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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생산방식을 위한 혁신활동

통합혁신, 한국기업 혁신 틀 바꾼다

김기홍 | 28호 (2009년 3월 Issue 1)

 

혁신 자생력을 상실한 국내 기업
2007년 중국 시장 진출을 위해 현지 컨설팅사와 파트너십을 맺고자 중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 당시 우리 측은 중국 진출의 교두보 확보를 위해 파트너십을 원했지만 중국 쪽은 우리의 컨설팅 방법론만을 전수받기를 원했다.
 
양쪽의 이해가 상충돼 파트너십은 무산됐지만 당시 경험을 통해 중국이 한국의 경제 발전에 얼마나 커다란 경외심을 갖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었다. 자본주의 경제가 급성장하고 있는 중국의 입장에서는 일본보다 한국의 기업 성장이 좀더 적합한 롤 모델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런 이유로 한국식 생산 방식과 컨설팅 방법론에 대해 구체적으로 배우고 싶어 했다.
 
그러나 아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우리에게 ‘진정한 한국식 생산 방식이 존재하는가’라는 의문이 든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 26호에서 한국식 생산 방식이 탄생하지 못한 이유를 ‘분임조 활동’ 도입에 따른 자생력 상실에서 찾아보았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품질관리(QC) 활동은 QC 7도구와 문제해결 10단계를 핵심으로 하는 현장의 소집단 활동이 기본이다. 1970년대 중반에 ‘메이드 인 코리아’ 제품의 품질 수준을 급격히 향상시킨 QC는 이러한 절차를 철저하게 준수하도록 가르쳤다. 그 결과 식품 공장이건 비료 공장이건 현장의 개선 활동은 천편일률적이고 획일적인 형태로 추진되었다. QC 활동의 절차와 문제해결 기법에 개개인의 창의성이 개입할 여지는 없었다.
 
국내 기업의 많은 혁신팀은 이처럼 조직원의 문제 해결 역량을 파악해 문제 해결 체계를 조직 전체에 정착하는 혁신 역량을 키우지 못했다. 단지 QC의 기법과 절차 도입에 그쳤다. 조직이 안고 있는 문제 유형이나 문제 해결 역량에 대한 객관적인 이해 없이 정해진 기법만을 반복해 도입하면서 혁신이 이뤄지길 기대한 것이다. 그래서 해외에서 성공한 TPM, 6시그마 등이 유행처럼 기업을 휩쓸곤 했다.
 
혁신 과제의 3가지 유형과 특징
진정한 혁신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구성원 전원이 참여해 문제를 찾아 해결할 수 있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혁신 과제의 유형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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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1>은 대부분의 기업이 갖고 있는 비전 체계의 기본 구조다. 기업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비전을 단기적으로 구체화·수치화한 목표를 설정한다.(설정형 과제)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품질·마케팅·기술 등 기능별 전략 기둥을 세운다.(탐색형 과제) 마지막으로 비전 체계의 기반으로서 혁신활동 중 지켜야 할 원칙이나 혁신을 통해서도 결코 변하지 않아야 하는 기본 가치를 결정한다.(발생형 과제) 이처럼 기업이 비전을 달성하기 위한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하면 크게 3가지 형태의 과제를 도출할 수 있다.
 
설정형 과제는 목표 수준을 높게 설정함으로써 조직의 현재 모습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경우다. 매출 목표를 높인다거나 업계의 순위를 높인다거나 하는 목표를 설정함으로써 현재의 생산량, 생산성, 구성원의 역량 등 총체적 문제 해결이 필요한 과제다. 이러한 과제는 대부분 경영진의 의사결정에 의해 결론난다. 그리고 결론이 나는 순간 새로운 탐색형 과제가 등장한다. 예를 들어 신규 시장 진출이나 인수합병(M&A) 등 경영진의 의사결정이 이뤄지면 사무관리직은 이를 실행하기 위해 수많은 탐색형 과제를 도출해야 한다.
 
탐색형 과제는 문제가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지만 시장의 평가나 경쟁사와의 비교, 데이터 분석 등을 통해 문제를 도출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과제다. 이러한 과제는 문제가 쉽게 드러나지 않으므로 문제를 도출해내는 과정 자체가 어렵다. 또한 대부분 사무관리직이나 엔지니어들이 과제를 찾고 해결한다. 과제 해결의 주체가 이렇다보니 사무관리 계층이 알고 있는 지식 정도가 회사 전체의 지식 수준이 되며, 해당 엔지니어의 역량 수준이 회사의 기술 수준이 된다. 따라서 개개인의 혁신 의식이 없으면 과제를 도출할 수 없다.
 
발생형 과제는 대부분 제조 현장에서 쉽게 발견된다. 재고·작업대기·불량·재작업 등과 같은 낭비와 비효율로, 누구나 불편하게 생각하고 쉽게 드러나는 문제다. 따라서 문제 해결의 주체도 현장 사원이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 발생형 과제는 쉽게 발견되지만 수없이 다양한 형태로 현장 곳곳에 산재해있다. 따라서 현장 사원이 나서지 않는 이상 문제점을 찾아내는 것도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한 과제다.
 
발생형 과제의 해결 주체인 현장 조직은 공정이 앞뒤로 연결돼 있고 개개인의 기능이 분담돼 있기 때문에 개인 혼자서 할 수 있는 개선이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해 팀원들의 협조와 합의가 반드시 필요하다. 예를 들어 현장 직원이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혼자 개선을 이뤘다면 같은 작업을 하는 다른 직원은 이로 인해 안전 작업에 위해를 받을 수도 있다. 이런 이유로 발생형 과제를 해결할 때는 항상 팀워크와 토론·협조·합의가 중요하다. 따라서 현장의 개선 활동은 소집단 활동으로 체계화된다.
 
혁신 활동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3가지 형태의 과제를 동시에 해결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경영진은 물론 사무관리직, 엔지니어, 현장 직원에 이르기까지 전 임직원의 과제 해결 활동이 이뤄져야 한다. 설정형 과제는 합리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 체계와 우수한 참모조직을 통해 탐색형 과제로 전환된다. 그러나 탐색형 과제와 발생형 과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현장과 사무실의 수많은 직원이 직접 과제를 도출하고 문제해결 과정에 뛰어들어 가시적인 성과를 창출하는 일련의 활동 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과제 도출력과 문제해결 역량의 균형
과제의 유형과 구성원 계층에 따라 개선 활동을 전개할 시스템을 구축한 뒤에는 개선 활동과 혁신 수준을 발전시킬 수 있는 운영 방식이 필요하다. 이러한 운영 방식은 우선 현장에 존재하는 발생형 과제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원래 문제라는 것은 쉽게 파악할 수 없으며 쉽게 해결되지도 않는 게 특징이다. 특히 현장의 문제는 하나의 원인에서 출발하지 않고 복합적이다. 따라서 다른 조직원이나 다른 부서와 협조해 해결해야 한다. 형태와 특징에 따라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나 절차가 다양해지는 것이다.
 
현장 직원의 문제 해결 역량이 높다는 말은 현장 직원이 표준화·품질개선·설비개선·물류개선 등 다양한 기법의 활용 능력을 갖추고 이를 능수능란하게 이용해 지속적으로 문제를 찾아 해결한다는 의미다.
 
이제 다시 과거의 분임조 활동을 돌이켜보자. 문제 해결 절차와 기법을 교육시키고 반복을 강요한 과거의 분임조 활동은 우리에게서 문제를 보는 눈, 문제를 중요시하는 관점을 빼앗았다. 그래서 문제 해결 기법을 혁신 도구로 이해하지 못하고 QC 활동이나 TPM 활동에 익숙해지는 것만이 현장 혁신의 궁극적 목적인 것처럼 인식하게 만들었다. 소위 ‘분임조 활동’의 전문가들은 문제를 찾는 능력 대신 문제 해결 절차와 기법 적용에 뛰어난 사람이 되어 버렸다. 

지속적인 개선을 이루려면 먼저 문제를 찾아야 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직원 역량이 갖춰져야 한다. 이 2가지가 균형을 이뤄야만 현장의 혁신 활동이 이뤄진다. 예를 들어 현장에는 사소한 문제도 많다. 이런 사소한 문제는 경험과 직관으로 바로 해결책을 찾고 실행에 옮길 수 있다.
 
그런데 사소한 문제의 개선을 분임조 활동으로 정한다면 이는 닭 잡는데 도끼를 쓰는 격이다. 반대로 현장 역량은 떨어지는데 큰 문제점을 개선 활동으로 삼으면 현장에서는 아예 도전을 포기하거나 수준이 떨어지는 개선 활동이 나타난다. 소화불량에 걸린 코끼리를 다리만 만져 보고 피부병이라 진단하고 빨간약을 발라주는 식이다.
 
또한 현장의 개선 활동이 ‘과제 도출력’과 ‘문제 해결 역량’의 균형을 이루며 발전하기 위해서는 현장의 자율성을 전제해야 한다. 즉 현장 직원들이 스스로 문제라고 느끼는 것,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문제들을 먼저 도출하고 해결해 나가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 이렇게 드러난 문제점을 해결하는 데는 그다지 많은 역량이 필요치 않다. 사소한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나면 좀더 눈에 띄지 않는 난이도 높은 문제점이 나타난다. 이때 새로운 문제점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과제 도출 능력이 부족한 것이니 직원들의 과제 도출 역량을 키워야 한다.
 
새로운 과제를 찾아 놓고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기법과 절차를 훈련시켜야 한다. 과제의 난이도와 현장 직원의 문제해결 역량이 균형을 이루며 같이 높아지는 것, 이것이 바로 끊임없는 개선의 기반이며 혁신 운영의 기본 요건이다.
 
한국식 생산방식의 출발
2000년대 초반 D중공업은 통합현장혁신(IFI, Integrated Field Innovation) 프로그램을 도입했다. M&A에 따른 노사 갈등과 시장 침체로 경영의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조직력을 회복하고 시장 회복에 대비한 잠재적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IFI는 일체의 형식을 버리고 철저한 문제 중심 사고와 현장의 자율적 참여를 기반으로 ‘원점에서 출발하는’ 혁신 활동을 말한다. 이 프로그램은 정해진 기법을 교육하고 절차를 따르도록 요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현장에 존재하는 다양한 문제점을 찾아내고 해결하는 자율적 활동을 지속하는 데 초점을 두는 혁신 프로그램이다.
 
IFI는 크게 두 경로로 추진된다. 먼저 소집단 별로 작업 특성부터 문제 해결 역량, 리더십, 조직력, 문제해결 역량, 조직 갈등구조까지 진단·평가해 지도 방향을 설정한다. 그리고 현장에 산재한 다양한 문제점을 사전 분석한 뒤 문제 유형에 따라 도입해야 할 다양한 개선 도구를 준비해 현장 관리자나 소집단 리더들을 교육한다. 앞으로 이들이 현장 사원의 개선 활동을 지도하고 지원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 것이다.
 
준비가 끝나면 현장 직원들은 문제를 찾고 해결한다. 이들은 문제를 찾는 과정과 해결하고 정리하는 과정까지 개선 활동의 전 단계에서 준비된 리더들로부터 필요한 지원을 받는다. 소집단 하나하나가 자신만의 혁신 개인 교사를 갖는 것이다. 형식도 절차도 없고, 가시적인 성과 목표도 없다. 목표가 있다면 오직 지속하는 것뿐이다.
 
D중공업이 일체의 형식이 없는 IFI 도입을 추진했을 때 직원들의 거센 반발을 샀다. D중공업은 QC 활동은 물론 TPM, 6시그마 등 새로운 혁신 기법을 가장 먼저 도입하고 100여 명에 이르는 6시그마 블랙벨트를 보유하고 있을 만큼 내실을 다졌다고 자부하던 터였다. 따라서 도입 초기의 저항과 거부감은 상상을 초월했다.
 
지금껏 잘해왔는데 무슨 뚱딴지 같은 IFI냐며 IFI 준비 자료를 내던지며 반발하는 사원도 많았다. 수십 년간의 개선을 통해 현장은 더 이상 개선할 것이 없다고도 했고, 개선 활동이 침체된 것은 경영진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탓이라고도 했다. 이런 반발이 일어난 것은 현장뿐만이 아니었다. 생산부장과 공장장을 비롯한 고위 관리자들은 물론 임원진도 현장에서 자율적으로 참여하고 스스로 지속하는 개선 활동이 가능하겠냐며 의구심을 보였다.
 
그러나 일련의 고통스러운 진통 끝에 IFI를 도입한 지 10개월 뒤에 현장에서는 놀라운 변화가 나타났다. 대부분의 사원들이 기존 형식과 기법을 버리고 스스로 작업 현장에 산재된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기 시작했다. 개선을 위해 필요한 지식을 스스로 공부하고 필요한 교육을 요청했다.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현장의 모습이 만들어진 것이다.
 
사외 파견 교육으로 장시간 자리를 비웠던 한 부장은 “혁신팀에서 마술을 부린 것 같다”고까지 말했다. 현장 직원들은 “이 활동은 회사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고 했다. “회사에서 IFI 활동을 중단하면 우리끼리라도 시간을 쪼개 계속 하겠다”는 사원도 있었다.
 
7년이 지난 지금 200여 개의 소집단인 ‘반’ 조직이 개선 활동을 하고 있지만 어느 반도 같은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지 않다. TPM이건 6시그마건 TPS이건 구분도 하지 않는다. 안전과 품질을 저해하는 요인을 찾고 필요한 문제 해결 기법을 그때 그때 공부해가며 가장 손쉽고 편리한 방식으로 개선하고 있다. 200여 개의 반이 서로 다르게 활동하다 보니 사내 벤치마킹을 통해 서로에게 배우는 것도 많다. 상향평준화의 선순환을 이뤄낸 것이다.
 
이제 D중공업 현장의 혁신 역량과 개선 활동은 세계 어디에 내놔도 뒤지지 않는 수준이다. 경영 성과 또한 훌륭해 사상 최대의 매출액을 매년 경신하고 있다. 이 회사는 지금도 IFI를 도입한 초기의 원칙을 준수하고 있다. 물론 IFI 활동이 이 모든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은 아니다. 그러나 7년이 지나도록 자율 참여의 원칙과 문제 중심의 개선을 고수하며 스스로 발전하고 진화하는 ‘강한 현장’이 없었다면 현재의 모습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D중공업의 현장에는 아직 부족한 부분도 있고 보완해야 할 부분도 많다. 그러나 일체의 형식과 기법을 버리고 문제에 집중하면서 문제 해결기법을 스스로 학습하고 활용하는 강한 현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스스로 발전하고 있는 한국식 개선 활동의 원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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