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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go CVC 현대차그룹의 CVC 전략

“경쟁-성장 함께” 스타트업과 스파링
CVC 사내에 두고 전사적 참여 독려

이규열 | 347호 (2022년 06월 Issue 2)

편집자주

지난해 말 국내 지주회사의 CVC 설립이 허용됨에 따라 대기업•스타트업 간 협력 및 창업, 생태계 관련 투자 시장이 크게 확대될 전망입니다. 이에 DBR는 국내 주요 기업의 CVC를 자세히 분석하는 기사를 연재합니다.

Article at a Glance

현대자동차그룹은 스타트업과의 협업을 통해 디지털, M•E•C•A, 로보틱스 등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해 2000년부터 CVC 활동을 펼쳤다. 현대차의 CVC 조직은 CVC팀, CorpDev팀, 제로원, 크래들 등 투자 목적에 따라 세분화됐고, 별도 법인이 아닌 현대차 오픈이노베이션본부 산하에 있다. 투자가 실제 사업으로 연계돼 오픈이노베이션의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CVC팀은 물론 스타트업과 직접 협업하는 사업부, 재경•기획부서 등 전사가 CVC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 취지에서다. 현대차는 오픈이노베이션에 대한 경영진의 메시지 전달, KPI 설정, 연 2회 전사적 협의체 등 제도 마련으로 사업부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스타트업과 스파링한다. 함께 사업을 진행하며 현대차는 미래 모빌리티에 필수적인 역량을 얻고, 스타트업은 투자와 고객을 얻는다.”

현대차에서 CVC팀을 이끄는 신성우 상무는 CVC 활동을 파트너와 경쟁과 성장을 함께하는 스파링에 비유한다. 현대차는 자동차 산업에서 파괴적 혁신을 이끄는 스타트업을 외면하거나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과 정면으로 부딪히며 발전하는 방법을 택했다. 투자를 통해 스타트업과의 경기가 성사되면 협력 사업을 통해 부족한 점을 깨닫고 스타트업과 함께 보완해나간다. 미래 모빌리티 산업의 핵심으로 꼽히는 Mobility(모빌리티)•Electrification(전동화)•Connectivity(연결성)•Autonomous(자율주행), 즉 M•E•C•A 및 로보틱스, UAM(Urban Air Mobility, 도심항공모빌리티), 수소 등에 역량을 가진 스타트업에 투자하며 협업의 가능성이 있다면 어떤 투자 단계에 있는 스타트업이든 상관없이 함께할 방법을 모색한다.

현대차는 2000년부터 CVC 활동을 비롯해 사내 스타트업 등 오픈이노베이션을 시도했다. ‘인터넷이 자동차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까’라는 다소 막연한 가설에서 CVC의 첫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2016년 이후 실리콘밸리의 테크 기업들을 통해 16년 전 가설이 검증됐고 이에 현대차의 CVC 활동 역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실리콘밸리, 텔아비브 등 스타트업들이 활약 중인 도시에서 현대차와 함께 스파링할 스타트업을 발굴하기 위해 사무소를 개소했고 외부 기관과 공동으로 펀드를 조성해 운용하고 있다.

현대차는 CVC 활동에서 전사적 참여를 강조한다. 아무리 좋은 스타트업을 찾아 투자해도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오픈이노베이션은 결실을 맺기 어렵다. 현대차에서 CVC 활동을 하는 조직들은 별도 법인이 아닌 현대차 내부에 하나의 팀으로 존재한다. CVC 조직은 스타트업-현대차 사업부 사이의 퍼실리테이터로서 CVC 활동 전 과정에서 사업부와 긴밀히 소통한다. 경영진 역시 오픈이노베이션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며 사업부의 CVC 참여를 독려한다. 파괴적 혁신에 맞서기 위해 파괴적 혁신을 선도하는 스타트업과 스파링에 나선 현대차의 CVC를 DBR가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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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리콘밸리에서 불어온 오픈이노베이션의 바람

현대차그룹의 CVC 연대기는 2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는 인터넷의 부흥기다. PC가 보급되고 인터넷 망이 깔렸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생활 곳곳에 인터넷이 침투하기 시작했다. 초창기 인터넷은 텍스트 정보를 주고받는 수준에 불과했지만 이베이 등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이커머스가 나타나며 인터넷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도 부풀었다. 당시 인터넷을 무기로 한 혁신을 이끌던 IT 벤처 육성은 정부의 주요 과제였고 나스닥, 코스닥 등 벤처 기업의 자금 조달을 위한 증권시장이 형성됐다.

현대차 역시 인터넷이 자동차에도 영향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벤처 생태계에 눈을 돌렸다. 현대차는 2000년 벤처 투자 전담 조직 ‘벤처플라자’를 설립해 스타트업 투자와 사내 스타트업 육성을 시작했다. 첫해에는 내비게이션 개발사, 사고기록장치개발사, 통합보안시스템 회사 등 12개 스타트업이 벤처플라자가 마련한 사무실에 입주했다. 현대모비스도 2001년 투자 전담팀인 ‘팰로알토(Palo Alto)’팀을 꾸렸으며 자동차용 인터넷 단말기, 음성 기술, GPS 등 자동차 부품 관련 첨단 기술을 개발하는 스타트업에 투자했다. 2001년 벤처플라자와 팰로알토팀은 현대차 산하 벤처플라자로 통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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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이후 CVC를 출범한 GM, BMW, 도요타 등 경쟁사들에 비하면 10년 이상 앞선 선도적인 움직임이다. 그러나 현대차의 CVC가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달렸던 건 아니다. IT에 대해 한껏 부푼 사람들의 기대감은 이내 거품으로 판별됐다. 스타트업에 흐르던 자금이 뚝 끊기며 창업 시장은 빙하기에 접어들었다. 현대차에서도 사내 공모로 투자할 스타트업을 모집했지만 마땅한 자격을 가진 스타트업이 없어 성에 안 차는 회사까지 억지로 선발해야 할까 고민하는 일도 있었다. 기대보다 못한 성과가 뒤따르기도 했지만 경영진은 스타트업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CVC 조직의 내실을 닦는 시기라고 판단했다. 그리고 CVC 활동을 이어나갔다.

다행히 가시적인 성과들도 나타났다. 내비게이션을 통해 자동차에 디지털 기능을 추가하기 위해 반복적으로 후속 투자를 진행한 내비게이션 개발사 엠엔소프트가 2005년 현대차그룹의 계열사로 편입됐다. 현대차의 내비게이션 프로그램 ‘맵피’와 기아차의 ‘지니’가 엠엔소프트의 작품이다. 2011년 현대엠엔소프트로 개명했으며 2021년에는 현대차그룹의 핵심 소프트웨어 회사 중 하나로 인정받아 현대오트론, 현대오토에버와 함께 현대오토에버로 통합됐다.

현대차그룹의 CVC 활동은 실리콘밸리로부터 시작된 모바일 혁신을 계기로 급물살을 탔다. 2010년 전후로 닷컴버블에서 살아남은 애플, 아마존, 구글 등 실리콘밸리의 테크 벤처들이 스마트 디바이스와 플랫폼을 주축으로 전통 제조 기업들을 앞지르기 시작하며 다시금 전 세계적인 창업 열풍이 일어난 것이다. 전 세계의 혁신이 실리콘밸리에서 탄생한다는 신호가 형성되자 글로벌 자동차 회사들이 실리콘밸리에 사무소를 열기 시작했다. 현대차 역시 실리콘밸리의 모바일 혁신이 모빌리티로까지 이어질 것이라 전망하며 2011년 실리콘밸리 사무소 ‘현대벤처스(現 크래들)’를 열어 실리콘밸리의 벤처들과 협업에 나섰다.

2016년 이후에는 우버, 테슬라, 구글 등 실리콘밸리의 스타트업이 M•E•C•A로 요약되는 미래 자동차 산업의 혁신 사례를 제시했다. 현대차의 라이벌이 다른 완성차 기업이 아니라 테크 기업이 될 수 있다는 메시지가 현대차 내부와 언론을 통해서 전달됐다. 그러나 15년 넘게 스타트업과 협업하며 변화의 흐름을 감지하고자 했던 현대차에도 테크 기업이 주도하는 모빌리티 혁신은 갑작스러운 변화였다. 자동차의 5대 성능으로 꼽히는 구동•제동, 승차감•핸들링, 진동•소음, 충돌•안전, 내구를 높이기 위한 기계공학 기술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IT로는 테크 기업들을 따라잡을 순 없었다. 외부에서 인재를 영입해 역량을 처음부터 다져 나가기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이 성장하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전사적으로 오픈이노베이션의 중요성이 더욱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에 오픈이노베이션본부가 신설됐고 산하에 CVC팀, 크래들, 제로원 등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하는 조직들이 포함됐다.

사업부가 적극 참여하는 CVC

이처럼 현대차에서 CVC 활동을 하는 조직들은 오픈이노베이션본부 내에 팀으로 존재한다. CVC 활동을 위해 별도 법인으로 설립된 롯데그룹의 롯데벤처스, 호반그룹의 플랜에이치벤처스와는 대비되는 지점이다.1 스타트업에 투자하는 조직이 기업 내부에 있으면 투자를 활발히 진행하는 데 제동이 걸리기 마련이다. 의사결정 과정이 복잡해지며 규모 확장이나 인재 영입에도 어려움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현대차가 CVC 조직을 내부에 둔 것은 사업부의 참여를 높이기 위해서다. 사내에서 사업 또는 기술을 개발하는 조직이 CVC를 포함한 오픈이노베이션에 배타적인 건 당연한 일이다. 내부에서도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데 외부 역량을 끌어오겠다는 시도는 자칫 내부 조직에 ‘밥그릇 뺏기’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재무적 투자가 목표였다면 좋은 스타트업을 찾아 수익만 실현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현대차는 전략적 투자가 목표였기에 투자가 실제 사업으로 이어지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CVC 조직이 외부에 존재하면 사업부의 긴밀한 참여를 독려하는 것은 더욱더 어려워진다. 신 상무가 실리콘밸리에서 만난 글로벌 자동차 기업들의 CVC 담당자들도 “독립적으로 투자를 집행 중인데 본사에서 진행되는 사업으로까지 연결이 되지 않는다”며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현대차는 현업 사업부와 온몸으로 부대끼며 CVC 참여를 이끄는 길을 택했다. 처음부터 사업부가 우호적으로 CVC 활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경영진이 오픈이노베이션에 대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전달하자 차츰 CVC에 대한 사업부의 분위기가 바뀌어 나갔다. 2016년에는 경영진 차원에서 전사 회의를 소집해 테슬라, 우버 등 스타트업이 모빌리티 생태계의 혁신을 주도하는 상황을 지적했고 이와 연계해 내부 신사업에 대한 이니셔티브를 강조했다. 2014년 이후부터는 임원들이 실리콘밸리 크래들을 탐방하기 시작했고, 2018년에는 사내의 모든 본부장이 1주일간 이곳을 방문해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의 혁신 기술과 일하는 방식을 배웠다. 1주일 동안 모든 본부장이 자리를 비운다는 건 국내에 중요한 의사결정을 내릴 본부장이 아무도 없다는 뜻으로 큰 리스크가 따를 수 있다. 그만큼 경영진이 오픈이노베이션에 ‘진심’이라는 신호로 비춰졌다.

이처럼 경영진이 스타트업과 신사업에 대한 메시지를 일관되게 전달하자 사업부에서도 CVC 활동을 중요하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CVC팀이 사업부에 먼저 스타트업과 협업을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게 일반적인 과정이었다. 사업부의 반대가 없으면 투자가 진행됐다. 현재는 사업부가 먼저 CVC팀에 협업하고 싶은 스타트업에 투자하자고 제안하는 일이 늘어났다. CVC팀이 검토하는 투자 건수가 크게 늘었고, 면밀하게 검토한 끝에 사업부의 제안을 반려하는 일도 생기고 있다.

CVC 활동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기 위한 제도도 마련했다. 스타트업과의 협업을 사업부의 KPI 중 하나로 설정한 것이다. 연 2회 11개 그룹사의 125개 팀이 모여 그룹사에 필요한 기술적 역량에 대해 논의하는 전사적 협의체도 운영한다. 투자가 진행되면 협업을 같이할 사업부와 재경, 기획, 구매 등 신사업과 자금 운영과 관련된 부서가 모두 참여해 과거 투자 사례, 투자 이후 스타트업 육성 방안, 재무적 타당성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다. 신 상무는 “실제 투자가 진행되기 이전부터 유관 사업부와 긴밀한 논의가 이뤄진 덕분에 실제 70% 이상의 투자가 개념 검증(PoC, Proof of Concept), 마켓 센싱 등 단기적인 목표 달성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목표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사례들에 대해서는 케이스 스터디를 진행하며 CVC 제도들을 개선해 나가고 있다. KPI로 설정하면 특정 활동에 첫발을 들이는 데는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러나 KPI가 구체적이지 않다면 ‘한 발만 걸치기’식의 활동이 늘어날 수 있다. 현대차 CVC팀도 한 사업부로부터 ‘투자 건수 자체가 KPI로 잡혀 있었기 때문에 스타트업과 딱히 원치 않았던 협업을 진행했다’는 솔직한 피드백을 받고 협업 의도, 방식 등 정성적인 내용을 KPI에 적용하는 방법을 고안하고 있다. 처음부터 공장에 바로 기술을 활용하겠다는 목표를 세웠지만 이후 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자원이 예상보다 부족하거나 스타트업과의 합의점을 찾지 못해서 협업이 어그러지는 일도 있었다. 현장에 스타트업의 기술을 바로 적용하기보다는 세부 요인을 보다 세세히 점검하는 ‘버퍼’를 마련해야 실패를 줄일 수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같이 실패 사례로부터 얻은 인사이트는 사업부에도 전달돼 사업부에서도 CVC 활동에 대한 이해를 높여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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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 세분화해 전방위 스타트업에 투자

현대차는 전 세계에 있는 모든 시리즈의 스타트업에 투자하며 구체적인 투자 목적에 따라 CVC팀, CorpDev팀, 제로원, 크래들 등 전담 조직이 분리돼 있다. CVC팀은 현대차 본 계정을 통해 주로 시리즈A 이상의 스타트업에 전략적 투자를 한다. 현대차 사업부 내에서 스타트업과의 협업 니즈를 발굴해 실제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로 연결하는 게 CVC팀의 핵심적인 역할이다. CorpDev팀은 시리즈D 이후에 회사의 정체성이 확립된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JV를 설립하거나 인수합병(M&A)을 추진한다.

2018년 출범한 창의 인재 육성 및 오픈이노베이션 플랫폼 제로원은 당장은 협업하기 어렵더라도 잠재적인 가능성이 있는 스타트업을 센싱(sensing)하기 위한 목적으로 주로 시드∼시리즈B의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사내 벤처를 전담하는 벤처사업개발팀이 액셀러레이터 역량을 확보하게 되면서 외부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까지 진행하게 됐다. 본 계정으로 투자를 집행해 소액이라도 재경, 구매 등 유관 부서의 엄밀한 검토가 이뤄지는 CVC팀과는 달리 제로원은 펀드를 조성해 20억 원 미만의 투자에 대해서는 자체적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2018년 현대차가 100억 원을 단독으로 출자해 제로원 1호 펀드를 조성했다. 2021년 제로원 2호 펀드에는 현대차와 더불어 산업은행•신한은행 등 금융사, 현대모비스•이노션 등 그룹사, 만도•동희 등 협력사 등이 참여해 805억 원의 자금을 모았다. 제로원은 액셀러레이터로서 신사업 및 신기술 개발 협업 지원, TIPS 등 정부 지원 사업 연계 등 스타트업 육성 활동도 전개하고 있다. 작가, 디자이너, 엔지니어 등을 대상으로 창작 프로젝트를 지원하며 신기술의 활용 방안을 예술적 접근을 통해 탐구하기도 한다.

글로벌 오픈이노베이션은 크래들이 담당한다. 크래들(CRADLE)은 ‘Center for Robotic-Augmented Design in Living Experience’의 약자인 동시에 ‘스타트업의 요람’을 뜻한다. 기술적 강점을 가진 전 세계의 유망 스타트업을 발굴하고 있다. 2007년 아이폰이 세상에 처음 나오고 실리콘밸리에서 모바일 혁신 기술들이 쏟아져 나왔다. 현대차 역시 혁신 기술 트렌드를 센싱하고, 허무맹랑해 보이는 아이디어도 적극적으로 실험해보는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의 기업가정신을 배우기 위해 2011년 실리콘밸리에 첫 크래들을 열었다. 이후 2018년 이스라엘 텔아비브, 독일 베를린, 2019년 중국 베이징, 2021년 싱가포르에도 크래들을 설립했다. 다소 괴짜 같은 아이디어를 가진 스타트업들이 가능성을 실험해 보기 위해 실리콘밸리에 모였다면 상대적으로 자동차 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AI, 센서 등의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들은 텔아비브에 많다. 자동차 산업의 전통 강자인 독일에서는 모빌리티, 스마트시티 분야에서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이 나타났다. 수소 생태계가 유럽을 중심으로 형성된다는 점 역시 베를린 크래들이 개설된 이유 중 하나다. 베이징 크래들은 중국 시장의 파트너를 물색하고, 싱가포르 크래들은 난양공대(NTU)와 산학 과제를 수행하며 미래 기술을 확보한다. 제로원 역시 크래들의 서울 사무소 역할도 수행한다. 각 크래들은 설립 취지에 맞게 전 세계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협업 및 투자 기회를 물색하며 CVC팀과 함께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한다.

현대차는 현재까지 본 계정을 통해 약 121건의 투자를 집행했다. 건당 30억∼100억 규모이며 스타트업 규모에 따라 몇백억 단위의 투자도 이뤄진다. 제로원 펀드를 통해서는 61건, 해외 대학 혹은 타 VC와 공동으로 운용하는 Co-GP 펀드를 통해서는 36건의 투자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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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는 M•E•C•A와 로보틱스, UAM 기술을 가진 스타트업에 주목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사운드하운드(SoundHound)’를 꼽을 수 있다. 사운드하운드는 2006년 설립된 미국의 음성인식 및 자연어 처리 기술 회사다. 2011년 차량용 음성인식 기술은 애플의 음성인식 AI ‘시리’를 만든 ‘뉘앙스커뮤니케이션스(Nuance Communications)’가 꽉 잡고 있었다. 현대차는 이미 완성된 뉘앙스의 기술을 적용하기보다는 기술이 만들어지는 단계에서부터 현대차에 적합한 음성인식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사운드하운드에 투자를 결정했다. 사용자가 멜로디를 흥얼거리면 노래를 찾아주는 게 당시 사운드하운드의 주요 서비스였으나 현대차와의 협업을 거치며 점차 차량용 솔루션을 개발해나가기 시작했다. 현재 사운드하운드의 강점은 여러 가지 요구가 섞인 복잡한 명령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보통 음성인식 AI는 음성을 텍스트로 변환하고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 사용자의 명령을 수행한다. 사운드하운드의 음성인식 AI는 텍스트 변환 과정 없이 음성을 바로 이해해 복잡한 명령도 빠르게 수행할 수 있다. 즉, 운전자들은 AI에 정확한 명령을 내리기 위해 단문을 사용하는 등 의식적인 활동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매끄러운 연결성을 경험할 수 있다. 사운드하운드의 음성인식 기술은 현대차의 북미, 인도 제품에 실제 적용됐고, 벤츠 또한 사운드하운드의 음성인식 기술을 활용한다. 사운드하운드는 유니콘으로 성장했으며 올해 4월 기업인수목적회사(SPAC)를 통한 나스닥 상장에 성공했다.

전동화를 위해선 ‘꿈의 전지’라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와 친환경 에너지로 꼽히는 수소 관련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두 기술 모두 상용화에 앞서 적극적으로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단계로 어떤 기술적 강점을 가진 회사가 시장의 주도권을 잡게 될지 가려지지 않은 상태다. 따라서 하나의 회사에 집중해서 투자하기보다는 여러 업체에 투자해 다양한 가능성을 대비한다. 예컨대, 전고체 배터리는 사용되는 전해질 재료에 따라 안정성, 비용 등이 달라진다. 전기차에는 주로 황화물 전고체 배터리가 활용될 것으로 전망되며 현대차는 그 재료가 되는 황화물 전해질을 개발하는 미국의 벤처 ‘솔리드파워(Solid Power)’에 투자했다. 황화물은 이온 전도도2 가 높고 안전성이 높다. 그러나 수분에 영향을 많이 받고 주원료인 황화리튬의 가격이 비싸다는 점이 극복해야 할 과제로 꼽힌다. 현대차는 전고체 배터리의 또 다른 재료인 고분자 전해질을 개발하는 미국 ‘아이오닉머터리얼스(Ionic Materials)’에도 투자를 진행했다. 고분자는 황화물보다 공정성이 우수하고 소재 원가가 낮지만 안전성 측면에서 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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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소의 경우 수소 생산부터 관련 사업에 이르기까지 수소 공급망 전 과정에 위치한 글로벌 스타트업에 투자한다. 그 과정에서 다른 기업, 학교 등과 파트너십을 맺어 공동으로 투자를 진행하거나 사업을 진행하기도 한다. 수소가 상용화되기 위해서는 수요와 공급이 함께 늘어 규모의 경제를 통한 생산 비용 절감이 필수적인데, 이를 위해선 여러 기업의 선제적인 투자가 필수적이다. 현대차는 사우디 국영 석유 기업 아람코(Aramco)와 수소 생산, 저장, 운송, 충전 등 수소 인프라를 구축하기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스위스 수소 기업 H2 Energy와는 수소를 활용하는 연료전지(Fuel Cell) 트럭 공급 합작법인 HHM(Hyundai Hydrogen Mobility)을 설립해 유럽에서 연료전지 트럭을 공급하고 있다. 중국 칭화대와 수소 에너지 펀드를 조성해 한국과 중국 등 수소 관련 스타트업에 투자를 진행하기도 했다.

기술뿐 아니라 시장의 데이터를 확보하기 위한 CVC 활동도 진행한다. 현대차는 대출 비교 플랫폼 ‘핀다(Finda)’에도 투자했다. 수익성이나 플랫폼 기술보다는 소비자들이 디지털 금융 상품에 어떻게 반응하고 이들의 지불 능력이 얼마 정도인지 등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현대차는 핀다와 함께 현대차의 커넥티드 카 전용 디지털 금융 대출 상품 ‘커넥티드 카 1Q 오토론’을 출시했다. 업계 최초의 비대면 자동차 금융 상품이며 향후 주행거리, 운전 습관 등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금융 상품의 출시도 준비 중이다.

이처럼 스타트업과의 다양한 협업을 통한 전략적 투자가 돋보이지만 재무적 성과가 뒤떨어지는 건 아니다. 현대차가 투자한 스타트업 중 IPO(기업공개)에 성공한 기업은 2020년 1개, 2021년 6개, 2022년은 5월 말에 이미 3개에 달한다. 지속적인 협업을 위해 엑시트하지는 않았지만 기업 가치가 한때 250배까지 늘어난 스타트업도 있다. 신 상무는 “현재까지 투자금 대비 수익이 3배 정도로 일반적인 VC와 견줄 만한 수준”이라고 밝혔다.


이규열 기자 kylee@donga.com


DBR mini box I : Interview: 신성우 현대차 오픈이노베이션본부 CVC팀 상무

“급변하는 시장, 새로운 기술-무기와의 대련만이 살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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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우 상무는 퍼듀대에서 산업공학을 전공한 후 현대모비스에서 처음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중국유럽국제공상학원(CEIBS, China Europe International Business School) MBA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SK이노베이션에서 중국 M&A, 사업 개발 등의 업무를 수행했고 2011년 현대차에 합류해 2014년부터 CVC팀을 맡고 있다. DBR가 그에게 CVC 조직의 역할과 전망을 물었다.

현대차는 왜 스타트업에 투자하나?

현재 자동차 산업은 태동 이후 가장 큰 파괴적 혁신을 맞이하고 있다. 구글에서부터 애플, 텐센트 등 글로벌 IT 업체들도 모빌리티 분야에 투자를 하며 주도권 확보를 위한 투자와 인재 확보 경쟁이 일어나고 있다. 혹자는 기존 자동차 회사 1, 2개만 빼고 모두 망할 수도 있다고 말할 정도로 큰 변화를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파괴적 혁신 속에도 살아남고 발전한 전통 기업들도 있다. 이들은 뼈를 깎는 자아 성찰을 통해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버렸다. 변화하는 고객에게 맞춰 새롭게 업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에 걸맞은 역량을 확보했다. 일본의 후지(Fuji)가 혁신에 성공한 전통 기업의 예로 많이 꼽힌다. 도쿄에서 후지의 CVC 조직인 LS-CVC(Life Science-Corporate Ventures Capital)의 대표를 만나 필름 산업이 위기를 맞았을 때의 사내 분위기를 직접 전해 들은 적이 있다. 과거 필름 산업은 후지와 코닥이 시장을 안정적으로 양분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의 후지를 “후지산 아래 도장에서 무술을 연마하는 고독한 사무라이 조직 같았다”고 말했다. 자신들의 도장(후지)이 세계 최고라 여긴 사무라이들은 도장 안에서만 스파링을 하며 만족하고 살았다. 그러나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었고 더 이상 후지산 기슭에만 머무를 수 없었다. 세상 밖으로 나와 새로운 기술과 무기로 싸우는 자(스타트업)들과 대련을 시작했다. 변한 세상의 이치를 알고 스스로의 위치도 알게 됐다. 당시 주력 사업인 카메라 필름 시장은 힘을 잃었다. 그러나 후지는 스타트업과의 스파링을 통해 얻은 새로운 역량을 바탕으로 현재 의료산업, 화장품, 사무기기 사업의 리더로 생존하고 있다.

현대차도 모빌리티 산업에 새로운 기술과 무기를 가지고 뛰어든 무사들과 끊임없이 대련하고 있다. 스타트업만큼 훌륭한 대련 상대는 없다고 생각한다. 스타트업은 시시각각 고객과 투자자들의 피드백을 통해 생존이 결정된다. 스타트업의 끊임없는 대련의 장을 구축하는 것이 CVC팀의 역할이다.

대련은 동반 성장으로 이어진다. 과거 자동차 산업의 핵심 경쟁력 중 하나는 협력업체를 관리하는 부품 사슬망(Supply Chain) 관리였다. 협력 업체로부터 경쟁력 있는 원가와 품질의 부품을 적시에 공급을 받는 것이었다. 미래에는 혁신 가치사슬(Innovation Value Chain)i 의 관점이 더 중요하고, 그 중심에는 고객과 변화하는 시장의 이해가 있다. 고객이 열광하는 서비스, 제품, 경험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동차 개발 방법을 떠나 스타트업을 포함한 파트너들과 역량, 데이터, 시장을 공유해야 한다. 스타트업은 현대차와의 대련을 통해서 투자와 고객을 동시에 얻는다.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과 매출이 발생하는 스타트업은 천지 차이다. 스타트업은 현대차와의 협력을 통해 기술과 사업의 방향성을 재정립하며 시장에 안착할 수 있다.

향후 어떤 스타트업에 투자할 계획인가?

최근 모든 산업이 세분화된 버티컬(Vertical) 시장으로 재편되고 있다. 반도체도 자동차용 반도체와 메모리용 반도체가 따로 있듯이 자동차 시장도 고객의 목적에 따라 시장이 새롭게 세분화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중형 승용차는 쓰임새가 많다. 개인 운전자들이 구입하기도 하고, 택시로 활용되기도 한다. 최근에는 여유 시간에 자차로 음식이나 물건을 배달하는 긱(Geek) 노동자들도 늘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모빌리티의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는 전부 다를 수밖에 없다. 모빌리티 시장 역시 쓰임새를 기준으로 세분화될 것이다. 화물이나 짐을 배송하는 데 최적화된 딜리버리 모빌리티와 승객을 태우기 위한 패신저 모빌리티 시장이 구분될 것이다. 소프트웨어나 데이터 등 세분화된 모빌리티 영역에서의 역량을 가진 스타트업과의 협업이 차차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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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VC 조직의 과제는 무엇인가?

첫째는 CVC 전문 인재를 육성하고 관리하는 것이다. 최근 숙련된 CVC 인재에 대한 시장의 니즈가 뜨겁다. 이들은 대기업 CVC뿐만 아니라 VC, 테크 기업 등 다양한 회사에서 러브콜을 받고 있다. 시장, 기술, 투자 역량을 고루 갖춘 인재들의 몸값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그러나 CVC 인재에 대한 커리어 개발 체계는 대부분의 기업이 기초 단계에 머물고 있다. CVC 인재 육성 체계를 어떻게 구축하는지가 기업의 오픈이노베이션 경쟁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현대차 CVC팀의 특징은 다양성이다. 남녀 성비도 동일하고, 해외 기업에도 적극적으로 투자하는 만큼 외국인 비중도 25%에 달한다. 커리어 배경도 다양하다. 현대차 내부에서 채용돼 현대차의 비전과 사업부의 이해관계에 밝은 인재도 있고, 특정 분야에 대한 투자 경험, 기술, 네트워크를 가진 인재도 있다. 혁신을 좇는 조직에 다양성은 큰 장점이다. 팀원들이 각자의 전문성을 공유하고 배우며 성장하는 조직을 지향하고 있다.

둘째는 스타트업을 통해 시장과 고객을 이해할 수 있도록 CVC 활동에 대한 전사적인 참여를 독려하는 것이다. 스타트업을 읽어야 시장의 트렌드를 읽을 수 있다. 대기업은 규제에 민감할 수밖에 없으나 스타트업은 샌드박스 등 제도를 통해 보다 유연한 실험을 진행하며 대기업보다 기민하게 시장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는다. 스타트업과 협업하고 스타트업이 일하는 현장을 직접 방문해야 시장의 빠른 변화 속도와 오픈이노베이션의 필요성을 느낄 수 있다. 도요타는 2010년 테슬라에 5000만 달러를 투자했지만 현재 전기차 시장을 놓쳤다는 점을 반면교사 삼아야 한다. CVC는 투자로 끝나는 게 아니라 투자로 시작된다. 40대, 50대들이 더욱 경각심을 갖고 스타트업 현장을 살펴야 한다. 20대, 30대가 메타버스, 블록체인 등 새로운 기술을 더 빠르게 이해하고 활용하지만 정작 현상을 보며 기술을 공부해야 하는 40, 50대는 스타트업 현장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유튜브, 사내 방송 등을 통해 스타트업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는 등 스타트업에 대한 빗장을 열어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인플레이션, 금리 인상 등으로 벤처 투자 시장이 위축되고 있다.

재무 수익보다는 전략적 투자를 우선시하는 CVC로서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급격히 줄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차에서 투자하고 상장에 성공한 기업들이 최근 시장의 조정을 받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소의 투자금으로 최대의 수익을 낸다는 모든 투자의 기본 원칙은 전략적 투자에서도 성립된다.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호황인 때에도 현대차는 DCF(Discounted Cash Flow, 현금 흐름 할인)ii , 멀티플iii , VC methodiV 등 다양한 절대적, 상대적 기업 가치 책정 방법을 적용해 기업의 현재와 미래 가치를 다면적으로 평가했다. 기업 가치를 측정하고 투자를 제안하는 과정에서 경색된 시장 상황을 반영하며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를 이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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