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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역량의 패러독스

김남국 | 56호 (2010년 5월 Issue 1)
기업의 가장 중요한 자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주저 없이 ‘기술력’을 꼽는 경영자들이 많다. 특히 제조업 분야에서 신기술 동향을 빠르게 파악하고 첨단 기술을 지속적으로 개발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기업 활동이다. 소위 ‘기술 역량(technological capability)’을 극대화하자는 주장에 반기를 들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기술 역량이 기업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 최근 저명 경영학 학술지에 실렸다. 홍콩대 연구팀은 세계적 학술지인 <전략 경영 저널(Strategic Management Journal·Vol.31)>에 실은 논문을 통해 기술 역량이 기업의 혁신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집중 분석했다.
 
연구팀은 기업의 혁신을 두 가지로 구분했다. 하나는 ‘이용(exploitation)’이고 다른 하나는 ‘탐색(exploitation)’이다. 이용은 기존 자원과 역량을 활용해 점진적인 개선 활동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도체 업체가 더 좋은 성능을 가진 칩을 개발하거나, 자동차 업체가 연료 효율이 좋은 엔진 기술을 개발하는 게 이에 해당한다. 탐색은 기존 자원이나 역량과 관계없는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을 개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반도체 회사가 바이오 신제품을 개발하거나, 전통적인 자동차 업체가 전기자동차를 개발하는 게 이에 해당한다.
 
중국 정보기술(IT) 업체를 대상으로 실시한 연구 결과, 기업의 축적된 기술 역량은 이 두 가지 종류의 혁신에 서로 다른 영향을 끼친 것으로 나타났다. 기술 역량이 높을수록 ‘이용’과 관련된 혁신 활동은 급격히 향상됐다. 하지만 기술 역량이 일정 수준 이상 높아지자 ‘탐색’과 관련한 혁신은 오히려 위축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절대 선(善)’으로 여겨지는 기술 역량이 탐색 혁신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된다는 얘기다.
 
기업이 생존하고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용과 탐색 둘 다 반드시 필요하다. 이용에 능숙해야 기업은 경쟁사와의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 동시에 기업은 탐색 활동도 잘 수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전혀 새로운 대체 기술의 위협에서 생존하기 어렵다. 예를 들어 코닥은 필름 카메라 기술에서 독보적 우위를 가졌지만 디지털 카메라 기술이 등장하자 쇠락하고 말았다. 이용에는 능숙했지만 탐색 활동에는 미숙했기 때문이다.
 
기술 역량이 탐색 활동에 악영향을 끼친 이유는 ‘관성(inertia)’ 때문이다. 모든 조직은 과거에 해왔던 방식대로 미래에 행동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다. 일상적인 업무를 수행하거나, 새로운 자원을 확보할 때 기업들은 과거와 똑같은 방식을 고수하려 한다. 기술도 마찬가지다. 과거와 유사한 기술, 기존 역량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하려는 성향이 강하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나 틀을 깨는 신제품을 만들 때 기존 기술 역량은 오히려 방해 요인이 된다.
 
기술 역량의 이런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연구팀은 관성을 극복하게 해주는 ‘전략적 유연성(strategic flexibility)’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실제 이 연구에서 전략적 유연성이 높은 기업들은 기술 역량 수준이 높아도 탐색 활동이 위축되지 않았다. 전략적 유연성이란 환경 변화에 신속하게 대응해 자원을 재분배하거나 기술 및 제품 개발 전략을 신속하게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환경 변화가 극심해지고 있는 21세기에 생존해야 하는 기업들은 기술력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급변하는 환경에서 기술 역량은 언제라도 기업에 치명적 독이 될 수 있다.
  • 김남국 김남국 |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장
    -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편집장
    -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정치부 IT부 국제부 증권부 기자
    - 한경가치혁신연구소 선임연구원
    mar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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