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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Case Study: 라이브 커머스 전문 플랫폼 ‘그립’

‘영상이 가진 힘’과 라이브를 믿었다
재미까지 더해 팬덤 커뮤니티로 진화

김윤진 | 316호 (2021년 03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2020년 언택트 소비 열풍에 힘입어 급성장한 라이브 커머스 전문 플랫폼 ‘그립’은 어떻게 코로나 이전에 시장 기회를 포착하고, 빅테크와 대형 유통사보다 한발 앞서 선발주자의 이점을 누릴 수 있었나?

1. 업계 공식을 따르지 않고 엔드 유저에게 가장 편리한 방식의 영상 커머스 경험을 구현할 방법을 탐색했다. 판매자와 소비자 행동을 관찰한 뒤 이들을 플랫폼에 록인(lock-in)했다.

2. ‘누구나 팔 수 있어야 한다(Everyone can sell)’는 명확한 사업 철학을 바탕으로 소상공인 들에게 방송에 대한 자율권을 주고, 진입 장벽을 허물었다. 시장이 라이브 커머스를 학습할 수 있도록 지원했다.

3. 강한 연결(strong tie)이 가지는 가치에 주목해 옆집 언니, 형 같은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를 육성했다. 취향과 관심을 공유하는 팬덤 커뮤니티로 진화하면서 자연스레 충성 고객을 확보하고 고객군을 세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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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브 커머스, 그걸 왜 하죠? 그냥 유튜브, 인스타그램으로 물건 팔면 되는 거 아니에요?”

2019년 2월, 그립(Grip)의 김한나 대표(41)가 국내에서 처음 모바일 생방송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라이브 커머스(Live commerce)’ 1 전용 플랫폼을 론칭했을 때만 해도 시장의 반응은 냉랭했다. 온라인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제조업자들에게 하루 백여 통의 이메일과 DM(다이렉트메시지)을 보내도 단 한 통의 응답도 돌아오지 않는 날이 부지기수였다. 이미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이 판매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강력한 ‘쇼핑 플랫폼’으로 떠오른 상황에서 듣도 보도 못한 앱에 입점해달라는 요청에 상인들이 화답할 리 없었다. 실시간으로 영상통화하듯 고객과 소통할 수 있고 바로 주문, 결제가 가능하다는 라이브 커머스의 강점을 설명해도 그것만으로 바쁜 소상공인들의 발길을 끌기엔 역부족이었다.

약 6개월간 김한나 대표가 인턴 한 명을 데리고 여기저기 발품 팔며 모은 판매업체는 겨우 49곳. 어쩌다 답장이 온 업체가 있으면 아무리 외진 시골이어도 기차를 타고 한걸음에 찾아갔지만 헛걸음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이렇게 힘겨운 첫발을 내디딘 그립의 위치는 2년 만에 180도 달라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으로 매출이 급감한 오프라인 자영업자들의 판로를 열어주고 막힌 숨통을 틔워주면서 온라인 비대면 트렌드의 선봉에 선 것이다. 2020년 한 해 소상공인들의 입소문을 타고 열띤 응원을 받은 결과, 2021년 2월 기준 그립에 입점해 있는 업체는 1만여 곳으로 급증했다. 2020년 한 해 거래액은 243억 원을 돌파했고, 월별 거래액은 전년 동기 대비 약 20배 뛰었다. 플랫폼에 들어오겠다고 요청하는 판매자들만 하루 100여 곳이 넘을 정도다.

달라진 건 숫자만이 아니다. TV홈쇼핑을 스마트폰으로 옮겨놓은 것 아니냐, 다른 영상 기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뭐가 다르냐는 각종 질문에 시달리던 라이브 커머스는 이제 더는 이런 질문을 받지 않고도 위상을 인정받는 ‘유통업계의 대세’로 자리매김했다. 네이버, 카카오 출신 8명의 외인구단으로 시작한 그립의 창업자들은 한발 늦게 라이브 커머스 시장에 뛰어든 대기업들과의 경쟁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수많은 개인 인터넷 쇼핑몰과 아마존, 쿠팡 등 오픈마켓, 유튜브 등 글로벌 영상 플랫폼과 SNS까지 가세한 이커머스 격전의 한복판에서 이름도 생소한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이 비약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비결은 무엇일까? 과연 그립은 코로나19를 계기로 라이브 커머스의 잠재력에 눈 뜬 대기업 후발주자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경쟁 우위를 지켜낼 수 있을까? “코로나로 속도가 빨라졌을 뿐 코로나 없이도 성장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김 대표를 DBR(동아비즈니스리뷰)가 만났다. 언택트 소비 열풍을 업고 비상한 회사의 사업 전략과 비전은 무엇인지, 그리고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지금의 성장세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인지 짚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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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의 ‘극단적 편리함’만 생각하다

김 대표가 2018년 8월6일 네이버에서 일하던 동료 4명과 함께 회사를 퇴사하고 그립을 창업할 때 멤버들 가운데 커머스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었다. 네이버의 카메라 앱 ‘스노우’, 라이브 퀴즈쇼 ‘잼라이브’ 등 수많은 이용자를 대상으로 영상 서비스를 해 왔던 이들이 아는 것은 오로지 ‘영상이 가진 힘’뿐이었다. 1020세대가 네이버가 아닌 유튜브로 정보를 검색하고, 틱톡에 짤막한 영상들을 올리는 등 바야흐로 영상의 시대라는 것은 명백했다.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 덕분에 분량이 긴 스트리밍 서비스도 거리낌 없이 소비하는 문화가 생겨났고 네이버 브이라이브(V live), 유튜브 라이브 등 실시간으로 소통하고 현장감을 극대화한 라이브의 시대가 오고 있었다. ‘이런 라이브 영상에 장바구니 기능을 바로 붙일 수는 없을까?’ ‘과수원에서 사과를 따고 있는 노부부나 독도에서 오징어 잡는 어부를 보면서 그 자리에서 주문 버튼을 누르고, 동대문이나 편집숍 구석구석을 옷가게 언니와 함께 누비면서 마음에 드는 옷을 결제할 수는 없을까?’라는 발상에서 출발한 사업이 라이브 커머스였다.

영상은 인쇄된 활자나 정지 상태의 이미지보다 훨씬 더 다양한 오감을 자극하고 사람들의 참여를 끌어내기 때문에 커머스 매체로서 강점이 뚜렷했다. 소비자들은 구매 전에 믿을 수 있는 제품인지, 식품의 원재료나 옷의 재질 등을 직접 보고 꼼꼼히 따져보길 원하는데 영상은 쇼핑의 경험을 구현하면서 이런 욕구를 충족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차별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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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라이브 영상의 커머스화’라는 큰 그림만 가지고 회사를 뛰쳐나온 창업자들이 서비스의 모습을 구체화한 것은 퇴사 이후였다. 컴퓨터를 세팅한 뒤 머리를 맞대고 상상하던 서비스를 그리기 시작했다. 유통업계에 몸담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기에 누가 물건을 배송해야 하는지, 중간에 연결해줄 미들맨이 필요한지 등 복잡한 중간 단계는 애당초 머릿속에 없었다. 판매자와 소비자를 직접 연결하는 D2C(직접 판매, Direct to Consumer) 방식밖에 생각할 수 없었던 이유다. 상품 구성이나 소싱, 풀필먼트 등 기존 이커머스의 성공 공식보다는 영상의 경험을 가장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플랫폼 구축에만 골몰했다.

소비자는 물건을 눈으로 보면서 궁금한 점을 바로바로 질문하고 답을 들을 수 있어야 하고, 사고 싶은 순간에 살 수 있어야 했다. 제품의 하자를 숨기거나 터무니없는 가격을 매기는 건 않은지 따져보기 위해 “더 가까이 보여달라” “생산 과정을 알려달라”고 거침 없이 요구할 수도 있어야 했다.

한편, 판매자는 모바일이 친숙하지 않고 아무런 기술이 없어도 언제 어디서나 스마트폰만 있으면 영상 통화하듯이 팔 수 있어야 했다. 누구나 비싼 카메라로 찍은 고화질 영상과 번듯한 스튜디오 환경, 콘텐츠를 기획할 작가와 PD를 대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야외 텃밭에 있든, 시장 골목, 지하상가에 있든 소상공인 누구나 쉽게 영상을 통해 고객에게 다가갈 수 있어야 한다는 철학만 있었다. 그립은 처음부터 ‘엔드 유저(end user)의 극단적 편리함’만을 고민한 서비스였다.” 김 대표의 말이다.

커머스를 몰라서 가능했던 커머스

그러나 창업 당시만 해도 라이브 커머스가 성공할 것이라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주변의 모든 이가 만류했다. 이들은 “남들이 안 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고 지적했다. 사업계획서를 쓰면서 해외 시장을 조사한 결과는 더욱 암담했다. 비슷한 시도들이 대부분 실패로 끝났기 때문이다. 아마존도 2016년 3월, 인플루언서들을 앞세운 실시간 커머스 방송 ‘아마존 스타일 코드 라이브(Amazon Style Code Live)’를 선보였다가 별다른 반향을 일으키지 못하고 25개월 만에 서비스를 접었다. 2020년 비대면 상황에서 ‘아마존 라이브(Amazon Live)’ 서비스를 재개한 아마존도 첫 도전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글로벌 유통 공룡인 아마존마저 철수한 비즈니스에 기회가 있겠냐는 회의론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 대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 것은 바로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라이브 커머스 성공 모델을 보여준 중국 시장의 사례였다. 중국에서는 2016년 타오바오, 징둥 등 대표 전자상거래 플랫폼이 라이브 커머스를 선제적으로 도입하면서 인플루언서 왕훙(網紅)을 중심으로 이 시장이 부흥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사드(THAD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사태로 한중 관계가 얼어붙기 전까지 한국에서도 왕훙이 동대문 상권을 활보하고 강남, 홍대 일대를 휩쓰는 패션, 뷰티 업계의 큰손으로 떠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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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건은 단 하나의 해외 성공 사례가 한국에서도 통할 것인지였다. 김 대표는 중국 시장에서 라이브 커머스가 먼저 폭발한 것은 스마트폰 안드로이드 앱이 발전하고 위챗페이, 알리페이 같은 모바일 간편 결제 서비스가 빠르게 결합했기 때문이고, 이 같은 기반 조건은 한국에도 갖춰져 있다고 봤다. 김 대표는 “모바일 SNS는 전 세계의 문화 수준을 비슷하게 끌어올렸고, 젊은 사람들이 갖고 싶은 것, 누리고 싶은 것들도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중국 시장에서 확인된 모바일 커머스 트렌드를 한국 소비자들도 금세 받아들일 것이라고 봤다”라고 설명했다.

김 대표는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을 성공리에 구현하려면 전통적인 커머스의 성공 공식보다는 세 가지 역량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바로 모바일, IT, 콘텐츠였다. ‘아마존 스타일 코드 라이브’의 실패도 쇼호스트 위주의 기존 홈쇼핑 형식을 그대로 빌리면서 인플루언서에만 의존하려 한 데 있다고 진단했다. 모바일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지 않은 게 패착이었다. 그런데 기존 커머스 기업들이 모바일 서비스를 잘 운영하고, 뛰어난 IT를 보유하면서 콘텐츠까지 만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국내만 해도 이 ‘모바일 DNA’를 장착한 유통 기업은 많지 않았다. 물론 대기업들이 일제히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에 사활을 걸고 있는 상황에서 디지털 역량을 갖추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러나 몸집이 클수록 전환 비용(switch cost)이 많이 들고 그 시간이 생각보다 오래 걸릴 수 있다는 게 이들의 약점이었다. 오프라인 기반의 회사가 하루아침에 온라인 기반의 디지털 회사로 변신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조직문화를 바꾸는 험난한 여정도 동반돼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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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에서 그립은 스타트업의 강점인 빠른 속도를 앞세운다면 충분히 라이브 커머스라는 신시장을 선점할 기회가 있다고 봤다. “대기업들이 섣불리 시도하기에는 품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뛰어들지 않거나, 뛰어들더라도 시간이 지체될 것이라고 예상했다”고 김 대표는 말했다. 물론 대기업이 진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그만의 착각이었다. 2020년 언택트 바람을 타고 네이버, 카카오 등 빅테크 플랫폼들을 비롯해 이커머스 업계 대표주자인 쿠팡, 티몬 등까지 경쟁에 가세하면서 이 같은 관측이 보기 좋게 빗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스노우와 잼라이브 등을 서비스하면서 쌓은 ‘모바일-IT-콘텐츠’ 역량을 커머스에 접목함으로써 라이브 커머스 선발주자로 승부수를 띄운 그립의 전략은 적중했다.

고객을 록인(Lock-in)2 하는 미묘한 차이

1. 쌍방향: ‘소통은 세로’ 가로 화면 공식을 깨다.

지금은 그립뿐만 아니라 모든 라이브 커머스 서비스가 세로 화면을 기본으로 하고 모두가 이를 당연하게 여기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TV에서 보는 홈쇼핑 영상도, PPL(간접 광고)이 들어간 유튜브의 쿡방이나 먹방도 가로 화면이 기본이었다. 주로 스튜디오에서 2∼3명의 쇼호스트나 인기 크리에이터가 출연해 진열된 제품을 소개하는 기존 홈쇼핑의 형태가 영상 커머스의 표준처럼 여겨졌다. 화면이 양옆으로 길지 않으면 시야가 한정되고 구도상 사람이나 제품이 잘릴 수도 있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인식됐다.

하지만 커머스는 모르고 줄곧 1020세대를 대상으로 영상 서비스만 해오던 그립 창업자들에게는 무조건 ‘소통은 세로’였다. 사전 녹화하거나 편집한 영상을 내보낼 때는 가로 화면이어도 큰 상관이 없지만 실시간 영상의 경우 스마트폰을 세로로 돌려 피사체가 가깝고 크게 보이도록 해야 한다는 게 일종의 공식과도 같았다. 화상 통화를 할 때도, 카메라 앱 스노우로 움직이는 셀카를 찍을 때도, 잼라이브의 실시간 퀴즈를 풀 때도 마찬가지였다. 쌍방향 소통을 핵심으로 하고 클로즈업도 잦은 라이브 커머스의 화면이 세로여야 한다는 데는 더욱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는 핵심 타깃 이용자층인 Z세대와 밀레니얼세대에게 직관적으로 가장 익숙한 형태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 당연한 걸 어떻게 이용자에게 가장 매끄러운(seamless) 방식으로 구현하느냐였다. 김 대표는 빈 A4 종이에 일단 사람의 얼굴부터 세로로 크게 그려놓은 뒤 다음 단계를 고민했다. 친한 언니나 형과 이야기하듯이 판매자와 소통하다가 물건을 사고 싶은 순간 주문할 수 있도록 스토어를 화면 왼쪽 아래에 배치했다. 그리고 클릭 한 번에 바로 장바구니와 결제로 넘어갈 수 있게끔 연결했다.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에서는 영상을 보다가 구매를 원하면 링크를 따라가야 하는데, 이렇게 링크를 찾아 클릭하고 로그인하는 사소한 불편 때문에 잠재 고객이 중간에 떨어져 나간다고 본 것이다. 김 대표는 “사용자들을 낚아채고 플랫폼에 록인하는 요소는 아주 미묘한 차이다”고 말했다.

이 밖에도 소비자와의 쌍방향 소통을 유도하고 지갑을 열게 하기 위한 그립의 디테일들은 철저한 ‘관찰’에서 나왔다. 많은 사람에게 정보를 전달하려면 소비자의 참여, 즉 인게이지먼트 비율(engagement rate)을 높이는 게 숙제였다. 이를 위해 어떤 기능을 더하거나 빼야 할지에 대한 해답은 판매자와 구매자들의 실제 이용 패턴에 있었다. 가령 생방송 초창기, 판매자들이 물건의 재고가 몇 개밖에 안 남았는데 누구한테 줄지 몰라 우왕좌왕하는 모습, 소비자들이 “저요, 저요” 하며 떨이 상품을 달라고 조르는 모습에서 착안해 ‘추첨’ ‘경매’ 등의 기능을 도입했다. 또한 네트워크 환경과 데이터 전송 속도에 따라 누가 먼저 댓글을 달았는지가 사용자 화면마다 다르게 뜬다는 문제가 포착되자마자 순서를 매겨주기 위해 ‘선착순’ 기능을 넣었다. 이 밖에도 ‘초성퀴즈’ ‘산타 잡기’ 같은 게임을 통해 상품을 나눠주는 기능도 판매자와 구매자 간 실제 커뮤니케이션 양상과 놀이문화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렇듯 관찰에 기반을 둔 UX(사용자 경험)/UI(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앱 곳곳에 녹임으로써 작은 디테일도 놓치지 않았다.

2. 접근성: ‘똥손도 가능’ 영상 진입 장벽을 허물다.

라이브 커머스의 장점은 전문 장비로 촬영하거나 별도로 영상을 편집할 필요 없이 판매자에게 방송에 대한 자율권을 준다는 점이다. 영상 제작에 품이 들어가지 않고 누구든지 도전할 수 있다. 스마트폰 사양과 관계없이 인터넷만 연결되면 모든 준비가 끝이다. 그립이 ‘누구나 팔 수 있어야 한다(Everyone can sell)’를 사업 철학으로 삼은 것도 이 같은 라이브 커머스의 순기능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 설득해 입점시킨 셀러(판매업자)들도 결코 커머스 경험이 풍부한 인플루언서가 아니었다. 향초, 비누, 장신구, 비건 빵 등을 만드는 소상공인들이 주축이었다. 입점 업체가 적은 신생 플랫폼이다 보니 인터넷 최저가를 내세운 오픈마켓 등과 비교해 가격 경쟁력도 없었다. 자연히 오프라인에서 구하기 힘들거나 실시간 가격 비교가 어려운 수공예 위주로 상품이 구성됐다.

그러나 자율권을 가진다 해도 판매자들이 하루아침에 방송인이 될 리 없었다. 아무리 앱 사용을 쉽게 할 수 있게 설계했다 해도 소규모 편집숍의 셀러들 모두 방송 경험이라고는 한 번도 없는 초짜들이었다. 이들은 당연히 영상을 켜고 끄는 것조차 낯설게 느꼈다. 따로 스튜디오나 촬영을 도와주는 스태프나 편집자가 있는 것도 아니고, 각본도 없고, 말 그대로 ‘라이브’였기 때문이다. 카메라가 돌아가는데 아무 말 못 하고 멍하니 앉아 있거나 접속자가 몇 명 없어 안절부절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이 잘 찍히고 있는 것인지, 고객의 댓글을 어떻게 읽고 답해줘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립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명확했다. 낯가리는 초보 이용자들의 진입 장벽을 허무는 일이었다. ‘온에어(on-air)’를 알리는 5초 카운트다운 기능을 넣었을 정도로 친절한 가이드라인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2019년 가을, 투자 유치 후 가장 먼저 시작한 일도 셀러들의 매끄러운 생방송을 돕기 위한 샘플 영상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이를 위해 셀러들을 대신해 방송 진행만 전문으로 맡아줄 ‘그리퍼(그립의 라이브 커머스 전용 크리에이터)’들을 영입했다. 개그맨 유상무, 김인석, 장동민, 강예빈, 백보람 등 연예인을 알음알음 섭외한 것도 첫 투자 유치 직후였다.

이렇게 연예인들을 불러 모은 것은 단순히 인지도의 힘을 빌려 마케팅에 활용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경험이 아예 없는 일반인들이 라이브 커머스 노하우를 빠르게 익히고 따라 할 수 있도록 가이드라인을 제공하려는 취지였다. 일반인 셀러들이 영상에 대한 감을 잡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얻어가는 게 중요했다. 이를 위해 방송을 잘 아는 그리퍼들과 함께 라이브 커머스에서만 가능한 콘텐츠를 기획, 제작하기 시작했다.

3. 예능형: ‘게임•스토리’ 엔터테인먼트를 더하다.

라이브 커머스가 무엇인지 시장에 메시지를 주고 플랫폼에서 구매하는 경험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는 “라이브 커머스는 재미있다”는 인식을 소비자들에게 심는 게 급선무였다. 방송 분량이 정해져 있는 홈쇼핑 및 다른 영상 커머스와 달리 라이브 커머스는 시간제한 없이 계속되고 여러 돌발 변수에 유동적으로 대응하면서 현장감을 극대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이런 특징을 살리면서 리얼리티 예능처럼 ‘보는 재미’를 부여한다면 콘텐츠로서의 가치도 높아지고 더 많은 사용자의 시간을 점유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졌다. 실제로 이렇게 인게이지먼트를 유발하는 예능형 콘텐츠들이 인기를 끌자 개별 그리퍼들도 주목을 받고 충성 고객을 하나둘 확보하기 시작했다. 범접하기 힘든 메가 혹은 매크로 인플루언서까지는 아니더라도 ‘잘나가는 옆집 언니나 형’ 정도의 마이크로 인플루언서들이 속속 등장한 것이다.

스토리텔링을 더한 콘텐츠 중 대표적인 게 ‘켜면 완판’ 시리즈였다. 예를 들어, 그리퍼들이 한겨울 칼바람 부는 공원에서 불쌍하게 라면을 먹고 추위에 떨면서도 라면이 ‘완판될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는 설정을 넣어 보는 이들의 웃음을 자아내는 식이다. 오직 라이브이기에 가능한 기획이었다. 전통적인 유통 채널과 협업하면서도 온라인과는 다른 오프라인의 가격 체계를 흔들지 않을 수 있는 기발한 콘텐츠들도 시도됐다. 백화점과 처음 제휴해 만들어진 ‘백화점을 털어라’ 시리즈가 그 예다. 이 방송은 이커머스와 가격이 비슷한 백화점 매대 할인 상품을 대상으로 ‘도둑이 다 훔쳐 가기 전에 사야 한다’는 설정을 넣어 긴장감을 유발하고 구매를 재촉하는 효과를 거뒀다. 또 이런 식으로 시간을 한정해 혜택을 주는 ‘타임딜’ 기획들은 기존 유통 질서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도 소비자의 가격 부담을 덜어줄 수 있다는 점에서 효과적이었다.

택배비만 내면 무작위로 상품을 배송해주는 ‘랜덤 박스’ 이벤트도 소비자들이 큰 부담 없이 라이브 커머스에 동참할 기회를 열어주면서 호응을 얻었다. 랜덤 박스를 주문할 경우 황당한 고무신, 팬티 등이 올 수도 있지만 운이 좋으면 에어팟을 받을 수도 있도록 다양한 유형의 상품군을 준비함으로써 소비자의 기대심리를 자극한 것이다. 이렇듯 리얼리티 예능의 오락 요소를 활용하고 스토리를 입힘으로써 몰입감과 참여율을 높인 결과 코로나19로 비대면 소비문화가 본격화하기 전부터 사용자들의 시간을 붙잡고 생방송의 경험을 시장에 학습시킬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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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연결(strong tie)의 팬덤 커뮤니티로 진화

“내가 88 사이즈인데 이 옷 입으면 66처럼 보이지 않니?”(‘빅사이즈’ 패션 상품 관련)

“저희 쌍둥이가 4살인데 너무 잘 갖고 놀아요.”(육아용품 관련)

그립을 한 번 이용한 소비자들이 플랫폼을 빠져나가지 못하는 이유로 셀러와 그리퍼를 향한 ‘팬심’도 빼놓을 수 없다. TV홈쇼핑처럼 일방향으로 영상이 나가는 매체의 경우 쌍방향으로 소통하는 라이브 커머스와 비교할 때 판매자와 소비자 간 연결이 느슨하다. 반면 라이브 커머스에서는 소비자가 판매자와 얼굴을 맞대면서 실시간으로 질문과 피드백을 주고받기 때문에 자연히 연결이 끈끈해진다. 신체 사이즈 88 옷을 입는 ‘빅사이즈 언니’를 중심으로 사이즈 77∼99 여성들이 똘똘 뭉쳐 패션과 생활 관련 이야기꽃을 피우고, 4살 쌍둥이를 키우는 ‘육아 맘’을 중심으로 3∼5살 또래를 키우는 부모들이 모여 육아의 고충을 나누는 식이다. 아울러 판매자와 소비자 사이에 연결고리만 생기는 게 아니라 소비자들끼리도 비슷한 관심과 취향을 공유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하게 된다.

이렇게 고객들이 셀러나 그리퍼에게 충성도를 보이는 것은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이 ‘팬덤 커뮤니티’로 진화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2021년 2월 기준 가장 많은 팬을 거느린 그리퍼의 팔로워는 약 12만 명에 육박하며, 한 번 방송에 억대 매출을 올리는 그리퍼들도 나오고 있다. 실제로 그립 이용자들의 ID를 보면 ‘남편이그립그만하래’ ‘그립중독’ 등 한 번 발 들이면 헤어 나올 수 없다는 그립의 매력을 표현한 경우가 적지 않다. 더욱이 이 관계는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는다. 유튜버와 비슷하게 그리퍼 대부분이 일정한 날짜, 일정한 시간에 라이브를 진행하고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기 때문에 채널을 구독하면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 방송이 하나의 약속이자 커뮤니티 정모(정기모임), 혹은 팬미팅이 되는 셈이다.

이 같은 관계의 지속성은 ‘신뢰’로 이어진다. 네트워크 이론에서 말하는 강한 연결의 가장 큰 특징은 상호 신뢰다. 판매자들은 생방송 특성상 물건의 단점과 결함을 감추기가 힘들고 꾸밈없이 보여줘야 하는 만큼 좋은 상품을 소개할 수밖에 없다. 또 방송이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소비자를 속이면 궁극적으로는 팬을 잃어 영업에 지장이 생긴다. 한 번은 속일 수 있지만 두 번은 속일 수 없는 이치다. ‘팬덤 관리’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인 이유다. 다음 방송에서 지난 상품에 대한 피드백이 얼마든지 올라올 수 있고, 소비자들 간에도 실시간 채팅을 통해 후기와 입소문이 빠르게 공유된다. 모든 게 투명하게 노출돼야 한다는 그립의 방침에 따라 고객 평점도 여과 없이 100% 공개된다. 이런 정보의 대칭성으로 인해 오프라인 점주들이 단골손님과 유대를 쌓아가듯이 그리퍼들도 팬덤을 키우려면 자신의 인간적인 매력과 진정성을 내보이면서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김 대표는 현재 플랫폼의 높은 구매전환율과 낮은 반품률도 이 같은 ‘신뢰’의 결과라고 말한다. 소비자들이 판매자들에게 느끼는 친밀감이 상품과의 심리적 거리까지 좁혀준다는 설명이다. 회사에 따르면 현재 그립의 구매전환율은 약 25%에 달한다. 콘텐츠를 시청하는 소비자 4명 중의 1명이 물건을 산다는 의미다. 평균적인 이커머스의 구매전환율이 0.3∼1%, 라이브 커머스의 구매전환율이 5∼8%인 것을 고려할 때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렇게 판매된 물건 가운데 반품되는 비율은 1% 미만이라고 한다.

그리퍼를 중심으로 팬덤이 생겨나면서 자연스레 고객이 세분화(segmentation)된다는 점도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의 강점이다. 특정 그리퍼들을 팔로우하는 소비자들의 연령, 성별뿐만 아니라 관심과 취향이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동질적인 구성원들 간에 강한 연결 네트워크가 형성된다는 얘기다. 아울러 채널별로 타깃 고객과 잘 팔리는 상품군이 명확하기에 커머스의 대상을 확장하기도 쉽다. 가령, 비슷한 연령대의 자녀를 키우는 집단이 필요로 하는 옷, 육아용품, 장난감은 시간이 흐르면서 같이 바뀌며, 그 범위가 자녀 교육상품 등으로 얼마든지 넓어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쿡방(요리하는 방송)으로 인기를 끄는 그리퍼의 경우 간편 가정식(HMR)에서 주방기구 등으로 판매 대상을 다양화할 수도 있다. 이처럼 그리퍼들을 통해 상품을 홍보하고 판매하면 자연스레 세분 시장을 향해 타기팅하거나 포지셔닝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게 ‘팬덤 커머스’가 가지는 경쟁력이다.

비즈니스 모델 다변화

1. 플랫폼 이용

그립 수익모델의 한 축을 담당하는 것은 판매자들 매출의 일정 비율을 수수료로 수취하는 플랫폼 이용료다. 하지만 이 수입원에만 의존하기엔 문제가 있다. 약 30%의 유통 수수료를 부과하는 홈쇼핑과 달리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의 수수료는 10%대이기 때문이다. 특히 ‘누구나 물건을 팔 수 있어야 한다’는 비전을 실현하고 소상공인들의 접근성을 최대한 보장하려면 판매 수수료를 무작정 높이기가 어렵다. 막대한 양의 데이터 전송을 동반하는 영상 스트리밍 플랫폼의 특성상 사용하는 서버 이용료나 간편 결제 수수료를 내야 해 최소한의 이윤만 남겨도 이미 플랫폼 수수료가 거래액의 10%를 훌쩍 넘어간다. 그러나 10%대 수수료마저 부담일 수밖에 없는 자영업자들의 경제적 여건을 고려하면 그 비율을 올리기가 힘들다. 올리기는커녕 그립은 사업 초기 비용을 감당하기 위해 18%로 잡았던 수수료를 점점 낮춰 왔을 정도다. 김 대표는 “현재 판매 수수료가 12% 정도인데 이 수수료로 큰돈을 벌기는 어렵다”며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의 적정 수수료는 훨씬 높다고 생각하지만 이 수수료를 소상공인들이 부담하기는 현실적으로 어려워 시장이 받아들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립에서 판매되는 상품군이 고가 제품으로 확대되면서 매출 단가가 올라갔다는 점은 플랫폼 이용 모델에 있어 그나마 다행인 점이다. 통상 가격이 비싸고 충동구매가 잘 일어나지 않는 고관여 상품의 경우 온라인에서 잘 거래되지 않는다. 구매하기까지 의사결정 프로세스가 길고 모조품 등이 섞일 수 있어 사람들이 직접 상품을 눈으로 확인하고 만지는 걸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시간 질의응답으로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고 품질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은 고관여 상품 판매에 불리하다는 모바일 커머스의 제약을 극복하고 있다.

실제로 이미 그립에서는 화장품, 의류, 식품 같은 저가 상품뿐 아니라 명품, 자동차 등 고가 소비재, 심지어 꼬마 빌딩까지 매물로 나오고 있다. 스마트폰 화면 너머의 간접 경험이긴 하지만 중개업자들과 동네 임장(현장 답사)을 다니듯이 상권과 주차장 등을 돌아보거나 차를 시승할 수 있게 되면서 가능해진 변화다. 거래가 전부 성사된 것은 아니지만 이런 변화는 라이브 커머스가 오프라인의 경험을 온라인으로 이전, 확장하면서 과거 모바일 거래액의 상한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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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020년 하반기부터는 코로나로 억눌렸던 소비 욕구가 분출되면서 국내 1, 2위 병행 수입자들이 판매하는 구찌, 프라다 등 명품 판매가 급성장했다. 일종의 ‘보복 소비’인 셈이다. 이 같은 상품의 저변 확대는 그립 매출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 간 경쟁이 나날이 치열해지고 네이버 등이 업계 최저 수수료를 내세우는 상황에서 플랫폼 이용료만으로 큰 수익을 기대하긴 여전히 힘든 실정이다. 생존을 위해서는 비즈니스 모델을 다변화해야 한다는 의미다.

2. 솔루션 구독

이런 문제에 대한 대안으로 그립은 2019년 9월부터 라이브 커머스 솔루션 구독 서비스를 시작했다. 플랫폼 사용료가 아닌 솔루션 구독료를 핵심 수입원으로 삼기로 하고, 그립이 개발한 라이브 커머스 API(애플리케이션 프로그래밍 인터페이스)를 고객사에 개방하는 구독 상품을 내놓았다. 유통사의 기존 앱에 연결만 하면 바로 라이브 커머스를 서비스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솔루션을 이용하는 기업들은 초기 구축비용과 월정액 요금만 내면 별도의 개발 인력 없이도 라이브 쇼핑을 도입할 수 있다. 자체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것보다 시간을 크게 단축하고 비용도 절감할 수 있다. 아울러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도 기존 앱 가입자들에게 매끄러운 사용자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이처럼 그립이 SaaS(Software as a Service, 서비스로서의 소프트웨어) 모델로의 전환을 과감히 추진할 수 있었던 데는 하루 600∼700건씩, 많으면 800건에 달하는 모바일 라이브 방송을 동시다발적으로 송출하면서도 안정적으로 서비스를 운영해 본 업체는 유일무이하다는 자신감이 작용했다. 김 대표는 “네이버나 카카오도 이렇게 많은 생방송을 동시에 송출하고 있진 않다. 한 달에 1만 건이 넘는 방송량을 소화하면서도 끊김 등의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건 그립의 기술과 서비스 운영 노하우가 집약된 결과”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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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든지 유사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수는 있겠지만 대규모 사용자를 상대로 서비스를 하면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가 녹아든 API를 쉽게 모방할 수 없다는 게 그립의 설명이다. 이 API에 대해서는 특허를 출원한 상태다. 실제로 그립이 구독 상품을 출시하자마자 비대면 상황에서 라이브 커머스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기업들은 발 빠르게 자사 앱에 그립의 솔루션을 적용하고 있다. 자체 IT 조직과 계열사를 보유한 대기업들도 예외는 아니다. 이미 신세계 쓱닷컴(SSG.COM), 롯데하이마트, 아모레퍼시픽, 에이케이(AK)몰, 홈플러스 등 대형 유통사들도 그립의 솔루션을 이용 중이다. 빅테크들에 커머스 시장의 패권을 내주지 않기 위해 그립의 서비스를 서둘러 이식하고 있는 상황이다.

3. 에이전시

그립 소속의 라이브 커머스 전용 크리에이터들인 ‘그리퍼’와 대형 제조 브랜드 및 일반 셀러들을 매칭해주는 에이전시 사업도 그립 비즈니스 모델의 또 다른 부분이다. 일종의 다중채널네트워크(MCN, Multi Channel Network)처럼 소속 그리퍼들의 콘텐츠를 유통하고, 장단점을 분석해 그들과 핏(fit)이 맞는 광고주 및 셀러와 연결해주는 사업이다. 개별 그리퍼의 개성, 팬덤의 성격을 분석해 잠재 고객을 개발하고 인플루언서로 성장하도록 지원한다는 점에서 매니지먼트업의 성격을 띤다. 김 대표는 “채널별 그리퍼의 역량과 콘텐츠의 분위기에 따라 그리퍼가 잘 판매하는 상품이 달라지는데 이런 데이터들을 바탕으로 방송을 해줄 사람을 찾는 광고주 및 셀러들과 그리퍼를 정교하게 매칭한다”고 말했다. 아직은 매칭 시스템이 상당 부분 수동으로 이뤄지지만 추후 AI를 접목해 매칭을 자동화한다는 계획이다.

16년 마케터 경력의 김 대표는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이 그리퍼들의 광고 유치를 대행하는 데 효과적일 수밖에 없다고 강조한다. 라이브 커머스가 마케팅과 유통의 결합이라는 점에서 광고주들의 페인포인트(pain point)를 해결해주는 서비스라는 설명이다. 통상 광고주들은 마케팅비를 쓰고 난 뒤 ‘돈을 잘 썼는지’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전통적인 매체 광고뿐만 아니라 유튜브, 인스타그램 인플루언서 마케팅도 마찬가지다. 마케팅 효과를 눈으로 확인하기도 어렵고 판매를 위해 별도의 비용을 집행해야 한다. 그런데 라이브 커머스는 다르다. 생방송으로 판매를 하면 마케팅과 동시에 판매로 자연스럽게 연결되기 때문에 돈을 넣은 만큼 그 효과가 바로바로 확인된다. 이렇게 제조 브랜드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서비스 수요가 점점 늘어날 것이라는 게 그립이 에이전시 사업을 비중 있게 생각하는 이유다.

그립이 2020년 6월부터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브랜드 라이브 절’ 같은 경우 이런 광고주들의 수요를 절묘하게 파고든 기획이었다. 일명 ‘브라절’로 불리는 이날에는 유명 그리퍼들이 광고주들의 본사를 직접 찾아간 뒤 1명이 1가지 상품을 맡아 동시에 생방송으로 판매한다. 이 같은 기획은 해당 브랜드의 다양한 상품을 알리고 소비자들에게 각인하는 동시에 여러 종의 상품을 한꺼번에 팔 수 있도록 해 마케팅과 판매라는 두 마리 토끼를 확실하게 잡는 효과를 보장한다. 가령, 2020년 10월 LG생활건강과 진행한 브라절에서는 개그맨 유상무, 김인석 등이 200여 종의 생활용품 1억4000만 원어치를 완판시키는 등 재미를 추구하면서도 매출에 크게 기여해 광고주들의 만족도를 극대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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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라는 ‘양날의 검’

코로나 이후 오프라인 경기 침체에 따른 모바일 라이브 커머스 시장의 급팽창은 그립에 ‘양날의 검’이 됐다. 코로나가 성장의 트리거(trigger)가 돼 빠르게 이용자를 확보하고 누적 투자액 120억 원을 유치할 수 있도록 해줬지만 한편으로는 선발주자로서 플랫폼의 입지를 단단히 다지기도 전에 시장의 경쟁이 격화됐기 때문이다. 트래픽이나 인지도에서 앞서 있는 네이버, 카카오, 쿠팡 등 대형 사업자들이 속속 시장에 뛰어들면서 한 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이 됐다.

그러나 김 대표는 그립은 라이브 커머스를 ‘왜 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출발점이 다르다는 점에서 후발주자들과 차별화된다고 강조한다. ‘누구나 팔 수 있어야 한다’는 명확한 사업 비전을 바탕으로 일반 소상공인들이 최대한 편리하게 쓸 수 있는 서비스를 고민하고, 영상 활용의 문턱을 낮추고, 판매자와 구매자 간 유대와 신뢰를 강화할 방법을 모색하던 중 팬데믹이라는 예기치 못한 계기를 맞았을 뿐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코로나 때문에 시작한 사업이 아니기에 코로나를 틈타 부랴부랴 뛰어든 업체들과는 차이가 있다는 설명이다.

코로나가 그립에 기회가 될지 위기가 될지, ‘팬덤 커머스’의 저력을 시장에 증명해 보일지는 앞으로의 행보에 달렸다. “라이브 영상들을 보다 보면 2020년 가장 잘한 일이 그립에 입점한 것이라고 말하는 셀러들이 있다. 월세도 못 내는 위기에서 다시 매출을 일으키고 재기할 수 있었다고 말할 때 보람을 느낀다. 패션이 좋아서 옷가게를 차렸는데 재고 때문에 늘 똑같은 옷만 팔다가 그립에 들어온 뒤 새 옷을 팔 수 있어 기쁘다고 하시는 분들도 있다. 이런 우리의 지향점과 감성을 잃지 않고 충성 고객이 남아 있는 한 코로나 이후에도 경쟁 우위를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김 대표)



DBR mini box I : 성공 요인과 시사점
기존 커머스 공식 몰랐던 게 오히려 혁신 동력


1. 적절한 사업 타이밍으로 선도자 효과(First Mover Effect) 극대화

그립은 온라인 플랫폼에서 새로운 소비 계층인 MZ세대의 이용 패턴을 확인하고, 텍스트와 이미지 중심에서 동영상 중심으로 콘텐츠 소비가 대이동하고 있음을 인지했다. 이어 영상을 활용한 라이브 커머스 사업을 가장 먼저 구상하고 실행에 옮겼다. 초창기 사업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 시각이 많았음에도 중국 시장의 성공을 목격하고 이 시장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중국과 한국의 모바일 환경이 비슷하고 상업적 교류가 많다는 데 착안해 라이브 커머스의 한국 시장 접목 가능성을 크게 평가하고 진입한 것이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 결과 그립은 라이브 커머스 스타트업으로서 성공의 이미지를 시장에 각인하고 선도자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다. 이 사례는 유통 비즈니스에서 타이밍과 장소의 적합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보여줬다.

2. 철저한 고객 중심적 사고로 모바일, 편의성, 엔터테이닝 강조

그립의 창업자들이 네이버 출신이었기 때문에 백엔드(back-end)보다는 프런트엔드(front-end)의 소비자 지향적 관점을 가진 것이 주효했다. 즉, 창업자 그룹이 네이버 같은 플랫폼에서 사용자 중심 인터페이스를 오랫동안 고민한 경험이 있었다는 게 강점으로 작용했다. 그립은 사업 구상 단계에서부터 라이브 커머스 플랫폼의 판매자인 셀러와 구매자인 고객 시각에서 가장 편리하고 사용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만 집중했으며, 사용자 관점에서 모든 환경을 정비하고 개선했다. 그리퍼를 전면에 내세운 것도 영상이 익숙지 않은 셀러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판매 방식을 가르쳐주려는 세심한 배려였다. 이처럼 UX(사용자 경험)/UI(사용자 인터페이스)를 중심에 놓고 작은 디테일에도 신경을 씀으로써 고객의 선택을 받을 수 있었다.

3. 기존 커머스의 공식을 탈피해 영상 중심의 Z세대에게 어필

그립의 창업자들이 이커머스 사업 자체를 아예 몰랐고 오직 효과적인 동영상 플랫폼 구축에만 매달린 것이 오히려 새로운 분야에서는 혁신의 동력이 됐다. 기존의 유통 및 커머스 업체들은 상품 구성과 소싱, 풀필먼트 등 기존 이커머스 사업의 핵심 성공 공식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던 것과 대비된다. 기존 홈쇼핑이나 온라인 커머스에서 중심이 되던 가로 화면에서 탈피한 것이 대표적이다. 그립은 모바일 기기에서는 가로보다 세로 화면이 동영상 소비에 더 적합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과감하게 적용했다. 이 같은 접근은 핵심 타깃 이용자층이자 현장감을 중시하는 Z세대에게 빠르게 어필했다.

4. 팬덤, 커뮤니티 등 관계성에 주목해 고객군을 세분화

그립은 이커머스 사업을 단순히 판매자와 구매자의 거래 관계로만 보지 않고 스타와 팬 간에 형성되는 팬덤 관계로 인식했다. 마케팅의 핵심 콘셉트를 거래(transaction)에서 관계(relationship)로 전환한 것이다. 그 결과 판매자, 특히 그리퍼를 추종하는 팬덤을 만들어내고 동질적 성향을 소유한 고객들을 하나로 묶음으로써 자연스러운 고객 세분화를 유도했다. 이러한 고객 세분화는 연관 상품으로의 확장이라는 교차판매 효과를 창출하는 기반을 닦았다. 이처럼 마케팅의 목표를 충성 고객과의 장기적 관계 형성으로 본 것이 성공을 견인했다. 팬덤 관계가 성숙하면서 온라인 판매가 잘 안 되던 고가 상품, 명품, 서비스 등으로 상품 카테고리가 확장되고 있는 것도 수익성을 제고할 새로운 동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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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점과 향후 고려할 문제

그립은 이커머스의 새로운 형태, 동영상과 콘텐츠를 결합한 라이브 커머스란 장르를 개척한 시장 선도자다. 그리고 라이브 커머스 시장이 2020년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상황 속에서 비약적으로 성장하자 그 중심에서 수혜를 입었다. 그러나 시장 확대를 계기로 강력한 경쟁자들이 입성한 뒤 급성장했고, 네이버, 카카오, 쿠팡 등 플랫폼 강자들의 추격은 더욱 거세졌다. 이들 플랫폼 강자는 기본적인 플랫폼 인지도와 막대한 고객 트래픽을 등에 업고 있다. 아울러 기존 이커머스 사업들과의 연계 시너지를 낼 수 있으며, 결제, 배송 등 다양한 편의 및 부대 서비스까지 제공하고 있다는 점에서 위협적이다.

이런 현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경쟁 기업들과 차별화되는 그립만의 강점을 극대화할 전략이 필요하다. 그립의 강점은 시장 선도자로서의 인지도를 바탕으로 소상공인 등 다양한 판매자에게 친숙한 플랫폼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퍼를 중심으로 충성 고객들과의 강력한 팬덤 관계를 형성하고 있고, 동영상이나 콘텐츠 측면에서도 서비스 노하우를 많이 쌓아가고 있다. 이런 팬덤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새로운 수익 모델, 즉 솔루션 구독 모델과 일종의 MCN 사업인 에이전시 모델에 박차를 가한다면 더욱 강력한 라이브 커머스 업체로서 포지션을 유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그립은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초기 시장 선점으로 선도자(First Mover) 포지션을 구축하고 본격 성장을 위한 기반은 마련했다. 그러나 제한된 수익 모델을 극복하고 진짜 실력을 보여줌으로써 시장 리더로서 자격을 인정받을 시점이 왔다. 계속해서 경쟁 우위를 지키기 위해서는 온라인 쇼핑 시장의 진화 방향을 고려한 준비가 필요하다.

첫째, 제조업체가 중간유통단계를 거치지 않고 직접 소비자와 접촉하는 D2C(Direct to Consumer) 트렌드를 놓치지 말고 따라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에이전시 사업 모델을 잘 살려 새로운 판매 채널을 모색하는 제조업체들에 그립이 가장 유용한 신규 채널로 인식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특히 세분 업종별, 기업별로 최적의 맞춤형 그리퍼를 매칭하려면 업종 및 카테고리별로 특화된 전문 그리퍼들을 육성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화장품 등 뷰티 제품 판매에 최적화된 그리퍼들이 수십 명씩 있다면 화장품 회사들의 구애를 받기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둘째, 그립이 적절한 사업 타이밍을 포착해 라이브 커머스의 선도자가 됐듯이 인공지능(AI)과 보이스 커머스에도 능동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그래야 다음 시대의 이커머스 트렌드에도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 온라인 쇼핑 시장은 과거 텍스트와 이미지가 중심이 되는 PC 기반의 인터넷 커머스에서 시작해 이미지에 동영상이 추가되는 스마트폰 기반의 모바일 커머스로 발전해 왔다. 이후 통신 속도가 급격히 빨라지면서 동영상 판매가 중심이 되는 라이브 커머스까지 등장했다. 그런데 라이브 커머스 시장의 경쟁이 격화될수록 이제는 그 이후까지 생각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업계에서는 앞으로의 온라인 쇼핑 시장이 음성 인식 디바이스 기반의 쌍방향 주문이 가능한 AI 및 보이스 커머스 시대로 진화할 것으로 예상한다. 그립이 언택트 유통의 선봉장으로 남으려면 이런 변화를 주시하고 대비해야 할 것이다.


정연승 단국대 경영학부 교수• 한국유통학회장 jys1836@naver.com
정연승 교수는 서울대 경영학부 학사와 석사를 졸업하고 연세대에서 경영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삼성경제연구소, 현대자동차, 이노션 등에서 근무했다. 국내 주요 유통 및 소비재 기업, 플랫폼 기업에 컨설팅하고 있으며, 다양한 정부기관을 대상으로 자문을 맡고 있다. 주 연구 분야는 유통채널, 세일즈, 브랜드 커뮤니케이션 등이다. 현재 한국유통학회장, 한국마케팅관리학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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