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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1)

메디치-다 빈치 코드: 이 손가락을 보라!

김상근 | 55호 (2010년 4월 Issue 2)
진짜 다 빈치 코드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는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예술가였다. 그를 ‘세계 10대 천재’ 중에 첫째로 보는 사람도 있고, 다 빈치의 IQ가 대략 205쯤 될 것으로 추정하는 학자도 있다. 그는 천재적인 지능과 재능을 바탕으로 이미 16세기에 헬리콥터, 장갑차, 자전거, 기관총, 쾌속선 등의 개념을 고안해냈다. 그렇게 똑똑하고, 놀라울 정도로 시대를 앞선 사고를 하던 다 빈치가 이상한 그림을 한 점 그렸다. 1513년과 1516년 사이에 로마에서 그린 ‘성 세례 요한’이란 작품이다.

 

 

이 그림은 다 빈치가 그린 생애 마지막 작품이다. 그림 속 주인공인 성 세례 요한은 짙은 어둠 속에서 은밀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는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성 세례 요한은 예수가 탄생하기 6개월 전에 먼저 태어나,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던 선지자이다. 서양 미술에서 성 세례 요한은 언제나 낙타털로 만든 옷을 입고(광야에서 살았기 때문에), 갈대로 만든 십자가 지팡이를 들고 나타난다. 그런데 다 빈치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에서 성 세례 요한에게 이상한 포즈를 부여했다. 오른손 검지를 하늘로 향해 치켜 올리게 한 것이다. 성 세례 요한의 사명은 메시아 예수를 소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손가락은 예수를 가리켜야 한다. 그런데 다 빈치의 ‘성 세례 요한’은 짙은 어둠 속에서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관람객들에게 이렇게 속삭이는 것 같다. “이 손가락을 보라!”
 
이 손가락 코드의 비밀은 무엇일까?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은 어떤 ‘다 빈치 코드’의 비밀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다 빈치 코드>를 쓴 댄 브라운도 풀지 못한 이 은밀한 수수께끼에 흥미를 느끼는 독자들에게 아래와 같은 세 가지 힌트를 드린다.
 
첫째, 성 세례 요한은 메디치 가문의 터전이었던 피렌체란 도시의 수호 성자(Guardian saint)이다. 그래서 피렌체 두오모(이탈리아에서는 도시의 주(主)성당을 두오모(Duomo)로 부른다)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세례당도 ‘성 요한의 세례당(Baptistry of St. Giovanni)’으로 불린다. 그렇다면 피렌체 출신인 다 빈치의 ‘성 세례 요한’은 메디치 가문의 고향이기도 한 피렌체란 도시와 어떤 연관이 있을 것이다.
 
둘째, 학자들은 대체적으로 이 작품이 제작된 시기를 1513년부터 1516년 사이라고 본다. 이때 다 빈치는 로마에 체류하고 있었다. 다 빈치의 손가락 코드를 풀기 위해서는 이 작품의 제작 시기와 장소가 중요하다. 다 빈치가 이 작품을 그릴 때, 당시 현직 교황은 레오 10세(Leo X, 1513-1521년 재위)였다. 교황 레오 10세는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첫 번째 교황이다. 다 빈치의 ‘성 세례 요한’을 주문한 사람이 바로 메디치 가문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였다고 추정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렇다면, 레오 10세는 피렌체를 기반으로 하는 메디치 가문에 대한 어떤 중요한 메시지를 고향 사람인 다 빈치의 작품을 통해 전달하려고 했을 가능성이 높다.
 
셋째, 메디치 가문은 15세기 초반에, 그러니까 레오 10세가 다 빈치에게 이 작품을 의뢰하기 약 100년 전에 매우 중요한 성자의 유물(Relic)을 한 점 소장하고 있었다. 그것이 바로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다 빈치가 숨겨놓은 손가락 코드의 비밀이 메디치 가문과 연관이 있다고 추리할 수 있다. 다 빈치의 마지막 작품 ‘성 세례 요한’은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교황이었던 레오 10세가 르네상스 천재 예술가 다 빈치를 통해서 세상에 알리고 싶은 어떤 메시지를 담고 있다. 그것은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보라!’이다. 아니,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통해서 메디치 가문을 보란 말이다. 메디치 가문의 첫 교황은 지금 우리에게 어떤 숨겨진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일까?

 

메디치 가문의 시작
15세기가 시작될 시점에 메디치 가문을 실질적으로 창업한 인물은 은행가였던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8)다. 물론 그 이전에도 메디치 가문의 명맥을 이어오던 인물들이 있었고, 피렌체의 의회 대표쯤 되는 곤팔리에레(Gonfaliere)의 중책을 역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1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 최고의 부를 축적하고,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했으며,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하고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던 명문가 집안으로서의 메디치 가문은 조반니 디 비치로부터 출발했다.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 비밀 역시 조반니 디 비치의 리더십과 연관되어 있다.
 
조반니 디 비치는 새로 문을 연 메디치 은행(Ban -co Medici)의 로마 지점장으로 임명되었다(1385년). 당시 로마의 메디치 은행을 이끌던 사람은 조반니 디 비치의 삼촌이었던 비에리 데 메디치였고, 메디치 은행의 사업 규모는 업계 3위 정도에 머물러 있었다. 당시 피렌체의 대표적인 은행들은 알비찌(Albizzi), 카포니(Capponi), 그리고 우짜노(Uzzano) 가문 등이 주도하고 있었고 스피니(Spini) 가문은 로마에서 은행업계를 선도했다. 그러니까 14세기 말에 문을 연 메디치 은행은 별 볼일 없는 후발업체였던 것이다.
 
조반니 디 비치는 로마의 삼촌 밑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면서 은행업의 진수를 배웠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은행업의 성공 여부는 고객들의 신용을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자본주의 체제와 상업·투자 은행의 사업적 기반이 다져지지 않았던 시절, 로마의 은행업은 비공개적인 사채놀이와 닮아 있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적 기초를 제공하는 <성서>는 이자 수입을 추구하는 은행업을 ‘창조의 질서’에 어긋나는 죄악이라고 보았다.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얻은 소득만을 인정하던 시기였다.2  그러나 14세기를 기점으로 중세 말기부터 유럽 경제 규모가 팽창하면서 더 이상 은행업이라는 사업 분야를 신앙의 이름으로 죄악시할 수 없었다. 생산과 서비스에 대한 소득이 있는 곳에 언제나 자본의 잉여가 있다. 충분히 먹고 즐긴 다음에도 돈이 남으면 새로운 투자처가 필요하다. 또 목돈을 투자했다면 누구든지 이자 소득을 요구한다. 결국 여유 돈을 받아주고 적절한 투자처를 알선해주거나, 적절한 이자 수익을 보장해줄 수 있는 은행이 필요했다.
 
문제는 교회와 <성서>가 이자의 지불을 금지하고 있고 은행업 자체를 부정하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당연히 14세기 은행가들은 비밀스럽게 사채를 굴릴 수밖에 없었다. 예금에 대한 기록은 공식적으로 남길 수 없었다. 예금주가 교황이거나 추기경과 같은 교회의 고위직이라면 더더욱 그러했다. 그래서 조반니 디 비치를 포함한 은행가들은 비밀 장부(Libro segreto)를 사용했다. 물론 비밀 장부에도 기록할 수 없는 비밀스러운 거래도 있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비밀 장부 혹은 비밀 장부에도 기록할 수 없는 거래를 보호해줄 수 있는 은행의 신뢰도가 성공의 척도였다. 예금주의 이익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은행의 신뢰도에 따라 로마의 거대한 잉여 자금들은 은밀하고 신속하게 이동하곤 했다.
 
조반니 디 비치는 로마에서 은행업으로 성공하기 위한 두 가지 교훈을 배웠다. 은행에 대한 신뢰도가 생명이란 사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되기 위해서는? 물론 교황과 직접 거래해야 한다. 조반니 디 비치는 이 점을 잊지 않았다.
 
메디치 은행의 시작과 새로운 고객
1395년, 삼촌의 은퇴로 작은 규모의 메디치 로마 은행을 인수받은 조반니 디 비치는 1397년 로마에 있던 메디치 은행의 본점을 피렌체로 옮겼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메디치 은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조반니 디 비치의 사업은 1400년, 그러니까 격동의 15세기로 접어들면서 서서히 기초를 닦기 시작했다. 그는 1402년에 피렌체의 은행가와 환전상의 길드인 아르테 델 캄비오(Arte del Cambio)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1402년의 공식 기록에 의하면 메디치 은행이 고용하고 있던 직원은 총 17명에 불과했다. 그중에서 5명은 피렌체 본점에서 일하고 나머지 직원들은 로마, 베네치아, 나폴리 등의 지점으로 파견되었다. 조반니 디 비치는 로마에서 배운 비즈니스의 교훈을 잊지 않았다. 은행업으로 성공을 거두려면 고객으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아야 하고, 궁극적으로는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되어야만 한다. 노심초사하던 조반니 디 비치의 메디치 은행에 고객 한 명이 찾아왔다. 그의 이름은 발다사레 코사. 나폴리 출신의 귀족 출신으로 메디치 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기 위해 조반니 디 비치를 찾아온 것이다.
 
말이 귀족 출신이지, 발다세레 코사는 원래 해적질에 개입한 적이 있는 과거가 어두운 사람이었다. 본인은 해외 무역으로 돈을 벌었다고 큰소리쳤지만 그의 어두운 과거는 로마에서 공공연한 비밀로 통했다. 해적 출신의 코사는 ‘해외 무역업’으로 번 돈으로 가짜 박사 학위를 매입하는 수단을 발휘한다. 그것도 세계 최고 대학으로 알려져 있던 볼로냐대의 법학 박사 학위를 구매했다. 이 기발한 가짜 박사는 추기경직까지 매입하기로 결정하고 로마의 메디치 은행에서 대출을 신청했다.
 
당시 로마 교황청에서는 성직 매매가 흔한 일이었다. 단테의 <신곡>이나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에도 이 성직 매매를 비난하는 글들이 보인다. 해적 출신의 가짜 박사 코사는 메디치 은행으로부터 1만 두카트(약 1만 2000 피렌체 플로린)3 를 빌렸다. 그 돈으로 추기경 자리를 매입할 요량이었다. 코사는 로마의 교황청 주거래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기 때문에 영세한 규모의 메디치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렸다. 메디치 은행은 추기경이 된 코사와 거래를 무려 8년간이나 계속했다. 그러던 중 1410년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코사 추기경이 요한 23세(John XXIII)란 법명을 사용하는 교황으로 덜컥 선출됐다.
 
당시 가톨릭교회는 암울한 역사의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경쟁으로 교황청이 로마와 아비뇽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따라서 2명의 교황이 존재했다. 이를 역사가들은 서방 교회의 대분열(Great Schism, 13781417) 시기로 부른다. 그러나 메디치 은행의 고객이었던 요한 23세는 이 2명의 교황에도 들지 못하는 제3의 교황이었다. 교회의 분열을 극복하고 법통을 이어받은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피사에서 모였지만 오히려 제3의 교황(알렉산더 5세)이 선출됨으로써 교황은 3명으로 늘어났다. 이 ‘피사 교황’이 일 년 만에 서거하고 발다세레 코사 추기경이 다음 교황으로 선출된 것이다. 어쨌든 요한 23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이 되었고, 메디치 은행은 덕분에 꿈에도 그리던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 될 수 있었다.4
교황 고객의 갑작스런 몰락
3
명이 각각 교황이라고 주장하는 어처구니없는 종교적 분열을 극복하기 위해 당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였던 시지문드(Sigismund)는 독일의 콘스탄체(Constance)에서 종교 회의를 소집하고 3명의 교황을 모두 초대했다. 1414년에 개최된 이 종교 회의를 위해서 황제는 모든 교황의 안전한 통행과 법적 보호를 약속했다. 그러나 콘스탄체 공의회의 결과는 3명의 교황이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막강한 권력을 가진 시지문드 황제는 3명의 교황을 모두 강제 폐위시키고, 완전히 새로운 인물인 마르틴 5세(Martin V)를 가톨릭교회의 적법한 교황으로 임명해버렸다. 요한 23세는 콘스탄체 종교 회의에서 체포되어 하이델베르크 성채에 유폐되었다. 요한 23세의 죄과에는 종교적인 타락 외에 전임 교황이었던 알렉산더 5세를 독살했다는 혐의가 추가되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는 폐위되어 체포된 요한 23세에게 3만 5000플로린에 해당하는 거액의 벌금을 부과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선택한 일종의 인질극이었다. 요한 23세의 주머니를 완전히 털어버리겠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이미 요한 23세는 빈털터리였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메디치 은행의 수장 조반니 디 비치뿐이었다. 당시 조반니 디 비치는 자신의 장남인 코시모 데 메디치를 콘스탄체로 파견시켰다. 종교 회의 기간 중에 교황 요한 23세를 보좌하기 위해 아들을 보낸 것이다. 자기 은행의 고객이었던 요한 23세가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코시모는 자신의 신변도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은밀히 변장을 하고 콘스탄체를 빠져나온 코시모는 알프스 산맥을 넘어 아버지가 기다리는 피렌체로 급히 말을 몰았다. 감옥에 갇혀 있던 불쌍한 전직 교황은 피렌체로 떠나는 코시모에게 장문의 편지를 보냈다. 그 내용은 제발 자신을 살려달라는 것이었다.

 

메디치 가문에 남긴 교황의 마지막 선물
피렌체로 급히 귀환한 코시모는 아버지와 독대했다. 콘스탄체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설명하고, 폐위된 교황 요한 23세의 다급한 처지를 알렸다. 3만 5000플로린의 벌금을 지불하지 않으면 늙고 병든 전임 교황은 하이델베르크 성의 감옥에서 곧 사망할 것이라고 보고하면서 25살의 청년 코시모는 아버지에게 놀라운 제안을 했다. 요한 23세의 벌금을 전액 대출해주자는 것이었다. 아들의 제안에 조반니 디 비치는 조용한 웃음으로 답하고, 대출을 승인했다. 3만 5000플로린이라는 거액을 재기가 거의 불가능해 보이는 요한 23세에게 빌려주기로 한 것이다. 조반니 디 비치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했던 직원들은 변제할 능력이 없는 교황에게 대출은 절대로 불가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메디치 가문의 부자(父子)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메디치 가문이 빌려준 거액의 대출금 덕분에 전임 교황은 석방되었다. 비록 감옥에서 빠져나왔지만 더 이상 갈 곳에 없어진 요한 23세에게 메디치 가문이 다시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피렌체에 거처를 마련해주고 생활비를 지급해줬다. 원래부터 병약했던 요한 23세는 석방된 다음 해에 피렌체에서 임종했다. 메디치 가문은 불운했던 고객에게 또다시 자선을 베풀었다. 피렌체의 두오모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세례당 내부에 폐위당한 전임 교황의 영묘를 아름답게 제작해줬다. 르네상스 조각의 거장으로 떠오르고 있던 도나텔로와 신예 건축가 미켈로초를 동원하여 최초의 르네상스식 영묘를 완성시켰다. 현직 교황의 엄중한 항의에도 불구하고 그의 묘비명에는 ‘전임 교황이었던 요한 23세(Ioannes Quondam Papa XXIII)’라고 기록하도록 한 것도 메디치 가문의 결정이었다.
 
해적으로 출발하여 가짜 법학 박사로, 돈을 주고 산 추기경 자리에서 교황 요한 23세로 등극했다가 결국 강제 폐위를 당했던 발다사레 코사는 그렇게 생을 마감했다. 요한 23세는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마지막 소지품을 메디치 가문에게 선물로 주고 임종했다. 위기의 순간에 끝까지 의리를 버리지 않았던 메디치 가문에게 발다사레 코사는 자신이 마지막 순간까지 간직하고 있던 성물(holy relic) 하나를 선물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 피렌체의 두오모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었다. 고객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메디치 은행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메디치 가문이 지킨 의리와 신용
조반니 디 비치와 아들 코시모는 왜 폐위당해 감옥에 갇힌 교황에게 거액의 돈을 빌려주었고 임종 후에는 화려한 영묘까지 마련해줬을까?
 
당시 은행업에서 가장 중요했던 비즈니스의 핵심 가치는 의리와 신용이었다. 조반니 디 비치와 그의 아들 코시모는 은행업의 핵심 가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의리와 신용의 모범을 보여줬다. 한번 거래한 고객과의 의리와 신용은 절대로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모두에게 보여줬던 셈이다.
 
물론 메디치 은행은 요한 23세 때문에 거액의 부실 채권을 안았다. 그러나 독일 콘스탄체에 모였던 유럽 각국의 왕실과 교황청 지도자들은 메디치 가문의 결정을 조심스럽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들은 메디치 은행의 결정에 탄복했다. 한번 맺은 고객과의 관계를 끝까지 배신하지 않는 메디치 은행의 정신을 보고 그들은 거래선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새로 적법하고 유일한 교황으로 선출된 마르틴 5세는 메디치 은행을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 지명했다(1424년). 이 여파로 로마에서 늘 매출 1위를 달성하며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으로 승승장구했던 스피니 은행은 파산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다음, 이제 메디치 가문에서 교황을 배출했고, 바로 그 가문의 첫 번째 교황 레오 10세가 고향 사람 다 빈치를 시켜 ‘성 세례 요한’을 그리게 했다. 아니,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그리게 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은 그 그림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을 보라! 우리 가문과 한번 맺은 인연은 절대로 변치 않는다! 이것은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이기도 하지만, 우리 가문의 정신이다!”라고.
 


 
편집자주 15∼17세기까지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연세대 김상근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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