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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질의 역설

김남국 | 1호 (2008년 1월)
엄선된 경영 정보를 제공하는 동아비즈니스리뷰(DBR)는 ‘Knowledge Frontier’ 코너를 통해 탁월한 성과를 내고 있는 지식 창조자들의 최신 연구 성과를 전합니다. 세계 최고의 경영학 저널에 실린 첨단 지식은 물론이고 논문 심사 절차가 진행되고 있는 유명 경영학자의 ‘워킹 페이퍼(working paper)’ 내용까지도 이 코너를 통해 소개합니다.
 
혁신의 걸림돌 되는 품질집착
품질이 좋아야 물건이 잘 팔린다.’ 너무 당연한 명제로 들린다. ‘좋은 제품을 싼 값에 만들어야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이론에 감히 도전장을 던질 수 있을까. 하지만 최근 학계에서는 이런 통념에 도전하는 연구결과가 자주 발표되고 있다. 품질에 대한 강한 집착이 오히려 과감한 혁신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이다. 저명한 경영학자들이 왜 이런 주장을 할까.
 
우선 품질에 대한 집착이 혁신의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연구가 있다. 미국 펜실베니아대 와튼스쿨의 매리 베너 교수와 하버드 경영대학원의 마이클 투시만 교수는 미국의 페인트 및 사진 산업 관련 기업의 20년 치 데이터를 분석했다. 그 결과, 품질경영을 잘 했다는 것을 입증하는 ISO 인증을 더 많이 받은 기업일수록 원천 특허가 더 적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구팀은 ISO인증을 획득하면서 품질 개선에 크게 힘을 쏟았던 기업들은 대부분 점진적 혁신에는 성공했지만,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만큼 위력을 가진 과감한 혁신에는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프로세스 개선’과 ‘과감한 혁신’ 사이에는 트레이드 오프(trade-off, 두 목표가 양립하기 어렵다는 이율배반적 관계를 의미) 현상이 생겼다는 분석이다.
 
미국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UC Berkeley)의 로버트 콜 명예교수도 최근 ‘캘리포니아 비즈니스 리뷰’라는 저널에 ‘호사다마(好事多魔)’정도로 번역되는 ‘Too much of a good thing?’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실었다. 이 논문에서 저자는 세계 최고의 품질 경쟁력을 갖고 있는 일본 기업을 분석했다. 그 결과, 정보기술(IT)처럼 시장과 환경이 급변하는 산업에서는 품질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과감한 혁신을 방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강조했다.
 
일례로 일본 최대 통신 사업자인 NTT의 경우 통화 품질과 관련해서는 최고의 기술을 가진 업체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인터넷 기술이 소개됐을 때 NTT는 큰 관심을 갖지 않았다. 데이터가 확실하게 전송되지 않는 등 기술적으로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NTT는 기존 기술을 발전시킨 ATM(비동기전송모드) 방식의 시스템을 개발하는데 열중했다. 이 서비스는 유선전화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안정성이 높고 데이터 전송속도가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넷 기반의 TCP/IP기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급속히 발전하면서 ATM 기술을 압도하고 말았다. 자연스럽게 일본 기업들은 인터넷 장비 개발 기회를 놓쳤고 시스코 같은 미국 기업이 거대한 인터넷 시장을 독차지하고 말았다.
 
시스템통합업체인 NTT데이터의 사례도 제시됐다. 이 회사도 시스템 구축 초기단계부터 다양한 팀원들이 참여해 문제점을 사전에 발견, 시스템의 안정성을 높이는 특유의 프로세스를 갖고 있었다. 이를 통해 공공기관 시장에서 확실하게 입지를 구축했다. 시스템 구축에 시간은 다소 오래 걸리지만 안정성만큼은 최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서 민간 기업의 시장 규모가 급속히 커졌다. 민간기업들은 공공기관과 달리 일정 수준 이상의 안정성만 뒷받침된다면 신속하게 설치할 수 있고 확장성을 갖고 있는 제품을 원했다. NTT데이터는 이런 민간기업의 요구를 맞출 수가 없었고 결국 시장 지배력을 유지하는데 실패했다.
 
또 1989년 세계시장의 80%를 점유했던 일본 D램 업체들이 몰락한 것도 품질에 대한 지나친 집착 때문이었다고 콜 교수는 분석했다. 대형 메인프레임 컴퓨터가 사용되던 시절에는 일본 D램 업체들은 안정성과 내구성을 무기로 세계 시장의 80%를 지배했다. 하지만 개인용 컴퓨터인 PC시대가 도래하면서 내구성 보다는 높은 성능과 발 빠른 신제품 출시가 중요한 성공 요소로 부상했다. 삼성전자 등 한국 업체들은 이런 시장 변화에 발빠르게 대처했지만 일본 D램 업체들은 품질만 집착하다가 실패하고 말았다.    
 
 
품질에 과도하게 집착하는 기업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산업의 특성이 고려돼야 한다. IT 산업처럼 너무나 자주 환경이 변하는 경우 기존 경쟁력이 시장에서 먹혀들어가지 않는 사례가 많다. 이런 산업에 종사하면서도 품질에 지나치게 집착한다면 발 빠른 변화를 모색하기 어렵다. 반대로 환경이 잘 변하지 않는 안정적 산업이라면 품질에 집착하는 업체가 더 큰 성공을 할 수 있다. 일례로 자동차 산업의 경우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안전, 속도, 품질 등이 중요한 성공 요소다. 이런 산업에 속해있다면 도요타처럼 지속적으로 개선 활동을 벌이는 기업이 경쟁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품질의 역설이 발생하는 또 다른 이유는 품질에 집착하는 문화를 가진 기업의 상당수가 위험을 회피하는 성향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이다. 품질을 보장하려면 미리 문제되는 소지를 없애야 한다. 이런 기업에서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은 혁신적 아이디어가 채택되기는 매우 어렵다. 또 품질로 명성을 쌓은 기업들은 안정성이 떨어지는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지 않으려 한다. 그동안 쌓아온 명성에 흠집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IT처럼 분, 초를 다투는 경쟁 산업에서 속도가 늦으면 시장을 빼앗길 수도 있다.
 
품질보다는 속도에 역점을 둬서 성공한 대표적인 기업이 애플이다. 애플은 오작동 확률을 5%이하로 낮춘 것을 확인하고 mp3플레이어인 ‘아이팟’을 출시했다. 품질을 강조하는 일본 기업이었다면 아마도 0.1% 혹은 그 이하로 낮춰야 제품 출시가 가능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객들은 애플의 내구성이 아니라 혁신적 디자인과 기능에 후한 점수를 줬고 결국 아이팟은 대표적인 히트 상품으로 자리 잡았다.
 
만약 환경변화가 매우 빠른 산업 분야에 속해있는데 품질을 강조하는 회사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한 가지 방법은 이른바 ‘양손잡이 조직’을 만드는 것이다. 기존 품질 위주의 활동을 하는 조직 외에 혁신적 아이디어를 사업화하는 별도의 조직을 둬서 자율성을 주되 기존 부서와 자원을 공유, 역량을 키울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게 양손잡이 조직의 취지다. 또 다른 방법은 별도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다. 혁신적이긴 하지만 품질이 다소 떨어지는 신제품을 출시하고 싶은데 기존 고급 브랜드 이미지에 타격을 줄 것을 우려한다면 별도의 브랜드가 가장 좋은 해결책이다. 이밖에 베타 테스트 제품을 시장에 미리 내놓는 것도 고려해볼 수 있다. 실제 일본 샤프의 경우 목표 생산성과 품질의 60%에 도달했을 때 LCD패널 베타 테스트 제품을 양산하지만 삼성전자는 20%정도 됐을 때 베타 제품을 양산한다. 삼성이 세계 TV시장에서 1위를 차지한 것도 이런 발 빠른 대응이 큰 기여를 했다는 덕분이다.
 
안정적인 환경에서는 품질에 대한 집착이 좋은 성과를 가져온다. 하지만 경쟁이 격화되고 고객의 욕구가 급변하는 상황에서 품질에 대해 너무 집착하다 자칫 시장 진출 시기를 놓치거나 새로운 사업 기회를 아예 상실할 수도 있다. 품질에 대한 고정관념에 대해 한 번 쯤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 김남국 김남국 | - (현)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장
    -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편집장
    - 한국경제신문 사회부 정치부 IT부 국제부 증권부 기자
    - 한경가치혁신연구소 선임연구원
    mar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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