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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M 이론 및 전략 종합

‘양날의 칼’ 공급망, 큰 틀에서 바라보자

허대식 | 52호 (2010년 3월 Issue 1)

2009년 세계적인 경기침체에도 불구하고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놀라운 실적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공급망 경영(SCM·Supply Chain Management)의 성공 때문이라고 한다. 최근 윤부근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사장은 삼성전자 TV가 세계 시장 1위를 하는 데 효율적인 공급망 체계가 큰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LG전자는 공급망 혁신으로 2009년에만 4억 달러의 비용을 절감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공급망 관리가 항상 이렇게 효자 대접을 받는 것은 아니다. 한때 공급망 경영의 대표 주자로 세계 PC 시장 1위를 구가했던 델 컴퓨터는 이제 3위 업체로 추락했다. 생산 관리의 교본처럼 여겨졌던 도요타 자동차는 올해 사상 최대 규모의 자동차 리콜 사태에 직면하고 최고경영자(CEO)가 미국 의회 청문회에 출석해야 할지도 모르는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 같은 사실은 공급망 관리가 기업에 혁신적인 성과를 가져다줄 수 있지만, 잘못 추진될 경우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공급망 경영(SCM) 패러다임의 등장
공급망은 도대체 무엇이고 기업들이 여기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공급망이란 ‘원재료부터 최종 소비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가치 창출 프로세스’로 정의할 수 있으며, 제품 개발, 구매, 생산, 배송, 판매 및 서비스, 재활용에 이르는 제반 활동을 포함한다. 통상적으로 공급망에는 여러 기업들의 가치 사슬이 복잡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공급망은 ‘공급 사슬’이라 불리기도 한다. 공급망이 기업들의 관심을 본격적으로 끌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중반 이후로, SCM 패러다임의 등장과 함께 기업의 경영 방식도 변화했다.(표1)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까지 경영 혁신의 핵심 목표는 기업 내부 자원 및 역량의 통합이었다. 즉 기업 내 여러 부서 간 의사소통의 단절과 협력 부족을 해소하고 업무 프로세스를 고객 가치를 중심으로 통합하는 것을 핵심으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20년간 가속화된 글로벌 경쟁 환경은 기업들의 관심을 기업 조직의 경계를 벗어난 가치 사슬 전체, 즉 공급망으로 옮겨놨다. 비핵심 기능과 프로세스를 아웃소싱하고, 핵심 역량에 내부 자원을 집중적으로 투자해 기업 고유의 경쟁 우위를 확보하려는 노력을 강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련의 경영 방식의 변화는 외부 기업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왔으며, 공급망 전체의 분절성과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석학 하우 리 교수는 “이러한 상황에서는 개별 기업의 합리적이고 독자적인 의사결정이 공급망 전체로 볼 때 최종 고객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는다”고 역설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간 정보통신 기술의 획기적인 발달로 인해 지역적으로 분산돼 있는 공급망의 효과적인 통합 관리가 가능해졌다는 점은 공급망의 잠재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했다.

스페인의 의류 브랜드 자라(Zara)는 이러한 공급망의 잠재력을 최대한 활용한 회사다. 자라에서는 패션 트렌드의 변화를 신속하게 감지하기 위해 소매점 관리자와 신제품 개발팀이 정기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디자이너, 생산, 구매 관리자가 함께 팀을 이루어 일하기 때문에 디자인 작업과 제품 생산 프로세스가 단절되지 않고 연계된다. 20여 개 자체 생산 공장과 450여 개 협력 업체의 생산 공장은 긴밀하게 적기생산(JIT·Just-in-time) 시스템으로 연결돼 있으며, 완제품은 인근에 위치한 중앙 물류 센터에서 전 세계 시장으로 배송한다. 1년에 총 1만 1000가지 스타일의 다양한 제품을 내놓으면서도 신제품 개발부터 유통까지 2주 만에 마칠 수 있는 민첩함이 자라의 경쟁력이다.
공급망 경영(SCM)을 위한 로드맵
SCM을 도입하려는 기업들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지난 10여 년간 기업의 경험과 학계의 연구 결과에 비춰볼 때, 성공적인 공급망 경영을 위한 로드맵은 △공급망 구성원에 대한 깊은 이해 △고객 가치와 공급망 전략의 일치 △타기업과의 신뢰 관계 구축 △정보기술(IT) 인프라 구축 △공급망 구성원 간 자원 공유 및 프로세스 통합의 5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그림1)

스텝 1
공급망의 상류 및 하류에 위치한 구성원들의 자원과 역량을 이해하라
자사가 소속된 공급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최종 소비자를 중심으로 공급망을 정의하고, 내부 및 외부 구성원들의 자원과 역량을 이해해야 한다. 인텔이 제조한 마이크로프로세서의 고객을 HP나 델 컴퓨터와 같은 PC 제조업체로 보는 것은 공급망을 최종 소비자가 아닌 인텔이라는 회사 입장에서 정의한 것이다. 개인 소비자를 인텔의 최종 고객이라고 본다면, PC 제조업체인 HP와 델 컴퓨터는 물론, PC 판매 업체인 베스트바이도 모두 인텔 제품의 유통업체로 간주할 수 있다. 따라서 인텔이 마이크로프로세서의 수요 변화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PC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베스트바이와 같은 유통업체를 접촉하는 것도 유익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와 같이 최종 고객에서 시작해 공급망과 그 구성원을 파악해가는 과정을 ‘공급망 도식화(supply chain mapping)’라고 부른다. 이 과정을 통해서 최종 소비자에게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과정에 참여한 구성원들과 그들 간의 횡적, 종적 네트워크를 파악하고, 각 구성원들의 상대적 공헌도 및 위험도를 사전에 인지해야 한다.
 
스텝 2
목표 고객의 욕구(needs)에 맞춘 차별화된 공급망 전략을 구상하라
공급망 구성원들의 자원과 역량을 이해하게 되면, 목표 고객의 욕구를 파악하고 이를 가장 효과적으로 충족시킬 수 있는 차별화된 공급망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공급망의 주요 성과 지표는 총원가, 품질, 납기, 유연성·반응성, 지속가능성, 기술 혁신의 정도 등이며, 이들을 효과적으로 결합해 차별화된 공급망 전략을 구사할 수 있다. 미국 와튼 경영대학원의 마샬 피셔 교수는 고객의 욕구를 ‘기능성’과 ‘혁신성’으로 나누고, 각각의 욕구에 대응하는 차별화된 공급망 전략으로 ‘효율적 공급망’과 ‘반응적 공급망’ 전략을 제시했다.
 
이러한 맞춤형 공급망 전략은 모든 산업에서 모든 기업에게 맞는 공급망 전략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한다. 심지어 한 기업에서도 목표 고객에 맞춰 다양한 공급망 전략이 존재할 수 있다. 미국의 의류업체 갭(The Gap)의 올드네이비(Old Navy) 브랜드는 가격에 민감한 고객을 타깃으로 해 주로 중국에서 생산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는 반면, 유행에 민감한 고객을 위한 갭(Gap) 브랜드의 경우, 신속한 시장 대응을 위해서 중남미 지역에 공급망이 위치해 있다. 또 이 회사의 고가 브랜드인 바나나리퍼블릭(Banana Republic)은 고품질을 유지하고 최신 유행을 반영하기 위해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생산을 하고 있다.
 
고객 욕구에 맞춘 다양한 공급망 전략의 필요성은 하나의 공급망이 모든 성과 지표를 동시에 달성하기 어렵다는 인식에 근거한다. 즉 미국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포터 교수가 제시했던 저원가와 차별화의 상충 관계(trade-off)가 그대로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경쟁 기업이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상황(stuck-in-the-middle)’에 있다면 임시적으로 가능할 수도 있지만, 장기적으로 저원가와 차별화의 경쟁 우위를 동시에 지속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최근 저원가와 고품질, 유연성을 모두 향유하는 기업으로 알려진 도요타와 델 컴퓨터가 경쟁 기업들과의 격차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오히려 경쟁자에게 추월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이제 기업들은 고객 욕구와 경쟁자의 전략, 공급망 구성원의 역량과 자원을 충분히 고려해, 자신만의 독특한 공급망 전략을 구상해야 한다.
 
스텝 3
공급망 구성원들과 상호 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상호 호혜 원칙과 공정성을 확보하라
공급망 경영이 어려운 이유는 공급망을 구성하는 여러 기업들이 함께 뜻을 모으고 협력하는 것이 쉽게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경제적 시장 거래에는 사회적 거래가 내포돼 있다. 즉 두 기업 간에 재화 및 서비스의 거래가 일어나는 동시에 신뢰, 설득, 존경, 헌신 등이 교환되기도 하고, 불신, 강요, 멸시, 기회주의가 두 기업 간 관계를 지배할 수도 있다. 공급망 구성원 간의 상호 신뢰와 헌신이 없이는 공급망 전체의 이익을 위한 협력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지난 수년간 미국 자동차 부품 업체의 완성차 업체 선호도 조사(Planning Perspectives 주관)에서 도요타, 혼다, 니산이 미국 자동차 3사보다 훨씬 앞서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부품 업체들은 일본 3사에 대한 연구개발(R&D) 투자를 증대시키고, 장기적으로 이들과 더욱 많은 거래를 하기를 희망하고 있다. 많은 경영학자들이 일본 자동차 산업의 경쟁력을 뛰어난 협력 업체 관리에서 찾고 있는 것도 이 같은 조사 결과와 일치한다.
 
공급망을 구성하고 있는 기업들이 마치 하나의 기업처럼 자원을 공유하고 공통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기 위해서는 기업 간에 깊은 상호 신뢰 및 헌신이 필수 불가결하다. 대기업은 강압적 힘을 쓰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며, 자원 및 정보 공유를 먼저 제안하고 실천함으로써 지속적인 사회적 거래가 일어날 수 있는 시장 메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 또한 기업 간 공동 의사 결정 프로세스에 있어서 모든 구성원들이 참여해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특정 기업에 지나치게 유리한 프로세스를 배제하는 등 절차적 공정성의 확립이 우선돼야 한다.
 
스텝 4
공급망 구성원 간 정보 교환의
신속성, 효율성, 정확성 제고를 위해
IT 인프라를 구축하라
1997년 미국 스탠퍼드대 하우 리 교수는 공급망의 대표적인 비효율성으로 ‘황소 채찍 효과(Bullwhip Effect)’를 지적하고, 정보기술(IT)이 이 문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기업 인프라라고 강조했다. 황소 채찍 효과란 최종 소비자 시장의 작은 변동이, 유통, 생산, 부품, 원재료 업체 등 소비자 시장에서 점점 멀어질수록 시장 정보가 왜곡되고 주문 변동이 증폭돼 나타나는 현상으로, 공급망 구성원 간 정보 교류 단절이 주요한 원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1990년대 중반에 이미 델 컴퓨터는 기업 고객의 주문 정보와 자사의 생산 정보를 50여 개 핵심 부품 업체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는 IT 인프라를 구축했다. 당시 마이클 델 회장은 “정보가 재고를 대체한다”고 강조하면서, “고객사-델 컴퓨터-물류 업체-부품 업체 간에 수요, 생산, 재고, 물류 정보가 자유롭게 흐를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근 한국의 주요 기업들이 도입하는 공급망 혁신은 대부분 IT를 기반으로 한다. 삼성전자는 전 세계 판매 법인과 생산 법인, 주요 1차 부품 업체를 전사적 자원 관리(ERP) 시스템을 통해 연결함으로써, 판매 예측 정보 및 실적, 생산 현황, 재고 수준 등을 실시간으로 파악해 판매 및 생산 계획의 정확성을 제고하고 있으며, 부품 업체와 주문, 생산 계획, 납품 정보 등을 공유하고 있다. 현대기아자동차는 최근 120여 개의 협력 업체와 함께 무선인식(RFID) 전자 태그를 적용해 부품 재고를 실시간으로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런 모든 노력들은 고객사와 내부 조직, 협력 업체 간에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해 공급망 전체의 가시성(visibility)을 높이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스텝 5
공급망 구성원 간 지식과 자원을
공유하고 프로세스의 통합을 시도하라
공급망 역량 이해, 전략 구상, 기업 간 신뢰 구축, IT 인프라의 구축은 모두 이 다섯 번째 단계를 위해 필요한 사전 작업이다. 즉 공급망 구성원 상호 간의 필요한 자원을 공유하고, 프로세스를 하나의 기업처럼 통합해 공급망 전체의 성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이다. 이때 외부와의 통합을 논하기 전에 먼저 기업 내부의 관련 기능을 조정, 통합하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부 파트너에게 정확하고 일관성이 있는 정보와 아이디어를 전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에서 최근 한국 기업들이 앞다퉈 채택하고 있는 판매-생산 계획(S&OP·Sales & Operations Plan-ning) 프로세스는 기업 내부의 판매-물류-생산-구매의 일관성과 통합을 가져오는 시의 적절한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공급망 경영에 있어 전 세계 상위 25개 사를 발표하는 미국의 AMR리서치는 삼성전자의 글로벌 판매-생산 계획 프로세스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하고 있다. 최근 삼성전자는 판매-생산 계획을 주(週) 단위에서 일(日) 단위로 바꿨다고 한다. 이는 삼성전자 공급망의 민첩성(agility)이 일 단위의 판매, 생산 계획의 변화도 소화할 수 있을 정도로 성숙해졌음을 의미한다.
 
내부 기능의 통합이 완료되면, 공급망 외부 파트너와 지식 자원, 인적 자원, 설비 등을 공유하는 프로세스의 통합을 통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고객사 또는 협력 업체와의 지식 교환은 상호 지식 자원의 차이를 줄이고 두 기업이 상호 공유할 수 있는 공통 언어와 지식을 만들어내며, 이는 다시 더 효과적인 지식 교류를 촉진한다. 최근 국내 가전업체가 이마트, 하이마트 등과 진행하고 있는 ‘상호공동계획예측(CPFR·Collaborative Planning, Forecasting, and Re-plenishment)’ 프로그램은 소매업체의 판매 정보와 가전업체의 신제품 출시 및 생산 정보를 상호 공유하면서, 양측 모두 재고 절감, 주문 충족률 향상 등을 기대할 수 있는 상생 프로그램이다. 포스코가 의욕적으로 시행하고 있는 ‘초기 공급 업체 참여(EVI·Early Vendor Involvement)’ 프로그램은 공급 업체인 포스코가 고객사 욕구에 맞춰 신기술 및 신제품을 개발하는 프로그램으로, 고객사와 공급 업체가 상호 학습을 통해 기술 혁신과 융합을 기대할 수 있는 공급망 통합의 좋은 예다.
 
공급망 경영(SCM)의 미래-도전과 기회
공급망은 미래에도 기업들이 고민해야 하는 주요한 이슈로 남을 것인가? 필자는 아래 3가지 경영 사례를 통해 21세기 기업들이 고려해야 할 도전과 기회에 대해서 소개하고자 한다.
①공급망 진화와 적자생존:
델 컴퓨터의 교훈
공급망 경영의 가장 신화적인 기업인 델 컴퓨터는 1984년 텍사스주립대 1학년이던 마이클 델이 자신의 기숙사방에서 창립했다. 창립 20주년이 되는 2004년 전 세계 PC 시장 1위 자리에 등극한 델 컴퓨터의 성장 비결은 ‘직접 판매 모델(Direct Model)’로 알려진 공급망 전략이었다. 이 모델의 핵심은 고객과의 직접 거래, 대량 맞춤화, 공급 업체와의 전략적 제휴, 정보의 실시간 교류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지난 수년간 델 컴퓨터의 시장점유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했으며, 2007년 HP에 1위 자리를 내준 이후 2009년에는 2위 자리마저 에이서(Acer)에게 내주는 수모를 겪었다.(표2)

왜 이런 결과가 초래된 것일까? 해답은 바로 시장 환경의 변화에 있다. 기업의 IT 투자가 감소하기 시작하면서, 지난 수년간 PC 시장은 개인 소비자들의 수요가 주도해왔다. 개인 소비자들은 이동성이 좋은 노트북 컴퓨터를 선호하고, 스타일 및 가격에 민감하며, 직접 제품을 테스트해본 후에 구입하려는 경향이 강해서 오프라인 유통업체를 선호한다. HP는 이러한 시장 변화를 재빨리 간파하고, 제품 디자인을 트렌디하게 변화시켰으며, 원가 절감을 위해 모든 조립 공장을 아시아의 전문 조립 업체로 아웃소싱했다. 또한 기존의 오프라인 소매 업체들과 거래를 계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과의 관계를 선점할 수 있어 노트북 시장 확대에 공격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한편 대만의 에이서(Acer)는 중국, 인도 등의 신흥 시장이 확대되고 넷북과 같은 저가 노트북이 인기를 끌면서, 저가 제품을 출시하는 공격적 마케팅으로 시장점유율을 급속히 확대해나갔다.
 
하지만 델 컴퓨터의 공급망 전략은 이런 시장 환경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델 컴퓨터는 오랫동안 기업 및 정부 등 대규모 구매 고객에 의존해왔으며, 공급망은 이 고객들을 중심으로 구축돼 있었다. 기업 고객들은 데스크톱 PC를 주로 구매했고 고성능, 기능성 디자인을 선호했다. 또한 맞춤형 제품 및 부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 델 컴퓨터는 조립 공장을 직접 소유하고 운영했으며, 오프라인 소매업체를 통한 거래는 하지 않았다. 결국 2007년 마이클 델 회장이 다시 일선으로 복귀해 공급망 전략의 대대적인 변화를 시도하고는 있지만, 델 컴퓨터의 변화의 속도가 시장 변화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시장은 계속 변화한다. 이 변화에 발 맞춰 공급망 전략과 공급망 구조도 진화해야 한다. 그러나 한 기업의 공급망을 진화시키는 것은 전문가들에게도 그렇게 녹녹한 일이 아니다. 시장 환경 변화를 간파하지 못하거나, 이를 인지했다고 해도 변화 의지가 부족할 수 있다. 한때 성공적이었던 공급망 전략과 구조는 이미 기업 내부에서 경쟁 우위의 원천으로 자리매김되고 많은 자원이 투자됐기에 더욱 바꾸기 어렵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레너드 바튼 교수가 지적했듯이 핵심 역량이 ‘핵심적 경직성(core rigidity)’으로 탈바꿈해 기업의 발목을 붙잡게 되는 것이다. 또한 현존하는 공급망의 재구축은 회복 불가능한 설비 투자를 남길 수밖에 없기 때문에, 새롭게 공급망을 창출하는 것보다 오히려 힘들 수 있다. 특히 장기적 상생 관계를 약속했던 공급망 제휴 파트너의 반발도 변화의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②공급망 세계화의 득과 실:
세계 1위 도요타 자동차의 위기
2010년 1월 26일 미국에서의 판매 중지를 시작으로 2월 현재 850만 대의 자동차를 리콜한 도요타 자동차는 창사 이래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특히 현재 위기는 지난 2007년 도요타 자동차가 미국의 GM을 제치고 전 세계 1위 자동차 회사로 등극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발생했기 때문에 더욱 충격적이다. 혹자는 무리한 원가 절감이 가져온 품질 결함에서 그 원인을 찾기도 하고, 일부에서는 정치적 의도가 있는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로 해석하기도 한다. 현재의 도요타의 위기를 이렇게 한두 가지로 설명하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도요타 자동차의 공급망 세계화에서 그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
 

도요타 자동차는 지난 10년간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이룩했다. 도요타는 1990년대에 매년 총 생산량을 470만∼480만 대 수준으로 유지했으나, 2000년부터 생산량을 늘려온 결과 2007년에는 853만 대를 생산, 세계 1위 자리에 등극했다. 이 8년 동안의 생산 증가분의 81%는 해외에서 생산됐으며, 국내 생산은 19%인 58만 대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2007년에는 도요타 창설 이래 처음으로 해외 생산이 일본 국내 생산량을 초과했다.(표3) 1995년에 도요타의 해외 생산 공장은 26개였지만, 2008년 말 총 52개의 해외 공장이 가동됐다. 이와 같은 도요타 생산 공장의 급속한 세계화는 해외 시장에서의 도요타의 폭발적인 인기를 반영하는 것이다. 도요타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1980년 3%, 1990년 8%, 2000년 8%였으나, 지난 4, 5년간 급속히 확대돼 2008년 17%를 기록했다.
 
도요타 자동차의 급속한 세계화가 불러온 문제는 무엇일까? 가장 먼저 표면화된 것은 품질 문제다. 미국 시장에서 리콜이 증가하기 시작해서, 2004년에 100만 대, 2005년에는 230만 대에 이르렀다. 와타나베 카수아키 전 도요타 사장은 ‘도요타 방식(Toyota Way)’에 익숙하지 않은 생산 인력과 관리자가 많으며, 이들을 훈련시킬 도요타 전문가도 필요한 인원의 3분의 1에 못 미친다고 우려를 표명했었다. 급속한 공장 신설로 인해서 도요타의 ‘린(lean) 생산 방식’을 제대로 토착화시킬 충분한 시간이 부족했으며, 기존의 훈련된 관리자들이 다른 기업으로 이직하는 바람에 준비되지 않은 초급 관리자들을 일찍 승진시키는 일도 벌어졌다. 결국 2009년 5월 발표된 미국 완성차 업체에 대한 부품 업체의 평가 결과, 처음으로 도요타가 1위 자리를 혼다 자동차에게 넘겨주는 이변을 낳았다. 협력 업체들은 그 원인 중 하나로 도요타의 젊고 경험이 부족한 구매 관리자들이 도요타 방식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지적했다. 또한 도요타는 소위 ‘글로벌 카’(렉서스, 캠리, 프리어스, 코롤라)와 지역적 특성을 고려한 자동차(크라운, 아발론, 사이언, 툰드라)를 동시에 개발하면서도, 개발 기간은 2년 이내로 단축하려고 시도하면서 많은 설계상의 문제를 일으켰다. 결국 최근에 와서는 개발 기간을 연장하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인한 시장 수요의 감소 등으로 인해 전 세계적으로 설비 과잉 현상을 경험하게 되면서 도요타 내부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커졌다. 2009년 창업자의 손자인 도요타 아키오 사장 체제가 출범하면서, 기업 전략의 핵심을 고객 중심과 품질 제일로 다시 자리매김을 하고 신규 공장 건설 연기, 유휴 공장 폐쇄 및 라인 공유 등을 통해 세계화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규모 리콜 사태가 발생했고, 이런 대규모의 불량 사태에 익숙하지 않은 도요타의 서투른 위기 대처는 문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세계화는 미래 성장을 꿈꾸는 모든 기업들의 전략이다. 무역 장벽 회피, 시장 접근, 원가 절감 등의 이유로 많은 기업들이 전 세계 시장으로 공급망을 확대해왔으며 이런 경향은 향후에도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화를 통해 시장 확대와 판매 증대를 실현할 수 있지만, 생산 설비, 물류 센터, 부품 업체의 현지화 등으로 인해 공급망이 전 세계로 분산됨으로써 복잡성과 위험성이 증가한다. 또한 현지 업체 관리 경험의 부족, 동반 진출한 협력 업체의 경영 미숙 등 여러 가지 위험 요소가 존재한다. 이러한 위험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세계화 속도를 조절하면서 내부 관리 역량을 키우는 데 중점을 둬야 한다. 이번 도요타 사태는 도요타가 관리할 수 있는 범위와 속도를 벗어난 규모로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도요타 내부의 인적 자원 및 기술 자원이 한계에 이르게 되고, 이것이 설계 실수, 품질 저하 등의 문제로 터져나온 것으로 볼 수 있다.
③혁신 네트워크로서의 공급망의 잠재력:
보잉 787 드림라이너의 교훈
보잉 787드림라이너는 보잉이 민간 항공기 시장에서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야심 차게 기획한 신제품이다. 이 항공기는 경량 재료와 연료 효율적인 엔진이 결합돼 구형 항공기에 비해 운행비용을 20% 절감시키고, 유지 보수 비용도 3분의 1가량 줄일 수 있으며, 동급 항공기와 비교해 화물 선적 공간이 50% 더 넓다. 또한 787기는 보잉의 91년 역사를 통틀어 협력 업체들에 의해 설계된 최초의 항공기다. 보잉은 일본, 한국, 영국, 스웨덴, 프랑스, 호주, 캐나다, 이탈리아 등 해외에 산재해 있는 12여 개의 주요 부품 공급 업체들과 신제품 개발팀을 구성해, 공급 업체로 하여금 항공기의 주요 구조물을 설계하고 생산하도록 승인했다. 개발에 참여한 공급 업체들은 내부 배선 및 시스템까지 포함하는 동체를 각각 나누어 생산한 후에 워싱턴 주 에버렛에 위치한 보잉의 최종 조립 시설로 수송해야 한다. 보잉은 수송이 완료된 후 빠르면 3일 안에 787기 조립을 완수한다는 계획을 수립했다.
 
2004년 이 항공기의 개발 계획이 발표되자 많은 항공사들로부터 주문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보잉은 2005년 37개 항공사로부터 총 458기 항공기를 주문받았으며, 2007년에는 52개 항공사로부터 총 762대를 수주했다. 2007년 7월 8 보잉은 1만 5000여 명의 하객을 초대해 787 1호기를 시연하는 행사를 열었다.
 
그러나 보잉은 2008년 여름까지 납품을 약속한 첫 번째 고객인 전일본항공(ANA)에 이 항공기를 인도하지 못했다. 또 베이징올림픽을 겨냥해 60여 대를 주문한 중국 항공사들도 787기를 인도받지 못했다. 보잉은 787기의 첫 비행 테스트를 수차례 미뤄오다가 2년이나 늦은 2009년 12월에서야 마칠 수 있었으며, 2011년 초에 첫 번째 고객인 ANA에 787기를 인도할 계획이라고 발표했다. 이는 계획보다 무려 2년 반이나 지연된 것으로, 보잉은 이에 대해 고액의 벌금을 물어야만 한다.
 
세계 최고의 항공 엔지니어들이 모인 보잉에서 왜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일까? 제일 먼저 지적된 문제는 보잉이 공급 업체들의 설계 및 생산 능력을 과대평가했다는 것이다. 개발에 참여한 공급 업체들이 이미 보잉에 항공기 부품을 오랫동안 공급해온 것은 사실이지만, 비행기 동체와 같은 시스템까지 포함하는 수준의 부품을 설계하거나 조립해본 경험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경험이 부족한 공급 업체들이 시스템 설계를 엔지니어링 전문 회사에 재하청하게 되면서, 일부 설계 회사에 과부하가 걸리고 이는 다시 전체 개발 일정을 지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또한 공급 업체들이 재하청 시에 해외 업체를 이용하면서, 관리의 복잡성이 커지고 설계 승인까지의 소요 시간이 늘어났다. 동체를 처음 제작하는 이탈리아 업체는 생산 설비를 새롭게 구축하는 과정에서 공장 부지 문제로 많은 시간을 지연시켰다. 한편 보잉의 엔지니어들은 오랫동안 항공기 설계 및 제작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으나 이를 효과적으로 공급 업체에게 전달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보잉의 전체 설계가 늦어지고, 설계 변경이 자주 일어나면서 공급 업체의 설계 일정이 더욱 지연되게 됐다.
 
공급망에 속한 기업들의 개발 역량과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공급망을 창조와 혁신의 네트워크로 전환하는 것은 모든 기업들의 꿈이다. 내부의 연구개발(R&D)에만 의존해서는 시장 변화의 속도를 쫓아갈 수 없고, 경쟁 기업과의 혁신 경쟁에서 뒤쳐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P&G는 개방형 혁신을 공급망 경영과 잘 결합한 회사다. P&G는 협력 업체 및 유통 업체, 여타 아이디어 중개 업체들과 내부 기술 및 지적 재산권을 공유하고, 동시에 외부에서 개발한 아이디어 및 기술을 이용해 제품 혁신을 이뤄내는 ‘연계개발(C&D·Connect & Develop)’로 많은 성공을 거뒀다. 최근 애플은 중소 기업들이 아이폰 사용자를 위한 응용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 플랫폼을 제공하고, 이들 기업들이 디지털 콘텐츠를 판매할 수 있는 유통 채널인 앱스토어를 만들어줌으로써 성공적인 개방형 혁신을 이뤄냈다.
 
개방형 혁신을 통해서 공급망을 혁신 네트워크로 전환하려는 야심 찬 계획을 가진 기업들에게 보잉의 사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먼저 공급망 구성원의 자원과 역량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이를 통해 외부 참여자들이 어떠한 수준의 공헌을 어떤 곳에서 할 수 있는지 명확히 파악해야 한다. 또한 외부 지식 자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업 내부의 역량 개발과 함께 개방적인 기업 문화의 정착이 필요하다. P&G에서도 외부 아이디어의 성공율이 1%에 머문다는 사실은 내부 개발 역량과 외부 지식 자원을 결합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시사한다. 또한 애플의 경우에는 소프트웨어를 모듈화함으로써 외부 개발자들이 애플과 잦은 접촉을 하지 않고도 독립적으로 프로그램을 개발할 수 있지만, 항공기와 같이 일체성이 높은 제품의 경우 외부 개발자와 보잉의 엔지니어가 독립적으로 설계를 진행할 수 없다는 점을 주의해야 한다. 즉 공급망을 개방형 혁신의 장으로 바꾸기 위해서는 공급망상 리더 위치에 있는 기업이 제품 전체의 구조까지 이에 적합하게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국 기업에 대한 제언
공급망은 원하면 피해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델, 도요타, 보잉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공급망은 양날의 칼과 같아서 경쟁 우위의 원천이 될 수도 있고 참담한 실패의 아픔을 초래할 수도 있다.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하려는 한국 기업은 먼저 내적 역량을 강화해야 하고, 이 과정에서 CEO의 지원과 관심은 필수적이다. 공급망 경영으로 유명한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현대기아자동차 등은 모두 최고 경영층의 적극적인 관심과 지원이 성공의 밑거름이 됐다. 공급망 경영은 기업 내부의 여러 부서 간의 통합과 조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최고 경영층의 지지 없이는 실현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 공급망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인재 개발 프로그램의 확립이 시급하다. 선진 기업의 경우, 신입 사원이 마케팅, 물류, 생산, 구매의 각 분야에서 수습 기간을 거친 후에야 선호하는 부서를 선택해 근무하도록 한다. 또 정기적인 순환 근무제를 도입해 공급망 전반에 대해 전문적 지식과 경험을 갖춘 전문가를 양성하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 기업은 그동안 기업 내 물류, 생산, 구매 프로세스의 통합에 집중해왔다. 이제는 공급망 경영의 초점을 외부 파트너와의 통합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최근 많은 기업들이 세계 각지에 판매 및 생산 법인을 설립하고 있는데, 시장 환경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하고 주요 판매 시장을 중심으로 공급망의 세계화를 진행해야 한다.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세계화는 반드시 재고(再考)해야만 한다.
 
한국은 1990년대 초까지 기술 도입국으로서 선진 기술의 도입, 모방, 학습 후 기술 자립의 길을 걸어왔다. 한국이 기술 선진국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개방형 기술 혁신과 패쇄형 기술 혁신을 효과적으로 병행해야 한다. 역설적이지만 내부 개발에 익숙한 외국 경쟁 기업보다 한국 기업이 개방형 기술 혁신에 유리할 수도 있다. 글로벌 기업으로 부상한 한국 대기업들이 고유의 노하우, 특허 등을 중소 협력 기업들과 공유하고, 중소 기업들이 기술 혁신을 할 수 있는 플랫폼 역할을 한다면, 개방형 혁신이 꽃 피울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기밀 누출과 같은 의도하지 않은 위험을 관리할 수 있는 능력도 배양해야 한다.
 
2007년 델 컴퓨터의 시장점유율 하락을 막기 위해 마이클 델 회장이 회사로 복귀했다. 복귀 후에 임직원들에게 보낸 첫 번째 사내 메일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직접판매 모델(Direct Model)은 혁명이었다. 하지만 종교는 아니다. 우리는 이 사업 모델을 계속해서 개선해나갈 것이며, 고객들이 원하는 바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이를 뛰어넘을 것이다.”
 
미래에 아무리 시장 환경이 변화한다 하더라도 공급망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다만 이를 어떻게 경영하느냐가 변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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