슐리펜은 반대였다. 사실은 그럴 수가 없었다. 독일이 가진 패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서는 그들 앞에 놓인 산을 넘어가는 수밖에 없었다. 6주 만에 당시 세계 최강의 육군을 보유한 프랑스를 점령해야 한다. 말도 안 되는 발상이지만, 그것이 그들이 무조건 넘어야 하는 첫 번째 산이었다.
 
6주 만에 프랑스를 수중에 떨어뜨리려면 선제공격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프랑스와의 국경은 요새화돼 있고, 상당수가 산맥으로 막혀 평야 지대는 좁았다. 길이 막히면 돌아가야 한다. 슐리펜은 프랑스 북쪽에 있는 중립국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우회해서 프랑스를 침공하는 계획을 세운다. 국제법과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흉악무도한 범죄지만, 슐리펜의 눈에 보이는 길은 그 곳뿐이었다.
 
왜곡에 의한 균형
 
슐리펜 계획의 특징은 이 우회에 있지 않다. 슐리펜은 독특한 전술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다른 모든 장군처럼 그도 전쟁사를 열심히 공부했다. 서구 전쟁사는 언제나 알렉산더와 한니발에서 시작한다. 한니발이 벌인 유명한 전투인 ‘칸나의 대회전’을 교범에서는 이중포위라고 정의한다. 슐리펜의 생각은 달랐다. 로마군이 패배한 이유는 균형을 잃었기 때문이다. 로마군은 공격을 중앙에 집중시켰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의 옆과 뒤를 공격했다. 여기서 말한 슐리펜의 균형은 무게 중심과 같은 공평한 물리학적 균형이 아니다. 이성적·전술적 균형이다. 알렉산더가 페르시아와 대결한 과가멜라 전투에서 좌익과 우익의 균형을 맞췄다면 분명히 패전했다. 좌익의 무게는 간신히 버티다가 학살당하기 직전 상황에서 전투가 끝나도록 맞추었고, 알렉산더가 이끈 우익은 좌익이 궤멸되기 직전 적진을 뚫고 다리우스의 중앙에 침투할 만큼 강화시켰다. 이것이 전술적 균형이다. 독일군이 승리하려면 알렉산더와 한니발처럼 전술적 균형(실은 불균형)을 예술적 수준으로 맞춰야 한다.
 
슐리펜은 벨기에로 들어가는 우익에 53개 사단을 할당했다. 별도의 예비대가 뒤를 받쳤다. 나머지 10개 사단은 중앙에, 9개 사단은 좌익에 배치했다. 공격의 주역은 우익이다. 53개 사단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진입한 뒤 좌회전해서 남쪽의 프랑스로 들어간다. 다음이 더 놀라운데 이 우회는 그저 프랑스의 국경방어선을 슬쩍 우회해서 방어선을 허무는 정도가 아니었다. 독일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커다란 동심원으로 그리면서 가로질러 프랑스의 뒤쪽에서 들어온다. 그리고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대각선으로 프랑스를 가로지르며 쓸고 나온다. 흔히 이 작전을 낫질에 비유하는데, 낫질하듯 프랑스의 절반을 뭉텅 베어버리는 작전이었다. 좌익과 우익의 비율은 무려 7대1, 낫질이 아니라 거의 철퇴였다.
 
회전문 작전
 
우익이 전진하는 동안 우익의 7분의 1 전력에 불과한 좌익은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대목에서 서로 다른 길을 잠시 걸었던 것처럼 보이는 손자와 슐리펜의 병법이 다시 만난다. 슐리펜은 프랑스의 생각을 정확히 꿰뚫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으로 자존심이 상해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강한 민족주의적 자부심으로 볼 때 공격을 받으면 참지 못하고, 바로 반격으로 나올 것이다. 반격 지점도 예측했다. 프랑스는 보불전쟁으로 알사스-로렌 지방을 뺏겼다. 그리고 지형적으로 그곳이 진격하기에도 가장 좋은 지역이었다.
 
프랑스군이 공세로 나오면 독일군은 바로 밀릴 것이다. 작전상 후퇴가 아니라 극단적인 우익 강화로 프랑스를 저지할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슐리펜이 노리는 진정한 함정이었다. 마치 회전문이 돌아가듯이 후퇴하는 독일군 좌익을 따라 프랑스군이 진격하면 독일군 우익은 더 빨리 우회할 수 있다. 독일군 우익은 이 회전문을 따라 프랑스군이 출발한 지점까지 도달할 것이고, 프랑스군은 독일 영토 안에서 독일군이 프랑스를 지나 자신들의 뒤로 진출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받게 될 것이다. 고립된 프랑스군은 궤멸된다. 여기가 회전문의 끝이다.
 
소설을 읽듯이 보면 슐리펜 계획은 명쾌하고 예술적이다. 하지만 전투 사단장이 이 작전 명령서를 받는다면 심장이 멎는 느낌이 들 것이다. 나폴레옹이 대담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넓은 전장에서 많은 병력을 장기판의 말처럼 다루지는 않았다. 일단 우회반경이 너무 컸다. 무려 53개 사단이 측면공격의 위험을 완전히 배제한 채 프랑스를 무인지대처럼 진군해야 한다. 중간에 1,2개 군이 정체되면 정체된 군의 좌우에서 튀어나간 군단은 즉시 적진에 박힌 못처럼 될 것이다. 좌익이 밀려들어간다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한쪽은 진격하고, 한쪽이 먹혀든다면 결국 기동전이 될 터인데, 독일의 중심부가 먼저 함몰되면 어떻게 될까?
 
세상을 리드하는 계획
 
슐리펜도 물론 이런 위험을 알고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도 그는 늘 그랬던 것처럼 절대명제의 방식으로 접근했다. 길이 이것 밖에 없다면 길을 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했다. 슐리펜은 평생 이 계획을 다듬었다. 여기서부터는 매우 냉정한 접근이 필요했다. 슐리펜의 구상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중요한 기술적 혁신이 있었다. 바로 철도였다. 철도의 놀라운 수송력 덕분에 엄청난 군대와 보급품을 빠르고 멀리 보낼 수 있게 됐다. 유럽의 모든 국가는 철도의 전술적 가치를 깨달았고, 참모부의 장교는 모두 철도 전문가라고 할 정도로 철도의 전술적 운영에 심취했다.
 
하지만 모든 전략가들이 철도의 속도와 화차의 무게를 계산하며 정밀한 전술지침을 다듬고 있을 때, 슐리펜은 당대의 기술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전략을 내놓았다. 슐리펜 계획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그의 계획이 애초에 실현 불가능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보급이었다. 당시의 철도망으로는 53개 사단을 한번에 투입하기도 힘들었고, 보급을 조달하려면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슐리펜도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우회 부대의 진격이 성공하려면 보급을 위한 “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얼버무렸다. 당시 기술수준으로는 이 ‘대단한 노력’을 구체적으로 제시할 방법이 없었다.
 
한마디로 슐리펜 계획은 현실과 맞지 않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앞서 나간 이 생각이 슐리펜 계획의 진짜 장점이다. 계획에는 세 종류가 있다. 현실에 기초한 계획, 현실보다 앞서 나간 계획, 그리고 현실을 리드하는 계획이다. 슐리펜 계획은 세 번째에 속한다. 당장 사용해야 하는 계획이라면 구체적이고, 실용적이며, 현실과 맞아야 한다.
 
그러나 국가의 운명을 건 전략적 구상이라면 현실에 매몰돼서는 안 된다. 현재의 기술, 현재에 가능한 능력만을 가지고 전략을 짠다면 그 전략은 금세 도태되고 말 것이다. 전략적 계획은 미래의 발전을 예측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계획 자체가 투자와 기술개발, 미래의 발전을 리드하는 것이 돼야 한다. 더욱이 현대전은 총력전이다. 현대적 총력전이란 국가의 모든 능력이 전쟁에 동원되며, 이 총체적 힘이 승부를 좌우한다는 개념이 아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전쟁은 언제나 그랬기 때문이다. 현대적인 총력전의 진정한 의미는 전쟁 계획도 사회, 경제, 문화, 기술 분야의 변화를 예상하고, 이를 바탕으로 최적의 방향점을 설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슐리펜 계획은 진정한 현대전의 마스터플랜이었다.
 
슐리펜은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1년 전인 1913년에 사망했다. 그는 “우익을 강화하라”는 말을 유언으로 남겼다고 한다. 어쨌든 이 계획의 실행은 슐리펜의 후임 참모총장 몰트게(보불전쟁의 영웅 몰트게의 조카, 두 사람을 대몰트게, 소몰트게라고 부른다)에게 넘어 갔다.(다음 호에 계속)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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