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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3. Interview: 광고대행사 이노션 김정아 ECD

볼거리 넘치는 세상, 그걸 언제 다 보나?
이젠 ‘어떻게 경험하게 할까’에 초점을

김윤진 | 289호 (2020년 1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기술이 콘텐츠에 날개를 달아주고 파괴력을 키워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바로 광고대행사 이노션의 ‘크리에이티브 알파팀’이다. 기술이 가진 크리에이티브의 가능성을 실험 중인 알파팀의 수장 김정아 ECD는 오늘날 크리에이터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독창성(uniqueness)에서 행동(action)으로 옮겨가고 있다고 말한다. 아울러 ‘어떻게 보여줄까’보다 ‘어떻게 경험하게 할까’가 더 중요해졌다고 강조한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택시를 제작해 도로 위를 달리게 하고, 태양광 패널로 배를 움직여 수상 쓰레기를 치우게 하고, 병원 내 디지털 놀이터를 조성해 아이들의 심신을 달래게 한 것도 이 때문이다. 크리에이터로서 존재 가치를 고민하는 이들이 어떻게 ‘실행’을 통해 새로운 브랜드 ‘경험’을 창조해내고 있는지 살펴봤다.



제일기획, 이노션 등 국내 광고대행사들의 제작 현장에는 ‘크리에이티브 디렉터(CD, Creative Director)’란 이름을 달고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크리에이터(creator)’를 자처하는 이들이 얼마나 ‘창의적인’ 업무에 종사하고 있느냐는 의문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봤을 것이다. 광고대행사들이 자체적으로 콘텐츠를 창작하기보다는 광고주들의 숙제를 대신 맡아 해결해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광고주의 깐깐한 요구와 눈높이, 기존 미디어의 규격이라는 제약조건 속에서 제한된 창의성을 발휘할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현대자동차 계열사로 주로 빅 브랜드들의 광고를 대행해 온 이노션도 이런 시선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더욱이 디지털 미디어 환경이 급변하면서 전통적인 의미의 ‘광고쟁이’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힙’한 아이디어로 트렌드를 선도하던 이들이 이제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기술, 분화되는 미디어를 좇아가기 바쁜 처지가 된 것이다. 이렇게 광고주로부터 부여받은 숙제만 해결하고 기술 변화에 끌려가서는 크리에이터로서 존재 이유가 사라질지 모른다는 위기의식에서 탄생한 조직이 바로 이노션의 ‘크리에이티브 알파(α)’팀이다. 2016년 조직된 이 팀은 테크놀로지와 크리에이티브의 결합을 모색하면서 기술을 무기로 새로운 콘텐츠를 제작하고 있다. 광고주가 찾아오기 전에 시장이 미처 떠올리지 못한 문제를 스스로 규정하고 해결책을 선(先)제안하자는 역발상의 산물이었다.

시작은 미미했다. 회사 안에서조차 “대체 뭐 하는 조직이냐”는 질문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동종업계에서도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던 이 팀이 기존에 없던 새로운 콘텐츠로 시장에 조용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해 1월 선보인 현대차의 ‘조용한 택시(The Quite Taxi)’ 미래 신기술 캠페인은 유튜브 누적 조회 수 1560만 회를 기록하고, 프랑스 칸 국제광고제에서 은사자상(실버 라이언즈)을 수상했다. 오직 이 캠페인을 위해 청각장애인도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는 택시 프로토타입이 특수 제작돼 도로를 달리게 됐다. 나아가 베트남 빈롱성 메콩강에는 한화그룹의 태양광 패널이 달린 수상보트가 띄워졌고, 서울아산병원과 세브란스병원에는 어린 환자들을 위한 디지털 인터랙티브 놀이터가 만들어졌다. 전부 알파팀의 작품이다.


김정아 이노션 ECD



이처럼 지난 3년간 택시, 보트, 놀이터 등 별의별 것들을 제작하며 기술 기반 콘텐츠의 저변을 넓혀온 알파팀의 수장, 김정아 이노션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 제작 전문 임원)를 DBR이 만났다. 팀의 창설부터 지금까지의 여정, 그리고 크리에이터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는 이들의 속내에 귀 기울여 봤다.



알파팀이 기술로 세상을 바꿔보자는 취지에서 출범했다 들었다.

전통 미디어 안에 갇혀 기존 제작 방식을 고수하고 시장의 요구에 따라가는 것만으로는 크리에이터로서 한계가 있다고 느꼈다. 조직 안에 나처럼 답답함을 느끼고, 새로운 기술이 콘텐츠에 날개를 달아주고 파괴력을 키워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을 한데 모은 게 알파팀이다. 테크놀로지가 창의성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 느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오늘날 크리에이터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무기 중 하나다. 이에 카피라이터, 아트디렉터, 플래너, 프로모션 전문가, UX 개발자 등 다양한 직군에서 비슷한 문제의식을 공유한 6명을 선발했다. 기술이 가진 크리에이티브의 가능성을 함께 실험해보자며 맨땅에서 시작한 것이다. 사내·외에서 적합한 인력을 스카우트하기 위해 인터뷰를 장장 3개월에 걸쳐 진행했다. 3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여전히 가장 어렵고도 고민스러운 부분은 ‘뭘 해야 할지’에 대한 질문과 해답을 우리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점이지만 기술을 크리에이티브하게 녹여내 전에 없던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어보자는 목표는 변함이 없다.


기존에 없던 형태의 팀이라, 광고주에게도 낯설고 생소했을텐데.

광고주의 니즈에서 출발한 콘텐츠가 아니고 우리가 역으로 먼저 제안을 하다 보니 처음에는 제작 필요성을 납득시키기가 어려웠다. 대부분의 반응이 ‘아이디어는 신선한데, 이 새로운 콘텐츠에 쏟을 예산이 당장은 없다’였다. 광고주와 브랜드 명단을 작성해놓고 일주일에도 몇 차례씩 제안서를 토해내기도 했고, 공공단체나 사회기관들과의 협업을 통해 파급력 있는 콘텐츠를 만드는 데도 시간과 노력을 쏟았다. 그렇게 알파팀이 광고주 없이 처음 만든 콘텐츠는 광고가 아니라 애플리케이션(앱)이었다. 당시 학교 폭력이 사회적 문제였고, 극단적 선택을 하는 학생들도 많았다. 기술이 이 문제 해결에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접근하다가 가상으로 학교 폭력을 경험할 수 있는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 가상공간을 뜻하는 사이버와 집단 따돌림을 뜻하는 불링에서 생겨난 신조어) 앱을 만들었다. ‘카카오톡 감옥’에 갇혀 원치 않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받는다든지, 협박 전화, 이상한 사진 등에 시달리는 학교 폭력 피해자의 사례들을 앱에 그대로 옮긴 것이다. 앱을 다운받은 사용자는 약 30초∼1분간 자신의 휴대폰으로 고스란히 학교 폭력을 체험하게 된다. 학교폭력 피해자 가족협의회와 협력해 만든 이 앱은 별도 홍보 예산 투입 없이도 15만 다운로드를 기록했다.



AI 기술을 콘텐츠와 접목하려는 시도도 많을 것 같다.

AI 기술의 범주가 워낙 넓은데 사실 지난해 좋은 반응을 얻은 ‘조용한 택시’ 캠페인도 머신러닝을 활용한 사례 중 하나다. 청각장애가 있는 택시 운전사들을 위해 운전 중 듣게 되는 소리들을 진동으로 옮겨주는 기술을 활용해 택시 프로토타입을 제작했다. 이를 위해 사전에 외부의 다양한 소음을 학습시키고 반복적인 머신러닝을 통해 구분해내도록 하는 작업을 거쳤다. 구급차 소리, 경적 등 도로 위의 소리를 학습시킨 뒤 해당 청각 정보를 식별해 운전자들에게 진동으로 전달하거나 그래픽으로 띄워준 것이다. 현대차가 보유하고 있는 헤드업디스플레이(HUD) 기술에 알파팀이 찾아낸 청각장애 운전자들의 다양한 인사이트를 결합해 세상에서 하나뿐인 택시를 구현했다.



‘조용한 택시’가 유튜브에서 높은 조회 수를 기록하고 국내외 광고제에서도 호평을 받은 이유가 무엇일까.

청각장애 운전사들을 배려하는 몇몇 기술은 현대차 외에 유수의 해외 기업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런 기술이 탑재된 택시가 실제 도로 위를 달린 적은 없었다. 일반인 기사가 이런 택시를 운전한 것도 처음이다. 광고 촬영용 연출이 아니었다. 과거에는 크리에이터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긴 덕목이 ‘독창성(uniqueness)’, 즉 세상에 없는 무언가를 생각해내는 데 있었다면 요즘은 달라졌다. 회의실 책상 위에서만 반짝거리는 아이디어보다는 그 아이디어가 실제로 구현돼 세상에 얼마나 영향력을 발휘하는지가 더 중요해진 것이다. ‘행동(action)’이 진정한 크리에이티브를 위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널리 공감을 얻고 있다. 어찌 보면 세상에 없는 아이디어는 없어진 세상이기 때문이다. 요샌 아무리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려도 유튜브나 네이버 어느 한구석에는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사람이 반드시 있다. 그만큼 좋은 생각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러나 좋은 아이디어가 책상을 벗어나는 일은 여전히 힘들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것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이를 실행하기까지의 숱한 난관을 극복하고 보완해가면서 완성도 있는 결과물을 내놓는 것이 중요해졌다. ‘조용한 택시’도 이런 측면에서 호평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작업이라 실행 과정에서 난관이 많았을 것 같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청각장애가 있는 택시 운전사가 당시 대한민국에 단 7명밖에 없었기 때문에 ‘7명을 위한 자동차가 필요한가’라는 근본적인 질문부터 제기됐다. 1000만 명이 넘는 일반 운전자를 위한 기술에 매진하는 게 더 타당하지 않느냐고 공격받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팀의 생각은 달랐다. 다수의 효율을 위해 움직이는 게 늘 옳다고 믿는다면 1000만 명의 운전자들을 위한 기술이 객관적으로 더 중요할 수 있다. 그러나 1000만 명이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고 해서 7명의 불편이 무시돼서는 안 된다. 단 한 사람이라도 모빌리티가 주는 편리함에서 소외돼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캠페인의 목표는 선명했다. 현대차가 대표적인 자동차 브랜드로서 ‘모두를 위한 모빌리티’라는 가치를 전달하고, 자동차 업계는 물론 기타 유관 산업의 종사자들에게 기술이 해결해야 할 새로운 화두를 제시하는 것이었다.


팀원들이 기술 전문가가 아닌데 어떻게 실제 운송수단 등을 만드나.

새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기술 진보와 새로운 트렌드에 대해 찾아 공부하고 익숙해지려 애쓴다. 협업이 필요한 각계각층의 전문가들과 컬래버레이션 형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기도 한다. 작년에는 한화그룹의 태양광에너지사업을 알리는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친환경 쓰레기 수거 선박을 만들어야 했는데, 이 선박 건조를 위해 팀원들이 일주일에도 몇 번씩 김제 조선소를 왕래했다. 조선소 사장님도 이런 배는 처음 만들어본다고 하더라. 5개월여에 걸쳐 만들어진 배 두 척은 베트남 빈롱성으로 옮겨져 지난 환경의 날(2019.6.5)에 메콩강에 띄워졌다. 태양광 패널을 통해 생산한 친환경 전기를 동력으로 운행되는 배였다. 이 보트에 장착된 컨베이어벨트는 물 위에 떠다니는 수상 쓰레기를 자동으로 수거한다.

실제 운송수단 등을 만들다 보니 기존 광고 제작에 비해 프로젝트 소요 기간이 길고, 없던 형태의 콘텐츠를 만들어내야 하기 때문에 팀원들이 받는 중압감도 크다. 그러나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두려움만큼 아웃풋에 대한 자부심도 있는 것 같다.


베트남에 배를 띄우자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왔나.

한화그룹의 한화큐셀은 태양광패널 분야에서 세계 최고 브랜드임에도 불구하고 B2B 기업이다 보니 일반 대중에게는 브랜드 인지도가 낮은 편이다. 고객과의 접점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소비자에게 기억할 만한 경험을 제공하고 브랜드 인식을 제고할지가 해당 기업이 당면한 큰 과제였다. 이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태양광 패널로 수상보트를 만들어 물에 떠다니는 쓰레기를 수거하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한화의 태양광에너지사업이 추구하는 ‘지속가능한 환경’이라는 가치를 알림과 동시에 나날이 심각해지는 부유 쓰레기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자는 취지였다. 한화그룹이 베트남 진출을 적극적으로 준비하는 시기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메콩강 수질오염이 매우 심각하기 때문에 이 지역을 우선순위로 두게 됐다.

지난해부터 메콩강에서 운행하기 시작한 배는 지금까지도 하루 500㎏이 넘는 수상 쓰레기를 수거 중이다. TV 뉴스를 통해 베트남 전역에 전파를 타는 바람에 한화큐셀이라는 브랜드가 현지 사회에 알려지는 데도 톡톡한 공헌을 했다.




아이디어를 구상할 때 기존 회의 방식과 다른 점이 있나.

일반 광고 제작 회의와 가장 다른 점은 회의실에서 온갖 질문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 분위기를 유도하는 편이기도 하고. 범위가 큰 질문을 던질수록 주제가 커지고 크리에이티브가 움직일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진다. 가끔 팀원들이 왜 이렇게 일을 크게 벌이냐고 푸념하기도 하는데, 생각의 운동장을 최대한 넓혀준 뒤 그 안에서 자유를 갖도록 하는 게 리더의 역할인 것 같다. 무엇보다 알파팀의 가장 큰 차별점은 ‘어떻게 보여줄까’가 아니라 ‘어떻게 경험하게 할까’를 고민한다는 데 있다. 현대해상 어린이보험 캠페인의 경우도 소아 환우들의 이야기를 스토리로 풀어 영상물을 만드는 대신 어떻게 하면 어린이들에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콘텐츠를 만들까에서 출발했다. 그 결과 TV 광고가 아니라 소아병동 환자들이 뛰어놀 만한 디지털 인터랙티브 놀이터를 만들게 됐다. 오랜 병원 생활에 지친 어린 환우들에게 잠시나마 병원에 있음을 잊게 해줄 콘텐츠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나온 아이디어였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 팀원들은 아이들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모션 센서 기술을 공부했고, 직접 유아용 재활 체조나 소아 환자들의 키, 눈높이에 맞춘 콘텐츠를 개발했다. 투병 효과를 높일 수 있도록 치료 순서를 기다릴 때 워밍업을 하는 캐릭터 체조라든지 인지발달을 돕는 쌍방향 콘텐츠 등도 소아과 전문의 등 관련 분야 전문가들의 자문을 거쳐 자체 개발했다. 이런 놀이터는 현재 아산병원, 신촌세브란스병원, 이대목동병원 등에 설치돼 있다.

이번에는 적용하지 않았지만 VR(가상 현실) 기술을 접목하려고도 했다. 가령, 어린 환자들의 경우 화상 재활 치료를 특히 힘들어하고 피부를 긁지 못하는 괴로움을 잘 못 견디는데 VR을 활용해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처럼 추운 날의 풍경을 보여주면 화상 치료를 상대적으로 잘 참는다고 한다. 차가운 느낌을 표현하는 가상 콘텐츠에 노출되면 아이들도 실제로 덜 뜨겁게 느끼고, 덜 힘들어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외국에선 이미 상용화된 기술에서 영감을 얻기도 한다.


VR 기술의 잠재력에도 많이 주목하나.

세부 기술은 계속해서 업데이트되겠지만 VR과 AR(증강현실)을 통합한 XR(확장현실)은 향후 업계의 판도를 바꿀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진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AR처럼 부가적인 정보를 띄워주거나 VR처럼 아예 다른 공간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지금 발을 디디고 있는 현실의 공간에서 사람들이 더 체감하고, 몰입하게 하는 XR이 각광받지 않을까 싶다. 지금까지의 콘텐츠들이 미디어에 갇혀 있었다면 앞으로의 콘텐츠들은 점점 사람들의 일상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아직은 자동차 광고를 찍을 때 해안가를 달리는 멋진 모습을 촬영해 TV나 유튜브 화면에 내보낸다. 그러나 앞으로는 실제 촬영지와 관계없이 고객들이 골목길에 서 있으면 골목길에서, 운동장에 서 있으면 운동장에서 차를 경험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크리에이터 입장에서는 시공간을 뚫고 나가 고객에게 도달할 수 있고, 과거의 물리적 제약을 무너뜨릴 수 있게 된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



AI가 크리에이터의 역할을 잠식하거나 대체할까.

기존 규격이나 형식 안에서 작품을 찍어내거나 단순 변형하는 정도는 자동화될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미디어의 규격에 맞춘 신문광고나 옥외광고 레이아웃의 단순 변형 같은 경우는 AI가 안정적인 결과물들을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30초짜리 광고를 15초, 20초로 줄이는 것과 같은 단순 편집도 AI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코어에 집중하고, 조금 더 가중치가 낮은 작업은 자동화된 시스템으로 해결될 것이다. 그렇지만 AI가 콘텐츠 제작 자체보다는 소비자 반응을 추적하거나 타깃 맞춤형 콘텐츠를 제공하는 데 더 활발히 활용되지 않을까 싶다. 이미 최근 몇 년 새 안면 인식 기술을 활용해 광고를 응시하는 고객들의 감정과 반응을 파악하거나 성별을 구별해 맞춤 메시지를 건네는 식의 콘텐츠가 다수 등장했다.


광고대행사들이 광고 제작 이외에 다른 비즈니스에도 많이 뛰어들고 있다는데.

이노션도 최근 스마트 선글라스를 제작, 판매하기 시작했다. 광고대행사가 수동적으로 광고주 요구에 따라 제작한 게 아니라 이노션 독자적으로 개발해 CES에 출품했다. 이 밖에도 영화 제작에 참여하기도 하고, 한정판 운동화를 발매하거나, 때론 캐릭터 사업에 가담하기도 한다. 이노션의 사내 벤처 프로그램 ‘펌프(pump)’에서도 재미있는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온다. 최근 1호 스타트업인 영양 주치의 서비스 ‘눈금’은 스핀오프도 했다. 직원들도 이런 프로그램을 자연스럽게 크리에이티브를 위한 또 다른 돌파구, 머리를 식히고 새로운 프로토타입을 만들어보는 기회로 여기는 것 같다. 이처럼 내부적으로 직원들이 아이디어를 내고, 그 아이디어를 실행해 볼 수 있는 경로가 열려 있는 편이다.




영감을 얻기 위해 유튜브 콘텐츠도 많이 보나.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크리에이터가 있는지.

요새 펭수에 빠져 있다. 뭐랄까, 담백하게 볼드(bold)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좋다. 내가 메시지에 관심이 많아서 그런 것 같다. 투박하고 거친 이야기들을 굉장히 시크하고 무심하게 던지는데, 솔직해서 매력 있다. 요즘의 한국 사회를 사는 우리 모두가 지쳐 있어서 툴툴거리지만 따뜻한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크게 와 닿는 건지도 모르겠다. 무엇보다 메시지 전달자가 인형 캐릭터라는 점이 좋다. 우리 시대의 구루(guru), 나이 지긋한 어른이 아니라 귀엽고도 되바라진, 말도 안 되는 캐릭터가 건네는 말이라 열광하는 거다. 온 국민이 암묵적 합의하에 그의 연습생 프로필과 사생활을 시치미 뚝 떼고 진지하게 믿어주는 게 마음에 든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 ‘이건 정말 진짜’라고 아무리 호소해도 믿게 만들기란 정말이지 쉽지가 않다.


사람들이 메시지를 잘 안 믿는 것을 실감하나.

그렇다. 어찌 보면, 메시지를 믿게 만드는 힘이 오늘날의 크리에이티브인 것 같다. 10년 전, 20년 전과 비교해보면 피부로 와 닿는다. 1996년부터 광고 일을 시작했는데, 그때는 지금보다 미디어의 종류도 적고, 사람들이 접할 수 있는 콘텐츠가 한정적이었다. 이제는 볼거리와 이슈가 넘쳐난다. 볼거리가 볼거리로 덮이고, 이슈가 이슈로 덮인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그 많은 걸 다 볼 수도 없고, 그 많은 이야기가 다 진짜라고 믿지도 않는다. 뭐 하나 오래도록 진득하게 믿는 공통의 가치가 없다. 앤디 워홀이 ‘미래에는 누구나 15분 동안 유명해질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예전엔 이 말이 ‘누구나 유명해질 수 있다’라는 의미로 들렸다. 그런데 이제는 이 말이 ‘유명해져도 15분 동안이고, 15분이 지나면 또 다른 무엇인가가 그 자리를 꿰찬다’는 뜻으로 들린다.

CSR 캠페인을 진행하다 보면 진정성을 가지고 행동에 옮기더라도 사람들이 ‘그 배경에 다른 뭔가가 있지 않을까’ ‘이 브랜드는 왜 이런 일을 할까’ 그 의도에 의구심을 품는다. 진짜를 진짜로 믿어주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다. 대중은 예쁘게 잘 포장하고, 부풀리고, 필요한 부분을 클로즈업하는 게 기업과 브랜드의 크리에이티브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있는 그대로를 보여줘도 진짜가 아니라고 오해한다. 이런 시대에 크리에이티브가 담당해야 할 몫은 한 번도 못 본 그림이나 임팩트 있는 카피를 만들어내는 것보다 사람들로 하여금 진짜를 진짜로 믿게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시대의 크리에이터는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테크놀로지는 크리에이터에게 숙제가 아니라 축복이다. 기술의 진보와 디지털 미디어의 출현으로 오늘날 크리에이터들이 만들어내는 창작물은 엄청난 파급력으로 사람들에게 쉽고 빠르게 노출될 수 있게 됐다. 이전 세대와는 비교도 안 되는, ‘미디어’라는 엄청난 초능력을 갖게 된 것이다. 하지만 창작물 옆에 꼬리표처럼 좋아요(like)와 조회 수, 댓글이 따라다니게 된 것 또한 디지털 시대의 크리에이터가 감내해야 할 멍에다. 숫자로 표현되는 효율과 속도에 지나치게 함몰돼 창작물의 완성도, 아이디어가 사회에 가져올 ‘선한 영향력’을 등한시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 브랜드를 다루는 크리에이터에겐 지나치게 짧은 호흡이 결국 해당 브랜드의 롱런에 독이 되기도 한다는 점을 잊어서도 안 된다.


김정아 ECD는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와 1996년 카피라이터로 제일기획에 입사했다. 2006년 이노션으로 자리를 옮겼고 현재 이노션에서 ECD(Executive Creative Director, 제작 전문 임원)을 맡고 있다. 현대·기아차 광고는 물론이고 구글, 현대카드, SKT, 도미노피자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국내·외 기업들의 광고 제작을 담당했으며 칸국제광고제와 뉴욕페스티벌, 스파익스아시아(Spikes Asia), 애드페스트(ADFEST) 등 주요 국제광고제에서 수상했다. 4대 국제광고제 심사위원을 모두 맡았다.

김윤진 기자 truth3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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