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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se Study

“협업은 결혼...싸울 수 있지만 못 풀 문제는 없다”

김유영 | 51호 (2010년 2월 Issue 2)

기업 간 협업을 추진할 때 가장 어렵고 힘든 과제 가운데 하나는 협상이다. 협력 파트너는 언제라도 기회주의적인 행동(opportunistic behavior)을 할 수 있다. 이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서는 발생 가능한 수많은 문제에 대해 상대방과 합의점을 찾아서 계약서에 반영해야 한다. 협상의 성패는 협업의 성패를 가른다.
 
초대형 협력 사례로 꼽히는 LG와 필립스의 합작 투자 사례는 많은 교훈을 준다. ‘LG필립스LCD(현 LG디스플레이)’라는 합작사를 탄생시키기까지는 협상 기간만 무려 1년 5개월이 걸렸다. 협상은 마치 ‘두더지 잡기 게임’ 같았다. 한 가지 이슈가 해결되면 또 다른 이슈가 금세 튀어나왔다. 협상 결렬 위기도 있었다. 강도 높은 협상이 이어지면서 실무자들은 거의 탈진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양측은 ‘세계 1위의 액정표시장치(LCD) 회사’를 만들겠다는 공통된 비전하에 마침내 협상 타결에 성공했다. LG와 필립스의 협상 사례를 체계적으로 분석한 자료와 당시의 자세한 정황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거대 기업 간 협상 과정 전체가 공개된 것도 매우 이례적이다.
 
상대의 자원과 전략 분석해 최적 파트너 찾아라
1998년 한국 기업 전체가 외환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LCD 산업이나 반도체 산업 모두 공급 과잉으로 최악의 국면을 맞았다. 당시 LG그룹의 LCD와 반도체 사업을 동시에 맡고 있던 LG반도체도 예외가 아니었다. LG반도체는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방안 찾기에 나섰다.
 
제휴 대상을 찾는 게 급선무였다. LG는 일차적으로 30여 개 글로벌 업체들을 검토했다. 그 결과, 필립스가 가장 적합한 파트너로 꼽혔다. 이런 판단의 근거는 필립스의 당시 자원과 역량, 전략적 포지셔닝에 대한 치밀한 분석에서 나왔다. 필립스는 이미 반도체 사업 부문을 구조조정을 해본 경험이 있었다. 또 필립스가 모니터 업계 선두이기 때문에 틀림없이 LCD 분야의 추가 제휴 대상을 모색할 가능성이 높았다.
 
필립스는 브라운관(CRT) 모니터는 세계 2위였지만, 당시 차세대 디스플레이로 꼽히던 LCD는 일본과 한국 업체에 밀리고 있었다. 어차피 브라운관이 LCD로 대체될 게 확실시됐기 때문에 필립스 입장에서도 LG를 제휴 후보로 여길 가능성이 높다고 LG 측은 추측했다. 실제 필립스는 이미 1997년 일본 LCD업체인 호시덴과 ‘HAPD(Hosiden and Philips Display)’라는 합작사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다. 게다가 필립스는 1990년대 초부터 구조조정을 꾸준히 추진해 유동성도 풍부했다. 이는 LG에 투자할 만한 여력이 있을 것이라는 얘기이기도 했다. LG도 필립스의 투자를 받으면 필립스의 기술력과 브랜드, 유통망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에 협업의 시너지를 충분히 낼 수 있었다.
 

 
비전과 데이터로 협상 물꼬 터라
당시 외형상으로 보면 LG가 필립스보다 열위에 있었다. 게다가 외환위기로 위기에 몰린 LG는 정부로부터 직간접적으로 외자를 빨리 유치하라는 압박을 받았다. 태생적으로 LG가 시간에 쫓기는 불리한 위치에 있었던 셈이다. 더욱이 필립스는 TV 제조업체로서 세계 시장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LG의 LCD 사업은 세계 4, 5위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LG는 이런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협상 초반부터 구체적인 비전과 자료를 무기로 삼아 필립스를 공략해 대화의 물꼬를 텄다.
 
1998년 2월 LG 측은 필립스에 물밑으로 제휴 의사를 타진했다. 필립스의 반응은 떨떠름했다. 필립스 측은 일본의 LCD 업체인 호시덴과의 합작사에 우선순위를 더 많이 두고 있었다고 밝혔다. 실제 필립스는 호시덴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었다. 특히 필립스에서는 LCD 시장의 공급 과잉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필립스 이사회도 LG와의 전략적 제휴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LG는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필립스에 명확한 ‘비전’을 제시했다. 그 비전은 ‘세계 최고의 LCD 회사(World No.1 LCD company)’로 다른 분야는 몰라도 LCD 분야에서는 반드시 세계 1위를 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LG는 구체적인 협업 방안도 제시했다. 필립스의 기초 기술, 판매망, 자금과, LG의 응용 기술과 생산 능력을 각각 결합하자는 내용이었다. 담대한 목표와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제시되자 필립스는 LG와의 제휴를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은 아직 많았다. 필립스가 제휴에 관심을 보이긴 했지만, 그들은 마케팅 및 판매 분야에서만 협력하자는 태도를 고수했다. LG는 위기 극복을 위해 자본 유치가 필요했다. 미래 성장을 위해 더 광범위한 분야에서 신규 투자가 필요하다는 LG 측의 거듭된 설득이 이어지자 필립스는 한발 양보했다. LCD 시장 여건이 좋아지면 ‘단계적으로 하겠다’는 태도를 보인 것.
 
LG는 필립스를 더 적극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했다. 돌파구를 모색하기 위해 왜 필립스가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지 집중 분석했다. 그 결과, LCD 시장 전망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LG는 당시 1년 뒤인 1999년이면 LCD 시장이 곧 호전될 것으로 내다봤다. 하지만 필립스는 아무리 빨라도 2년이 지나야 업황이 개선될 것으로 전망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해결책은 쉽게 나왔다. LG는 필립스에 ‘공동으로 LCD 시장 조사를 하자’고 제안했다. 필립스가 확신을 가질 만한 구체적인 자료가 나온다면 빠른 시일 내에 신규 투자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드디어 조사가 이뤄졌고, LG 측의 전망대로 LCD 공급 부족 상황이 1년 뒤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상황은 반전됐다. 양측 협상팀 사이에서 LCD 공급 부족을 투자 기회로 만들자는 공감대가 확산됐다. 당연히 수익을 얻으려면 제때 투자해야 한다는 인식도 퍼져나갔다. 원대한 비전과 이를 뒷받침하는 과학적 데이터가 필립스의 마음을 돌려놓았다.
 
핵심 사안에 대해서는 강공으로 밀어붙여라
필립스가 투자 쪽으로 마음을 돌렸지만 합작사 투자 비율을 놓고 양측은 힘겨루기를 벌여야 했다. 필립스는 합작 회사의 조건으로 필립스가 ‘필립스’라는 브랜드 명을 그대로 사용하고 지분도 필립스가 51%, LG가 49%(양측 지분을 총 100%로 가정 했을 때)를 가져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필립스는 대형 LCD 점유율 확보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경영권 확보에 필요한 자금만 투입하겠다는 태도를 보였다.
 
반면 LG는 새로운 브랜드나 공동 브랜드를 사용하고 지분은 양측이 50 대 50으로 동등하게 투자하자고 제안했다. 당시 LG는 자금 확보가 중요했다. 따라서 필립스가 70% 이상 지분을 가져간다면 생각해볼 수 있었지만, 51%를 가져간다면 필요한 자금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경영권만 빼앗기게 된다. 필립스가 51%의 지분을 갖게 되면 지배 주주 프리미엄을 주장할 게 확실시됐다. 또 LCD 사업은 LG에게도 전략적으로 중요했다. 따라서 각종 의사 결정에 있어서 LG도 필립스와 대등한 위치에서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해야 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51의 지분과 50의 지분은 완전히 다른 결과를 초래할 게 뻔했다. LG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강공을 지속했고 결국 필립스는 50% 투자안을 수용했다.
 
합작 회사의 역할도 핵심 사안이었다. 필립스는 애초 ‘판매와 마케팅 부문에서만 합작을 하자’고 제안했다. LG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필립스의 브랜드뿐 아니라 기술력도 필요했던 LG로서는 필립스가 생산까지 관여하지 않으면 합작을 할 이유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LG는 필립스도 LG 이외의 대안이 없을 것이라는 걸 간파하고 ‘생산과 판매를 겸하는 합작사를 만들자’고 밀어붙였다. 당시 호시덴은 대형 LCD 경쟁력이 낮았고 다른 일본 기업도 보수적인 문화 특성상 필립스가 다수 지분을 확보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게 뻔했다. 대만 기업 역시 후발 주자로 국내 기업보다는 한 수 아래였다. LG는 LCD 사업에서는 생산과 판매의 시너지가 중요하기 때문에 생산과 판매를 분리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필립스를 설득할 수 있었다.
 
최고 경영진이 확고한 의지를 표명하라
외환위기로 국내외 상황이 급변하면서 협상 환경도 요동쳤다. 당시 정부는 구조조정을 위해 반도체 빅딜을 추진했다. 이로 인해 1998년 12월 LG반도체의 반도체 부문이 현대전자(현 하이닉스)에 흡수 통합된다고 결정됐다. LG반도체는 원래 부채 비율을 200% 이하로 낮추려고 외자 유치를 추진했다. 하지만 LG반도체의 경영권이 현대전자로 넘어가고 반도체 매각 대금이 현금으로 들어오면서 협상의 의미가 퇴색됐다.
 
이런 가운데 LG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었다. ‘앞으로 LCD가 그룹의 효자 사업이 될 텐데, 필립스에 왜 지분을 넘기려 하는가’ ‘그동안 쌓은 기술력으로 독자 생존할 수 있다’ 등의 반대 의견이 이어졌다. 하지만 IMF 구제금융 지원을 받는 한국의 경제 상황에서는 외자 유치가 매우 중요했고, 그룹의 구조조정을 확실히 하려면 제휴가 성사돼야 했다. 구조조정본부의 강력한 리더십하에 필립스와의 제휴를 추진하는 쪽으로 의견이 정리됐다. 협력에 대한 최고 경영진(top management team) 차원의 결단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와 함께 협상이 고비를 겪을 때마다 구본무 LG그룹 회장은 “합작은 결혼이다. 살다 보면 부부가 싸울 수도 있지만 대화로 못 풀 문제는 없다”며 협상팀을 다독이곤 했다고 한다.

 
상황 변화를 레버리지 삼아 전세를 역전하라
LG는 LG반도체의 반도체 부문의 향방이 결정되자 순발력 있게 대응했다. 1999년 1월 LG반도체의 LCD 부문을 떼어나 ‘LG LCD’라는 법인으로 분리했다. LG 측과 필립스 측의 협상 주체도 바뀌었다. 이전까지 LG반도체와 구조조정본부가 협상을 주도했지만 이제 LG전자와 구조조정본부로 주역이 변경됐다. 협상 주체뿐만 아니라 주도권을 행사하는 측도 달라졌다. 반도체 매각 대금으로 한숨을 돌린 LG가 이제는 우월한 입장에 설 수 있었다. 또 정부의 외자 유치를 의식해 협상을 서둘러 할 필요도 없었다. LG는 재빨리 협상 목표를 바꿨다. ‘빠른 협상 타결’이 아니라 ‘최대한 높은 가격을 받는다’는 것으로 협상의 목표가 새로 정해졌다.
 
자신감을 얻은 LG 측은 1999년 2월 기업 가치 평가 기법으로 산정할 수 있는 최대 가격인 65억 달러를 제시했다. 협상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한 ‘앵커링(닻 내리기·anchoring)’ 전략을 쓴 것이다. 필립스는 충격을 받았다. 이전까지 필립스가 제시한 가격은 20억 달러였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높은 가격이란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LG 측은 ‘이전에 논의된 가격이 저평가됐다는 점을 필립스에 일깨워주고 협상에서 최대한 유리한 고지에 서기 위해 가능한 가격 중 최고가를 불렀다. 실제 LCD 경기는 바닥을 치고 상승기에 있었기 때문에 LG는 강공을 지속했다. 기업 가치 평가에서 필립스는 LCD업계 평균 수율(불량품이 아닌 제품의 비율)을 반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LG는 업계 최고의 생산성 기업임을 내세워 ‘LG 프리미엄’을 반영해야 한다고 맞섰다. LG는 한 술 더 떠 ‘업계 평균의 20분의 1의 자금으로도 생산 능력을 2배 키울 수 있다’ ‘LG의 기술 경쟁력이 높아 필립스가 제안한 연구개발(R&D) 비용의 절반으로 차세대 LCD를 개발할 수 있다’ 등의 사항도 그대로 관철시켰다. 그 결과 LG는 필립스가 초반에 제시한 가격보다 무려 147% 높은 가격으로 협상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권한 이양하고 협상팀 내 역할 분담은 확실하게 하라
LG 측은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실무진에 권한을 대폭 이양(empowerment)해서 웬만한 의사결정은 실무진들이 하도록 했다. 가장 민감한 가격 문제도 협상의 전권은 구조본의 부사장 지휘하에 LG전자 상무에게 주어졌다. 이런 권한 이양으로 협상팀은 상황을 재빨리 파악해 발 빠르게 대처할 수 있었다.
 
또 LG는 필립스와의 협상에서 상대방의 논리적이지 못한 부분을 공격할 때에는 A 상무가 전담했다. 또 달아오른 분위기를 가라앉힐 때에는 B 상무가 부드러운 분위기를 유도했다. B 상무는 필립스와의 우호적인 채널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필립스 내부 동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범죄 수사에서 자주 활용되는 전형적인 ‘굿 가이, 배드 가이(good guy, bad guy)’ 전술이다.
 
이와 함께 협상 테이블에서는 한 건에 대해 한 명만 이야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혹시라도 다른 의견이 나와 상대편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특히 기업 가치에 관해서는 오직 한 사람만 이야기하게 했고, 다른 사람들은 절대로 가격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게 철저하게 지시했다.
 
협상에서 영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상대편과 사고방식을 같이 하는 게 의미가 있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외부로 감정을 표출하지 않는 인내심도 중요하다. 협상 과정에서 실망스러운 적도 적지 않았지만 항상 웃었다. 협상 시 논쟁을 해도 ‘비즈니스는 비즈니스, 프렌드십은 프렌드십’이라는 원칙을 고수했다. 협상장 안에서 논쟁을 해도 협상장 밖에서는 커피를 함께 마신 일이 비일비재했다.
 
계약 사인 직전까지 방심하지 마라
지루한 밀고 당기기 끝에 LCD 사업의 최종 가치가 결정됐다. 필립스는 최종 가치 32억 달러 중 부채를 제외한 금액의 절반인 16억 달러를 LG에 지불하기로 했다. LG와 필립스는 양측에서 1명씩 모두 2명이 공동 대표이사를 맡고, 3명씩 총 6명으로 구성된 이사회를 중심으로 회사를 운영키로 했다. 최고경영자(CEO)는 LG 측이,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필립스가 맡기로 했다.
 
이후 1999년 5월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필립스 본사로 갔다. 투자의향서(LOI·Letter of Intent)에 사인을 하기 위한 것. 조인식 장소는 축제 분위기였다. 코어 본스트라 회장이 구 회장 일행을 이끌면서 계속해서 건배를 제안했다.
 
하지만 행사 시작 2시간 전의 분위기는 전혀 딴판이었다. 필립스 측에서 갑자기 회의를 열자고 했다. 필립스 회장이 의논할 게 있다며 LG 측 인사들을 불렀다. 필립스는 놀랍게도 LG가 CEO를 맡기로 한 것을 걸고넘어지며 투자 가격을 깎아달라고까지 요구했다. 필립스는 요구 사항을 들어주지 않으면 협상을 틀겠다고 선언했다.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필립스로서는 ‘홈 어드밴티지(home advantage)’를 최대한 활용했다. 더불어 성대한 파티를 불과 2시간 앞두고 협상 결렬을 내세우면서까지 강력한 요구를 한 것은 전형적인 니블링(nibbling) 전술이다. 니블링은 협상 막바지에 갑작스럽게 추가 요구를 하면 전체 협상이 깨질 것을 우려한 상대방이 양보하도록 유도하는 협상 기법이다.
LG와 필립스, 만남부터 쿨한 이별까지
 
LG와 필립스는 1999년 7월 최종 합작 계약(Joint Venture Agreement)을 체결했다. 합작 법인인 LG필립스LCD는 1999년 9월 출범했다.
 
이 협업은 큰 성과를 냈다. 필립스와 전략적 제휴를 추진하기 직전인 1998년 LG반도체의 LCD 사업은 매출 905억 원에 당기순이익은 4억 원 적자였다. 그러나 1999년 출범하고, 4년 만인 2003년 ‘순익 1조 원’ 클럽(매출 6조 313억 원, 당기순이익 1조 191억 원)에 가입했다.
 
양측 협업의 시너지는 기업 경쟁력 강화로 이어졌다. 필립스의 투자금은 LG필립스LCD가 세계적인 LCD 업체로 도약하는 데에 밑거름이 됐다. 디스플레이 산업은 매년 조 단위의 거액 투자가 필요한데다 투자 타이밍이 중요하다. 경쟁사가 소형 LCD를 생산할 때 LG필립스LCD는 대형 LCD에 집중하기로 하고 선제 투자에 나서 LCD 공급 부족이 빚어질 때 대량 양산을 통해 시장점유율을 높여갈 수 있었다. 당시 양사의 지속적인 투자로 경북 구미 사업장은 세계 최초 4세대, 세계 최초 5세대, 세계 최대 6세대 LCD 생산라인 등을 갖춘 LCD 메카로 변모했다. 2003년 대형 LCD 세계 1위에 등극한 것을 시작으로 세계 시장에서의 지배력을 높여갔다. 뿐만 아니라 2004년 6월 LG필립스LCD는 국내 기업으로서는 최초로 한국과 미국 증시에 동시 상장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필립스의 브랜드도 크게 작용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하지만 필립스는 LG필립스LCD 기업 공개 첫해인 2004년을 기점으로 LG필립스LCD에 대한 지분을 점진적으로 낮추기 시작했다. 당초 두 회사는 서로의 동의 없이 지분을 30% 이하로 떨어뜨릴 수 없도록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이는 규정상으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는 거꾸로 지분이 30%가 될 때까지는 자유롭게 주식을 팔 수 있다는 뜻이었다. 특히 2005년 필립스가 자체 사업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LCD 패널 사업을 접기로 결정하면서 양측의 결별은 공식화됐다. 필립스는 반도체뿐 아니라 LCD 사업을 포기하는 대신 조명, 의료, 가전에 주력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특히 차세대 광원(光源)인 발광다이오드(LED) 사업에 역량을 집중키로 했다. 이에 따라 루미레즈(Lumileds) 등 LED 기업을 잇달아 인수하기 시작했다.
 
LG 측도 2008년 2월 회사 이름을 LG필립스LCD에서 LG디스플레이로 바꾸는 등 단독 경영 체제를 단계적으로 강화해 이별에 대비했다. 결국 필립스는 2009년 3월 보유 지분을 블록세일 형태로 전량 매각하고 LG 측과 결별했다. 필립스는 지분 매각으로 처음 투자했던 금액인 16억 달러의 3, 4배에 이르는 재무적인 이익을 거둔 것으로 알려졌다.
 
필립스와 결별한 뒤 LG디스플레이의 성적표는 괄목할 만하다. 2009년 연 매출 20조 원을 처음 돌파했다. 2009년 20조 6136억 원의 매출에 1조 772억 원의 영업 이익을 거뒀다. 특히 매출은 20조 원을 사상 처음 돌파하면서 사상 최대 수준을 기록했다.
 
LG와 필립스의 합작 일지
- 1998년 2월 LG반도체, 필립스에 물밑 접촉
협상 담당할 ‘이글 프로젝트팀’ 발족
- 1998년 9월 LG와 필립스에 LCD 장기 공급 계약 체결
(합작사 설립 전 느슨한 형태의 제휴 시작)
- 1998년 12월 ‘반도체 빅딜’로 LG반도체의 반도체 부문,
현대전자에 흡수 통합 결정
- 1999년 1월 LG, LG반도체의 LCD 부문 분리해 LGLCD 출범
- 1999년 7월 LG와 필립스, 최종 합작 계약서 체결
- 1999년 9월 LG필립스LCD 출범
- 2004년 7월 LG필립스LCD, 한국과 미국에서 기업 공개
- 2007년 11월 필립스, 헬스 케어, 조명,
소비자 라이프스타일에 집중하겠다고 발표
(LCD 패널 사업은 접겠다는 의사 공식화)
- 2008년 2월 LG,
LG필립스LCD에서 LG디스플레이로 사명 변경
- 2009년 3월 필립스,
LG디스플레이에 대한 보유 지분 전량 매각
 
LG는 니블링 전술에 말려들고 말았다. 2년 가까이 추진한 계약 협상을 물거품에 빠지느니 현실적인 타협안을 찾기로 한 것이다. (보통 니블링에 대응하려면 상대 요구와는 전혀 다른 조건을 추가로 제시하는 맞받아치기 전략이 효과적이다. LG는 이 부분에서만큼은 단호하게 대응하지 못했다.) 결국 계약서에는 ‘3년 후에는 CEO를 교체할 수 있다’는 내용을 추가하고, 금액도 깎아줬다.
 
하지만 서울로 돌아온 LG 협상팀은 암스테르담에서 시간이 없어서 따지지 못했던 점들을 되짚어봤다. 그리고 필립스가 구사한 ‘홈 어드밴티지’ 전략을 역이용했다. ‘합작사가 잘 돌아가는 게 가장 중요한 상황에서 돈 때문에 양측의 우호 관계가 깨져서 되겠느냐. 합작사가 한국에 있다는 점만은 잊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를 필립스에 전달했다. 결국 LG는 필립스에 깎아줬던 가격을 일부 돌려받을 수 있었다.
 
편집자 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장영길 씨(서강대 경영학과 4학년·26)가 참여했습니다. 기사는 LG인화원에 이동기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와 이동현 가톨릭대 경영학부교수가 작성한 ‘LG의 전략적 제휴’라는 미공개 보고서와 DBR 취재 등을 바탕으로 작성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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