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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 종합

조선, 휴대전화… 한국은 ‘ 캐치업’왕국

한정화 | 34호 (2009년 6월 Issue 1)
불황기에 순위가 뒤바뀐 가장 대표적인 산업으로 세계 조선업을 들 수 있다. 1990년대 초 세계 최고의 조선 산업 분석 기관인 클락슨은 불황을 예고하며 조선업체들에 신중한 투자를 권했다. 일본 기업은 이 충고에 따라 설비 투자를 줄이고 표준화 전략을 채택해 투자 대비 성과를 극대화했다. 하지만 한국 조선업체는 전혀 다른 전략을 택했다. 현대, 삼성, 대우 간 라이벌 경쟁으로 한국 조선사들은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했다. 이후 중국 경제의 부상과 유가 인상으로 물동량이 늘어나 조선 산업에 호황이 돌아오자, 공격적 설비 투자를 단행한 한국이 2000년대 초 세계 조선 산업의 리더로 떠올랐다.
 
철옹성 일본 무너뜨린 한국 조선 산업
클락슨의 경고를 무시한 한국의 투자 확대는 합리적인 결정이었을까? 한국 조선업의 도약은 운이 좋았기 때문일까? 결과를 놓고 보면 운도 따랐다. 하지만 한국의 공격적 투자는 선두업체로 도약하겠다는 강한 열망을 갖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후발기업이 선발기업을 따라잡으려면 ‘캐치업(catch-up)’에 대한 강한 열망, 즉 ‘전략적 의지(strategic intent)’가 반드시 필요하다.
 
1990년대 초 일본의 조선 산업은 성숙·포화 상태여서 성장 전망이 밝지 않았고, 전자나 자동차보다 인기가 없어 우수 기술 인력의 유입도 저조했다. 일본은 인적 자원의 제약, 특히 설계 인력의 부족이라는 문제에 부딪혔기 때문에 표준 설계를 기반으로 한 표준선 전략을 선호했다. 자국 시장의 수요가 50%를 차지하는 일본으로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해외 수요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한국은 상대적으로 풍부한 설계 분야의 기술 인력을 바탕으로 고객의 주문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전략을 추구했다. 고객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선박을 디자인했고, 조건만 맞으면 까다로운 설계 변경 요청에도 유연하게 대처했다.
 
또 막대한 설비 투자 없이 선박 공기를 단축하기 위해 육상 건조 공법, 해상 건조 공법, 침수 공법 등 다양한 생산 공정 혁신을 이뤄냈다. 경남 해안 지역에 산업 클러스터가 집중돼 있었기 때문에 철강, 엔진, 전장품 등 관련 부품의 원활한 조달도 이뤄졌다. 이를 토대로 한국 조선업체들은 원가를 줄이면서 납기를 더욱 단축할 수 있었다. 조선 산업의 캐치업은 전략적 의지에 기초한 공격적 투자(aggressiveness), 고객의 요구에 적극 대응하는 유연성(flexibility), 납기의 신속성(speed) 등이 바탕이 됐다. 이는 결과적으로 고객의 가치를 획기적으로 높였고, 한국은 수십 년 동안 철옹성 같았던 일본의 우위를 무너뜨리고 산업의 리더가 될 수 있었다.
 
이와 유사한 캐치업 사례가 또 있다. 1970년대 말 일본 반도체 회사가 선발주자였던 미국을 따라잡은 일이다. 당시 일본 반도체 회사들은 미국의 ‘선발자 우위(first-mover advantage)’를 따라잡고자 16K D램 양산에 성공한 뒤 미국 시장을 집중 공략했다. 당시 미국은 오일 쇼크로 인한 불황에서 회복 단계에 있었다. 미국의 반도체 회사들은 불황기 공급 과잉으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설비 확장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 PC산업이 성장하면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가 늘어났고, 수급 불균형이 생겼다. 일본 회사들은 이 틈새를 적시에 공략해 단기간에 시장의 리더가 될 수 있었다. 결국 일본의 원가 경쟁력에 밀린 미국 반도체 업체들은 메모리 사업을 포기했고, 이는 1980년대 미국과 일본 간 반도체 무역 분쟁의 원인이 됐다.
 
불황은 역전 기회 제공
이 2가지 역사적 사례를 볼 때, 불황은 기업 간 순위의 역전을 가능케 하는 기회를 제공함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조선과 반도체 산업 모두 대규모 설비 투자를 요하는 장치 산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장치 산업은 ‘호황에 부자, 불황에 거지’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 고정비 부담이 크기 때문에, 과잉 설비 투자가 선발기업에는 심각한 부담을 줄 수 있다. 따라서 선발기업들은 불황이 예견될 때 투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후발기업 입장에서는 선발기업의 투자가 주춤한 시기가 캐치업의 기회가 된다. 이미 과잉 투자 상태에 있는 선발기업의 적자폭이 커지는 시기에 후발기업이 투자를 시작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설비 투자가 끝나고 양산 단계에 접어들 때 경기가 회복되면 시장점유율 격차가 줄어들게 된다. 이를 통해 캐치업이나 역전이 가능하다.
 
앞의 2가지 캐치업 사례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후발기업들이 선발기업을 따라잡겠다는 강력한 전략적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통적인 전략 수립 방법론에 따르면, 기업들은 환경이나 자원 역량에 대한 분석(SWOT)에 기초해 다양한 전략 대안을 선택하는 합리적·분석적 접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실제 기업 현장을 살펴보면, 합리적 접근을 넘어선 도전자의 강력한 열망이 의사결정을 주도하는 사례가 적지 않다.
 

그렇다고 캐치업이 단순한 전략적 의지만으로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열망이 전략적 의지로 나타나면서 선발기업의 취약점을 공략하는 ‘전략적 혁신’이 따라야 한다. 1970년대 말 일본의 반도체 회사들은 품질 관리와 양산 기술 면에서 세계 최고 수준이었으며, 이에 기초한 원가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가격과 품질의 우수성으로 시장을 공략할 수 있었던 셈이다. 1990년대 한국 조선회사들도 풍부한 설계 인력과 지속적인 생산 혁신으로 품질, 원가, 납기(QCD) 경쟁력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에 수요, 공급의 불균형이라는 시장의 모멘텀을 적시에 활용해 역전에 성공했다.
 
불황 때 캐치업에 성공하기 위해서는 차별화나 원가 우위 전략으로 새로운 고객을 창조할 수 있어야 한다. 일찍이 피터 드러커는 마케팅과 혁신을 통해 ‘고객을 창조하는 것(creation of customers)’이 기업의 본질적 역할이라고 정의했다. 대표적인 예로 기업사상 최초로 할부 판매제를 도입한 농기구 회사 맥코믹이나, 주택 산업과 제휴해 사양화됐던 카펫 산업을 활성화시킨 사례를 제시했다.
 
오늘날은 할부 판매 제도가 보편화돼 있지만, 불과 1세기 전만 해도 아무도 이러한 판매 방식을 생각하지 못했다. 농민들은 생산성이 높은 농기구를 구매하고 싶어도 구매력이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농기구를 사용하면 수확을 늘릴 수 있기 때문에 미래 소득을 증가시킬 수 있다. 즉 미래의 소득으로 현재의 구매력을 창출하는 판매 방식의 혁신이 새로운 거대한 시장을 만들었다. 불황의 늪에 빠진 카펫 산업도 주택 산업과 제휴해 고급 마루를 까는 대신 카펫을 깔도록 함으로써 추가 비용 부담 없이 고객 가치를 높여 시장을 확대했다.
 
차별적 가치 제안으로 추격 발판 마련해야
지난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로 인한 최악의 불황기에 웅진코웨이는 정수기 사업에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정수기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는데 불황이 찾아오면서 판매가 부진해졌다. 세일즈맨들이 발이 부르트도록 뛰어도 불황기에 정수기가 소비의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었다.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은 위기 상황에서 발상을 전환해 렌털 시스템으로 판매 방식을 바꿨다. 당장 100만 원 정도의 목돈을 들여 정수기를 구매하기는 어렵지만, 한 달에 몇만 원 하는 렌털 방식에 대한 부담감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이에 따라 웅진은 정수기 필터를 정기적으로 바꿔주는 ‘코디’ 제도를 도입해 고객 만족도를 높였다. 코디를 단순 세일즈맨이 아닌 고객과의 접점으로 활용하기 위해 자가 운전이 가능한 대졸 이상의 여성만 모집했고, 체계적인 교육도 시켰다. 남편의 실직 등으로 위기에 처한 우수 인력이 전문 상담원으로 훈련돼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강력한 세일즈 인력이 됐다. 이는 100여 년 전 맥코믹의 혁신적인 마케팅 방식이 21세기에도 보편적 진리로 적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성숙·포화 상태인 휴대전화 사업에서 시장점유율을 높여가고 있는 LG전자 싸이언도 소비자에 대한 ‘전략적 가정(strategic assumptions)’을 바꿈으로써 고객 창조에 성공했다. 기술적 요소만으로는 더 이상 고객에게 차별화된 이미지를 줄 수 없다고 판단해 감성에 호소하는 제품을 개발하기로 한 것이다. 전자업계의 라이벌이면서도 삼성전자의 애니콜 신화에 밀렸던 LG전자는 이처럼 과감한 전략적 시도를 하기로 결정한 후,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명품 휴대전화를 만들겠다는 의지로 프로젝트팀을 가동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제품이 3년 전 나온 ‘초콜릿폰’이다.
 
LG전자는 휴대전화 분야에서 카메라의 화소 경쟁과 다양한 옵션 기능 경쟁을 포기했다. 대신 고객의 감성에 호소하는 고급 디자인을 초콜릿폰에 적용했다. 또 터치패드 방식을 도입해 손을 대는 순간 불이 들어오면서 휴대전화가 살아나는 느낌을 ‘폰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라는 감성적 광고 카피로 전달해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초콜릿폰은 무려 2000만 대 이상 팔렸으며, 샤인폰이나 프라다폰 등 다양한 후속 모델도 나왔다. 이를 토대로 LG전자는 성장을 거듭했다.
 
웅진코웨이 정수기와 LG전자 휴대전화 사례는 불황기 고객에 대한 차별화된 ‘가치 제안’이 성공을 가져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불황이 찾아오면 소비자들의 구매 성향은 양극화되는 경향이 있다. 일반적으로 시장에는 가격 민감성이 낮으며 고가 제품을 찾는 하이엔드(high-end) 고객과, 가격 민감성이 높으며 최저가의 제품을 선호하는 로엔드(low-end) 고객이 있다. 그 중간에 가격과 성능을 면밀히 비교해 효용 가치를 극대화하고자 하는 중간 계층(mid-range)이 존재한다. 평상시에는 일반적으로 중간 계층이 두텁기 때문에 기업 간 경쟁의 초점이 이들을 공략하는 데 맞춰진다. 따라서 마케팅의 초점도 고객이 느끼는 가격 대비 성능이나 품질을 높이는 데 맞춰져 있다. 그러나 불황기에는 중간 계층의 고객이 줄어들고 양극화되는 경향이 있다. 특히 가격 민감성이 높은 로엔드 고객층이 급증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떠한 가치 제안을 할 것인가가 승패를 가름한다.
 
양극화되는 소비 시장 공략
로엔드 고객층을 공략하는 초저가 가치 제안을 토대로 성공한 대표적인 사례가 일본의 유니클로다. 이 회사는 경쟁 업체가 싸구려라고 경시할 때도 가격에 민감한 소비자층을 공략해 저가 패션 유통업체로 탁월한 성공을 거두었다. 저가격 전략은 장기 불황에 빠진 일본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소비 계층도 창출했다. 젊은 층은 고급 제품을 오래 입는 것보다 저가 제품을 여러 개 구매해 몇 번 입고 싫증나면 버리는 소비 행태를 나타내는데, 유니클로 제품은 이러한 소비 행태와 맞아떨어졌다. 즉 유니클로는 저가 제품을 생산했다기보다 새로운 방식의 마케팅을 시도했다고 볼 수 있다. 이 회사는 일찍이 중국의 경쟁 업체가 따라올 수 없는 낮은 가격을 가능케 하는 공급망을 구축하고, 현금 거래 등 원가를 낮출 수 있는 모든 방법을 강구해 경쟁 업체를 따돌렸다.
 

반면 불황 때 소비자들의 기대 수준을 넘는 명품을 개발하는 방식으로 하이엔드 고객을 공략해 성공한 사례도 있다. 고급 커피의 대중화에 성공한 스타벅스나, 치킨 시장에서 고급화를 이룬 BBQ 등이 하이엔드 분야의 시장 창출 전략을 택했다. 스타벅스가 시장에 진입한 1970년대 말은 커피 산업의 불황기였다. 당시 미국에서는 소프트드링크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커피에 대한 선호도가 급감하고 있었다. 싸구려 인스턴트커피가 판을 치고 있는 시장 상황에서 고급 커피 체인점이라는 비즈니스 모델은 투자자들의 관심을 끌기 어려웠다. 그러나 예상외의 대성공을 거두자 스타벅스는 수많은 사례 연구의 대상이 됐다.
 
하버드 사례 연구에 따르면, 스타벅스의 성공 요인은 한마디로 ‘누릴 수 있는 사치(affordable luxury)’라는 개념과 관련돼 있다. 사람들은 누구나 고급 제품에 대한 열망을 갖고 있지만, 주머니 사정상 욕구를 억누르며 살고 있다. 특히 불황기에는 더욱 그렇다. 스타벅스는 바로 소비자들의 이러한 심리에 어필해 커피업계의 벤츠나 BMW 같은 위상을 만들어 고객들에게 다가갔다.
 
불황기에 지출을 최대한 줄이면서도 품위를 유지하려는 소비 행태를 ‘립스틱 효과’라고 한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사람들은 가장 저렴한 비용으로 사치와 허영심을 충족할 수단을 찾는 경향이 있다. 립스팁 효과는 대공황인 1930년대 산업별 매출 통계를 근거로 해서 나온 말이다. 요즘도 불황기에 화장품 매출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중에서도 립스틱 매출이 전년 대비 20∼30%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여성들이 불황으로 인해 당장 필요하지 않은 소비는 줄이더라도, 화장품처럼 심리적 만족과 관련된 부분에는 투자를 아끼지 않기 때문이다.
 
탁월한 실행 역량 갖춰야
불황기 후발기업이 캐치업에 성공하려면 첫째, 선발기업을 따라잡겠다는 전략적 의지를 분명하게 가져야 한다. 전략적 의지는 불황기에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의 DNA로 잠재해 있다가 급격한 환경 변화 속에서 드러나게 된다. 업계 최고가 되고자 하거나 세계 일류 기업이 되겠다는 최고경영자(CEO)와 구성원의 열망은 미래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선행적, 공격적 투자를 가능케 한다.
 
둘째, 공격적 투자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경기 회복에 대한 시나리오와 함께 새로운 가치 제안에 따른 고객 창조 가능성을 면밀히 분석해야 한다. 선두업체와 차별화된 가치 제안을 했을 때 고객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 즉 가치를 높이거나 낮췄을 때 고객의 호응에 대한 전략적 가정을 철저하게 검증해야 한다. 대부분 선두기업들은 쓸 수 있는 전략적 수단을 다 사용했기 때문에 어떤 전략적 변화도 성공하기 힘든 ‘교착 상태(strategic stalemate)’에 빠져 있다는 암묵적 가정을 하는 경향이 있다. 후발기업은 바로 이러한 교착 상태를 깨뜨릴 수 있는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
 
셋째, 근본적인 혁신을 할 수 있는 조직 역량을 갖춰야 한다. 전략적 의지를 갖고 방향을 설정했더라도 탁월한 실행 역량이 없으면 성과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다. 공격적 투자에는 높은 수준의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과감한 위험 부담을 할 수 있는 기업 문화, 즉 ‘실패에 대한 관용’이 있어야 구성원들의 창조적 실행 능력이 높아진다. 반대로, 실천력이 없는 과감한 투자는 오히려 위기를 불러올 수 있다는 점도 유의해야 한다. 앞서 성공 사례로 열거한 기업들은 과감한 실행력을 발휘할 수 있는 독특한 리더십과 기업 문화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벤치마킹해야 한다.
 
필자(hanjh@hanyang.ac.kr)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조지아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내외 저명 저널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으며, 한국벤처연구소장을 역임했다. <벤처창업과 경영전략> 등 많은 책을 펴냈으며, 전략 경영과 창업 및 중소기업, 기업 윤리 등의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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