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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1. Interveiw: 조너선 브릴 글로벌 퓨처리스트

“훌륭한 서퍼는 미래의 큰 파도에 대비
예측 불가 리스크 관리가 팬데믹의 교훈”

이규열 | 328호 (2021년 09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HP의 ‘퓨처 유닛(Future Unit)’은 향후 10년간 HP의 주요 투자 의사결정에 미칠 수 있는 거대한 충격인 ‘이상파랑(Rogue Wave)’을 예측하기 위해 기술, 경제, 사회의 변화 동향을 탐구한다. 이들은 2015년 이미 팬데믹 발생 가능성을 예측했고, 헬스케어 및 재택근무 제품을 개발하는 등 대비책을 마련했다. 다음과 같은 ‘탄력적 성장의 ABCs’ 프레임워크를 활용하면 기업이 미래의 위기를 혁신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프레임워크는 이렇게 요약된다. 첫째, 예측하기 어려운 거대한 충격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구성원들에게 ‘인지’시킨다. 둘째, 이 같은 충격에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마련하는 ‘행동’에 착수한다. 셋째, 구성원들이 미래를 지향할 수 있도록 ‘문화’를 재설계한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을 계기로 위기를 맞은 기업도 있지만 반대로 이를 기회로 활용해 부상한 기업들도 있다. 모더나, 씨젠 등 코로나19를 맞이하며 오랫동안 쌓아온 기술력이 빛을 발한 기업도 있고, 마이리얼트립 1 과 같이 과감한 피버팅으로 사업의 주력 모델을 바꿈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성장을 이룬 기업도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팬데믹 초기, 신속하고 전략적인 판단 아래 기민하게 움직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전부터 전염병 유행의 위험 신호를 감지하고 대비했다면 어땠을까? 매출 방어 정도에 그치지 않고 본질적으로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를 창출할 준비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HP(휴렛팩커드)에서 미래의 위험과 기회를 예측하고 전 세계 조직의 리더들과 대응 전략을 세우는 글로벌 퓨처리스트로 활동한 조너선 브릴(Jonathan Brill)은 “HP는 2015년부터 전염병의 발생이 증가할 것이라 예측했고, 신속 진단 등 의학 분야에 프린터 기술을 접목하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말한다.

팬데믹의 여파가 1년 반 이상 지속되고 있는 지금, HP의 올 2∼4월 분기 당기순이익은 12억2800만 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약 61% 늘었다. 주당순이익(EPS) 역시 0.98달러로 전년 동기 대비 84.91%로 큰 폭 성장했다. 물론 재택근무가 확산되며 호황을 누린 노트북 시장의 수혜를 입기도 했지만 브릴은 “미래에 닥칠지 모르는 거대한 사건들의 리스크와 기회를 인식하기 위해 장기간 탐구하고, 이를 의도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선제적으로 접근법을 고민한 덕분”이라고 평가했다.

2020년 12월, HP를 떠난 그는 기업이 미래를 예측하는 힘을 길러 지속가능한 성장을 도모하는 방법을 연구한 결과를 최근 그의 신간 『Rogue Waves』(한국에는 10월 중순 발행 예정)에 발표했다. DBR가 HP뿐 아니라 삼성, 마이크로소프트 등 여러 글로벌 기업의 혁신 파트너로 활동하는 브릴과의 서면 인터뷰를 통해 코로나19 이후 미래에 다가올 위험이 무엇인지, 또한 이를 어떻게 전략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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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는 어떻게 팬데믹을 예측하고 대응할 수 있었나?

지금은 무거운 제조기업처럼 보이지만 HP는 실리콘밸리발(發) 차고(garage) 신화의 시작을 알린 미국의 원조 IT 스타트업이다. 물론 시대 변화에 빠르게 순응하지 못해 초창기 PC와 같은 신사업 기회를 놓쳤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스타트업답게 언제나 기민하게 움직이고 실험하며 새로운 혁신을 물색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다.2

‘혁신을 이루기 위해선 세 종류의 파도를 탈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지금 타고 있는 파도로, 현재 비즈니스의 핵심을 이룬다. 둘째는 예측 가능한 속도로 다가오는 파도다. 셋째는 미래에 밀려올 거대한 파도를 뜻한다. 성장을 위해서 세 가지 파도 중 어떤 파도에 올라탈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혁신을 가져온다.’ 2017년 HP의 전(前) CEO인 디온 와이슬러(Dion Weisler)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한 발언이다. 이처럼 2015년 CEO로 취임한 그는 미래에 다가올 거대한 파도가 결국 혁신의 원동력이 될 것으로 보고 ‘퓨처 유닛(Future Unit)’을 창설했다.

그의 말처럼 기업의 성장과 리스크를 막기 위한 전략을 완전히 파괴할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은 ‘이상파랑(rogue wave)’에 비유할 수 있다. 이상파랑은 여러 자연 현상이 맞물린 조건에서 돌발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대규모의 파도를 뜻한다. 깊은 대양에서 이상파랑을 만난 배는 침몰하고 만다. 반대로 파도가 거대할수록 그 위에 올라타 새로운 혁신이라는 더 큰 도약을 일으킬 수 있다.

퓨처 유닛의 임무는 향후 10년간 HP의 투자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모든 기술, 경제, 사회적 동향을 추적하고, 현업에 있는 리더들이 올바른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다. 사회과학, 정책, 경제, 기술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모였고, 이들이 연구하는 분야는 글로벌 시장 진출 전략, 기술 연구의 우선순위, 부동산 투자 전략 등 제한이 없었다.

이 같은 연구를 진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HP는 2015년에 이미 감염병 유행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전 세계 도시 인구밀도가 증가했고, 국가 간 여행은 활발해졌다. 그와 동시에 전 세계적으로 인구 고령화까지 진행되고 있었다. 이렇게 팬데믹이 발생할 확률은 점점 높아지고 있었고 예견 가능했다. 2016년, 이러한 연구 결과를 사내 매거진 ‘HP 이노베이션 저널(HP Innovation Journal)’3 에 소개했다.

이 결과에 맞춰 HP는 신속 진단 등 의학 분야에 프린터 기술을 접목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화상 및 원격 기술을 적용한 프린터 등의 재택근무에 특화된 제품 등을 개발하기 시작했으며 잦은 소독에도 부식되지 않는 디스플레이, 환자 개인정보 보호 기능을 강화한 컴퓨터 등 헬스케어 전용 제품 및 솔루션을 준비해 나갔다.

이렇게 선제적으로 준비했지만 실제 감염병 사태가 덮친 2020년 초, HP의 상황은 밝지 않아 보였다. 경쟁사인 제록스가 HP를 적대적 인수합병하겠다고 선언한 상태였고 4 글로벌 공급망은 와해됐다. 사무실이 폐쇄되자 주력 상품인 사무기기 부문도 부진을 면치 못했다. 사실 이는 비단 HP만의 상황은 아니었다. 2020년 미국 인쇄업계 규모는 전년 대비 9.4% 축소됐고, 최대 경쟁사인 제록스의 주당순이익(EPS)도 전년 동기 대비 60%가량 감소했다.

다행히도 HP는 팬데믹이 본격화되자 과거부터 차근차근 준비했던 재택근무 제품 및 헬스케어 기술에 자원과 역량을 더욱 집중했다. 그리고 약 1년이 지난 현재, 재무 성과는 회복됐다. 큰 어려움을 사전에 대비해 피해를 최소화한 것이 다양한 요인으로 더욱 나빠질 수 있었던 기업 실적을 방어해냄은 물론 향후 비즈니스의 선택지를 넓히고 잠재력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특히 고령화와 관련된 사업은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할 프로젝트들이었다. 미국 역시 빠른 속도로 고령화가 진행되고 있고 이는 의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것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HP 내의 헬스케어 관련 사업은 모멘텀을 얻게 됐고 관련 사업 영역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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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글로벌 퓨처리스트로서 다양한 기업과 함께 일하며 미래 대응 전략을 연구해왔다. HP 외에도 이상파랑을 활용하는 데 성공한 다른 기업이 있나?

린(lean) 생산 방식의 선두주자인 도요타를 꼽을 수 있다. 2011년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현지 납품업체들이 문을 닫는 바람에 도요타 공급망에 차질이 빚어졌다. 이후 도요타는 핵심 부품의 1∼4개월 치 재고를 미리 준비했다. 그 결과, 2016년 후쿠시마현에 진도 7.4의 강진이 닥쳤고, 2020년 코로나19 사태가 발생했지만 도요타는 안정적으로 자동차를 생산해낼 수 있었다.

특히 코로나19 이후 완성차 업체들이 수요 예측에 실패하면서 반도체 공급에 차질을 겪자 도요타의 안정적인 생산 능력은 전략적 우위로 작용했다. 도요타는 매출액과 순이익 모두 회계연도 1분기 기준 역대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5

이처럼 미래의 이상 신호를 활용해 꾸준히 이익을 얻는 회사들을 연구하다 이들 기업의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를 정리해 여러 기업에 적용할 수 있는 ‘탄력적 성장의 ABCs(The ABCs of Resilient Growth)’라는 세 단계의 프레임워크를 만들었다.

첫 번째는 ‘인지(Awareness)’ 단계다. 사람들에게 가까운 혹은 먼 미래에 거대한 사건이 들이닥칠 수 있다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왜 변해야 하는지 모르는 기업은 변하지 못한다. HP의 퓨처 유닛 역시 정기적으로 C레벨 경영진과 이사회에 장기에 닥칠 수 있는 위험과 기회에 대한 분석 결과를 브리핑했다. 또한 HR, 재무, 법무, 고객 서비스, 운영, 마케팅 등 모든 분야의 대표자와 지역 관리자들이 함께하는 글로벌 단위의 다기능 그룹(cross functional group)을 조직했다. 이들의 의견을 듣고 퓨처 유닛의 연구 결과에 각 기능 또는 지역의 시각을 보충했고, 이들을 통해 퓨처 유닛의 핵심 정보를 조직 전체에 효과적으로 전파했다.

두 번째는 ‘행동(Behavior)’이다. 모든 레벨의 관리자들은 급진적 변화에 대한 이해는 물론 위기를 활용하고 리질리언스를 향상할 능력을 갖춰야 한다. 퓨처 유닛 역시 핵심적인 의사결정권을 가진 리더들이 영업 채널, 국제무역, 자산 투자 등에 있어서 팬데믹을 포함해 미래에 생길 수 있는 요인들을 고려해 전략을 세우도록 적극적으로 코치했다.

세 번째는 ‘문화(Culture)’다. 실제 직원들이 먼 곳을 바라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이다. 직원들은 물론 리더들까지 단기 성과를 좇기 쉽다. 장기 성장을 추구할 수 있도록 인센티브 구조를 재설계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각각의 직원이 어떤 리스크를 어느 정도까지 관리해야 하는지를 정의하는 ‘리스크 밴드(risk band)’를 구축할 수도 있다.

글로벌 퓨처리스트로서 코로나19 이후 주목하고 있는 이상파랑은 무엇인가?

크게는 기술, 경제, 사회적 측면으로, 세부적으로 열 가지 측면으로 미래 동향을 파악할 수 있다. 기술적 측면으로는 △혁신의 가속화(accelerating innovation) △신흥 기술(emerging tech) △기술의 융합 및 변형(convergence&remixing), 경제적 측면으로는 △데이터 경제(data economy) △노동과 자동화(labor and automation) △아시아의 부상(rise of Asia) △저금리 자금(cheap money), 사회적 측면으로는 △인구통계적 변화(changing demographics) △디지털 신뢰(digital trust) △새로운 사회계약(new social contracts) 6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려되는 현상은 다음과 같다.

• 인도와 중국에서 늘어나는 자원의 수요는 아시아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긴장을 유발할 것이다.

• 코로나19로 비롯된 통화가치 저하(debase-ment)는 작은 국가들의 자율성을 제한하고, 강대국 내에서의 부를 재분배하게 될 것이다.

• 데이터 주도의 비즈니스와 보안 분야가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오히려 경쟁의 다양성이 제한되고 권력이 한데로 통합될 것이다.

• 바이오테크와 인공지능(AI)은 변혁적인 혁신 기술이다. 만약 이 기술들이 빠르게 확장하지 못하면 고령화로 인한 성장 둔화를 상쇄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너무 빠르게 확장하면 규제 당국이 대응할 수 있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경제를 전환해 아노미 현상을 초래할 가능성도 있다.

• 전 세계적으로 자연재해의 위협이 잘못 계산됐다. 이로 인한 예상치 못한 수조 달러의 경제적 피해가 발생할 것이다.

기업에서는 이 같은 이상파랑을 활용해 어떻게 혁신을 도모할 수 있나?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이상파랑 하나하나를 정확하게 예측하는 건 불가능하다. HP 역시 감염병의 유행 가능성이 높아질 것을 예측한 것이지 콕 집어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퍼질 것을 미리 안 것은 아니다. 즉, 어떠한 혼란이 와도 이를 이용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퓨처 유닛이 글로벌 무역 긴장에서 일자리 자동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슈를 살펴본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폭넓은 이상파랑이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을 검토하기 위해서는 ‘혁신 빙고’를 활용할 수 있다. 기술, 경제, 사회적 변화가 각각 어떻게 기업의 재무, 운영, 외부 요인, 전략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지 꼼꼼히 검토해보는 것이다.(그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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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같은 검토 과정을 거치고 최적의 의사결정을 내려 조직의 역량을 향상하고, 고객들에게 더 많은 가치를 제공하기 위해선 세 가지 혁신을 고민해볼 수 있다.

프로세스 혁신(process innovation): 조직의 리질리언스를 높이는 것이다. HP는 글로벌 인재 전략, 로컬 전략, 디지털 전환 등을 고려했다.

제품 혁신(product innovation): 고객을 위한 전략적 이점을 창출하는 것이다. HP는 기업용 컴퓨터 및 인쇄 기술을 어떻게 리모트 워크에 적용할 수 있는지 살펴봤다.

경쟁력 혁신(competitive innovation): 경쟁자는 할 수 없는 틈새를 개척하는 것이다. 즉, HP에 적합하지만 경쟁사에는 적합하지 않는 비즈니스를 선별했다.

기업들이 별도의 조직을 만들면서까지 미래를 예측하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대부분의 리더는 이상파랑을 있을 수 없는 일로 치부해버린다. 내일의 벌어질지 모르는 일보다는 어제의 데이터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실제 미국 10대 기업 중 8개 기업의 리더는 감염병을 위험으로 식별하지 못했다. 심지어 우한에서 첫 감염자가 발생했을 때도 이들은 코로나19가 전 세계의 사업을 망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충격은 이를 미리 대비하지 못한 모든 기업을 덮쳤다.

진짜 문제는 이런 이상파랑을 마주칠 확률이 생각보다 높고, 앞으로는 점점 더 높아질 것이라는 것이다. 20세기 동안 매년 평균 네 차례의 충격이 미국 기업을 강타했다. 하나의 큰 충격이 닥치거나 하나의 충격에서 회복되기 이전에 새로운 충격이 연이어 닥치면 이상파랑이 발생한다. 2020년 인류는 지구 한편에서 시작된 충격이 지구 반대편까지 막대한 재앙을 몰고 올 수 있음을 모든 이의 삶의 현장에서 목격했다. 전 세계가 점점 더 복잡하게 얽혀가고 있는 지금, 이러한 위험이 점점 더 자주 찾아올 것이라는 것은 확실하다. 이것이 기업이 이전보다 ‘미래’를 사업 전략에 더욱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반영해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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