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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운하 시대 중국 상인 이야기

“사치도 경제” 400년 전의 인식 전환

조영헌 | 355호 (2022년 10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명나라 중국의 사치 풍조는 문인 엘리트가 열었지만 대중화는 상인들이 주도했다. 상대적으로 사회적 지위가 낮은 부자 상인들이 다른 상인들을 압도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향락의 삶을 과시했다. 문인들은 이런 사치가 대중화되는 것을 우려하며 ‘구별 짓기’를 통해 돈 많은 상인을 비하했다. 그러던 중 사치는 민생에 도움이 된다는 새로운 인식이 등장하며 이 같은 경쟁 구도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다.



사치 단속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는
중국의 명품 시장

중국 공산당 창립 100주년이었던 2021년 7월을 전후해 중국 지도부는 사회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정풍(整風) 운동’을 한층 강화했다. 기업과 부유층이 가진 부를 나눠 빈부격차를 줄이겠다는 ‘공동부유(共同富裕)’ 정책이나 대중적인 영향력이 큰 연예인 관련 정보를 강력히 통제하는 정책 등이다. 인터넷에 전파가 금지된 연예인의 금지 목록 가운데 ‘사치•향락과 배금주의’가 포함된 것이 눈에 띈다. 사치 풍조를 차단해 과열된 빈부격차를 줄이며 사회 기강을 바로잡겠다는 의도일 터이다.

허베이성(河北省) 푸닝(撫寧)에서는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인민폐 200위안(한화 약 3만5000원) 이상의 현금 선물을 주고받는 것도 금지됐다. 대상은 공산당 당원, 공무원, 지역 지도자들이다. 중국 공산당이 이런 식으로 당원들을 단속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 2015년 중국 당국은 부패 방지 운동의 일환으로 사치스러운 식사와 음주는 물론 골프클럽에 가입하거나 사적 클럽에 출입하는 것도 금지했다. 그 시작은 2013년 시진핑이 집권과 함께 ‘부패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4풍(四風, 관료주의, 형식주의, 향락주의, 사치 풍조) 척결’을 주장하면서부터다. 당시 명품 업계는 큰 타격을 받았던 것으로 보도됐다. 사치스러운 선물을 주고받거나 화려한 차를 타는 일 등이 금기시되며 명품 업계가 휘청거릴 정도가 됐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도 잠시였다. 실제 명품 시장에서 중국의 입김은 점점 확대되는 추세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동안 중국의 세계 명품 시장 점유율은 약 두 배 증가했다. 컨설팅 업체 베인앤드컴퍼니는 중국이 2025년 세계 명품 시장 점유율의 46∼48%를 차지하며 미국과 유럽을 제치고 세계 최대 명품 시장이 될 것으로 관측했다. 제주도 등지의 면세점에서 중국인 여행객들이 명품을 싹쓸이하는 큰손이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중국인들이 명품을 좋아하는 것만큼이나 중국은 모조품, 즉 명품의 ‘짝퉁’으로도 유명하다. 짝퉁 시장에 방문해보면 짝퉁 역시 C급부터 AA급까지 수준이 다양하다. 명품 사랑과 짝퉁의 유행은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지만 그 규모와 액수의 수준에서 중국은 가히 세계 최고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중국에서 사치 풍조는 언제부터 확산됐을까? 사치 풍조를 조장한 이들은 누구일까? 그리고 사치 풍조는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기능만 수행했을까? 이에 대한 답변의 대부분은 대운하 시대(1415∼1784)를 살았던 상인들과 관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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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치 풍조가 대중화되는 명나라 시대

필자가 상하이를 갈 때마다 늘 방문하는 곳이 있다. 인민광장에 1996년 12월에 건립된 상하이박물관이다. 1998년 2월 처음 방문했을 때 가장 인상 깊게 관람한 곳은 ‘명청(明淸) 가구관’이었다. 명나라 시대의 가구를 먼저 관람한 후 청나라 시대의 가구를 바라보던 중 속이 메슥거렸다. 몸이 피곤해서가 아니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소박한 명나라 가구에 비해 화려한 장식 기교가 들어간 청나라 가구가 토할 것처럼 어지러웠기 때문이었다. “이러니 청나라가 망했지!”라는 말이 나왔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하지만 명에 비해 청이 더 사치스러웠다는 판단은 단순화의 오류였음을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외형적으로 더 화려하고 복잡한 기교가 많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에서 사치 풍조가 대중적으로 확산한 시대는 명나라였다. 사치 향락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됐지만 사치의 대중화는 명나라 중엽부터 시작됐다. 심지어 명을 ‘사치의 제국’이라 부르는 학자도 있다.1

명나라 270여 년 가운데 사치 풍조가 확산한 시기는 15세기 후반이다. 대체로 성화제(成化帝, 치세 1465∼1487)의 치세 기간을 전후로 명 초기의 담백하고 건실한 풍조가 문란해지기 시작했다. 명이 시작된 지 딱 100년이 지난 시점이다. 명 조정이 사치 풍조를 막기 위한 ‘사치금지령’을 총 119번이나 반포했는데 성화제 이전은 11번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그 이후에 집중됐다. 질서정연했던 이갑제(里甲制)의 향촌 질서가 와해하기 시작한 시기도 바로 15세기 후반이므로 이 시기를 ‘전환기로서의 명 중엽’이라 일컫는다. 16세기가 되면 사치 풍조는 연해 지역까지 확산하는데 왜구의 침입 이후 “습속(習俗)이 일변(一變)”했다고 할 정도로 기강이 문란해졌다.

이는 명나라를 개창했던 주원장(朱元璋, 홍무제)이 꿈꾸던 세상이 결코 아니었다. 떠돌이 소작농 출신이었던 주원장은 ‘오랑캐’인 몽골을 북방으로 몰아낸 후 다시금 몰락했던 중화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노력했다. 특별히 복식과 예교(禮敎) 체제를 규정해 신분 질서를 유지하려고 했던 주원장은 관리의 관복, 가옥, 가마, 채찍, 휘장 등만 보고도 그 등급을 구별할 수 있는 질서정연한 사회를 소망했다. “그 옷을 보고 귀함과 천함을 알 수 있고, 그 용도를 보고 등급과 위험을 밝힐 수 있는(望其服而知貴賤, 睹其用而明等威)”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보았다. 상인들을 규제하기 위해 농민에게는 허용했던 비단옷의 착용을 상인에게 불허함은 물론이었다.2

주원장의 바람은 100년이 못 가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눈에 잘 띄는 복식부터 기강이 문란해졌다. 16세기에 이러한 변화를 목도한 장한(張瀚, 1511∼1593)은 『송창몽어(松窗夢語)』에서 “나라의 사대부와 부녀자의 복식은 모두 제대로 정해져 있었다. 홍무 연간에는 율령을 엄격히 밝혔고, 사람들이 유일한 법으로 받들었다. 사치스러운 풍조로 바뀌니 사람들은 모두 부유하고 사치스러움을 숭상하는 데 뜻을 두어 명확하게 금지했음을 다시 알지 못하고 모두 그것(사치 풍조)을 따랐다”고 개탄했다. 당시 농민들은 칡 섬유로 짠 베옷으로 만든 바지도 걸치지 못했지만 상인들은 규정을 어기고 비단 바지를 입고 활보하고 있었다.3

사치 풍조의 발상지, 강남

사치 풍조의 발상지는 양쯔강 하류 델타 지역의 강남(江南)에 밀집했던 도시였다. 이는 상품경제의 발달과 중소 도시의 성장이라는 사회경제적 변화와 맞물린 변화였다. 축적된 문화 자원과 유행에 민감한 분위기도 한몫했다. 이를 모두 겸비했던 도시는 강남의 대표적인 운하 도시이자 비단 생산으로 유명한 소주(蘇州)였다. 소주 출신의 문인 귀유광(歸有光, 1507∼1571)은 강남의 사치 풍조에 대해서 “무릇 도시에서 시작돼 나중에는 교외에까지 이르렀으며 문인 집안에서 시작돼 나중에는 시민에게까지 이르렀다”고 파악했다.4 소주의 복식 패션을 ‘소의(蘇意)’ 또는 ‘소양(蘇樣)’이라고 불렀는데 주요 포인트는 높은 관과 낮은 신발 및 넓고 우아한 도포였다. 여기에 소주의 정교한 수공예품과 질 좋은 비단 제품이 덧붙여졌다. 소주의 가구는 조각 장식을 중시하지 않으면서도 우아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이러한 ‘소주 스타일[蘇式]’의 명대 가구가 상하이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강남 지역에서 소주와 함께 사치 풍조를 이끌던 도시는 남경(南京)이다. 명의 초반 50여 년 동안 수도였던 남경은 북경으로 수도가 옮겨간 이후에도 명 말까지 명나라를 유지하는 남북의 두 수도, 즉 ‘양경(兩京)’ 제도의 한 축을 유지했다. 북경은 사실상 남경의 경제력과 유행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남경에서 유행하던 새로운 양식과 사치 풍조를 모방하기에 급급했던 것이 명나라의 북경이었다. 사치 풍조라는 현상은 거대한 경제 자본을 소유한 집단이 출현하면서 두드러진 결과지만 문화적 기반 없이는 유행을 선도하기 어렵다. 남경에는 명나라 개창 이래의 여러 훈신(勳臣),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국자감 학생이나 생원(生員), 과거에 합격한 거인(擧人) 등의 사대부, 상인 등 서로 다투어 모방하면서 경제 자본을 사회적 신분을 상징하는 소비 형태에 투입하는 힘 있는 집안이 많았다. 진보적인 유학자로 돈 많은 상인을 제자로 많이 거느렸던 담약수(湛若水, 1466∼1560)도 남경에서 관리를 지내면서 “남경의 풍속은 사치를 숭상하기 때문에” 장례 제도를 따로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할 정도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소주와 남경의 사치 풍조는 주변으로 확산했는데 명 후기부터 시작해서 청대까지 이러한 흐름을 계속 이어갔던 도시는 양쯔강과 대운하가 교차하는 양주(揚州)였다. 양주의 사치 풍조를 주도한 계층은 소주나 남경의 문인 신사(紳士)와 달리 외부에서 유입된 상인들이었다. 산서(山西)와 휘주(徽州)에서 소금 유통업에 종사하기 위해 양주에 몰려든 유력 상인들이 주범이었다. 이는 토착 신사들의 거부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1523년에 출간된 지방지에는 “양주의 습속(習俗)은 가벼워지고 양주인의 풍속은 사치해졌으니, 이를 바르게 돌이킬 수 없게 되었도다!”는 한탄이 담겨 있지만 1599년에 출간된 지방지에는 이미 상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5 “오늘날 사방에서 온 상인들이 시장을 메우고 그 사이에서 교역에 종사해 열 명 중 하나는 치부(致富)하였다. 이 부자들은 걸핏하면 집을 궁실(宮室)처럼 꾸미고 첩을 두고 즐겼으며, 노복들의 음식과 패복(佩服)도 왕자와 비등했다. 또한 (그들은) 신분이 높은 고관들에게 재물을 바치고 관계를 맺어 자주 거마(車馬)를 타고 출입했다. 부인들은 일이 없어도 항상 차려입고 예쁘게 화장했는데 금옥(金玉)으로 새긴 것으로 머리를 장식하고, 명주와 비취, 깃털 장식이 있는 옷을 입고 속옷에까지 화려한 자수가 들어갈 정도로 아름답고 사치함이 극에 달했다. 이는 열에 아홉이 모두 상인 집안이었고 마을의 부유하고 경박한 자제들이 다투어 모방했다.”

‘부적절한’ 옷차림을 한 외지 상인들의 행렬은 지역 문인들에게 사회규범이 전복된 증거였고, 상업의 발전과 함께 도래한 소비의 힘이 신분의 정상적인 기준을 압도했다. 사치 풍조에 대한 신사층의 거부감 표명만으로 상업 자본이 주도하는 현실을 되돌리기에는 사실상 역부족이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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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들의 모방 전략과 사대부 문화와의 혼합

사치 풍조는 문인 엘리트가 열었지만 그 대중화는 상인들이 주도했다. 15세기 후반 이래 상인들이 사치 풍조에 가담해 그 열풍을 확산시킨 것은 나름의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핵심적인 배경은 경쟁의 심화다. 사회경제의 발전과 함께 이윤 획득을 위해 많은 이가 상업에 종사하자 외래 상인들이 운집하는 도시는 경쟁이 심화됐다. 겉으로는 화려했지만 실상 성공하는 상인보다 실패하고 귀향하는 이들이 더 많았다. 게다가 전통시대 상인들은 사회적 지위가 낮아 각종 위험과 착취로부터 보호받기도 어려웠다. 따라서 사회적 지위가 낮은 부자 상인들이 극도로 경쟁적인 사치와 향락의 삶을 드러냈던 것은 보호본능의 한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우선은 부(富)로 다른 상인들을 압도하려는 의도에서 시작되지만 더 나아가 “신분이 높은 고관들에게 재물을 바치고 관계를 맺어” 부당한 착취와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었다. 사회적 신분이 높은 사대부와 관료들과의 교제를 위해 그들을 모방하는 과정에서 화려한 사치스러움이 부각된 것이다. 본래 우아한 사치는 사대부 계층에서 시작됐으나 이를 모방하는 상인들의 화려한 사치가 유행을 이루자 다시 이를 모방하는 경쟁적인 풍조가 강남 도시사회를 중심으로 확산했다.

17세기 명에서 청으로의 교체기를 살았던 상해 출신의 엽몽주(葉夢珠)는 강남의 화려한 복식 문화가 경쟁적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본래 그 시작은 대개 사대부 집안에서 시작해 노비와 첩들도 이것(복식 장식)을 모방했으며, 또 몰래 가져다 쓰면서 친척들은 물론 그 이웃에까지 이르게 됐다. 부자들이 처음 기이한 것을 창시했고 이후에는 이전 것을 능가해야 아름답다고 여겼다. 그것을 얻은 자는 분수에 지나치다고 여기기는커녕 영예롭다고 여겼고, 얻지 못한 자는 평안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끄럽다 여겼다. 혹 그들 중에 재산이 장신구 하나 살 형편도 안 되거나 일 년 수입이 옷 한 벌 만들 수 없을 만큼 여유가 없는 자들도 유행을 좇으니 결국 돌이킬 수 없게 되어 세상의 도를 관장하는 이들에게 깊은 걱정거리가 됐다.”:CN::7::/CN:: 엽몽주는 사치스러운 복식 문화를 우려하면서도 이것이 전파되는 과정에 모방 심리가 있음을 간파했다.

문제는 사치 풍조의 유행과 경쟁적인 모방이 분수를 넘는 소비로 이어지는 데 있었다. 명 말 강남의 한 지방지에도 사치스러운 연회 비용을 지적하는 기사가 실렸다. “부잣집에서 손님을 초대하면 차린 음식이 매우 고급스러웠다. 산해진미는 매번 한 상 가득했다. 중인(中人)들도 그것을 흠모하여 따라 했는데 연회 한 번의 비용으로 매번 수개월 치 음식값을 썼다.”8 어떤 연회에는 수십 명의 악기 연주자와 희곡 공연까지 선보였다. 맛보지 않았으면 모를까, 한 번 맛본 화려한 연회에서 경험한 환상적인 느낌에 “세상 풍속이 경쟁적으로 사치를 좇게” 됐다. 앞서 언급한 1599년의 양주 지방지에서 언급한 사치 풍조에서 “열에 아홉이 모두 상인 집안이었고, 마을의 부유하고 경박한 자제들이 다투어 모방했다”는 언급도 동일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이러한 우려의 목소리를 잘 들어보면 걱정하는 주체는 상인이 아니라 문인 엘리트였다. 그런데 정작 부자 상인들이 연출하는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문화는 문인 엘리트를 흉내 내는 데 불과했다. 일부 기괴할 정도로 왜곡된 사치 행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상층 엘리트의 문화를 모방하는 수준이었다. 그렇다면 문인 엘리트를 걱정스럽게 만든 것은 사치 그 자체라기보다는 사치가 ‘풍조’가 될 정도로 대중화되는 데 있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문인 엘리트들은 상인들과 혼합돼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 불편했던 것이다. 반대로 상인들의 사치 전략은 문인 엘리트와 한데 섞이기 위함이었다. 사대부와 상인이 서로 섞이는 “사상상혼(士商相混)”이야말로 상인들의 전략이자 사대부들의 근심거리였다.

걸핏하면 이전 시대에 농업을 중시하고 상업을 억제하던 중농억상(重農抑商)을 상기시키면서 분수에 어긋나는 상인들을 비판했던 이들은 대부분 기득권을 지키는 데 혈안이 된 사대부들이었다. 그들은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오랜 신분 질서가 요동치는 사회적 변화를 ‘풍속의 타락’으로 간주했다. 반면 15세기 후반부터 “사대부이면서 상인이고, 관리이면서 상인인 자(士而買, 官而買)”들이 등장해 사치 풍조를 주도했다. 여기서 사치 풍조는 ‘새로운 풍속’으로 인식됐다. 상인 가문에서 과거 합격자가 나오기도 하고, 연납(捐納)을 통해 벼슬자리를 얻는 이들이 많아졌다. 과거 합격자나 관직이 없어도 문화적인 소비 행태로 사대부나 관리인 양 하는 이들도 늘어났다. 재력이 뒷받침하기에 더 화려했다. 구분이 점차 모호해졌다. 누가 진짜 사대부이고, 누가 진짜 장사치란 말인가!9 15세기 후반 이후 사치 풍조 확산의 배후에는 이러한 신분 경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치 풍조에 대한 사대부의 구별 짓기 : 우아함과 저속함

위기감을 먼저 느낀 쪽은 대부분 문인 엘리트였다. 그들은 돈 많은 상인들을 교묘하게 차별하며 비하하기 시작했다. 가령, 상인들의 모방과 이를 경계하는 사대부 사이의 사회적 경쟁이 치열하게 드러난 분야는 여행과 연회 문화였다. 특히 아름다운 물길과 운하가 사통팔달하게 연결된 강남의 도시에서 배우와 연주단을 싣고 주연(酒宴)을 베푸는 놀잇배, 즉 화방(畵舫) 문화에서 그러했다.

본래 강남의 수로에 배를 띄워놓고 음악에 맞춰 시를 읊으며 즐기는 것은 사대부들이 전유하던 문화였다. 남경의 진회하(秦淮河) 일대는 배를 띄워놓고 연회를 베푸는 도시 유람으로 유명해 날씨가 좋을 때는 유람선이 100여 척에 달했다. 저녁이 되면 화려한 등을 단 여러 배를 연결해 하나의 ‘등선(燈船)’을 만들어낸 모습은 장관이었다. 하지만 명 중엽 이후 남경에서 부를 과시하기 위해 화방을 타고 여행하는 상인들이 증가했다. 점차 화방을 소유하는 상인이 증가하자 화방 문화가 사대부와 상인들이 경쟁하는 장이 됐다. 심지어 명 말이 되면 하층 사대부들은 관부 아니면 돈 많은 상인의 후원에 기대어야 화방을 즐길 수 있을 지경이 됐다.10

이일화(李日華, 1565∼1635)가 남긴 『미수헌일기(味水軒日記)』에는 유람선을 탄 문인의 두 가지 상반된 심리가 등장한다. 이일화는 강남에 속한 절강성 가흥(嘉興) 출신으로 서화(書畵) 작품의 감식에 탁월해 당시 사람들이 박물군자(博物君子)라고 불렀다. 어느 날 이일화는 정씨(程氏) 성을 가진 휘주 상인의 초대로 주연이 베풀어진 화방을 타고 호수를 유람할 기회를 얻었다. 당시 화방에는 양주의 완함(阮咸, 네 줄 현악기) 연주자 두 명이 타고 있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불렀는데, 그 풍취가 비단길을 따라 초원으로 여행하는 듯했다. 술에 한창 취하고 달이 떠오르자 연주자는 “소주 지역의 새로운 노래를 불렀는데 매우 부드러워 사람을 매혹시켰다”고 한다.11 당시 이일화는 상인들이 준비한 고상한 문화에 심취해 상인의 유람선에서 사대부와 상인이 서로 섞이는 ‘사상상혼(士商相混)’을 큰 거부감 없이 즐겼다.

한편 다른 날 서화선(書畵船)을 타고 강남 지역을 여행하던 이일화의 선박에 골동품 상인이 찾아왔다. 서화선이란 문인들의 이동 작업실이자 동호인들과 함께 서화 전람회를 여는 선박이다. 남쪽에는 배가 많고 북쪽에는 말이 많다는 ‘남선북마(南船北馬)’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 물길이 많은 강남 지역에서 문인들은 선박을 이용해 이동과 작품 활동을 겸했다. 이일화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최고의 문인화가이자 화론가(畫論家)였던 동기창(董其昌)도 고향인 강소성 화정(華亭)과 북경을 왕래할 때 운하에서 서화선을 이용했다. 배를 타고 가던 도중에 감흥이 일면 싣고 다니던 서화 작품을 펼쳐 놓고 친구들과 함께 감상하기도 하고, 그림의 제발(題跋)을 구하러 오는 이들에게는 일필휘지로 써 주기도 했으므로 동기창의 예술 활동의 상당 부분은 서화선 위에서 이뤄졌다.12 이일화가 탄 배에 찾아온 골동품 상인 하씨(夏氏)는 종종 가짜 작품을 갖고도 의기양양하게 팔러 다니는 장사꾼이었다. 이일화는 하씨가 가짜 서화 작품이나 골동품을 가지고 올 때마다 하씨가 무안할 정도로 꽤 심술궂게 상대했다. 하씨가 찾아온 날마다 일기에는 ‘위(僞)’ ‘부진(不眞)’ ‘안(贋, 옳지 않음)’이라는 거짓을 판별해주는 글자가 자주 등장한다. 화방 선박에 탔을 때와는 달리 서화선에 탄 이일화는 문화적 안목이 떨어지는 상인들을 한 수 아래로 낮춰 봤다.

문인 엘리트들은 우아한 사대부만이 명산대천의 의경(意境)을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인 원굉도(袁宏道, 1568∼1610)는 평범한 시간에 서호(西湖)를 유람하는 항주 사람들을 ‘속된 선비’로 간주하는 한편 ‘아침 해가 막 뜰 때’ 놀러 나오는 ‘산승(山僧)이나 유람객’을 높이 평가했다. 이처럼 많은 문인 엘리트는 일부러 상인들을 비롯한 일반인들이 선택하지 않는 시간이나 자신만의 독특한 여행 시간을 자랑했다. 이는 왕사임(王思任)이 잘 언급했던 것처럼 자신이 만든 ‘우아한(雅)’ 여행과 일반인의 ‘저속한(俗)’ 여행을 구별하기 위함이었다.13

‘우아함’은 명 후기 문인 엘리트 계층이 신흥 상인들의 사치스러운 문화와 구별 짓기 위한 전략 코드였다. 유행과 패션은 사실상 엘리트 계층이 창조한 것이고, 그래서 ‘우아한’ 고급문화는 늘 하층 사회의 문화와 구분하는 배타성을 지니기 마련이다. 경제력을 기반으로 상인 계층과의 경쟁에 직면해 사대부들은 더 적극적으로 ‘우아한’ 풍속을 새롭게 만들어냈고, 이를 통해 자신들의 신분과 지위를 재정립하고자 했다.

이일화를 방문했던 하씨가 휘주 출신 상인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휘주 상인들은 예술 시장에 대한 투자를 통해 예술 작품의 값을 크게 좌우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명나라 시대에 소주에서 유행하는 예술 작품이 있으면 그 소문은 강남 전체로 퍼졌고, 돈이 되는 것을 알아차린 휘주 상인들이 이를 유행 상품처럼 거침없이 사들였다. 그래서 이일화나 동기창과 같은 문인 엘리트는 자신들의 감식안을 무기로 대가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고 구매하는 휘주 상인을 야유하거나 얕보는 문장을 자주 남겼다. 대체로 문인 세력이 강한 소주 출신 사람들이 상인 세력이 강한 휘주 출신 사람들을 깔보는 분위기가 명 말까지 유지됐고, 어떤 남경의 문인은 휘주 상인을 “비린내를 쫓아다니는 파리”와 같다고 조롱했다.14

돈 많은 휘주인들이 소주인들에 대해 갖고 있던 문화적 열등의식은 명에서 청으로 왕조가 교체된 이후 18세기 양주에서 비로소 극복될 수 있었다. 그때가 되면 휘주 상인은 양주팔괴(揚州八怪)라고 불리는 개성 많은 화가들을 후원하며 ‘양주풍’이라는 새로운 예술 양식을 주도했다. 『양주화방록(揚州畵舫錄)』에는 18세기까지 전개된 양주의 화려한 도시문화의 후원자이자 향유자가 대부분 휘주 출신 상인임을 거리낌 없이 기록하고 있다. 소주 양식에 구애받지 않는 양주의 화려한 도시문화는 상인들의 물적 토대를 기반으로 전개됐고, 그랬기에 상인들이 주도한 사치 풍조는 기괴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개성이 풍부하다.15

사치 풍조에 대한 새로운 인식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기존의 경쟁 구도는 바뀌기가 어렵다. 하지만 인식이 바뀌면 새로운 사회적 패러다임이 생길 수도 있다. 사치 풍조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였다. 사치 풍조에 대한 부정적인 고정관념이 바뀌기 어려울 뿐 한 번 인식이 전환되면 이후부터 파생되는 사회경제적 변화는 이전과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사치는 민생에 도움이 된다(奢易治生).” 명 후기에 등장했던 사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었다.

가령, 오늘날 상하이에 해당하는 송강부(松江府) 출신의 육즙(陸楫, 1515∼1552)은 앞서 언급했던 강남 도시의 호화로운 배 유람이 가진 긍정적 효과를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소주와 항주의 호수와 산만 가지고 얘기해보면 그곳에 사는 사람은 때맞춰 유람하는데 유람에는 반드시 화방(畵舫), 진수성찬, 좋은 술, 가무가 있어야 하니 가히 사치라 할 수 있다. 가마꾼, 뱃사공, 노래하는 아이, 춤추는 기녀 등 호수와 산에 기대어 먹고사는 자들이 몇이나 되는지 모른다. … 이렇듯 양식과 고기를 사치하면 농부도 이익을 나누어 가지게 되고, 화려한 비단을 사치하면 상인과 직조하는 자도 이익을 나누어 가지게 된다. 이는 바로 『맹자』에서 말한 “서로 생산한 물건을 바꾸어 남는 것으로 부족한 것을 보충해야 한다”와 같다.”16 육즙도 개인적으로는 절약이 도움이 될지 모르나 국가 경제 전체를 고려한다면 사치가 오히려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놀이를 금지하면 백성은 생계가 끊긴다”는 엽권(葉權, 1522∼1578)의 언급도 같은 맥락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인식의 전환이었고, 그렇기에 이렇게 생각하는 이들은 아직 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사치 풍조는 한 번 맛보면 되돌리기 어려운 법이다. 앞서 언급했던 장한 역시 『송창몽어』에서 “인간의 감정은 검소한 것에서 사치스러운 것으로 나아가기는 쉽지만 사치스러운 것에서 검소한 것으로 되돌아가기는 어렵다(蓋人情自儉, 而趨於奢也易, 自奢而返之儉也難)”고 고백했다. 분명 이후 역사의 방향은 그렇게 흘러갔지만 중국은 시간이 문제였다. 16세기 육즙과 같은 이들이 생각했던 개방적인 사치 인식이 보편적으로 확산되기에는 시간이 꽤 필요했다.

21세기 중국은 세계 명품 시장에서 가장 구매력이 큰 시장으로 성장했다. 이른바 사치품의 소비에 있어 최고의 ‘큰손’ 국민이 된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중국에서 다시금 국가 주도로 ‘사치 풍조와의 전쟁’을 벌이면서 풍속을 단속하겠다고 하니 만약 400여 년 전 육즙이 살아나 본다면 어떤 생각을 할까? 혹 명나라 문인 엘리트처럼 그동안 지배층만 향유하는 고급문화가 대중화돼 일반인과 서로 혼합되는 것이 두려워진 것일까? 다시금 “사치는 민생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조영헌 고려대 역사교육과 교수 chokra@korea.ac.kr
필자는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중국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의 방문 학자와 하버드-옌칭 연구소 방문 연구원을 거쳐 서울대 동양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중국 근세 시대에 대운하에서 활동했던 상인의 흥망성쇠 및 북경 수도론이 주된 연구 주제이고, 동아시아의 해양사와 대륙사를 겸비하는 한반도의 역사 관점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다. 저서로 『대운하 시대, 1415-1784: 중국은 왜 해양 진출을 ‘주저’했는가?』 『대운하와 중국 상인: 회양 지역 휘주 상인 성장사, 1415-1784』 『옐로우 퍼시픽: 다중적 근대성과 동아시아(공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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